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계속 가만히 있을 건가?”
기다리다 못한 에스텔라가 한마디 했다.
떨떠름한 우려가 섞인 시선이 한 차례 세라를 훑었다.
여자는 경기가 시작된 이후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그저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허옇게 질려서는 서서히 가까워지는 점토 군단만을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부릅떠진 자수정 빛 눈동자가 혼란스럽게 흔들렸다.
저럴 만도 하지.
에스텔라는 어느 정도 그녀를 이해했다.
무기를 든 채 소리 없이 진군하는 점토 군대는 보고 또 보아도 여전히 꺼림칙한 기분이 들게 했다.
“이대로 있다간 병사들이 왕을 해칠 텐데.”
하지만 이해하는 건 이해하는 것이고, 경기는 경기이다.
에스텔라는 혹여나 세라가 등 뒤의 왕좌를 보지 못했을까 봐 친절히 왕의 존재를 일깨워 주었다.
아케이드가 개최된 이후로 백여 년, 마지막 경기에 참가한 참가자들은 저 등 뒤의 왕을 지키기 위해 싸워 왔다. 그건 어느 정도 정답에 근접한 행위였다. 적어도 결론적으로는.
성질 고약한 제자가 남긴 복잡한 마법식의 일부분을 해석해 보았을 때, 등 뒤의 왕이 끝까지 살아남아야 다음 단계가 진행되도록 안배되어 있었다.
여태 수많은 참가자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왕을 지켜 냈으나, 제대로 된 정답에 이른 자는 아무도 없었다. 에스텔라는 중요한 건 결과뿐만이 아니라 과정에 있다는 사실을 오래전에 깨달았다. 그걸 알고서도 여태 제자가 원하는 정답을 찾아내지 못한 게 그의 한이었다.
“……왕?”
에스텔라의 지적에 정면을 향해 고정되어 있던 여자의 시선이 마침내 뒤를 돌아보았다.
“…….”
그리고 제법 오랜 시간 소리 없이 돋아난 붉은색의 점토 인간을 바라보았다. 저 왕을 이렇게 유심히 관찰하는 사람은 또 처음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확실한 건 불안정하게 뒤흔들리던 여자의 눈동자가 차게 식어 간다는 사실이다.
그것만으로도 여자를 감싸는 분위기가 일변했다.
싸늘하게 가라앉은 낯과 비정한 시선은 언제 왕에게 달려들어 목을 졸라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매서웠다. 그러나 여자는 바라만 볼 뿐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병사들에게도. 왕에게도.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슬슬 답답해진 에스텔라가 힐끗, 유리 벽 너머를 살폈다.
그사이 참가자 셋이 탈락하여 사라졌다.
“당신 눈에도-.”
에스텔라의 인내심이 슬슬 한계에 다다르기 직전, 하염없이 뒤를 돌아보던 여자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저 사람들이 병사로 보여?”
여자가 그들을 향해 진군하는 점토 병사들을 가리켜 물었다.
뜬금없는 의문이었다.
“무기를 들고 진군하니까.”
에스텔라는 어렵게 생각지 않고 단순하게 대답했다.
다수의 인간이 무기를 들었다는 점에서, 충분한 폭력의 의지가 깃들었으므로 저들은 충분히 병사라고 불릴 수 있었다.
하지만 여자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다.
“저런 걸, 무기라고 할 수 있나?”
씁쓸한 미소를 띤 여자가 점토 인형들이 쥐고 있는 물건을 눈짓했다.
제대로 다시 보고 판단해 보라는 의미가 역력했으나 안타깝게도 그 또한 에스텔라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관찰력이 좋군.”
고개를 주억거린 에스텔라가 그녀를 칭찬했다.
여자의 지적대로, 점토 인형들이 손에 쥔 것은 낫과 곡괭이, 빗자루, 투박한 몽둥이가 전부였다. 여태 저들이 제대로 된 무기를 쥐고 있지 않다는 걸 알아보는 이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대부분은 소리 없이 진군하는 섬뜩한 분위기에 휩쓸려 공격을 하는 데 여념이 없었으니까.
여자도 분명 처음에는 이전의 참가자들과 딱히 다른 점을 보이지 않았으나, 지금은 달랐다.
“당신은 저들이 왜 이곳을 향한다고 생각해?”
평정을 되찾은 듯한 여자는 도리어 침착하게 에스텔라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글쎄.”
에스텔라가 처음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미건조한 시선이 전방의 점토 인형들에게로 향한다. 정규 훈련을 받지 않은 병사들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향하는 결말이 다를 것 같지는 않았다.
“왕의 목숨을 빼앗기 위해서겠지.”
“아니. 틀렸어.”
제법 뻔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여자는 생각이 다른 모양이었다.
일언지하에 에스텔라의 말을 부정하는 목소리는 단호하고 흔들림이 없었다. 꼭 자신만이 정답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신하는 것처럼.
기이할 정도로 차분한 태도에 위화감이 들었다.
“그럼-.”
“소름 끼칠 정도로 정확하네.”
그럼 뭐냐고 물어보려던 말은 곧 이어진 혼잣말에 묻혀 때를 놓쳤다.
눈매를 좁힌 여자가 새삼스럽다는 표정으로 주변을 휘둘러보았다.
노을 진 성을 한 바퀴 돈 여자는 다시 뒤를 돌아 붉은 점토로 만들어진 왕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대체 어떤 놈이지? 누가 살아남아서 이딴 엿 같은 걸…….”
그사이 점토 인형들이 손 뻗으면 닿을 거리까지 가까워졌다.
그들을 향해 무기를 겨눈 점토 인간들이 포위하듯 원을 좁혀 왔다.
머릿수의 차이로 인해 보기에는 퍽 위협적이지만, 에스텔라는 딱히 걱정되지 않았다.
그들은 참가자가 먼저 공격하지 않는 한 상대를 인식하지 않는다는 걸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에스텔라와 여자를 무시하고 왕의 내실까지 다가갈 것이다. 여태까지 모든 아케이드에서 그래 왔고, 예외는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당연히 그러리라 예상했다.
“……!”
여자를 한 걸음 앞둔 병사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이 멈춰 서기 전까지는.
“…….”
별안간 걸음을 멈춘 이들이 일제히 한 곳을 바라보았다.
모두의 시선이 모이는 곳에는 여자가 서 있었다.
“…….”
여자 또한 당황하지 않고 상대를 마주 봐 주었다.
에스텔라는 기이한 감정으로 침묵 속의 대치를 지켜보았다.
먼저 공격한 적이 없는데도, 점토 병사들이 여자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었다.
이런 적은 지난 120년의 아케이드 역사 속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 대치 상황에서, 먼저 움직인 건 점토 병사 쪽이었다.
가장 앞에 서 있던 인형 하나가 들고 있던 곡괭이를 들어 그녀를 향해 겨누었다.
와, 소리 없는 탄성을 내쉰 그녀가 입술을 달싹인다.
진짜 엿 같네.
허, 실소를 머금은 그녀가 뿌득 이를 갈았다.
한 번 끌려 나온 과거의 기억이 멈출 때를 잊은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똑같은 장소, 똑같은 상황, 하지만 지금과 전혀 다른 시간대에서.
세라는 저들이 문을 열고 나타난 순간, 일말의 자비도 없이 모조리 없애 버릴 작정이었다.
그녀가 누구인지, 어떻게 죽었는지 본 자나 들은 자가 있어도 그 사실을 바깥으로 옮길 수 없게.
하지만 정작 적들이 눈앞에 나타나자, 맹렬하게 끓어오르던 살기가 주춤대며 삐걱대기 시작했다.
그 망설임은 다가온 ‘폭도’들이 제 목에 무기를 드리웠을 때 깨달음이 되어 세라를 내려쳤다.
‘내게 거짓말을 했구나.’
교활한 왕이 또 제게 거짓말을 지껄였다는 걸.
국왕은 세라에게 자신의 자리를 빼앗으려는 무시무시한 폭도들이 무장한 군대를 앞세워 왕궁을 공격해 올 것이라 말했다. 염치라곤 모르는 탐욕스러운 버러지들이 감히 세라의 동생을 인질 삼아 어떻게 하면 왕좌를 차지할까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
하지만.
“…….”
씁쓸한 시선이 제게 무기를 겨눈 점토 인형의 손으로 향했다.
비쩍 골아 앙상한 팔뚝은 고작 곡괭이를 들어 올리는 것만도 힘에 겨운 것처럼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생기 하나 없이 바짝 시든 몸뚱어리는 해골이 걸어 다니는 것처럼 볼품없었다. 그 앙상한 몸 위에 누더기 같은 옷을 걸치고 있으니 묘지에서 갓 일어난 시체 같았다. 저런 팔로 휘두르는 무기에 맞아 봤자 크게 다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왕궁을 향해 진격해 오는 모든 이들이 그런 꼴을 하고 있었다.
국왕이 일삼았던 어떤 묘사도 그들과 맞는 게 없었다. 탐욕스럽고, 무시무시하기는커녕 한데 뭉쳐 무기를 들고 있음에도 두려워 떨고 있었다.
떨면서, 물었다.
‘마녀여. 우리를 죽일 텐가?’
그들은 세라를 마녀라 불렀다.
죽음을 예감한 눈동자에서는 낯익은 빛이 일렁거렸다.
평생 빼앗기는 것에 익숙한 자의 체념.
세라가 일생을 다 바쳐 지우려고 애썼던 지긋지긋한 약자의 그림자.
그 순간, 본능에 가까운 깨달음이 그녀의 심장을 꿰뚫었다.
‘너희가, 아니구나.’
저들은 에델을 빼앗지 않았다.
그들은 무시무시한 폭도도, 탐욕에 찌든 군대도 아니었다.
그저 잘 먹지도 못하고, 잘 입지도 못한 죽기 직전의 페이덴의 백성일 뿐이었다.
세라의 동생은, 그녀의 가족은, 저들에게 납치당한 게 아니다.
왕궁이 아무리 예전 같지 않더라도, 곡괭이 하나 겨우 드는 저런 이들이 정규 훈련을 받은 병사들을 뚫고 에델을 데려가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렇다면, 에델은 어디로 갔을까.
지난 반년간 아무리 찾아도 없던 내 동생은.
대체 어디에.
대체 누가.
저들도 아니라면, 이 나라에서 세라 몰래 에델에게 손을 댈 수 있는 인물은 단 한 명뿐이었다.
‘……당신은 약속을 지키는 법이 없구나.’
이미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가슴에 절망이 소낙비처럼 내렸다.
국왕이 에델을 빼돌렸다. 세라가 찾을 수 없는 곳으로. 그리고 아마도 앞으로도 영영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아이가 폭도들에게 납치당한 게 아니라는 희소식을 알게 됨과 동시에, 세라는 아이와의 영원한 이별을 직감했다.
‘마녀여.’
그녀가 굳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곡괭이를 든 노인이 그녀를 향해 한 번 더 물었다.
‘우리도 죽일 텐가?’
여태까지 그래 왔듯, 그녀의 사악한 마법으로 자신들을 죽이겠느냐고.
나라를 돌보지 않고, 사람들을 병들게 하는 국왕을 위해 싸우겠느냐고.
‘……국왕을, 위해서?’
세라는 그들이 하는 말을 낯선 표정으로 따라 읊었다.
무슨 소리야. 난 에델을 위해 살아왔는데.
자신이 국왕을 위해 살았다니 그거야말로 처음 듣는 개소리였다.
하지만 그 자리가 되어서야,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세라가 지키고 싶은 건 국왕의 알량한 왕좌가 아니라 앞이 보이지 않는 동생의 편안한 일상이었는데.
남은 건 에델이 아닌 왕좌뿐이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지키고 싶은 보물이 있었는데, 언제 잃어버렸는지조차 모르게 그것을 잃어버렸다.
병신같이.
‘…….’
완전한 상실을 깨달은 마녀가 손을 늘어뜨렸다.
언제든 ‘목소리’를 꺼내 쓰기 위해 끌어올렸던 마력이 공기 중에 흩어졌다.
그래서 세라는, 국왕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다.
“……길을 터 줘. 에스텔라.”
회상에서 깨어난 세라가 옆으로 비켜섰다.
그녀가 비켜선 자리만큼 인형들과 국왕 사이에 작은 통로가 만들어졌다.
덜컹, 그들의 뒤에 앉아 있던 왕이 왕좌가 흔들릴 정도로 펄쩍 뛰었다. 마치, 그런 결과를 원하지 않는다 항의하는 것처럼.
그 움직임을 읽어 낸 에스텔라가 비켜서는 대신 염려 섞인 어조로 충고했다.
“그럼 왕이 죽을 텐데.”
이 아케이드의 목적은 왕을 지키는 것이다.
혹시 이 여자는 그 간단한 규칙조차 눈치채지 못한 걸까?
의심 어린 시선이 세라를 훑는다.
“괜찮아.”
세라는 에스텔라 쪽으로는 쳐다도 보지 않은 채 대꾸했다.
그리고 한 번 더, 옆으로 비켜서라며 그를 재촉했다.
“…….”
에스텔라는 내키지 않는 낯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들이 완전히 비켜서자, 겨눴던 무기를 내린 점토 인형들이 멈췄던 행진을 재개했다.
터벅, 터벅, 흙발이 상앗빛 궁전을 더럽힌다.
폭도들과 마주한 왕이 어딘가를 손가락질 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다 거리가 더 좁혀지자 왕좌 뒤에 숨어 몸을 덜덜 떨어댔다.
“저들이 원하는 건 죽음이 아니라.”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세라가 자신을 스쳐 가는 폭도들을 변호하듯 담담히 덧붙였다.
“삶이거든.”
이번에도 역시나, 자신의 말이 정답이라는 확신이 서린 어조였다.
믿는 구석이 확실히 있는 태도에 에스텔라의 미간이 조금 풀렸지만, 여전히 납득이 되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았을 때, 무기를 들고 여기까지 쳐들어온 이들이 등 뒤의 왕에게 새삼스레 뭔가를 구걸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체 누구에게?
에스텔라의 의식이 새로운 의문에 가 닿았을 때.
와아아아-!
등 뒤에서 우레와 같은 함성이 들려왔다.
점토 인형들이 밀려든 이후, 조용해진 문 저편에서부터였다.
갑작스러운 이변에 에스텔라가 황급히 성문 쪽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대체 언제 나타난 것인지 모를 말을 탄 병사들이 물밀듯이 달려들어 오고 있었다.
비쩍 말라 농기구를 들고 있던 첫 병사들과는 달리, 이번에는 제대로 갑옷을 갖춰 입고 검과 창을 든 기사들이었다.
“……?!”
아케이드를 개최한 이후 처음 겪는 상황에 에스텔라가 처음으로 당혹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대체 저것들은 어디서 솟아난 거지? 여태 두 번째 부대가 등장한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두두두두-.
말발굽에 의해 약하게 땅이 울렸다.
들이닥친 진짜 군대는 삽시간에 정원을 장악하며 왕을 향해 진격했다.
어지럽게 기사들을 관찰하던 에스텔라의 시야에 낯이 익은 문양이 포착된 건 그때였다.
문양을 알아본 에스텔라의 두 눈에 이채가 서렸다.
“저 깃발은……?”
선봉에 선 기사. 그의 손에 들린 깃발은.
한때 화려한 영광을 누렸으나, 대륙의 폭군이라는 오명과 함께 스러진 소서 제국의 깃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