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에 나라를 팔았습니다-102화 (102/131)

#102

아주 가지 않고는 버틸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 놓은 덕분에, 겨우 평정심을 되찾은 마음이 다시 바람 앞의 갈대처럼 흔들렸다.

제 명예를 바쳐 얻어 낸 평화였는데, 이 얄미운 페이덴 같으니…….

억울한 표정을 지은 세라는 하여튼 그 족속들과 얽히면 좋은 일이 없다며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받기는 했는데. 그다음엔?”

애매하게 끊어진 말. 그 뒤로 이어지는 이야기가 없자 에녹이 그녀를 돌아보며 물었다.

마침 마음을 다잡기 어려워 누구에게라도 털어놓고 싶었던 세라는 그래도 오래 산 에녹에게 상담이라도 해 볼까 입술을 달싹였다가.

“……아니요, 됐어요.”

포기하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답답한 표정을 지은 에녹이 삐딱한 어조로 뜬금없는 질문을 해댔다.

“사람을 제일 열받게 하는 게 뭔 줄 알아. 노예야?”

모르는데요. 세라는 누가 들어도 관심 없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자 에녹이 비장하게 목소리를 깔며 대답했다.

“첫 번째는 말을 하다 마는 거고, 두 번째는.”

“…….”

“…….”

두 번째는. 그다음이 없었다.

세라의 미간이 팩, 찌푸려진 건 그다음 순간이었다.

“왜 말을 하다 말아요? 짜증 나게?”

그녀가 짜증을 부리자, 에녹이 실실대며 본색을 드러냈다.

“그러니까 마저 이야기해. 돈을 받기는 했는데 그래서 뭐.”

“하-.”

겨우 그 이야기하려고 밑밥을 거창하게도 깔았냐.

김이 팍 새어 버린 세라가 별 정성을 다 들인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평소에는 귀찮아. 귀찮아. 노래를 부르던 주제에 꼭 이렇게 이상한 데서 집요하게 굴었다.

“…….”

하지만 어이가 없을지언정 굳이 마다하고 싶지는 않았다. 딱히, 에녹 소서가 그녀의 심오한 고민을 진지하게 들어줄 거라 기대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그만큼 세라의 근심이 깊을 뿐이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랄까…….

“주인님은-.”

네가? 라는 눈으로 에녹을 한 번 훑어본 세라가 못 이기는 척 말문을 열었다.

“뭔가를 포기해 본 적, 있어요?”

그리고 질문을 입 밖으로 꺼냄과 동시에 에녹은 공감하지 못할 주제라고 생각했다.

명예도, 힘도, 평화도, 전부 쟁취하신 우리의 영웅께서 뭘 얼마나 포기하며 살았을까 싶어서.

하지만 의외로 에녹은 그녀의 말에 공감하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있지.”

많지.

덧붙는 말투가 많았다는 거치고는 제법 담담했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얼굴이 여상했다. 세라는 그게 포기했던 게 아쉽지 않은 것들뿐이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거듭된 포기로 인해 단단해진 건지 궁금해졌다.

“그중에 아쉬웠던 걸 떠올려 봐요.”

“얼마나?”

“오히려 희망을 품는 게 더 괴로울 정도로 간절한 거요.”

“…….”

아, 단단해진 거구나.

세라는 일순 무겁게 가라앉은 표정을 보고 금세 답을 유추했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 사무치는 상실의 경험이 비단 자기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데에서 오는 저열한 만족감이었다.

“이미 실패한 꿈이에요. 단념한 지도 오래됐어요.”

본심을 숨긴 세라가 자신이 말했던 조건에서 몇 가지 가정을 더했다.

그 뒤를 어떻게 설명할까 고민하던 그녀는 앞뒤를 전부 자르고 핵심만 두루뭉술하게 뭉개 에녹의 발치에 던져 넣었을 때.

“근데 어느 날 누군가가 나타나서, 네가 실패한 그 꿈이 이뤄질지도 모른다고 말하면-.”

“해.”

그는 더 들어 볼 것도 없다는 듯이 곧장 결론을 냈다.

“난 할 거야. 그게 뭐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하겠다고.

“누군지 모르겠지만 그 사람 참 부럽네.”

거기에 더해 그 괴로운 기회를 잡은 사람더러 부럽다고까지 했다.

이토록 대답이 시원시원하니, 도리어 고민하고 있던 세라가 이상한 사람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하지만, 또 실패할지도 모르고-.”

“그런 거 따질 정신이 어딨어?”

어쩐지 변명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반론을 제시했으나 이번에도 금방 가로막혔다.

“간절하다며. 나라면 일단 기회부터 잡고 봐.”

재차 못을 박은 에녹이 세상 참 불공평하다며 의자에 깊이 몸을 묻었다.

부럽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는지, 비 오는 하늘을 올려다보는 시선이 스스로의 신세를 비관하듯 씁쓸한 색채를 띠고 있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기회 따위 오지 않는 것보단 그게 훨씬 낫지.”

하필 비에 쫄딱 젖은 채로 그러고 있으니 여간 처량 맞아 보이는 게 아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면, 괜히 스스로가 배부른 고민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쩐지 해서는 안 될 짓을 한 것 같고…….

간만에 마음이 불편해진 세라가 스리슬쩍 대화에서 발을 뺐다.

“……제 얘기 아니에요.”

“누가 뭐래?”

에녹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 실실 쪼개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차라리 네 얘기인 거 누가 모르냐며 타박을 주지. 하여튼 얄미운 짓은 혼자 다 하는 작자였다.

얄미운 작자이긴 한데…….

“저기요.”

“왜.”

“……저랑, 어디 좀 갈래요?”

에녹과 함께라면 가 볼 수도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면 실패를 하더라도, 혼자 있을 때보다는 덜 상처 받을 것 같았다. 기회조차 오지 않아도 꿋꿋이 잘 사는 저 남자가 함께 불행의 구렁텅이에 있어 준다면.

……이 사실을 알면 본인은 분명 길길이 날뛸 테지만. 어쨌든.

“으음-.”

하지만 문제는 같이 가 줄 것 같지가 않다는 거였다.

세라는 자기가 한 말을 제 귀로 들은 후에야, 이 말이 에녹에게 얼마나 매력이 없는 것인지 깨달았다.

남들 다 놀러 나가는 휴가에도 귀찮다고 아무것도 안 하는 인간인데, 이런 밑도 끝도 없는 제안을 받아들일 리-.

“그래.”

“……예?”

“가. 어디든.”

“…….”

-없을 줄 알았는데, 에녹이 허무할 정도로 선뜻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게…… 되네?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세라는 뭐라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놀란 토끼처럼 구는 그녀를 두고, 에녹이 놀리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렇게 놀라. 빈말이었어?”

“아, 아니요…….”

“그럼 일어나. 가게.”

도리어 세라를 재촉한 그가 당장 떠나자며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젖은 몸을 어떻게 할 생각도 하지 않고 곧장 문을 향해 걸어갔다.

“이, 이렇게 바로……?!”

설마 이렇게까지 즉흥적으로 떠나게 될 줄 몰랐던 세라가 얼떨떨해하며 타월을 내려놓았다.

“지체할 이유라도 있어?”

에녹은 오히려 왜 지금 떠나면 안 될 이유를 물었다.

굳이 핑계를 대자면 아직 비가 많이 온다는 문제가 있지만…….

“…….”

거기까지 생각한 세라는 방금 창밖으로 본 길드원들이 왜 그렇게들 일찍 떠나고 싶어 안달을 했는지 이해했다. 가야 할 곳이 있고, 가기로 했으니 비가 좀 오는 것으로 발걸음을 잡아두기에는 마음이 벌써 저만치 앞서나갔다.

사람일 참 한 치 앞도 모르지.

설마 자신이 빗속을 뚫고 여행길에 오를 줄은 몰랐던 세라가, 허탈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하고.

***

현 대륙의 어느 길드든.

길드원이 장기간 자리를 비울 때는 반드시 관리자에게 행선지와 대략적인 일정을 신고해야 했다. 개인 정보가 각 길드에 파편화되어 있기 때문에, 혹여 돌아오지 않을 경우 그 사람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혹은 실종된 것인지 추적하기 위함이었다.

길드장이라고 해서 그 절차에서 자유로울 순 없었다.

따라서 두 사람이 떠나기 위해서는 남들과 똑같이 비제에게 서류를 제출해야 했고, 마침 비제와 할 이야기가 남아 있던 세라가 그의 몫까지 함께 신고해 주기로 했다.

두둑이 채워진 돈주머니만 챙겨 나온 세라는 더 이상 짐을 챙기지 않고 속전속결로 비제를 찾아갔다.

“정말 잘 생각하셨어요!”

비제는 하루도 지나지 않아 다시 만나게 된 세라를 두 팔 벌려 환영했다. 그녀가 스노우 대신 에스텔라 길드의 의뢰를 해결하러 떠나겠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에는 숫제 춤이라도 출 기세였다.

……비제가 이렇게까지 좋아하는 것으로 보아 의뢰 보상금이 제법 어마어마한 모양이다.

“중요한 일이니까 최우선으로 처리해 드릴게요!”

기쁘게 서류를 넘겨받은 비제가 제 책상으로 달려가 손을 바쁘게 움직였다.

그녀의 책상 위에는 아직 처리하지 못한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세라가 그 서류의 산을 질린 눈으로 헤아렸다.

“너는 휴가 안 가?”

“저까지 가면 길드는 누가 먹여 살려요? 자리 지켜야지.”

호기롭게 손을 내젓는 비제에게서는 휴가에 대한 아쉬움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왜 네가 길드장이 아니지…….”

세라는 진심으로 이쯤 되면 에녹이 시그너스 길드를 비제에게 이양해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자, 다 됐어요. 스노우 씨가 미리 짜 놓은 경로랑 숙소, 일정은 전부 거기에 있으니까 맞춰서 움직이기만 하면 돼요.”

금방 처리를 끝낸 비제가 방금 날짜 칸을 채워 넣은 예약 증서를 한아름 넘겨주며 와다다 설명을 쏟아 냈다. 세라는 당장 필요한 몇 가지 중요한 것만 뇌리에 새겨 넣은 뒤 사무실을 나섰다.

비제는 건물 밖까지만 배웅해 주겠다며 그녀를 따라나섰다.

“길 막지 말고 비켜 줄래? 내가 먼저 지나가고 있었거든.”

그렇게 기분 좋은 이별을 하는가 싶었지만, 문을 열고 나오기가 무섭게 시비가 걸렸다.

“……?”

세라는 제 옆에 세 명은 더 지나갈 수 있는 넓은 공간을 한 번, 자신을 못마땅한 눈으로 노려보는 여자를 한 번, 쳐다보고는 옆으로 반 발자국 정도 비켜 주었다.

“앞으로 주변 좀 잘 보고 다니렴.”

원하는 대로 해 줬는데도 여자는 여전히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아랫것을 보듯 세라를 내리깔아 본 여자가 그녀의 어깨를 부러 툭, 치며 지나갔다.

여자의 뒤로, 그녀와 함께 있던 무리들이 우르르 따라 움직였다. 한 명 한 명 세라를 지나칠 적에 불만이 많은 눈으로 노려보는 걸 잊지 않았다.

하나같이 손에 작은 짐이 들려 있는 것으로 보아, 그들도 어디 가까운 곳에 여행이라도 가는 모양이었다.

“재수 없어.”

그러다 마지막.

강하게 적의를 드러낸 여자가 들으라는 듯이 크게 혼잣말을 지껄였다.

“……허-.”

세라의 황당한 시선이 그들의 뒷모습에 끝까지 따라붙었다.

그녀는 방금 자신을 스쳐 지나간 여자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하나같이 예쁘고, 몸매도 좋고, 자기들끼리 똘똘 뭉쳐 다니는 저 무리는 바로 에녹의 애인들이었다.

원래도 세라를 마음에 들어 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예전에는 그걸 감추려는 노력이라도 보였는데 오늘은 웬일로 그런 노력조차 하지 않은 것이다.

“대체 쟤들은 나를 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야?”

빈정이 팍 상해 버린 세라가 불만스럽게 투덜거렸다.

정말 모르겠어서 한 말이었는데, 비제가 그 발언 자체를 놀라워하는 기색으로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언니가 대장이랑 잤기 때문이 아닐까요?”

“……으윽.”

비제. 너마저…….

방심하다 뼈를 맞은 세라가 질색을 했다.

오늘 하루, 그녀의 입을 닥치도록 만든 마법의 문장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저들에게만큼은 세라도 할 말이 있었다.

“나만 잤어? 지들도 자 놓고선. 방금 그 사람도 잤고, 그 옆 사람도 잤고, 그 옆옆 사람도 잤는데. 왜 나한테만 지랄들이냐고!”

열변을 토해 내는 세라의 어깨를 토닥여 주는 건 비제의 몫이었다.

워. 워. 흥분한 황소를 달래듯 그녀를 진정시킨 비제가 조용히 세라가 몸서리치는 의문에 대한 답을 돌려주었다.

“으음……. 애인은 여러 명이지만 노예는 언니 하나니까?”

“그게 중요해……?”

“중요……하죠? 특별 취급해 주는 거잖아요.”

“……?”

세라는 순간 언어 능력이 고장 난 사람처럼 정지했다가.

“……특별~? 언제부터 그 말이 ‘부려 먹다’와 동의어가 됐어?”

못 들을 말을 들은 사람처럼 코웃음을 쳤다.

쓸데없는 말을 들은 사람은 세라였는데, 정색한 사람은 도리어 비제였다.

“언니. 눈치 좀 챙겨요.”

그렇게 겪어 놓고도 대장을 몰라?

웃음기를 쏙 뺀 비제가 서슴없이 그녀를 꾸짖었다.

사람마다 눈치가 빠를 수도 있고 느릴 수도 있으니, 늦게 깨달을 수야 있겠지만. 이렇게까지 모른 척을 한다면 그 또한 범죄라면서.

“대장이 설마 진짜 부려 먹을 사람이 필요해서 생판 모르는 여자를 제 집 안에 들여놨겠어요? 그렇게 귀찮은 걸 싫어하는 사람이?”

“귀찮은 걸 싫어하니까 노예를 들인 거지.”

“에이, 그냥 같이 있고 싶으니까 핑계 대는 거잖아요.”

“……?”

“그거 모르는 사람 이 길드에 언니 혼자뿐일걸요.”

“……???”

사고의 근원이 다른 두 개의 의견이 충돌한다.

세라의 머리로는 만사가 귀찮은 사람이 부려 먹을 노예를 집 안에 들이는 게 어떻게 특별 취급이 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하여튼, 순진해 가지구…….”

조심히 다녀오세요. 언니.

악명 높은 흑마법사를 감히 귀엽다는 눈으로 바라본 비제가 건물 밖에 나오자마자 얄짤 없이 손을 흔들며 작별을 고했다.

“…….”

여전히 혼란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세라는 멀어지는 소녀의 등만 하염없이 지켜봤다.

“뭐 해?”

빨리 와.

그때,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에녹이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 작은 등을 툭, 건드렸다.

어느새 곁에 선 에녹은 두 사람이 들어가고도 남을 커다란 우산을 자연스럽게 세라 쪽으로 기울였다.

세라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우산을 따라 올라붙었다.

특별 취급…….

그 말을 입 안에서 굴려 보던 세라는 팔을 타고 오소소 올라오는 닭살에 몸서리쳤다.

이건……. 이건 아니야. 부르르 몸을 떤 세라가 괜히 이상한 말을 들어서 혼란만 가중됐다며 낮게 투덜거렸다.

“어우, 어서 가요. 마차가 준비되어 있대요.”

애써 요상해지는 기분을 털어 낸 세라가 마차가 준비되어 있을 장소를 향해 앞장서 걸었다.

그녀의 뒤를 따라 걸은 에녹이 여행의 기대감이 서린 어조로 물어 왔다.

“근데, 우리 어디 가?”

“……에스-.”

무심코 에스텔라라고 대답할 뻔한 세라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 순간 아주, 아주 멀어서 다른 사람들이 의뢰를 맡길 꺼려 했다는 말이 떠오른 것이다. 괜히 행선지를 밝혔다가 저 귀찮은 건 죽어도 안 하는 인간이 은근슬쩍 발을 빼 버리면 곤란했다.

“좋은 곳이요.”

혹은, 비제가 말한 그 ‘특별 취급’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유지하고 싶은 마음일지도 몰랐다.

“아-. 좋은 곳.”

다행히 에녹은 그 말을 믿는 눈치였다.

사실 세라도 남쪽 끝에 있는 길드라는 것만 알 뿐-비제가 에스텔라 길드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가 담긴 서류를 넘겨주었지만 읽지 않았다.-그곳이 정말 좋은 곳인지는 몰랐다.

하지만 딱히 거짓말을 했다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에스텔라.

입 안에 감기는 어감이 촉촉하고 반짝거렸다.

어쩐지 무척 아름답고 풍요로운 곳일 것 같은 인상이 물씬 풍겼다.

여행길이 늘 즐거울 것 같고, 편할 것 같고, 에녹과 싸울 일도 없을 것 같고…….

“내가 노예 덕분에 겨울 온천을 다 와 보네.”

그날 밤 도착한 길드에서 스노우가 예약해 두었다는 겨울 온천에 몸을 담갔을 때까지만 해도, 분명 예감이 좋았다.

하지만, 그로부터 정확히 이 주일 뒤.

“넌 나를 속였어.”

태양을 등지고 선 그의 뒤로 황량한 사막의 모래바람이 회오리치다 멀리 흩어졌다.

세라는 검게 염색한 머리칼을 어색한 눈으로 올려다보며 대꾸했다.

“우리 이러지 않기로 했잖아…….”

친구에게 하듯 편해진 어투는 더 이상 존댓말이 아니었다.

퍽 자연스러워진 하대에 에녹의 짙은 눈썹이 불만스럽게 까딱였다.

“당신은 날 속였어요.”

낮게 으르렁거린 에녹이 분하다는 듯이 말을 고쳤다.

깍듯한 존댓말과는 달리 세라를 바라보는 눈빛만큼은 불량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면서 마지못해 세라를 부르는 호칭을 입에 담았다.

“주인님.”

태양을 등진 그의 목에 감긴 새빨간 개 목걸이가 그녀를 원망하듯 번쩍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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