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에 나라를 팔았습니다-124화 (105/131)

#124

에스텔라는 결코 이곳에서 볼 수 있으리라 생각지 않은 과거의 유물에 거대한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정신이 멍해졌다. 입술이 절로 벌어지고, 등줄기를 따라 소름이 돋는다. 아직 그의 머리로는 미처 이해하지 못했지만 여태 어떻게 해도 맞춰지지 않은 퍼즐이 들어맞은 것 같은 예감이 일었다.

주최자인 그가 혼란스러워하는 만큼, 유리 벽 너머에 있는 또 하나의 참가자의 움직임도 분주해졌다.

“가, 갑자기 어디서 이런 놈들이……!”

갑자기 밀려드는 기마 부대에 경기가 끝난 줄로만 알고 있던 니르샨의 노예들이 크게 당황했다.

“……허어-.”

니르샨은 기도 안 찬다는 표정으로 쏟아져 나오는 기사들을 멀거니 바라보기만 했다.

말없이 전진하는 첫 번째 점토 부대도 섬뜩했지만, 제대로 된 무기와 갑옷을 갖춰 입은 채 말까지 타고서 밀려드는 정규 기사들의 모습에서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어마어마한 박력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고작 다섯이나 될 법한 니르샨과 노예의 수에 비해, 사방에서 달려 나오는 수십 명의 기마병들은 굳이 일일이 싸워 보지 않아도 결과가 어찌 될지 뻔했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니르샨 쪽은 세라 쪽보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노, 놈들이 공격해 옵니다!”

성문을 넘어온 기마병들이, 바닥에 널브러진 점토 인형들의 잔해를 발견하고는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기 때문이다.

“니르샨 님! 어떻게 할까요!”

니르샨을 중심으로 모여든 노예들이 그를 보호하듯 에워쌌다.

무한한 신뢰가 어린 시선들이 니르샨에게로 향한다. 그들의 주인은 어떠한 위기 상황에서도 침착하고 노련하게 상황을 해결해 왔다. 자신이 모시는 이에게 어떤 신묘한 지혜가 있다고 믿고 있는 노예들이 기적을 바라는 얼굴로 그의 명령을 기다렸다.

“이거, 상황이 묘하게 흘러가는군.”

하지만 안타깝게도, 니르샨이라고 해서 뾰족한 수가 있을 리 만무했다.

“후발대에 대한 정보는 들어 본 적이 없는데…….”

그를 특별하게 생각하는 노예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여태 그가 적재적소에 알맞은 해결책을 내놓을 수 있었던 이유는 사전에 수집한 정보들 덕분이었다. 수백 년에 걸쳐 쌓인 아케이드에 관한 정보를 모으기까지 돈과 시간이 많이 들었지만 어쨌든 해냈고, 그 원동력으로 니르샨은 마지막 경기까지 무난하게 진출할 수 있었다.

“우승은 어렵겠어.”

빠르게 현실을 받아들인 그는 깔끔하게 우승을 체념했다.

쯧쯧, 텄군.

아쉬운 낯으로 혀를 찬 니르샨이 유리 벽 너머로 보이는 가녀린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어째서 달라졌는지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저 여인으로 인해 뭔가가 바뀌었다는 점이었다.

‘대체, 정체가 뭐지?’

분명 처음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사막을 잘 모르는 순진한 아가씨인 줄 알았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범상치가 않아졌다.

우선 여자의 주변부터가 그랬다.

니르샨을 지옥에서 구해 준 남자. 그 남자의 원한을 산 노예. 길드장. 여자를 둘러싼 인물 중 누구 하나 평범한 이가 없었다.

보통 이런 경우에 그 본인도 뭐가 있을 확률이 높던데.

기민하게 여자를 살핀 니르샨이 입술을 핥았다.

“재밌는 여자였네.”

저 여자의 정체를 완전히 파헤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이전까지는 단순히 얼굴이 예뻐서 관심이 갔지만, 어쩐지 다른 종류의 관심이 돋아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니르샨 님! 위험합니다!”

그사이 기마 부대에 포위된 노예들이 니르샨을 보호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다급히 방어 자세를 취하는 노예들의 머리 위로, 점토로 만들어진 말을 탄 병사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달려들었다.

“으, 으아악!”

진흙으로 빚어진 말발굽에 얻어맞은 노예들이 장렬하게 비명을 내질렀다.

말들의 발 구름이 바닥에 부서져 흩어진 점토의 모래와 뒤엉켜 자욱한 연기를 만들어 냈다. 높게 일어난 먼지바람이 잠잠해졌을 때, 그곳에는 말과 기사, 그것에 습격당한 노예들 중 무엇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니르샨도 탈락했다.

그리하여 남겨진 참가자는 오로지 하나.

이 모든 사태를 이끌어 낸 군청색 머리의 여자뿐이었다.

“이게 대체-.”

에스텔라는 아케이드 경기장에 휘날리는 소서 제국의 깃발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익숙한 장소에 낯익은 문양이 더해지니 갑자기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졌다.

수십의 기사들이 그들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으나 위기감은 전혀 들지 않았다. 갑자기 혼자만 이 공간에서 유리된 것처럼 현실 감각이 현저히 떨어졌다.

에스텔라가 예상치 못했던 상황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맹렬한 기세로 달려오던 기마 부대는 여자의 앞에서 거짓말처럼 멈춰 섰다.

말에서 내린 기사가 그녀를 한 번 쳐다보고는 그대로 스쳐 지나 왕이 있는 어전 안으로 들어갔다.

앞장서는 그의 뒤로 기사들이 뒤따랐다.

기사들이 등장하자, 어전을 장악하고 있던 선객들이 양옆으로 갈라져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그 과정에서 누구도 허리춤에 찬 검을 뽑거나 위협하는 흉내조차 내지 않았다.

단 하나의 무력도 간섭하지 않은 평화로운 침략이었다.

에스텔라가 아는 한, 소서 제국이 무혈 입성한 적은 단 한 번뿐이었다.

“……페이덴 왕국은 마녀의 손에 의해 멸망했다고 들었는데.”

하지만 그가 알던 것과 그 과정이 전혀 달랐다.

까마득하게 오래전에 일어난 일일지라도, 그것만큼은 똑똑히 기억한다.

500년의 역사를 지닌 왕국이 단 한 사람에 의해 멸망한 일은 제법 충격적인 사건이었기에.

“당신이 아는 게 맞을걸.”

에스텔라의 혼란을 잠재워 준 사람은 세라였다.

냉소적으로 대답한 그녀는 한쪽 입매를 비틀어 웃었다. 비록 남들이 알고 있던 것과 진실이 다르다 하더라도, 페이덴은 세라 때문에 망한 게 맞았다.

그녀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덕분에 국왕의 왕좌가 부서졌으니까.

이 세상 모든 이들이 그녀를 손가락질하며 욕해도 상관없었다. 그건 병신 짓만 일삼던 세라의 인생에서 몇 안 되는 잘한 짓 중 하나였다.

“우리도 가자.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놓치겠어.”

마지막 기사를 따라 걸음을 옮긴 세라가 어전을 향해 몸을 돌렸다.

‘재미있는’이라는 대목을 강조한 그녀에게서는 비틀린 만족감이 묻어 나왔다. 이번에도 역시 무언가를 알고 있는 자의 여유가 느껴졌다.

정말 얼토당토않은 가설이지만, 에스텔라는 이 여자와 자신의 제자 사이에 어떤 강력한 연관성이 있다고 확신했다. 기마 부대의 등장을 조금도 놀라워하지 않는다는 점이 그 가설에 무게를 더해 주었다.

“어떻게 한 거지?”

에스텔라의 물음에 앞서가던 세라가 걸음을 우뚝, 멈췄다.

그녀는 완전히 뒤를 돌아보는 대신, 고개만 살짝 돌려 듣는 체했다.

“지난 120년간, 너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은 자들도 분명 있었어. 하지만 그때마다 모조리 실패했다. 그런데 너는 왜-.”

“글쎄.”

길게 이어지는 일리 있는 지적에도 세라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되레 여태 태연했으면서 이제 와 자기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가증스럽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내가 운이 좋았나 보지.”

어디에나 가져다 붙일 수 있는 성의 없는 설명을 마친 그녀가 뒤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에스텔라를 재촉했다.

“꾸물대지 말고 들어오기나 해. 네 제자가 뭘 남겼는지 알고 싶다며?”

“…….”

에스텔라는 말을 흐리지 말라 지적하고 싶었으나, 세라의 말마따나 이 뒤에 이어질 상황이 궁금했기에 군말 없이 그녀를 따랐다.

어전 안에는 그동안 밀려든 점토 인형들로 가득 차 흙냄새가 진동을 했다.

왕좌 뒤에서 벌벌 떨고 있던 왕은 기사들의 손에 질질 끌려 나와 무릎이 꿇려졌다.

왕이 앉아 있던 왕좌에는 소서 제국의 깃발이 자랑스럽게 내걸렸다.

고양이 앞의 쥐새끼처럼 머리를 조아리던 왕은 목숨을 구걸하는 이처럼 두 손을 싹싹 비벼 댔다. 볼품없이 옹송그린 몸이 들썩이던 중에, 언뜻 막 어전으로 들어서는 세라와 시선이 마주친 것도 같았다.

“……!”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왕이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왕의 돌발 행동은 그를 양옆에서 감시하고 있던 기사들의 손에 곧바로 제압당했다.

적군을 보고서도 머리를 조아리던 왕은 세라를 향해서는 고개를 빳빳이 든 채 미친 듯이 발버둥 쳤다.

파닥, 파닥. 어전에는 발버둥 치는 왕의 보잘것없는 기척 소리만이 울렸다.

목에 핏대를 세우며 버둥대는 왕은 무언가를 열심히 외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에스텔라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겠지만, 세라에게만큼은 지금쯤 그가 하고 있을 말이 머릿속에 생생히 울려 퍼졌다.

세라 로젠바움이 나라를 팔았다!

저 배은망덕한 년이 날 배신했어!

“아하하하! 저 허우적대는 꼴 좀 봐.”

세라는 배를 잡고 깔깔대며 웃었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높아질수록, 왕의 반항이 거세어졌다. 자신을 비웃는 여자의 행태에 분노라도 한 것처럼.

펄쩍펄쩍 튀어 오르는 힘이 점점 강해지자, 왕을 제지하는 기사의 수가 둘에서 넷으로 늘어났다.

광분한 왕이 얌전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기사들이 결국 무력을 사용했다.

퍽! 퍼석한 모래가 얻어맞는 소리가 들렸다.

목덜미를 제대로 때려 맞은 왕이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사지를 축 늘어뜨리며 기절했다.

그와 동시에 형태를 잃은 붉은 점토가 아래로 와르르 녹아내렸다.

바닥에 수북이 쌓인 모래가 꿈틀대며 하나로 뭉쳤다. 자기들끼리 뒹굴며 모양을 만들던 흙더미가 마침내 네모반듯한 상자 모양으로 고정되었을 때.

쿠구궁. 하늘과 땅이 크게 진동하며 그사이에 남아 있던 점토 인형들을 잘게 부수었다.

농기구를 든 비쩍 마른 인형들도, 갑옷을 입은 기사들도, 왕좌도, 상앗빛의 궁전도, 새빨갛게 물든 노을도. 신기루처럼 사라져 원래의 휑하고 어두운 경기장으로 돌아왔다.

마법이 사라진 자리에는 붉은 상자 하나만이 남아 있었다.

“쉽네.”

웃음을 뚝 그친 세라가 상자를 향해 성큼 다가갔다.

거리낌 없이 그것을 주워 든 그녀는 후-. 하고 입김을 불어 상자에 묻은 먼지를 털어 냈다.

그러면서 지나가는 투로 물었다.

“그래서, 제자 이름이 뭐라고?”

빨리도 물어본다.

에스텔라는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리드.”

“흐음.”

제자의 이름을 들은 여자가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난생처음 듣는다는 반응이었다.

이름을 곱씹던 여자가 상자 겉면을 요리조리 돌려 보며 유심히 관찰했다.

무언가 해로운 마법이라도 걸려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는 것 같았다.

그녀를 따라 상자를 흘끗, 쳐다본 에스텔라가 친절히 그녀의 걱정을 덜어 주었다.

“이상한 마법은 걸려 있지 않으니 안심해. 상자에 걸린 건 보존 마법뿐이다.”

“아이고, 잘나셨어.”

그게 고까웠는지 세라가 빈정 상한 눈으로 그를 흘겨보았다. 과장스럽게 빈정댄 그녀는 에스텔라와 상의도 없이 달칵, 상자를 열어 버렸다. 마주 보는 상태였기 때문에, 그렇게 하면 에스텔라의 위치에서는 내용물이 보이지 않았다.

“이봐. 열 거면 같이 봐야-.”

의뢰주를 아주 호구 취급하는 태도에 에스텔라가 불만스럽게 한마디 하려 했으나.

“……?”

무심결에 여자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말을 멈추었다.

“…….”

호기롭게 상자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한 여자에게는 표정이랄 게 없었다.

에스텔라는 인간을 이루는 감정이 얼마나 빠르게 표백될 수 있는지를 제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기마 부대가 몰려와도 놀라는 법이 없던 여자는 정작 그녀를 공격할 수 없는 상자 안쪽을 바라보았을 때에야 창백하게 핏기를 잃었다.

탁, 돌연 소스라치게 놀란 여자가 무언가에 쫓기듯 상자를 닫아 버렸다.

“……이봐. 괜찮아?”

대체 뭐가 들었길래?

반응이 이토록 수상하니 더더욱 제자가 남긴 내용물이 궁금해졌다.

몇 걸음만 옮기면 어렵지 않게 그것을 확인할 수 있었으나, 에스텔라는 다리가 굳어 버린 것처럼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만큼 여자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상자를 닫은 자세 그대로 굳어 버린 그녀는 눈을 뜬 채로 숨이 멎은 시체나 다름없어 보였다.

섣불리 건드렸다가는 방금 전의 점토 인형들처럼 파스스 부서져 흩어질 것 같았다.

“…….”

“……?”

누구 하나 먼저 나서서 움직이지 않으니, 두 사람은 꽤 한참 동안 침묵의 대치 상황을 이어 나갔다.

경기장의 문이 열리며 진행 위원들이 등장한 건 그즈음이었다.

“아케이드 우승을 축하드립니다!”

“너무 축하드려요!”

환호성과 함께 나타난 진행 위원들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축하의 말을 전했다.

짝짝짝. 살얼음판처럼 고요한 경기장에 어울리지 않는 박수갈채가 쏟아져 내렸다.

위태롭게.

***

에스텔라는 황금 궁전 한복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아케이드 우승자를 위해 열리는 대관식이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

황금으로 만든 월계관을 쓴 여자는 길드를 한 바퀴 도는 행렬에 올랐다. 우승의 영예는 오롯이 주인 혼자만의 몫이었으므로 노예 역할인 에스텔라는 그 길고 떠들썩한 자리에 끼지 않아도 되었다.

‘돌려줄게.’

행렬을 떠나기 전 아름답게 치장한 여자는 에스텔라의 품에 제자가 남긴 상자를 안겨 주었다.

짙은 화장이 창백하게 질린 낯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지만, 딱딱하게 굳은 표정만큼은 홀로 장례식이라도 치르는 것처럼 죽상이 따로 없었다.

‘이걸로 의뢰는 끝이야.’

여자는 세상에서 가장 우울한 얼굴로 행렬에 올랐다.

그렇게 헤어진 게 조금 전이었다.

오랫동안 공을 들이던 일이 드디어 결실을 맺었음에도, 영 기분이 찝찝했다.

드디어 제자의 유언을 알 수 있게 되었다며 후련해지기는커녕, 머릿속이 더 복잡하게 꼬여만 갔다.

복잡한 건 질색인데. 그건 너무 귀찮은데.

착잡한 한숨을 내쉰 에스텔라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품에 든 상자를 바라보았다.

“……안 열려.”

여자는 아무렇지 않게 열고 닫았던 상자가 그의 손에 들어오자 거짓말처럼 입을 딱 다물어 버린 것이다.

보존 마법만 걸려 있기는 개뿔.

이제 보니 온갖 복잡한 보안 마법이란 마법은 다 걸려 있었다.

“리드. 대체 무슨 생각이었던 거냐.”

에스텔라는 제게 자꾸만 어려운 상황만 남기는 제자의 이름을 원망스럽게 읊조렸다.

의뢰는 성공리에 마무리되었지만, 에스텔라는 아직까지도 자신의 제자가 왜 그런 공수가 많이 드는 귀찮은 마법까지 써 가며 이 상자를 남겼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자신의 제자가 누구를 위해 이것을 남겼는지와 스노우가 그 누군가를 정확히 골라 보냈다는 것만은 알겠다.

“돌아오면 이야기라도 해 봐야겠군.”

결국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또 기다리는 것뿐이라는 걸 깨달은 에스텔라가 퉁명스럽게 꿍얼거렸다.

돌아……오긴 하겠지?

얼굴만 봐서는 행렬 중에 콱 목이라도 매서 죽어 버릴 것 같긴 했는데…….

“그것도 기다려 보면 알겠지.”

혹사당한 머리는 더 이상 생각을 이어 나가는 것을 거부했다.

자꾸만 무거워지려는 의식의 흐름을 털어 낸 에스텔라가 별생각 없이 제 방문을 열어젖혔다가.

“……?”

열자마자 흘러나오는 우중충하고 시커먼 공기에 조용히 문을 닫았다.

잘못 들어왔나?

눈썹을 까딱인 에스텔라가 시선을 돌려 주변을 확인했다.

하지만 역시나, 잘못 찾아왔을 리 없었다.

헛걸 봤나.

고개를 갸웃거린 에스텔라가 다시 문을 열어젖혔다.

하지만 역시나, 잘못 봤을 리도 없었다.

“뭐가 이렇게 축축해?”

불쾌하게 눈매를 찡그린 에스텔라가 신경질적으로 제 방을 둘러보았다.

제 취향의 찬란한 황금과 보석, 강렬한 햇빛으로 언제나 번쩍번쩍하던 방이 빛 한 점 들지 않는 동굴처럼 습하고 우중충했다.

방을 가득 채운 우울한 공기를 역으로 추적하던 에스텔라는, 시커먼 이끼처럼 눌어붙어 있는 사내를 발견하고는 미간을 있는 대로 구겼다.

“에녹 소서. 여태 내 방에서 뭘 하고 있는 거지?”

방 주인의 곱지 않은 물음에, 테이블에 엎드려 있던 에녹이 음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세상의 먼지가 되기를 기다리는 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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