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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에 나라를 팔았습니다-99화 (99/131)

#99

“이거 어쩌죠…….”

그렇게 정신력을 흐트러뜨리는 아련한 공기를 뚫고 겨우 도착했는데, 수고가 무색하게도 세라는 스노우를 바로 만날 수 없었다.

“오라버니가 지금 주무시는 중이라…….”

스노우의 방이 있는 2층에 올라서자마자, 어째서인지 복도에 의자를 두고 앉아 있던 아퀼라가 곤란한 얼굴로 세라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녀는 세라가 찾아올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는지 제법 놀란 얼굴이었다.

에녹이 퍼뜨린 독버섯 같은 소문을 들은 게 틀림없었다.

더럽게 민망해서 귀가 벌겋게 익어 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받아야 할 게 있었기에 물러서지 않았다.

“그래? 언제쯤 일어나는데?”

오후? 저녁? 담담한 어조로 일어날 만한 시간을 가늠한 세라가 가만히 답을 기다렸다.

“글쎄요.”

어려울 거 없는 질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아퀼라는 다시 한번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생각할 게 많은 얼굴로 음, 음, 거리며 말을 고르던 아이가 어림잡아 대답을 돌려준 건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음, 아마도, 봄……?”

“…….”

생각보다 훨씬 먼 기상의 때에 세라의 입매가 설핏 굳었다.

모르는 사람이 들었다면 농담하지 말라며 웃어넘겼겠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스노우가 이토록 오랜 시간을 잠들어야 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페이덴의 핏줄들은 ‘지혜’를 들여다본 뒤에는 반드시 짧게나마 잠이 든다. 원래는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진리를 들여다본 대가로 그만큼의 수명이 줄어든 탓이다. 그들이 훔쳐본 진리가 깊을수록 잠드는 시간이 길어진다.

아직 첫눈이 오지 않은 초겨울에 잠든 스노우가 봄이 되어서야 깨어난다는 건, 그가 엿본 ‘지혜’가 예언에 가까울 정도로 정확하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가 마지막으로 들여다본 진리란 에델에 관한 것이고 말이다.

“그래-.”

겨우 떨쳐 냈던 복잡한 감정이 다시금 세라를 향해 밀려왔다.

만날 수 있어.

자꾸만 희망을 종용하는 목소리가 귓가에 어른거린다.

“그렇구나.”

이번에는 진짜일까?

믿어도 되는 걸까.

그녀의 인생을 어그러뜨린 페이덴이 하는 말에, 또다시 희망을 품는 어리석은 선택을 해야 하는가.

“그럼, 그쯤에 올게.”

상념에 빠진 세라는 또 금세 100골드의 존재를 잊어버렸다.

일단은 지금 당장 스노우를 만날 수 없음을 받아들인 세라가 순순히 아퀼라로부터 등을 돌렸다.

“저, 어, 언니……!”

그때, 아퀼라가 다급하게 세라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두 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모르지만.”

“……?”

“그, 그래도-.”

답지 않게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아이는 한참 동안 적절한 말을 고르듯 어물거렸다.

“자신의 몸을…… 소, 소중히 하세요…….”

그러다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겨우 말을 끝마쳤다.

말하면서도 민망한지 아퀼라는 차마 세라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어디로 들어도, 길드를 강타한 삼각 스캔들을 아는 자의 발언이었다.

드문드문 이어지는 말에는 세라를 향한 염려와 애정이 묻어 나왔다.

그리고 그 올곧은 염려와 애정의 대상자인 세라는.

“…….”

세라에게서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언니……?”

그에 의아함을 느낀 아퀼라가 용기를 내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가.

“…….”

창백하게 질린 채 굳어 버린 얼굴을 마주하고는 헉, 소리를 내며 숨을 들이켰다.

본능적으로 뭔가 잘못됐음을 느낀 아퀼라가 본인이 더 놀라며 와르르 변명을 쏟아 냈다.

“……죄, 죄송해요. 제가 너무 주제넘게! 그게, 언니가 실연의 상처를 극복하지 못하고 극,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고 해서-.”

하지만 그것은 도리어 역효과를 불러일으켰다.

“이 세상이 멸망해서 먹을 게 전부 사라졌어도 절대 먹으면 안 되는 걸 먹어 버렸다고 다들 걱정하길래-.”

“……그만.”

“어, 언니가 깨끗한 것만 먹었으면 해서…….”

“그만해! 그만!”

괴로운 얼굴로 소리친 세라가 다급히 아퀼라의 말을 가로막았다.

딴에는 대화의 적나라함을 좀 가려 보고자 나름의 은유를 더한 모양이지만 그래서 더욱 듣는 자로 하여금 자괴감이 들게 했다.

오는 길에 들었던 민망한 수군거림 백 마디보다, 아퀼라의 입에서 튀어나온 저 걱정 어린 한마디가 기어코 간신히 유지하고 있던 세라의 평정심을 깨부쉈다.

웃는 얼굴로 급소를 찌르는 아퀼라의 화술은 이번에도 빛을 발했다.

적잖은 충격을 받은 세라가 비틀대며 난간을 붙잡았다.

에녹 소서 대체 어디까지 소문을 퍼뜨렸길래 아퀼라까지 그 난잡한 소식을 전해 들은 거야.

원한 어린 혼잣말을 중얼댄 그녀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입가를 틀어막았다.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마. 아퀼라.”

그러고는 흡사 애원하는 어조로 아퀼라에게 이쯤에서 멈추라며 침묵을 당부했다.

제발……. 쪽팔리니까…….

차마 하지 못한 마지막 말을 끙끙 않던 세라가 비척비척 걸음을 옮겼다.

“갈게.”

“네에…….”

이번만큼은 아퀼라도 순순히 그녀를 보내 주었다.

쿵, 쿵, 세라가 느리게 계단을 내려간다. 난간에 몸을 의지하여 엉금엉금 내려가던 그녀가 별안간 중간쯤에 멈춘다.

그러다 다시 쿵, 쿵, 쿵. 맹렬한 기세로 계단을 거슬러 올라와 두 손으로 아퀼라의 어깨를 딱 잡아챘다.

“……?!”

놀란 아퀼라가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넌 행복하게 살 거야. 앞으로도 별 탈 없이. 쭉!”

내용은 더할 나위 없었으나, 민망함이 가시지 않은 상태라 그런지 말투가 화라도 난 사람처럼 거칠었다.

“……네?”

거의 통보에 가까운 축복에 아퀼라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했다.

“잘 지내. 봄에 보자.”

그러나 할 말을 모두 끝낸 세라는 더 이상의 설명 없이 휙, 돌아 다시 계단을 내려가 버렸다. 삐걱대며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아퀼라가 두 뺨을 발그레하게 붉히며 중얼거렸다.

“……다정한 사람.”

그러다 걱정과 근심이 잔뜩 내려앉은 얼굴로 푹, 한숨을 내쉰다.

대체 어쩌다가 오라버니와 헤어진 거지.

두 분은 분명 좋은 연인이 되었을 텐데…….

제 등 뒤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른 채, 세라는 도망치듯이 건물을 나섰다.

“어우, 그놈 때문에 이게 무슨 창피야……!”

민망함에 몸서리를 친 세라가 자꾸만 간질거리는 왼쪽 팔뚝을 벅벅 긁어댔다.

“아, 내 100골드!”

그리고 밖에 나오고 나서야, 자신이 방문 목적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당사자도 잠든 마당에 이제 와서 다시 돌아가 아퀼라에게 혹시 스노우가 내 앞으로 남겨 놓은 돈 같은 건 없냐고 물어볼 정도의 뻔뻔함이, 세라에게는 없었다.

“이거 사기 계약 당한 거 아닌-?”

그러다 문득, 자신이 잊고 있던 게 하나가 더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붉게 자국이 남을 정도로 긁어대던 팔을 걷어 올렸다.

그러자, 착실하게 줄어든 형량이 새로이 모습을 드러냈다.

세라는 이전과 이후의 차이를 가늠하며 조용히 제게 남은 형량을 읊조렸다.

“316,145,000이라…….”

들인 수고가 아쉽지 않게 칠천만 년이라는 어마어마한 형량이 줄었다.

아직 아퀼라의 어깨에 내려앉은 검은 덩어리가 전부 사라지지 않았는데도 이 정도라면 제법 쏠쏠한 결과였다.

비록, 더러운 삼각형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되었지만, 어차피 시간이 전부 해결해 줄 일이었으므로.

그래. 이 정도면 충분히 감수할 만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길드원들이 측은한 눈빛을 하는 것만 빼면, 뭐라도 물어보고 싶은데 차마 물어보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기웃거리는 것만 빼면,

아까 그 곡소리가 나는 거리를 되돌아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한 것만 빼면…….

“할 수 있다. 나는 할 수 있어.”

애써 정신을 그러모은 세라가 후하후하 심호흡하며 첫발을 내디딘 순간.

“세라! 세라아!”

저 멀리서부터 그녀를 부르며 달려오는 인영이 하나 보였다.

이토록 흐린 날에도 유난히 축축하고 음울해 보이는 까만색. 하지만 요즘 들어 그나마 살아 있는 사람 같은 까만색이 된 레니스였다.

“오지 마. 레니스.”

반가운 얼굴이었으나 아침부터 시달릴 대로 시달린 세라로서는 지레 겁을 먹게 하는 등장이었다. 아퀼라에 이어 레니스의 입에서도 그녀가 에녹을 따먹었다느니 하는 말이 나온다면 그때야말로 쪽팔려서 기절이라도 할 것 같았다.

우산을 푹 눌러쓴 세라는 아무것도 못 들은 척 재게 발을 놀렸다.

그리고 일을 이 지경까지 끌고 온 에녹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걔는 여태 한두 명이랑 잔 것도 아니면서 왜 나랑 잔 것만 유난을 떠는 건데…….

“세라? 세라! 잠깐만!”

하지만 야속한 레니스는 아까보다 더욱 큰 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외쳐댔다.

“아, 제발…….”

세라가 이제는 숫제 울상을 지으며 더 빠르게 걸었다.

사람들이 그녀를 본다.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우산을 푹 눌러 썼는데도, 찌를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수군대는 목소리. 그녀의 이름 뒤에 당연하다는 듯이 에녹의 이름이 따라붙었다. 한 세트처럼 엮여 진짜로 뭐라도 있는 것처럼 분위기가 형성되자 자꾸만 얼굴이 화끈거렸다.

태어나 처음으로 먼지가 되어 사라지고 싶은 충동이 그녀를 휩쓸었다.

“세라! 세라! 잠깐만! 잠깐! 너한테 꼭 할 말이-.”

그사이 세라를 따라잡은 레니스가 그녀의 어깨를 붙잡아 세웠다.

“아악! 그래! 먹었다!”

마지막 인내심마저 바닥난 세라가 참지 못하고 빼액 신경질적으로 소리친 건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남들 다 따먹은 놈 같이 좀 따먹은 거 가지고 왜 이렇게 난리야!”

난리야……. 난리야……. 난리야…….

우렁찬 메아리가 비 오는 거리를 뒤덮었다.

시원하게 내지른 고함을 못 들은 사람은 없었다. 예민하게 날이 선 세라가 바들바들 떨며 자신을 바라보던 길드원들을 노려봐 주었다.

뭐. 왜. 어쩌라고. 불만 있어?

딱 그런 당당한 눈으로 쳐다보자, 멈춰 서서 그녀를 구경하던 길드원들이 자연스럽게 흩어져 각자 갈 길을 갔다.

다들 한 맺힌 절규에 서린 세라의 경고를 확실하게 알아들었다.

알아듣지 못하고 헛소리를 이어 가는 사람은 레니스뿐이었다.

“……맛있었어?”

“아니!”

몹시 직설적인 물음에 세라가 발작을 하며 부정했다.

굳이 에녹의 맛을 표현하라고 한다면 맛있다기보다는 독한 맛이었다. 그놈은 마시면 몸을 해치는 독주 같은 놈이었다.

“맛도 없는 걸 왜 먹었어? 다음부턴 맛있는 걸로 먹어.”

그에, 레니스가 한술 더 떠 난잡한 소리를 해댔다.

“야! 너는 뭔 그딴 말을-.”

씩씩대며 뒤돌아본 세라는 여느 때와 똑같이 맹한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레니스를 발견하고는 멈칫했다. 그녀가 생각하는 그렇고 그런 의미에서 한 말치고는 상대의 눈빛이 너무나도 맑았다.

어쩐지 핀트가 나가도 한참 나가 버린 것 같은 예감에, 세라가 미심쩍게 미간을 좁혔다.

“너, 몰라……?”

“응? 무슨 소리야. 나도 다 알아!”

아는 사람만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묻자 레니스가 이번에도 해맑게 대꾸했다.

“스노우랑 사귄다면서?”

축하해.

레니스가 늦어도 한참 늦은 축하를 전해 왔다.

대장과 사귀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라고 덧붙이는 얼굴이 순진하기 그지없었다.

이쯤 되니 세라도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

레니스는. 지금 길드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쥐뿔도 모른다는 사실을.

그나마 마음이 편해지는 소식이었으나, 이번엔 다른 의미로 마음이 불편해졌다.

아퀼라도 알고 있는 걸 레니스는 모른다. ……얘 혹시 왕따인가?

“……레니스.”

진지하게 표정을 굳힌 세라가 역으로 레니스의 어깨를 붙잡고서는 단단히 일렀다.

“넌 진짜, 비제 옆에 꼭 붙어 있어. 알았지?”

“어? 으응.”

“그래서, 뭣 때문에 왔다고?”

“비제가 불러. 나랑 같이 가자.”

“……비제?”

생뚱맞은 이름에 세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헤타르딘에서 돌아온 이후로 비제와 이렇다 할 접점이 없었던지라 이렇게까지 열심히 자신을 찾을 이유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응. 너한테 받아야 할 게 있다던데?”

레니스가 두루뭉술하게나마 용건을 설명해 주었으나 짚이는 게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난데없이 지목을 받아 버린 세라가 두 눈을 끔뻑였다.

“……나한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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