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흥……?
세라는 나이 지긋한 남자의 입에서 나오기에는 다소 민망한 소리에 눈을 끔뻑였다. 누가 미운 300살 아니랄까 봐. 새침한 콧방귀를 뀐 에녹은 고집스럽게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 세라를 외면하고 있었다.
어이없어.
지금 정말로 외면하고 싶은 사람이 누군데.
세라는 이상한 소문을 내 제 얼굴에 먹칠을 한 누구누구의 뒷모습을 어이없다는 눈으로 한 번 흘겨봐 준 뒤 척척 2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
등 뒤로 따라붙는 에녹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세라는 돌아보지 않았다.
오는 길에 우산을 제대로 쓰지 않은 탓에 그녀의 머리끝도 약하게 젖어 있었다. 가장 먼저 제 방에 들러 짐을 던져 넣은 그녀는 다음으로 욕실과 가장 가까운 방으로 들어가 보송보송하게 잘 마른 타월을 하나 가지고 나왔다.
그리고 다시 1층으로 내려와 창가로 걸어가서는 그것을 아직도 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에녹의 머리 위에 뒤집어씌웠다.
“회의를 할 거면 좀 멀쩡한 꼴로 하던가.”
그 위에 손을 얹은 세라가 마구잡이로 물기를 털어 냈다. 물장난을 잔뜩 치고 집에 돌아온 애완견을 돌보는 주인 같았다.
“…….”
에녹은 저항하지 않았다.
사람 얼굴만 봐도 흥, 흥 거렸지만 막상 손을 대니 앙칼지게 굴지 않고 순순히 머리를 내맡긴다.
세라는 그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어조로 그를 골려 주었다.
“빗속에 버리고 갔다고 이런 식으로 시위하는 바보가 어딨어요?”
그러고는 못마땅한 눈으로 바닥에 동그랗게 고여 있는 물웅덩이를 내려다보며 쯧쯧 혀를 찼다. 이미 마룻바닥에 흡수되기 시작한 물 자국이 신경 쓰였다. 아, 저거 제대로 안 말리면 나무 썩는데. 자연스럽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떠올리다가. 나도 노예 다 됐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
에녹은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기분은 확연하게 풀어진 것 같았다.
머리와 얼굴을 모조리 덮어 버리는 타월 때문에 표정이 보이지 않았지만 일단 세라가 느끼기에는 그랬다.
지가 기분이 안 풀리면 어쩔 거야.
괜히 입술을 삐죽거리면서도 세라는 에녹을 닦아 주는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
얼추 물기가 마른 머리칼에서 미끄러진 타월이 에녹의 얼굴을 꾹꾹 눌러댔다.
“야.”
별안간 타월 너머로 눈이 찔린 에녹이 살벌하게 목소리를 깔았지만 안 들리는 척 손끝에 바짝 힘을 주었다.
“……?”
그때, 창밖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타월로 질식시켜 버릴 것처럼 에녹의 머리를 꽉꽉 졸라대던 세라가 창가로 붙어섰다. 절반 이상을 가려 놓은 판자 때문에 세라가 바깥을 살피려면 바짝 까치발을 들어야 했다.
거리에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분명 그녀가 귀가할 때까지만 해도 다들 일찍 집에 들어가는 분위기였는데, 어째 옆구리에 짐을 한가득 싸 짊어지고 나와서는 낑낑대며 빗속을 뚫고 걸었다.
비를 맞는 것도 아랑곳 하지 않는 얼굴들이 하나같이 밝았다.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표정과는 달리 짐을 들고 떠나는 뒷모습은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어딘가 다급해 보였다.
그즈음 힘에 부친 세라가 까치발을 툭, 내려놓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들 어딜 가는 거지……?”
“휴가.”
대답은 그녀의 아래쪽에서 돌아왔다.
자연스럽게 시선을 내리니 마주 보는 연둣빛 눈동자 대신 동그란 붉은색 정수리가 그녀를 반겼다.
“봄까지 길드원들에게 휴가를 줬거든. 다들 어디 여행이라도 가나 보지.”
에녹은 여전히 마음이 전부 풀리지 않은 어조로, 하지만 충실히 세라의 의문을 해소해 주었다.
“……휴가?”
눈을 동그랗게 뜬 세라가 다시 까치발을 들어 창밖을 살핀다.
앞뒤 상황을 알고 보니 왜 저렇게들 신이 났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데?”
다만, 비가 그치지도 않았는데 쫓기듯이 떠나는 게 못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딜 가도 가시가 꽂혀 있어 살풍경인데, 대체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저렇게들 바쁘게 떠나나 싶어서…….
“장기간 길드를 떠날 수 있는 기회란 흔치 않으니까. 이참에 대륙이라도 한 바퀴 돌고 싶은 모양이지.”
그저 놀라울 뿐인 세라와는 달리 에녹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는 식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눈을 찔리면서도 허구한 날 일만 하면서 길드에 묶여 있다 보면, 여행을 싫어하던 놈들도 어디로든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까치발을 내린 세라가 창에서 떨어졌다.
“주인님은 어디 안 가세요?”
그즈음 슬슬 손이 아파진 세라가 얼굴을 눌러대던 타월을 더 아래로 내렸다. 그대로 목덜미를 엉성하게 감싸고는 물기를 닦는 둥 마는 둥 주물럭거렸다.
“뭐 하러.”
“애인들이랑 어디 놀러 간다든지?”
“귀찮아.”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말에 에녹이 성가셔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길드에 갇혀 살다 보면 누구라도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이 어쩌고 한 사람치고는 의욕도 뭣도 없는 태도였다.
“그럼 겨울 동안 뭐 하시게요?”
“탱자탱자 놀 거야. 호화롭게.”
그나마 가지고 있는 계획이라곤 놀겠다는 마음 하나뿐이었다.
그의 뒷덜미를 털어 주던 세라가 미심쩍은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럴 돈 없잖아요.”
“네가 있잖아. 돈.”
날 버리고 받아 온 100골드.
한차례 빈정거린 에녹이 그녀가 돌아온 후 처음으로 시선을 맞췄다. 뾰로통한 시선에는 완전히 풀리지 않은 응어리가 한가득이었다.
역시, 아까의 일을 아직도 마음에 담아 둔 게 틀림없었다.
“…….”
“돈, 받아 온 거 아니야? 허탕 쳤어?”
세라가 답이 없자, 에녹이 따지듯이 돈의 행방을 물었다.
“……예에. 뭐-.”
꼭 돈을 맡겨 놓은 것처럼 행동해서, 세라는 대체 내가 받은 100골드와 너의 호화로운 겨울 휴가가 무슨 상관관계에 있느냐 따져 보지 못했다.
“받아 오긴, 했는데요…….”
얼떨결에 이실직고한 세라의 시선이 흘끗, 돈주머니가 있는 2층 어딘가를 올려다보았다.
‘여기, 스노우 씨가 언니 앞으로 맡겨 놓은 돈이에요.’
스노우가 약속했던 보수를 건네준 사람은 의외로 비제였다.
사무실로 찾아간 세라에게 차와 다과를 권한 아이는 그녀의 앞에 순도 높은 금화로 채워진 주머니와 서류를 함께 내밀었다.
‘확인해 보시고, 인수 서류에 사인해 주세요.’
찬찬히 금화를 세어 본 세라는 비제가 내민 서류에 사인한 뒤 그토록 바라던 보수를 건네받았다. 그리고 들었던 것과 다른 상황에 개운하게 좋아하지도 못하고 어정쩡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나한테 받을 게 있다고 해서 왔는데.’
아직, 비제가 자신에게 받아 가야겠다고 한 게 무엇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행여나 숨겨진 주어가 방금 건네받은 돈일까 걱정된 세라가 품 안의 주머니를 꽉 끌어안았다.
비제는 세라의 쌈짓돈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언니의 노동력이요.’
‘음……?’
‘스노우 씨 대신, 의뢰를 하나 가 주셔야겠어요.’
그 이후 비제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차라리 100골드를 도로 뱉어 내라고 하는 것보다 더 최악이었다.
‘……내가? 왜?’
‘보증서셨잖아요. 여기. 이렇게. 버젓이.’
의문을 표하는 세라의 앞에, 비제가 새로운 서류를 한 장 들이밀었다.
그것을 얼른 낚아챈 세라가 종이를 잡아먹을 듯이 글자를 훑어 내렸다. 스노우와 외부의 누군가가 주고받은 것으로 보이는 의뢰서의 맨 마지막 줄에는 처음 보는 특수 조항이 붙어 있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스노우가 의뢰를 수행하지 못하는 경우, 대리 수행할 것을 보증함.]
그리고 그 옆에 시원하게 갈겨진 제 사인도 붙어 있었다.
‘이, 이건……?’
그것을 확인한 세라는 소스라치게 놀랐다가.
‘아……!’
불현듯 뇌리를 스치는 과거의 기억에 단말마와도 같은 탄성을 내뱉었다.
그러고 보니, 스노우와 애인 계약을 맺은 직후에 사람들을 철저하게 속여야 한다며 어딘가에 사인을 휘갈겼던 게 떠오른 것이다.
그게 이렇게 귀찮은 서류였던가?
세라가 낭패라는 눈으로 뒤늦게 서류의 내용을 확인했다.
스노우가 겨울이 지나기 전까지, 어떤 길드에 방문해 문제를 해결해 주기로 했다는 게 의뢰의 주 골자였다. 분명 과거의 자신이 사인한 서류인데, 모든 게 새로웠다.
에스텔라 길드? 그건 또 어디 붙어 있는 건데.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세라가 초조하게 입술을 짓씹었다.
‘으휴, 또 제대로 안 읽어 보고 사인했죠?’
‘…….’
그런 그녀를 두고, 비제가 여지없이 정곡을 찔러댔다.
으윽, 정말로 어딘가를 찔린 사람처럼 괴로운 표정을 지은 세라가 불쌍한 낯을 꾸며 냈다.
‘……나 말고 다른 사람을 찾는 건 어때?’
‘안 돼요. 여긴 거리가 멀고, 경비도 많이 들고…… 하여튼 여러 가지 이유로 다들 기피하는 곳이라고요.’
하지만 비제는 그녀를 봐주지 않았다.
설명을 들으니 더더욱 가고 싶지 않아진 세라가 연신 계약 파기를 요청했다.
안 돼. 안 물러 줘. 돌아가.
단호하게 세라의 애원을 차단한 비제가 100골드 위로 스노우의 의뢰서를 얹어 주었다.
진퇴양난에 빠진 세라가 내키지 않아 죽겠다며 몸을 비틀어 물었다.
‘얼마나 먼데……?’
그에 반색을 하고 일어선 비제가 어디선가 지도를 가져와 책상 위에 넓게 펼쳤다. 그들이 살고 있는 대륙의 지도였다. 비제는 한가운데에 있는 거대한 숲 지대인 로우드로부터 아래쪽으로 쭉 떨어진 끝 지점을 톡톡, 손끝으로 두드리며 말했다.
‘대륙의 남쪽 끝이요.’
‘…….’
‘지금 출발하면, 첫눈이 올 때쯤엔 도착하겠네요.’
‘…….’
‘돌아오면, 눈이 전부 녹을 때려나?’
쾌활하게 이어지는 그 말은 공교롭게도 어디선가 많이 들어 본 내용이었다.
모른 척을 하려고 해도, 이토록 노골적인 우연이기에 세라는 어쩔 수 없이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스노우가 자신을 보증인으로 세운 저 의뢰가, 에델을 찾는 일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일일 것이라고.
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머지않은 과거를 떠올린 세라가 멍하니 탄식했다.
‘경비야 방금 받은 100골드로 충분할 테니까 문제는 없을 거고요.’
황당한 시선이 제 품에 꼭 안겨 있는 돈주머니로 떨어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내심 보람찬 감각을 주던 보상이 지금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아, 어쩐지. 별것도 아닌 일에 돈을 많이 주더라.
후한 보상의 의도를 알고 나니, 큰돈을 쥐고서도 기쁘다는 생각보다는 속았다는 감상이 더 짙게 자리 잡았다.
‘그 외에 필요한 절차는 스노우 씨가 미리 처리를 해 둬서, 따로 할 일은 없을 거예요.’
그 와중에도 비제는 매끄럽게 설명을 이어 나갔다.
‘…….’
귀찮은 일이 최소화되었다는 희소식이었으나 세라는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마차, 애인 대행, 100골드, 보증서.
대체 어디서부터 그의 계획이었는지 거슬러 올라갈수록 당해 낼 수 없는 거대한 흐름이 느껴져 자꾸만 기막힌 헛웃음을 지어졌다. 뒤통수가 다 얼얼했다.
망할 스노우.
망할 페이덴.
짜증스러울 정도로 집요한 놈들.
‘그러니까, 언니는 몸만 가면 돼요.’
설명을 끝낸 비제의 뒤로, 한창 잠에 빠져 있을 스노우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언제나처럼 능글맞은 미소를 지은 그가 그녀를 향해 이렇게 속삭이고 있는 것 같았다.
이래도 안 가?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