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연달아 큰일을 겪은 시그너스에서 길드 회의가 열린 건 참으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회의 장소는 언제나와 똑같이 에녹의 집이었다.
매번 모일 때마다 하나씩 부숴 버린 덕분에, 이제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휑한 응접실에는 집주인인 에녹이 앉는 의자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었다.
손님을 위한 가구라곤 아무것도 준비되어 있지 않은 공간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사람이 다섯이었다. 들어온 순서대로 시그너스 길드의 실질적 관리자인 마커스, 첩보와 암살 담당인 발레리, 지원부대를 교육하는 베니, 가시 공략의 주축인 기드온, 마지막으로 시그너스의 모든 날붙이를 제작하는 대장장이 사이온이었다.
원래는 이 구성에 레니스까지 있어야 했지만, 비제가 합류한 이후에 재정과 관련한 부서는 길드 회의에 출석하지 않기로 합의가 되었다.
가장 마지막으로 열렸던 회의는 기드온이 테이블을 박살 내면서 끝이 났고, 길드가 기습당했을 때 모였던 건 에녹 없이 임시로 치러졌던 회의였으므로 제외. 사실상 모든 구성원이 빠지지 않고 전부 참석한 회의는 올해 들어 처음이라 할 수 있었다.
에녹을 빙 둘러선 다섯 명의 표정에는 어딘가 기묘한 구석이 있었다.
이번 회의를 소집한 사람이 다름 아닌 길드장 에녹이었기 때문이다.
매번 일을 하기 싫어서 이리 빼고 저리 빼고 하던 사람이 참으로 별일이었다.
예전이라면 드디어 일을 할 마음이 들었느냐며 쌍수 들고 환영하겠으나, 지금은 사정이 많이 바뀌었다.
“발레리. 우리 오늘 왜 모인 거야?”
“몰라. 대장이 할 말이라도 있나 보지.”
“비제 덕분에 이제 밀린 안건도 없는데…….”
느닷없는 소집의 이유를 알지 못하는 베니와 발레리가 작게 속닥거렸다.
시그너스를 강타한 안타레스의 기습은 많은 희생과 피해를 입혔지만, 그나마 순기능이 있다면 길드의 많은 부분이 아예 망가져 버린 덕분에 적재해 있던 문제가 함께 사라져 버렸다는 거였다.
게다가 세라가 헤타르딘에서 섭외해 온 비제가 비상한 머리로 무너진 길드를 더 번쩍번쩍하게 재건하고, 비효율적인 업무 체계를 뜯어고치고, 신명 나는 투자 감각으로 노후화된 시설이나 부족한 자재들을 넘치도록 사들인 덕분에 사실상 회의를 해야 할 만큼 급박한 의제 같은 건 없었다.
어느 정도로 없느냐 하면, 길드에 산재한 문제보다 비에 쫄딱 젖은 꼴로 앉아 있는 에녹이 더 신경 쓰일 지경이었다.
“……대장. 물 좀 닦으면 안 돼?”
마룻바닥에 흥건하게 고이는 물웅덩이를 못마땅한 눈으로 쳐다보던 마커스가 결국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
“신경 꺼-.”
에녹이 축축 처지는 목소리로 맞받아쳤다.
뭐 그렇게 좋은 거라고 겨울비를 흠씬 뒤집어쓴 대장은 고집스럽게 제 몸을 닦지 않고 젖은 채로 방치하는 중이었다.
의욕적으로 사람을 불러 놓고 어째 비 오는 창밖만 바라보는 옆모습이 우울의 극치를 내달리고 있었다.
그 꼴을 가만히 지켜보던 발레리가 마커스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눈알을 요리조리 돌려댔다.
‘어제 좋은 시간 보냈다며. 근데 왜 저래?’
발레리의 신호를 받은 마커스가 눈을 지그시 끔뻑이며 대답했다.
‘내가 어떻게 알아. 쟤가 저러는 게 하루 이틀이냐.’
온 길드가 떠들썩하게 뜨거운 밤을 보낸 주제에, 별안간 우울증이 도져 버린 에녹을 두고 길드원들끼리 소리 없는 눈싸움을 반복하던 그때였다.
“각자 상황 보고해.”
영원히 창밖이나 바라보고 있는 것 같던 에녹이 언제 우울해했냐는 듯 멀쩡한 낯으로 그들을 돌아보았다.
가장 먼저 대답한 건 에녹과 곧장 눈이 마주친 마커스였다.
“중앙 가시는 최종 구간 공략만 남겨 두고 있는 상태야. 핵의 위치를 찾는 게 관건인데. 원래는 스노우가 마저 찾아야 하는데, 봄까지는 움직일 수 없는 상태라고 들었어.”
그의 보고는 시그너스에서 가장 중요하게 매달리고 있는 중앙 가시에 대한 내용이었다. 차근차근 공략한 덕분에, 핵이 숨겨져 있는 최상부만을 남겨 두고 있었지만 핵심 역할을 맡고 있던 스노우가 행동 불능에 빠져 버리는 바람에 모든 것이 중단된 상태였다.
“그럼, 스노우 대신 그 면역자가 가면 되겠군.”
마커스의 보고를 들은 기드온이 이제는 거의 반사적으로 에녹의 노예를 입에 담았고.
“기각.”
에녹 역시 반사적으로 그 의견을 무시했다.
“다음-.”
자연스럽게 마커스와 기드온을 넘긴 에녹이 베니를 눈짓했다가.
“-은 보고할 게 없겠군. 그다음.”
그저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해맑은 얼굴을 마주하고는 물 흐르듯이 다음으로 넘어갔다.
“올해 초에 발주받은 물량들은 전부 쳐 냈어. 지난 습격에 용광로가 부서졌는데, 주문 제작이라 들여오려면 시간이 필요해.”
“기다리면 되겠고.”
곧이어 사이온까지 속전속결로 끝내 버린 에녹이 한 바퀴를 빙 돌아 건너뛰었던 발레리를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쥐새끼는?”
시그너스에 큰 엿을 선사한 스파이에 관한 물음이었다.
“……지난 습격 이후로 활동하지 않는지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아.”
은밀히 길드에 숨어든 쥐새끼의 행방을 찾고 있던 발레리는 허탕이라는 의미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본래는 암살자 길드를 운영하다가 시그너스에 편입된 그녀는 특히 첩자를 추적하는 데 특출난 재능을 가졌다. 그녀는 추적자가 가져야 하는 모든 소양을 지닌 축복받은 자였다. 교활하고, 자비가 없었으며, 집요했다.
시그너스에 첩자가 든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들은 대륙에서 최고라 불리는 길드 중 하나였으며, 굳이 안타레스가 아니더라도 그들을 견제하는 길드는 사방에 깔려 있었다.
그때마다 길드에 숨어든 쥐새끼를 잡아낸 이가 바로 발레리였다.
누구라도 그녀의 먹잇감이 되면, 한 달도 버티지 못하고 덜미가 잡혀 끌려 나왔고 예외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조차 꼬리조차 잡지 못할 정도로 이번 놈은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그런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이 정도면 혼란을 틈타 탈출한 게 아닐까 싶은데.”
너무나도 나오지 않아서, 발레리는 급기야 자신이 허상을 좇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지경이었다.
“아니. 그건 절대 아닐걸.”
하지만 에녹은 딱 잘라 그건 아니라 못 박았다.
아직 누가 첩자인지 밝혀진 게 아무것도 없는데, 한 번도 본 적 없는 상대의 존재를 단호하게 확신하고 있었다.
“어떻게 확신해?”
“막다른 길이니까.”
“……?”
설명을 전부 생략한 결론에 발레리는 물론 다른 이들의 얼굴에도 의아한 빛이 스쳤다. 개중에 에녹의 말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은 마커스 정도였다.
“습격은 실패했고, 정보를 빼갈 경로는 막혔고-.”
부러 늘려서 설명해 준 그 덕분에 다른 사람들의 이해가 빨랐다.
첩자가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습격은 어느 정도 타격을 입히는 데 성공했으나 에녹이 몸 바쳐 폭발을 막은 덕에 재건할 수 있는 수준에 그쳤고, 비제의 보안 개혁 덕분에 예전처럼 함부로 정보를 빼가기가 어려웠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시그너스에 첩자가 있다는 사실만 들켰을 뿐 결과만 놓고 보았을 때는 제대로 해낸 게 없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아마 지금쯤 굉장히 초조하고 위축된 상태이긴 할 터였다.
“‘관’에 갇히고 싶지 않다면 내 목이라도 가지고 돌아가야 하지 않겠어?”
이대로 있으면 기다리는 건 죽음뿐일 테니.
첩자의 심경을 정확히 간파해 낸 에녹이 자신의 죽음을 마치 남의 것처럼 흥얼거렸다.
“한동안 쥐새끼는 놔둬.”
그러다가 대뜸 첩자를 쫓는 건 그만두는 게 좋겠다고 말한다.
“어엉?”
“……갑자기? 왜?”
어디로 봐도 그놈을 잡아 족쳐야 한다는 흐름이었는데, 갑자기 조였던 손을 풀어 버리자니 앞뒤가 맞지 않았다.
“걔도 숨통이 트여야 굴 밖으로 머리를 내밀지 않겠어?”
에녹은 잔뜩 몸을 사리고 있는 첩자가 안심하고 사고를 칠 때까지 기다리자는 대담한 결단을 내렸다. 그건 그렇지. 그 말에 가장 먼저 동의를 표한 사람은 발레리였다. 그녀의 숱한 경험으로, 작정하고 숨을 죽이는 첩자를 찾아내는 것만큼 어렵고 비효율적인 일도 없었기 때문에.
“그럼, 알아들은 걸로 알고-.”
그녀의 합의마저 이끌어 낸 에녹이 시선을 창밖으로 옮겼다.
그러다 무언가를 발견했는지 우울한 눈에 순간 이채가 어렸다.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도 있는 걸까. 무기력하게 굳어 있던 입매가 픽, 하고 허물어지며 호선을 그린다.
“돌아오는 봄까지 시그너스가 할 일이 없다는 말이네?”
가볍게 회의를 요약한 에녹이 이견이 있냐는 눈으로 좌중을 훑었다.
대부분의 안건은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였으므로,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방금 전까지 우울해 죽으려고 하던 남자가 갑자기 활기를 띠는 게 영 수상했다.
저놈이 왜, 좋아하지?
의심스러운 눈으로 에녹을 쳐다보던 마커스가 일단 반사적으로 그의 말을 부정하고 들었다.
“……으음, 그렇다고 아주 없지는 않은-.”
“그게 없는 거지.”
“일이야 만들면 되는 건데-.”
“안 만들면 없잖아?”
하지만 그가 무슨 말을 하든 에녹에게는 바늘 하나 들어갈 틈도 보이지 않았다. 이미 그의 마음속에, 일 같은 건 어디에도 없었다. 그럼 결국 진실이야 어찌 되든 없는 게 될 것이었으므로, 마커스는 어쩔 수 없이 항복하고 말았다.
“……그래. 없다. 없어.”
“좋아.”
결국 승리를 거머쥔 에녹이 씨익, 말간 소년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놀자.”
“……?”
그건 아주, 당혹스러우면서도…….
“시그너스 길드는 봄까지 전부 휴가야.”
모두의 가슴에 불을 지르는 말이었다.
“자, 잠깐, 대장 그거 진심이야?”
“정말? 진짜? 우리도 놀아도 돼?!”
“매번 혼자만 놀던 인간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예상치 못했던 파격적인 복지에 흥미 없이 회의에 임하던 길드원들이 굶주린 짐승처럼 두 눈을 번뜩였다. 심지어 마커스마저도.
시그너스 길드는 가시 토벌의 최전선에 있는 길드였기 때문에, 지난 몇 년간 모두가 쉴새 없이 일만 했던지라 구성원에게 공식적으로 휴가다운 휴가를 준 적이 없었다.
“그래. 진짜.”
휴식에 대한 강한 열망을 품은 면면들을 바라보며, 에녹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리고 이번 겨울의 눈이 전부 녹으면.”
그리고 들뜬 길드원들이 환호성을 내지르기 전에 한마디 덧붙였다.
“시그너스는 중앙 가시를 완전히 박살 낼 거다.”
마침내 그들에게도, 이 끝나지 않는 싸움의 끝이 있으리라고.
“…….”
“…….”
자연스럽게, 하지만 결코 가볍지는 않은 그 선언에 휴가로 들떠 있던 길드원들의 분위기가 대번에 날카롭게 변했다. 에녹이 제시한 이번 휴가가 결코 기분 내키는 대로 주어지는 충동적인 결정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시그너스가 결집된 이유이자, 모두가 바라 마지않는 결실이 눈앞에 있으니, 한 걸음 물러서 숨을 고르라는 의미였다.
혹은, 이것이 인생에 주어지는 마지막 겨울일 수 있으니 후회 없이 보내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매정해 보일 수 있는 말이었으나, 그중 누구도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시그너스가 원하는 일이었다.
……가시에 꿰뚫려 죽어 가는 세계를 살아가는 이들의 숙명이었다.
“그래. 이제 그럴 때가 됐지.”
“준비도 됐고.”
“나중에 후회하지 않으려면 개처럼 놀아야겠어.”
한마디씩 보탠 길드원들이 저마다의 각오를 다졌다.
비장한 기운이 응접실에 내려앉았다. 바라 마지않던 일을 곧 이룰 수 있다는 흥분이 공기를 팽팽히 잡아당겼다.
달칵.
그때, 현관문이 열리며 그 안으로 빗소리가 들이닥쳤다.
문틈으로 불어온 차가운 바람이 과열된 열기를 빠르게 식혀 주었다.
“다녀왔습니-.”
막 우산을 접으며 응접실로 들어오던 세라가 방 안을 가득 채운 시커먼 인영들을 발견하고는 멈칫했다. 우산 하나만 들고 나갔던 그녀는 어디서 났는지 품에 커다란 짐을 안고 있었다.
“회의 중이셨구나. 2층에 올라가 있을게요.”
주르륵, 구성원을 살펴본 그녀는 금방 정답을 찾아냈다.
“아니. 이제 가려던 참이야.”
“그래. 우리도 눈치가 있지.”
그녀가 언제나처럼 2층으로 자리를 피하려 하자, 마커스와 베니가 앞장서서 손사래를 쳤다.
“……?”
세라는 여기서 왜 눈치를 찼지? 하는 얼굴이었다.
“회의 끝. 흩어집시다.”
그사이 부러 큰 소리로 회의를 파한 마커스가 어물쩍대는 이들의 등을 밀어대며 빠르게 집을 빠져나갔다.
그 꼴이 꼭 뭔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부자연스러워서 이상해 보였지만, 시야에서 사라지니 금방 관심이 사그라들었다.
급한 일이라도 있었나 보지.
그렇게 생각한 세라가 마침내 창가에 앉아 있는 에녹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주인님. 왜 아직도 그러고 있어요?”
그러다 헤어진 지가 언젠데 아직도 쫄딱 젖은 꼴로 앉아 있는 그를 향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
그에 에녹이 새침한 눈으로 세라를 쳐다보다가.
“흥!”
창가를 향해 팩, 고개를 돌려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