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에 나라를 팔았습니다-125화 (106/131)

#125

하등 쓸모없어 보이는 모습에 에스텔라가 그를 한심하게 바라봤다.

“그런다고 먼지가 되겠나. 불 속이라도 뛰어들지 그래.”

“……그래 봤자 안 죽어.”

농담이었는데, 진지하게 우울해하는 모습이 정말 시도는 해 본 사람 같았다.

그리고 아마 그게 맞을 것이다.

“…….”

그쯤에서 에스텔라는 에녹의 우울이 그럴듯하게 꾸며 낸 가짜가 아니라 진짜 우울이라는 걸 눈치챘다. 오랜 세월을 살아 낸 마법사는 마음이 병든 영웅을 보고서도 가엽게 여기기는커녕 성가시다는 감상이 전부였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뒷걸음질 쳐 나가 버리고 싶었지만, 마주친 김에 에녹에게 볼일이 생겨 버려 그럴 수가 없었다.

아, 진짜 귀찮다.

내키지 않는다는 기운을 풀풀 풍긴 에스텔라가 에녹의 맞은편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거기 앉지 마. 나가.”

뻔뻔한 에녹 소서는 혼자 있고 싶다며 감히 집주인을 밖으로 내쫓으려 했다.

에스텔라는 굴하지 않고 꿋꿋이 제 할 말을 이어 나갔다.

“네 노예 말이야.”

그의 입에서 세라가 언급되자, 시름시름 말라 가던 에녹이 움찔, 반응을 보였다.

“어떻게 만났지?”

“…….”

스르륵, 고개를 올린 에녹이 말없이 에스텔라를 올려다보았다.

깊은 바닷속처럼 축 쳐져 있던 눈빛에 조금이나마 안광 비스무리한 게 맺혔다.

“갑자기 그건 왜?”

대답을 피하고 이유부터 물어 오는 목소리에 미약한 경계심이 돋보였다.

궁전에서 먹여 주고 재워 준 사람에게 보이기에는 적절치 않은 태도다. 서로가 서로에게 질문을 한 가지씩 던진 상황. 누구라도 먼저 대답해야 대화가 풀린다는 걸 알고 있었으나 먼저 물은 사람은 에스텔라였다.

“만난 지 오래됐나?”

그는 에녹의 물음을 무시하고 자신의 용건을 강조함으로써 집주인의 권위를 바로 세웠다.

“…….”

드디어 일의 순서를 깨우친 걸까. 에녹이 질문에 질문으로 되갚지 않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제게 주도권이 왔음을 직감한 에스텔라가 은근슬쩍 가장 묻고 싶은 질문을 찔러 넣었다.

“아는 게 있으면 말 좀 해 봐. 예를 들면, 가족 관계나, 출신 같은 거.”

“그런 거 몰라…….”

다시 테이블에 고개를 얹은 에녹이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걘 기억을 잃었다는 설정이거든…….”

“……설정?”

일반적이지 않은 단어 선택에 에스텔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억을 잃었으면 잃은 거지. 그런 설정이라는 건 대체 무슨 조홧속이란 말인가.

이래서야 마치 저쪽에서 한 거짓말을 다 알고서도 속아 넘어가 준 모양새였다.

그가 풍문으로 들었던 에녹 소서는 자신을 기만하는 상대를 참아 줄 만큼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하여튼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그래서, 아무것도 모른다고?”

“어. 몰라.”

“그래도 꽤 가까운 사이 같더니……. 그 여자가 어디서 온 누구인지 궁금하지도 않았나?”

“안 궁금해…….”

설마설마하는 심정으로 좀 더 파고들어 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에녹 소서는 정말로 여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이해할 수가 없다. 여태 옆구리에 꼭 끼고 다녔으면서, 상대가 누군지도 제대로 알아보지 않다니 찝찝하지도 않나.

……안 물어본다고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여자도 보통내기는 아니지만.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내 노예인데.”

에스텔라가 떨떠름해하는 건 어떻게 알았는지, 테이블에 고개를 처박은 에녹이 설명을 덧붙였다.

곧이곧대로 해석하자면, 상대가 누구든 제 것으로 만들었을 거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게 참, 이렇게 들으면 로맨틱해 보이는 말이긴 한데…….

그렇다고 정말로 아무런 호기심을 내비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 이상 논란의 여지가 없었다.

“매정한 주인님이네.”

겉핥기식의 관계를 눈치챈 에스텔라가 쯧, 혀를 찼다.

하도 싸고돌기에 뭐라도 알고 있을 줄 알았더니, 에녹이나 자신이나 다를 게 없으리라는 예감이 딱 왔다. 어디서 온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백지나 다름없는 에녹이 그 여자와 제자 사이의 연관성을 유추해 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냥 본인한테 물어봐야겠군.”

얻을 게 없으면 이런 축축하고 음울한 남자 따위 상대하고 있을 이유가 없다.

당사자에게 물어보는 게 낫겠다는 판단을 내린 에스텔라가 미련 없이 상자를 챙겨 일어났을 때였다.

“…….”

테이블을 가로지른 손이 그의 옷깃을 붙잡았다.

힘이 어찌나 센지, 고작 그것 좀 붙잡혔다고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혼자 있고 싶다고 할 땐 언제고.

에스텔라는 성가셔 죽겠다는 듯이 한숨을 푹 내쉰 채 허공에 손을 휘둘렀다.

“뭐 하는 거지? 이거 놔.”

그의 의지를 담은 마력이 움직여 틀어쥔 손을 헐겁게 만들었다.

벌어진 틈으로 옷을 잡아 빼려는데, 무식한 에녹 소서가 콰직, 마력째로 옷깃을 움켜쥐었다.

“……관심 있어?”

육지에 올라온 미역처럼 늘어져 있던 남자가 어느새 또렷하게 에스텔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매서운 안광이 돌아온 그는 그제야 조금 사람처럼 보였다.

에스텔라는 먼지가 되어 사라지고 싶다던 사람이 갑자기 예민하게 구는 이유를 알아챘다.

“있지. 아주 많이.”

그리고 대놓고 그의 신경을 긁었다.

“뭐?”

“나도 슬슬 말동무가 필요했는데, 그 여자라면 좋은 말 상대가 되어 줄 것 같아.”

절반은 에녹 소서가 괘씸해서 한 말도 있었지만 아예 빈말은 아니었다.

붉은 상자를 품에 안은 그 순간부터, 에스텔라는 참으로 오랜만에 타인에게 관심이 생겼다.

마지막 경기에서 보여 준 그 광경은 대체 무엇이었는지.

그걸 어떻게 알고 있었는지.

리드와는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지.

상자 속에 든 물건을 보고 왜 그렇게 놀랐는지.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알아내다 보면, 또 다른 의문이 생길 것이다.

에스텔라는 여자와 자신 사이에 주고받을 이야기가 제법 길게 이어지리라는 예감을 느꼈다.

따져 보니 정말 좋은 상대가 될 것 같잖아.

할 수만 있다면 이대로 자신의 궁에 들어앉히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 잘됐군. 너는 그녀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어 보이니. 우린 제법 셈이 맞아.”

충동에 휩싸인 에스텔라의 뇌리에 순간 좋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 노예는 얼마지? 부르는 대로 값을 치러 줄 테니 내 궁에 두고 가는 건 어때?”

한 가지 목표에 매몰된 그가 눈을 번뜩이며 거래를 청했다.

방금 전의 대화로 미루어, 에녹 소서에게는 그 여자 자체에 대한 관심이 깊지 않아 보였기 때문에 막대한 황금을 안겨 주면 되지 않을까 하는 가벼운 계산이 성립한 것이다.

“…….”

하지만 그 기대도 에녹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꺾였다.

에스텔라의 말을 들은 에녹은 여태 방을 채운 음울한 공기 따위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시커멓고 무거운 살기가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안 되는 모양이네.

말보다 더 확실한 거절의 의사에 에스텔라가 아쉬운 낯으로 쩝, 입맛을 다셨다.

“……얼마 줄 건데?”

그러나 정작 에녹의 입에서 튀어나온 건 예상과는 전혀 다른 말이었다.

“정말? 나에게 팔 거야?”

몸과 입이 하는 말이 전혀 달라서, 에스텔라는 순간 자신이 잘못 들었나 의심했지만 곧 제대로 들었음을 깨닫고 반색했다.

넘치는 게 시간과 돈인 에스텔라에게 거래는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었다.

숨통을 터뜨려 버릴 듯이 죄여 오는 살기 속에서도 싱글벙글한 에스텔라가 노예치고는 제법 후한 가격을 제시했을 때였다.

“그럼 한 100골드 정도로-.”

“500골드.”

문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대화에 집중하느라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던 두 사람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향했다.

활짝 열린 문틀에 비스듬히 기대선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제가 그동안 시그너스에 벌어다 준 게 얼만데. 500은 받아야 수지에 맞죠.”

지금쯤 한창 퍼레이드를 즐기고 있어야 할, 세라였다.

당당히 거래에 끼어든 그녀는 자신을 팔아넘기려는 주인을 보고서도 담담한 표정이다.

오히려 이 김에 한몫 단단히 잡으라는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

“…….”

아이고.

예상치 못한 거래의 대상자이자 당사자의 등장에 두 사람 사이에는 싸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본래 노예라는 게 주인의 뜻에 의해서 이루어지기는 하지만, 이상하게 나쁜 짓을 하다가 걸린 것처럼 괜히 가슴 한쪽이 뜨끔거렸다.

흠, 흠. 목청을 가다듬은 에스텔라가 나락으로 가 버린 분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언제부터-.”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

그보다 한발 먼저, 에녹이 나섰다.

두 눈을 크게 홉뜬 그는 무서울 정도로 얼굴을 굳힌 채 제 노예를 채근했다.

“아까부터요. 에스텔라 님. 혹시, 제자의 무덤 같은 게, 있을까요?”

간단히 대꾸한 세라는 에녹이 뭐라 대답할 여백을 주지 않고 곧장 에스텔라에게 관심을 기울였다. 자신을 두고 이뤄지는 거래 따위 어떻게 결론 나든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어어? 무덤? 묘지가 있긴 한데…….”

노예 대장부 같은 태도에 압도당한 에스텔라가 순순히 그녀가 원하는 답을 내어줬다.

충분히 기분 나빠할 수 있는 일이었는데, 이런 것에 연연하지 않다니. 볼수록 마음에 드는 구석만 잔뜩이었다.

“어디예요?”

“……공동 납골당. 시가지의 사자상을 지나서 북쪽으로 가다 보면-.”

“그거면 충분해요.”

그사이 원하는 것을 모두 알아낸 세라가 문틀에 기댔던 몸을 일으켰다.

바로 납골당으로 갈 것처럼 몸을 돌리던 그녀는 뭔가 생각이 난 듯 다시 그를 돌아봤다가.

“감사합니다.”

에스텔라를 향해 꾸벅, 허리를 깊이 굽혀 인사했다.

여자에게는 처음으로 당해 보는, 공손하면서도 예의 있는 대우였다.

그러고는 이번에야말로 정말 휙, 가 버렸다.

어떤 충격에 휩싸인 마법사는 여자가 사라진 자리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쟤 방금 나한테 존댓말 하지 않았어?”

조금쯤은 감격스러운 어조로 에녹의 의견을 구했다.

존댓말뿐인가. 심지어 에스텔라‘님’이라고까지 했다.

“…….”

반면, 에녹은 아까부터 아무 말도 없었다.

에스텔라가 조금만 더 남의 눈치를 보는 사람이었다면, 한층 더 축축하고 무거워진 공기를 알아챌 수 있었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그렇게까지 섬세한 감성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이제 내 노예가 될 것 같으니까 대우해 주는 건가?”

대신 자신의 감성만큼은 누구보다도 열심히 챙겼다.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에스텔라는 가슴 저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감정에 완전히 몰입했다.

노예가 존댓말을 하는 건 당연한데 난 왜 이렇게 감격스럽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사소한 일이니 일단은 넘어가자. 마음껏 감격에 젖은 에스텔라가 두 뺨을 붉히며 설레발을 떨었다.

그의 발언을 들은 에녹의 이마에 불룩 핏줄이 솟았다.

“에스텔라.”

“불렀나?”

세상 음산하게 들리는 제 이름에 에스텔라가 그제야 에녹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번쩍, 어둠 속에서 빛나는 채도 높은 눈동자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눈치가 그따위로 없을 거면 눈알을 아예 파 버리는 게 어때?”

싸늘하게 일갈한 에녹이 한 몸처럼 들러붙어 있던 테이블을 박차고 일어섰다.

우당탕! 제 앞길을 막는 것들을 모조리 발로 걷어찬 그가 요란하게 에스텔라의 방을 나가 버렸다.

“……아니-.”

에스텔라는 갑자기 패악을 부리는 영웅의 뒷모습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다가.

아, 이제야 알겠다는 듯이 무릎을 탁 치며 중얼거렸다.

“나한테만 깍듯한 게 부러워서 저러나?”

***

길드가 터를 잡은 사막은 특히나 모래폭풍이 잦은 지역이었다.

재해라고 생각될 정도로 심하지는 않지만, 며칠만 지나면 눈에 익었던 모래 언덕들의 위치가 바뀌어 길을 잃기에 십상이었다.

언제든 말라죽을 위험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사자의 혼이 후손들을 삶으로 이끌어준다고 믿었다. 따라서, 사막의 후예들에게 물 다음으로 중요한 게 바로 죽은 자의 넋을 기리는 장례였다.

사자의 배려로 삶을 이어가는 후손들에게 꽃 한 송이 피워낼 수 없는 모래 사이에 조상의 몸을 묻는 건 죄악이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그들의 육신을 태워 재로 만든 후 영원히 썩지 않는 도기에 담아 사막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모셨다. 언제, 어디서라도 사막을 헤매는 후손을 그들이 이끌어줄 수 있도록.

그래서 에스텔라가 알려준 납골당을 찾는 건 간단했다.

그가 일러준 대로 사자상을 지나 북쪽으로 꺾자, 아무것도 없이 저 멀리 높은 지대에 말라죽은 숲 하나만 덩그러니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오래전에 말라붙어 시커멓게 변해버린 나무들의 속을 파낸 자리에 사자의 유골을 담은 형형색색의 도기들이 사이사이 콕콕 박혀 있었다. 가족끼리 나무 하나를 공유하는지 대부분의 나무에는 비슷한 무늬의 도기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다른 지역에서 찾아볼 수 없는 형태의 묘지는 세라에게 낯선 것이었지만, 죽음을 따라 모여드는 서늘한 기운은 매한가지였다.

세라는 앙상한 죽은 나무숲에서 에스텔라의 제자가 있는 곳을 단번에 찾아냈다.

온통 새카만 나무들 사이에서도, 가장 굵고, 가장 높이 자랐으며.

……황금으로 칠해져 있었으니까.

“취향 참, 한결같네.”

이 정도면 병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황금에 집착하는 모습이 참 질리다가도.

저 속에 묻힌 자를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눈에 보여서 싫지 않았다.

세라는 착잡한 눈으로 나무의 한가운데 박혀 있는 화려한 도기 상자를 바라보았다. 색색의 보석이 박혀 눈이 아플 정도로 화려한 도기 표면을 눈으로 훑다가.

“…….”

주머니를 뒤져 상자에서 슬쩍해온 물건을 꺼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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