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에 나라를 팔았습니다-122화 (103/131)

#122

반란군이 궁을 향해 진군하고 있다.

세라를 호출한 국왕이 대뜸 그렇게 소리쳤다.

방에 틀어박혀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꼴로 숨만 쉬고 있던 세라는 짐짝처럼 질질 끌려가 그가 하는 말을 듣고만 있었다.

명색이 궁정 마법사인 세라가 국왕을 보고도 예를 올리지 않았으나, 이미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왕은 그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괘씸한 것들이 내 땅에서 살게 해 주었더니!”

목에 핏대를 세운 그는 감히 제게 반기를 든 반란군에게 욕설을 쏟아부었다.

씩씩대며 옥좌를 쿵, 쿵, 내려치는 모습이 불안정하기 짝이 없었다.

몇 년간 이상한 종교에 심취한 그는 예전의 푸근한 인상은 온데간데없고, 눈 밑이 퀭하고, 듬성듬성 흰머리가 자라 실제보다 더 나이 들어 보였다.

혼잣말을 중얼대던 왕이 제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세라를 향해 다가왔다.

“네가 가서 폭도들에게 누가 이 나라의 주인인지 가르쳐 주거라.”

“…….”

허공을 헤매던 눈동자가 스르륵, 왕을 향해 움직였다.

버석한 보랏빛은 길길이 날뛰던 국왕조차 순간 흠칫할 정도로 공허했다.

날이 갈수록 표정을 잃어 가는 세라는 영혼이 빠져나가고 남은 빈 껍데기처럼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인 그녀가 한참 늦게 국왕의 말을 이해한 듯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면 제 동생은요?”

“동생?”

국왕은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며 눈매를 찌푸렸다.

제 동생을 완전히 잊고 있는 듯한 태도에 텅 빈 눈동자가 음울하게 일렁였다.

“반란군들한테 납치당했다고 했잖아요. 괜히 손댔다가 그 애한테 해코지라도 하면…….”

언젠가 국왕이 해 주었던 이야기를 그대로 읊었다.

국왕이 보살피고 있던 에델은 무엄한 반란군의 손에 납치당했다. 워낙 음흉하고 치밀하게 계획된 작전인지라 국왕으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것이 세라가 전해 들은 비보였고, 허무하게 동생과 이별하게 된 이유였다.

그날부터 그녀의 모든 시간은 지옥이었다.

안 그래도 앞이 보이지 않는 아이. 행여라도 붙잡혀 간 곳에서 모진 고문이라도 당하고 있는 건 아닐지 걱정이 되어 먹지도, 자지도 못했다.

밤낮으로 까마귀와 뱀, 온갖 날짐승들을 풀어 추적해 보았지만 어디에도 아이의 흔적은 나타나지 않았다. 악랄한 반란군 놈들이 대체 제 동생을 어디에 숨겼는지 머리카락 한 올 구경할 수 없었다.

그렇게 반년이나 지났다.

아이를 보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세라는 시들었다.

고통스러운 실험도 견뎌 낼 정도로 생명력이 강하던 여자는 보살필 가족을 잃자마자 눈에 띄게 삶의 의욕을 잃어 갔다.

그래서 국왕을 노리는 반란군이 성문 앞까지 찾아왔을 때는 미치지 않은 게 용할 정도로 정신이 마모된 상태였다.

세라가 에델의 일로 휘청거릴 때마다, 국왕은 더욱 매섭게 그녀를 다그쳤다.

“이런 멍청한 년! 그러니까 더더욱 놈들을 죽여야지!”

그럴 시간이 밖에 나가 반란군 놈들을 하나라도 더 죽여 버리라고.

“내가 건재해야 저놈들이 네 동생도 건들지 못하는 걸 모르느냐!”

그들의 목숨을 빼앗아 동생을 구하라고.

“반란이 실패하면 저것들이 뭘 앞세워 목숨을 구걸하겠는지 생각해 봐라! 꼭꼭 숨겨 놓은 네 동생을 판돈으로 내걸겠지!”

더 이상 빼앗을 목숨이 없을 때까지 그들을 몰아붙이고 나면, 그다음에 에델을 되찾아 오면 된다.

국왕은 호언장담했다.

하지만 정말로 그럴까.

국왕은 예전에도 실험만 잘 끝나면 집에 돌려보내 주겠다고 했지만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국왕은 예전에도 자신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동생을 만나게 해 주겠다 했지만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국왕은 예전에도 에델을 잘 보호해 주겠다 장담했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국왕은 예전에도 납치된 에델을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으나 정말 그러한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여태 세라와 약속한 것 중 아무것도 지키지 않았다.

언제나 당연하다는 듯이 빼앗아 가기만 할 뿐이다.

불신이 싹튼 세라는 순순히 국왕의 말을 따르지 않고 말대답하는 횟수가 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동생을 잡아간 반란군들을 제 손으로 해쳐, 그들이 에델에게 손을 댈 명분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국왕과 나라의 안위보다는 제 동생의 무사함이 더 걱정이었다.

“벌써 반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못 찾은 거면 이미 왕국에는 없을 수도…….”

그녀가 냉큼 알겠다고 고개를 조아리지 않자 국왕이 쿵! 위협적으로 발을 굴렀다.

“눈도 안 보이는 병신이 가긴 어딜 가!”

눈도 안 보이는 병신.

그것이 제 동생을 칭하는 말이라는 걸 깨닫자 세라의 눈앞이 순간 시뻘겋게 물들었다.

그딴 식으로 말하지 마!!!

온 성에 그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르르릉! 마치 왕궁 안에만 거대한 천둥이 친 듯 천장이 무너질 기세로 흔들렸다.

“히익!”

세라의 마력을 면전에서 맞은 국왕이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한 번만 더 그따위로 말하면-.

그를 죽일 듯이 노려본 세라가 여전히 마력이 흐르는 목소리로 저주를 퍼부으려 할 때였다.

“케헥! 커헉, 쿨럭!”

회로를 타고 흐르던 마력이 인위적으로 역류했다.

가슴을 부여잡은 세라가 피 섞인 기침을 토해 냈다.

그녀의 마력이 흩어지자 무너질 듯 공명하던 궁전이 다시 고요를 되찾았다.

죽을 듯이 헐떡이는 세라의 뒤로, 인기척이 다가온 건 그다음이었다.

“저런, 세라-.”

또각, 또각 소리를 내며 가까워진 구둣소리가 그녀의 바로 뒤에서 멈춘다.

“전하께 ‘목소리’를 쓰면 안 되지.”

상냥한 척 어깨를 토닥인다.

그러다 몇 달 동안 제대로 먹지 않아 앙상해진 어깨를 부러뜨릴 기세로 꾸욱 움켜쥐었다.

“무서워하시잖니.”

세라의 귀에 입술을 바짝 댄 여자가 뱀처럼 속삭였다.

“…….”

소리 없이 고통을 삼킨 세라가 손톱이 살을 파고들 정도로 강하게 주먹을 쥐었다.

목소리만 들어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그 사람이었다.

어느 겨울. 세라에게 빵을 건넸던 여자.

그녀를 속여 왕에게 바치고,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삶을 선사한 여자.

세상에서 가장 증오스러운 년.

빠득, 세라가 여자를 갈아 먹을 기세로 이를 갈았다.

“다, 당장 가서 폭도들이나 처리해! 전부 죽여! 저 지긋지긋한 놈들의 씨를 말려 버리란 말이야!”

그사이 ‘목소리’로부터 풀려난 국왕이 다시 의기양양해져 윽박을 질러댔다.

병적일 정도로 발광을 하며 죽이라 소리치는 중년의 남자는 한 나라의 국왕이라기보다는 정신병자 같았다.

“…….”

세라는 이번엔 말대꾸를 하지 않고 일어섰다.

여전히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일은 꺼림칙하고 무서웠지만 입도 벙긋 못 했다.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자란 세라는, 자신의 공포가 누군가의 무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너무 이른 나이에 깨우쳤다.

터덜, 터덜. 걸음을 옮기는 세라를 여자가 안내해 주었다.

친히 반란군이 몰려올 길목에 그녀를 데려다준 여자가 석양빛이 새어 들어오는 성문을 가리키며 일렀다.

“저 성벽 너머에 네 동생을 앗아 간 놈들이 오고 있어.”

“…….”

세라는 눈 뜨고 죽은 시체처럼 여자의 말을 듣기만 했다.

여자가 말했다.

평소대로만 하면 돼.

죽어 버리라는 말 한마디면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올 거란다.

세라는 그 말이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평소대로 전부 죽여 버리라고?

언제부터 이런 게 내 일상이 되었지.

내 인생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바로잡고 싶었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법을 몰랐다.

누군가 알려 줬으면 좋겠다.

하지만 아무도 없겠지. 여태까지 늘 그래 왔듯이.

제게는 그런 걸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었지만, 제 동생에게는 있었으면 했다.

그것이 자신이 되고자 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 전에 동생을 빼앗겼다.

이건 대체 누구의 탓일까.

“저기, 적들이 왔구나.”

저놈들 때문에?

“자. 세라.”

성벽 너머의 병사들 때문에?

“가서, 죽여.”

유혹하듯 죽음을 속삭인 여자가 세라의 등을 떠밀었다.

또각, 또각. 그녀를 전쟁터에 홀로 남겨 둔 여자가 안전한 궁으로 몸을 숨겼다.

끼이익. 성문이 열린다.

새카맣게 죽은 눈이 자신의 적을 바라보았다.

산 채로 불타는 것처럼 괴로운 희망 속을 살아가는 여자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못하고 울고 있었다.

***

세 번째 경기가 시작되었다.

정면의 문이 열리자 그 너머에서 새카만 인영들이 스멀스멀 안쪽으로 걸어 나왔다.

인간의 모양을 본뜨고 마법으로 생명을 불어넣은 점토 인형이었다. 머리카락 한 올, 속눈썹까지도 섬세하게 재현한 점토 군대가 새하얀 공간을 흙발로 더럽히며 진군해 왔다.

“우승은 내 거야!”

그것들을 확인하자마자 참가자 중 하나가 제 노예와 함께 앞으로 튀어 나갔다.

그는 점토 인형들이 무기를 들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세 번째 경기의 목적이 저들을 모조리 제압하는 것이라 예상했다.

그리고 어차피 전부 같은 상황이라면 가장 먼저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 응당 우승에 가까우리라는 판단하에, 다른 이들보다 한발 먼저 목표물에 닿기 위해 달려 나간 것이다.

성문까지 길게 이어진 새하얀 길을 절반쯤 달려갔을 때만 해도, 남자와 그의 노예는 자신들의 우승을 확신했다.

갑자기 발밑이 푹, 꺼져 바닥에 잡아먹히기 전까지는.

“으, 으아아악?!”

남자가 성문까지 정확히 절반 정도 가까워지자 다시 흐물흐물해진 풍경이 남자를 집어삼키며 사라졌다.

탈락이었다.

“……자리를 이탈하면 안 되는 건가?”

유리 벽 너머로 그 광경을 훔쳐본 다른 참가자는 덕분에 몰랐던 규칙 하나를 알게 되었다.

신중하게 움직이는 게 제일이라는 생각으로 무기를 빼 든 그는 노예와 등을 맞댄 채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점토 군대를 유심히 노려보았다.

그러다 또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고는 눈을 빛냈다.

“공격을…… 안 하잖아?”

이제는 제법 거리가 가까워졌는데도 점토 병사들이 무기를 휘두르지 않았다.

이상하다. 분명 저것들과 싸워 이겨야 하는 상황인 줄 알았는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은 여자가 자신을 지나쳐 어디론가 가는 점토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여태 미처 발견하지 못한 존재를 발견하고는 눈을 빛냈다.

그녀가 지키고 있던 등 뒤의 공간에는 붉은색의 점토 인간이 앉아 있었다.

금빛으로 빛나는 화려한 의자인 것으로 보아 저건 아마도 왕좌일 것이다.

제 등 뒤에 왕이 앉아 있다고 생각하니 미궁에 빠졌던 이야기가 금세 완성이 되었다.

그렇군. 이건 저 붉은 점토 인간을 지켜야 하는 경기이다.

모든 계산을 끝낸 여자가 제 노예를 향해 명령했다.

“저것들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해!”

“네! 주인님!”

그러자 옆에서 훔쳐보고 있던 다른 참가자도 그것을 똑같이 따라 했다.

“우, 우리도 벤다!”

“알겠습니다!”

훔친 전략이지만 먼저 하면 제 것이라는 마음으로 빠르게 발도한 남자가 점토 인간을 베었다.

파사삭. 날카로운 검 끝에 닿은 흙 인형이 손쉽게 부서졌다.

허공에 흩날린 흙더미가 후두둑 떨어져 내리자, 그저 앞을 향해 걸어가던 점토 병사들이 제자리에 멈춰 섰다.

“…….”

그리고 제 동료를 벤 남자를 돌아본다.

소리 없이 돌아가는 수십 개의 머리에 남자의 등허리를 타고 쭈뼛, 소름이 끼쳤다.

“뭐, 뭐야!”

흠칫 놀란 그가 방어하듯 무기를 앞으로 내밀며 뒷걸음질 친 순간.

“왜 갑자기 달려드는……!”

눈을 새빨갛게 물들인 점토 병사들이 일제히 참가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으아아악!”

처음에는 잘 막아 내는 듯해 보였으나, 머릿수 앞에 장사 없다고.

점점 밀리기 시작한 참가자와 노예는 종국엔 파도처럼 밀려드는 점토 병사들을 당해 내지 못하고 완전히 파묻혀 버렸다.

그 사정은 같은 행동을 한 다른 참가자도 다르지 않았다.

마지막에 마지막까지도 맞서 싸우던 두 번째와 세 번째 참가자는 결국 점토 인형들에게 파묻혀 바닥 아래로 쑥, 잡아먹혔다.

둘 다 탈락이다.

“섣불리 베어서도 안 되는 모양이군.”

그리하여 남은 네 번째 참가자. 니르샨은 꽤 많은 정보를 손에 넣게 되었다.

“어떻게 할까요. 주인님?”

“일단 저놈들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

“건드려야 공격해 오는 것 같으니 전부 들어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여유롭게 말끝을 끈 니르샨이 주변에 있는 기둥 하나를 눈짓했다.

군대가 전부 들어오면 저것을 넘어뜨려 한 방에 없애 버리자는 뜻이었다.

“예!”

그의 의중을 읽어 낸 노예들이 우렁차게 대답한 뒤 흩어졌다.

둘은 좁은 입구를 막아서 점토 병사들이 더 이상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남은 둘은 기둥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언제든 니르샨이 원할 때 그것을 쓰러뜨릴 밑 작업을 했다.

니르샨이 이 모든 것을 관망하며 때가 오길 기다렸다.

점토 병사들이 끝도 없이 꾸역꾸역 밀려드는 통에, 입구를 막고 있던 노예들이 땀을 비 오듯 흘리고 있었지만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병사들의 행진에도 드디어 끝이 찾아왔다.

마지막으로 문을 통과한 병사를 끝으로, 더 이상 누구도 나타나지 않자 니르샨이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의 신호를 받은 노예들이 기둥을 밀어 넘어뜨렸다.

콰르르릉! 육중한 기둥 2개가 점토 병사들 쪽으로 쓰러졌다.

형체도 없이 부서진 점토의 흙먼지가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말끔하게 쓸려 나간 점토 병사들을 내려다본 그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머리를 쓰면 쉬울 것을.”

깔끔한 일 처리에 자신감을 얻은 니르샨은 별다른 이변이 없다면 자신이 우승하리라 확신했다.

손을 휘휘 저어 텁텁한 모래바람을 흐트러뜨린 그가 자신과 함께 마지막 남은 참가자 쪽을 바라보았다.

어디, 저쪽은 얼마나 훌륭한 결과물을 낼까 궁금해서였다.

“……?”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흥미진진하게 유리 벽 너머를 응시하던 황금빛 눈동자가 기묘하게 뒤틀렸다.

“……왜,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

유리 벽 너머의 여자.

세라는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점토 병사들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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