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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에 나라를 팔았습니다-98화 (98/131)

#98

그에 간만에 부드럽게 풀려 있던 세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뭐?”

팔랑팔랑 날아들 것처럼 가볍던 목소리가 영하의 기온처럼 뚝 떨어진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그냥 듣기에도 결코 긍정적인 변화가 아니었지만, 에녹은 눈치라곤 개구멍에 버리고 온 사람처럼 자랑스럽게 대꾸했다.

“오래 걸릴 줄 알았는데, 네 덕분에 생각보다 일찍 끝났어.”

“내 덕분이라니?”

“어제 빗길을 질주했잖아. 네가.”

우산도 없이.

그는 기억이 나질 않느냐는 듯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또박또박 어제 세라가 얼마나 사연 많은 꼴로 거리를 질주했는지 자세히 묘사해 주었다. 더불어서 그 꼴이 얼마나 보는 사람의 호기심을 자극하는지까지도.

미친년 같았다는 걸 필요 이상으로 실감 나게 표현해서, 세라는 그가 일부러 자신을 놀리려고 작정을 했나 싶었다.

하지만 웃음기 없이 담담한 얼굴을 보면 그건 또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애매했다.

“다들 이미 네가 스노우랑 헤어졌다고 알고 있던데.”

자의적인 해석이야 어쨌든 중요한 건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거였다.

헤어졌다고 소문이 난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원래도 일이 끝나고 나면 자연스럽게 헤어진 연인 행세를 하기로 계획이 잡혀 있었다.

“아니 그거 말고 아까 그거 다시 말해 봐. 누가, 뭘 따먹었다고?”

이상한 건 그 과정에 난잡한 개소리가 섞여 들어간 거였다.

예를 들면, 세라가 에녹을 따먹었다느니 하는 말 같은 거.

“아, 그거. 별거 아니야.”

거기가 가장 중요한 대목이었는데, 에녹은 막상 그곳에 이르러서는 건성으로 대화에 임했다.

“너한테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묻기에, 어제 내가 겪은 그대로만 이야기했지.”

“……그게 앞뒤 다 자르고 내가 널 따먹었다는 말이야?”

“정확히는 네가 날 따먹고 이쪽으로 갈아탔다고 했어.”

“뭐, 뭐 갈아타? 누가? 내가 너한테?!”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데, 에둘러 표현한 말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정정해 주는 꼴에 아주 억장이 다 무너졌다.

“사람들이 그 말을…… 믿어?”

“바로 믿던데.”

“…….”

“다들 널 안쓰러워하더라.”

“…….”

자신을 안쓰러워했다던 길드원들의 표정을 보지 않고도 알 것 같았다.

아, 그렇구나. 그랬구나. 어색하게 웃으면서, 시선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갈팡질팡하는 반응들.

응. 잘 알지.

세라가 에녹의 문란한 생활을 볼 때마다 짓던 표정을 떠올리면 훤했다.

그리고 그 시선들이 자신을 향할 것이라 생각하면 눈앞이 다 아찔해졌다. 비틀거리는 세라를 에녹이 우산을 들고 있지 않은 손으로 부축해 주었다.

“괜찮아?”

걱정스럽다는 듯이 세라의 안색을 살핀다. 그러면서 역시 어제 너무 많이 하긴 했다는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했다. 본인이 아픔일랑 손톱만큼도 느껴지지 않게 깔끔히 치료해 주었으면서 부러 저런 말을 입에 담는 게 악의적이다.

세라는 그 손을 차갑게 쳐 내며 물었다.

“너, 나한테 무슨, 억하심정 있어?”

“전혀.”

에녹은 일말의 여지도 없이 산뜻하게 고개를 저었다.

“근데 왜 이래! 너랑 똑같은 사람으로 만드는 것도 유분수지. 따먹었다느니, 갈아탔다느니 하는 말을 왜 하고 다니는데?!”

말하면서도 점진적으로 차오르는 분노에 세라가 땅을 강하게 박차며 발을 탁탁 굴렀다. 만약 에녹과 하룻밤 뒹구는 대가에 이런 쪽팔린 결과가 뒤따르는 줄 알았더라면 환청에 머리가 터져 버리는 한이 있었더라도 결코 그의 품을 빌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분한 건.

“언제는 숭고한 치유 행위라며……!”

그 짓이 숭고한 치유 행위라고 하던 주제에 따먹었다느니 하는 난잡하고 음란한 행위로 표현하는 에녹의 이중성이었다.

“너랑 하는 건 섹스 아니라며……!”

이글거리는 시선이 공격적으로 에녹에게 꽂혀 들었다.

“어제 한 건 섹스였는데?”

그러자 에녹이 못지않게 황당해하며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제의 자신을 구원해 준 남자가 오늘은 그렇게 얄미워 보일 수가 없었다.

“숭고한 치유 행위는 그전에 했고, 멀쩡해진 네가 날 욕조에 쓰러뜨린 순간부터는 섹스지.”

내가 틀린 말 했나?

외설스러운 말을 담담하게 늘어놓은 에녹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무지 자신의 머리로는 그 이외에 어제의 일을 설명할 재간이 없다는 듯이.

“어디서 말장난이야. 내 말은 지금 그런 뜻이 아니잖아. 똑바로 대답 안 해?!”

마음 같아서는 동네가 떠나가라 소리라도 지르고 싶지만, 행여나 누가 들을까 무서워서 소리 죽여 분노를 토해 냈다. 눈을 아래위로 치켜뜨며 부라리자, 에녹이 가소롭다는 얼굴로 픽, 웃으며 그녀의 이마에 꽁, 딱밤을 먹였다.

“이게, 대신 마무리해 준 주인님한테 고맙다는 인사는 못 할망정.”

“고맙기는! 그대로 내버려 뒀어도 알아서 끝났을 거거든?!”

이번만큼은 참기 힘들었던 세라가 빼액 소리쳤다.

평소 같으면 거리가 쩌렁쩌렁 울릴 만큼의 소리였으나, 다행히 비가 거세게 내려치는 덕분에 메아리까지는 면했다.

“조용히 기다리면, 대충 헤어졌나보다 하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을! 왜 굳이 긁어 부스럼-.”

“그랬으면 이번엔 다른 놈들이 꼬였겠지.”

그게 못내 억울해서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데, 에녹이 단호히 말허리를 잘라 버렸다.

“……뭐?”

그건, 세라가 조금도 생각지 못했던 방향의 가정이라서 곧장 받아칠 수가 없었다. 어버버 거리며 바보처럼 뭐? 뭐? 엥? 하고 묻자 에녹이 넌 그런 것도 모르냐는 얼굴로 핀잔을 주었다.

“스노우랑도 사귀었으니까 다음은 나랑 사귀자면서 사내놈들이 줄줄이 나타나면.”

“……뭐-.”

“주인님 입장에서 성가시고 짜증 나지 않겠어?”

“……으음?”

“그 전에 알아서 영역 표시해 놔야지.”

“…….”

하지만 들을수록 혼란스러운 건 어쩔 수 없다.

에녹의 말이 이어질수록 세라의 표정은 점점 이상하게 뒤틀렸다.

다음은 나랑 사귀어? 사내놈들이 줄줄이 나타나? 대체 누가 그런 짓을 하는데……?

평생 경험해 본 적 없는 상황에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넌 내 건데.”

그러다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바보 같은 엥.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하필 그 대목에서 진지하게 표정을 굳힌 채 아련하게 목소리를 깔 건 또 뭐냔 말이다.

둘 사이 대단한 서사라도 깔려 있는 양 구는 바람에 하마터면 그녀조차 깜빡 속아 넘어갈 뻔했다.

“……아니-.”

간신히 끼어든 세라가 찜찜한 표정으로 말끝을 늘였다.

하지만 그다음 말이 소리가 되어 입 밖으로 흘러나오지 않았다. 정리가 되지 않은 탓이다.

그래. 내가 지금은 네 노예이기는 한데……. 노예가 주인에게 귀속되는 재산인 것도 맞는데……. 그걸 이렇게 말할 일인가? 질척한 뭔가가 느껴지는 건 내 기분 탓인가? 아니면 날씨 탓? 뭐라 뚜렷하게 정의 내리지 못한 위화감과 민망함이 스멀스멀 얼굴로 올라붙었다.

어쩐지 뺨이 화끈거리고 귀가 뜨거워지는 감각에 애꿎은 입술을 짓씹고 있을 때였다.

“그래서, 넌 누구 딸이래?”

어느새 혼자 주제에서 벗어난 에녹이 퍽 해괴한 질문을 했다.

“……갑자기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부모에 관한 기억이라면 떠올리고 싶지도 않다.

달갑지 않은 질문에 세라가 모욕이라도 당한 얼굴로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어제, 출생의 비밀이라도 들었던 거 아니야?”

이런 분위기를 읽지 못할 만큼 둔하지도 않을 텐데. 능글맞게 웃어 보인 에녹이 부득불 그 주제를 이어 나갔다.

“뭐래? 알고 보니 둘이서 배다른 남매라던? 아니면 어렸을 때 사고 쳐서 낳은 딸?”

궁금해서 묻는다기보다는 제발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는 투였다.

얘 막장 좋아하네. 순식간에 개족보로 만들어 버리는 발언에 세라가 저도 모르게 실소를 터뜨렸다.

“…….”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이게 에녹 나름대로의 대화 방식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출생의 비밀을 들은 게 아니고서야. 네가 그다지도 무너질 일이 무엇이냐고. 그게 뭐든 저런 문장 다음에 가져다 놓으면 덜 충격적이긴 해 보일 것 같았다.

하여튼, 한없이 가벼워 보이는 방식으로 살면서, 의외의 부분에서 세심한 남자였다.

‘만날 수 있어.’

그 순간, 스노우의 목소리가 빗속에 스며들었지만 세라는 애써 모르는 척했다.

아직, 아직 그의 말을 믿을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별로. 그냥 마지막에 의견이 좀 안 맞았을 뿐이거든요.”

자꾸 삐져나오려는 감정을 갈무리한 그녀는 착실한 노예의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그래……?”

세라가 다시 존댓말을 시작하자, 에녹이 금세 흥미를 잃은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면서 그녀를 향해 기울여 주었던 우산을 은근슬쩍 제 쪽으로 바로 세운다. 그녀가 알려 주지 않으니 내심 마음이 상한 게 틀림없다. 세상을 구원해야 하는 영웅께서 어쩜 이렇게 속이 좁으신지…….

이대로 대화가 끝났겠거니. 하고 있는데, 에녹이 확연하게 퉁명스러워진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그래도 챙길 건 챙겼지?”

“……?”

뭘?

세라가 전혀 짚이는 바가 없는 눈으로 물끄러미 에녹을 쳐다보았다.

에녹은 어떻게 이렇게 중요한 걸 잊어버릴 수 있냐며 그녀를 타박했다.

“100골드 말이야. 애초에 걔랑 어울린 이유가 그거 때문 아니었어?”

“……아, 맞다!”

내 100골드……!

정신이 번쩍 든 세라가 손뼉을 쫙, 맞부딪히며 펄쩍 뛰었다.

“아, 맞다?”

누가 들어도 완전히 잊고 있었던 반응에 에녹의 눈썹이 살벌하게 까딱였다.

“깜빡할 뻔했네! 고마워요! 주인님!”

그러거나 말거나, 당장 해야 할 일이 생각나 버린 세라는 에녹의 손에 들린 우산을 빼앗아 들고는 후다닥 달려 사라졌다.

“노예야. 나 비 맞는데…….”

등 뒤로 에녹이 뭐라 뭐라 중얼대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세라는 뒤 한번 돌아보지 않았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는 건 에녹도, 스노우도 아닌 받지 못한 100골드뿐이었다.

***

세라는 에녹이 비를 맞도록 내버려 둔 것을 후회했다.

아니, 정확히는 그의 우산을 들고 튄 걸 후회했다.

에녹의 집에 있는 유일한 우산은 그의 머리 색을 닮은 새빨간 색이었고, 이토록 흐린 날에도 너무나도 눈에 띄었고, 그래서 사람들이 그것을 쓰고 있는 세라를 너무나도 쉽게 알아보는 부작용을 초래했다.

“세라…….”

“아이고, 세라야…….”

“왜 그랬어……. 왜 그랬어…….”

그리고 세라는, 에녹이 아침부터 퍼뜨렸다는 그 소문에 대해서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 봤어야 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가 지나는 자리마다, 길드원들의 곡소리가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모두가 하루를 푹 쉬고 일어난 시그너스의 거리에는 사람들로 넘쳐흐르고 있었다. 오늘은 가시 토벌을 나가는 이들이 없었기에 삼삼오오 모여앉은 길드원들은 차양을 친 야외 테이블에 앉아 낮술을 퍼먹는 중이었다.

“스노우 다음에 대장이라니 남자 보는 눈 진짜 왜 그래…….”

안 그래도 아침 일찍 길드를 강타한 엇나간 삼각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이들은 세라를 보자마자 속상한 얼굴로 연거푸 술잔을 기울였다. 그 꼴이 꼭 금이야 옥이야 기른 여동생이 남자 하나 잘못 만나 고생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오라비들 같았다.

스노우와 사귄다고 소문이 났을 때에는 그냥 술렁거리고 마는 정도였는데, 그 상대가 에녹으로 바뀌자 분위기가 장례식 뺨치게 무거웠다. 길드원들은 세라가 관짝에 들어가 눕기라도 한 양 아이고, 아이고, 통곡했다.

“약점 잡혔나……?”

자기들 딴에는 안 들리게 중얼댄다고 생각한 모양인데, 취객들이 목소리를 줄여 봤자였다. 귀 바로 옆에다 대고 속삭이는 것처럼 너무나도 잘 들리는 바람에, 세라는 안 들리는 척 표정 관리를 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내가 다 속상하네. 어휴. 왜 하필 그 문란한 인간을…….”

“보답받지 못할 마음을 품었어. 그 인간이 어떤 인간인데.”

“저 좋다는 애들도 많구만, 왜 자꾸 안 될 사람이랑…….”

가장 심각한 문제는, 에녹과의 관계에 매달리는 사람은 자신이고, 심지어 이미 곧 차일 사람 취급당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참을 만했다.

조금 귀가 간지럽고, 얼굴로 열이 몰리기는 했지만, 별거 아니라는 게 세라의 감상이었다.

저쪽은 세라의 이름을 알지만 세라는 저들을 모른다.

친분이랄 것도 없고 앞으로 얼굴을 마주할 일도 거의 없는 자들이 하는 말이란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면 그만이었다.

애써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세라가 아무것도 못 들은 양 길드 회관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괜찮다. 괜찮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이깟 자극적인 소문 따위는 금방 사라질 것이다.

“저긴, 스노우네 방향인데…….”

“대장이 차였다고 하지 않았어?”

금방 사그라들 소문이긴 한데.

“맞아. 자기한테 갈아탔다고 했는데-.”

“에이! 보고도 모르겠어?”

정말 그렇긴 한데.

“아직, 미련이 남은 게지…….”

아, 에녹 소서. 진짜 죽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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