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나……? 에녹이 아니라?
예상치 못한 진실이 세라를 황당케 했다.
어딜 가든 눈에 띄는 에녹이라면 모를까. 대체 자신이 뭘 잘못했다고 처음 보는 사람에게 노려지기까지 해야 하는 걸까.
“……혹시 면역자한테 감정 있어?”
이유를 유추하던 세라가 가장 그럴싸한 가설을 내세웠다.
“개인적은 감정은 없다니까?”
유르아는 기껏 쥐어짜 준 명분을 제 발로 걷어찼다.
딱딱, 그녀가 허공에 손가락을 두 번 튕기자 스멀스멀 걸어 나온 암살자들이 세라를 빙 둘러쌌다. 흉흉한 기세를 내뿜는 사내들과 홀로 대치하고 있는 세라는 무력하고 나약해 보였다.
굳이 상상력을 발휘하지 않더라도 알 것 같은 뻔한 결과에, 유르아가 만족스럽게 입술을 찢어 웃었다.
“그냥 받아들여. ‘그 사람’ 눈에 띈 네 재수가 없는 거니까.”
기분이 좋아지면 주둥이가 가벼워지기 마련이었다.
바라던 결과를 눈앞에 둔 유르아가 은근슬쩍 세라를 해치러 온 이유를 흘렸다. 개인적인 감정은 없다고 하더니, 그녀도 세라처럼 누군가에게 의뢰를 받아 행동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사람이 누군데. 라고 물어봤자 대답해 줄 것 같은 분위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즈음 세라에게는 누가 자신을 노리는지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생겼으니까.
“으음…….”
유르아를 바라보던 세라의 시선이 자신을 둘러싼 암살자들을 주욱 훑어보았다.
한 명 한 명 짚고 넘어가는 눈동자가 무언가를 일일이 확인하듯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으음?”
마지막 한 명까지 꼼꼼히 살펴본 그녀가 뭔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눈썹을 까딱였다.
이게 왜 이러지. 혼잣말을 중얼대며 눈을 열심히 비볐다 다시 보고, 비볐다 다시 보기를 반복해 보지만 결과가 바뀌지 않는지 구겨진 미간이 펴지는 일은 없었다.
“여기서 죽으면 가족 상봉이 더 빨라지겠네.”
세라가 삐걱대는 사이 부하들을 준비시킨 유르아가 전혀 장점으로 들리지 않는 일을 장점인 양 궤변을 늘어놓았다.
“너도 가족과 만나고, 나도 가족과 만나고. 우린 서로 좋은 거래를 한 거야.”
일방적으로 빼앗으러 온 주제에, 뻔뻔하게도 지금의 이 상황이 상호 간의 동의하에 협의된 양 그녀를 세뇌시키려 했다.
딱히 상대해 주고 싶지는 않지만 굳이 트집을 잡자면, 세라는 이미 한 번 죽었는데도 에델을 만나지 못했다. 착한 제 동생은 천국으로 갔을 테지만, 자신은 지은 죄가 많아 지옥에 떨어졌으니 말이다.
“잘가요. 가여운 아가씨.”
유르아의 편의에 맞춰 흘러가던 대화는 그녀의 작별 인사와 함께 끝이 났다.
무언의 신호를 보낸 유르아가 뒤로 물러나자, 그녀의 자리를 온전히 암살자들이 채웠다.
약한 짐승을 사냥하는 데 희열을 느끼는 사냥꾼처럼 암살자들이 세라를 향해 비열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약해 보이는 먹잇감에게 한 번에 달려드는 수고로움은 덜려는지, 조여 오는 걸음이 지루할 정도로 느렸다.
여유롭게 사냥하는 그들의 얼굴에는 설마 반전이 일어나리라는 의심 따윈 추호도 없었다.
전쟁터에서 쉽사리 승리를 확신하는 그 모습에, 세라가 쯧쯧 혀를 찼다.
너네 진짜 무서운 사람을 안 만나 봤구나.
도리어 상대를 가엽게 바라봐 준 세라는 침착하게 마력 회로를 점검했다.
최근 들어 에녹과 접촉하지 못해 상태가 최상은 아니지만, 그래도 ‘목소리’를 사용하는 데 무리는 없어 보였다.
회로의 상태를 확인한 세라가 잠들어 있는 마력을 깨웠다.
얼어붙은 마력이 녹으면서 회로 속을 빠르게 유영하기 시작한다.
작은 시냇물처럼 흐르던 마력이 강줄기로, 강에서 헤엄치던 마력이 대양의 파도가 되어 휘몰아쳤다.
우우우웅-!
세라가 깨운 불길한 마력이 닿자 손안의 보석이 크게 울었다.
그게 꼭 에델이 자신을 부르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하면, 너무 감성적인 상상인가.
“응. 괜찮아. 누나 이제 손 씻었어.”
엄지로 잘게 진동하는 단단한 표면을 쓸어 준 세라가 다정히 속삭였다.
그러자 정말 신기하게도 부서질 듯 진동하던 보석이 조금 잠잠해졌다.
그 공교로운 타이밍은 의미를 부여하기에 너무나 적절했다.
이러니까 정말 에델이 보고 있는 것 같잖아.
죽은 사람의 영혼은 지상에 머무르지 않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세라는 그만 자신이 만들어 낸 상상에 스스로 속아 버리고 말았다.
“어쩔 수 없네. 살려 줘야지.”
그래서, 쉽게 방심하는 놈들에게 인생의 쓴맛을 보여 주려던 계획을 아주 조금 바꾸었다.
그녀는 본래 후환을 남기는 편은 아니었으나, 에델의 묘비 앞에서 험한 꼴을 보일 수는 없겠다는 기특한 생각이 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놈들을 여기서 죽이면 동생과 함께 이 납골당에 묻힐 게 아닌가?
저런 치사하고 비열한 놈들과 에델이 한 공간에 있어야 한다니. 생각만 해도 기분이 나빴다.
“그래. 살려 주자.”
갑자기 선한 충동에 휩싸인 세라가 재차 결심했다.
마음을 먹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죽이지도 않을 거면, 저 많은 인원들을 어떻게 제압하지? 세라는 새로운 고민에 빠져들었다.
“뭘 그렇게 중얼대지? 기도라도 하시나?”
죽음을 목전에 두고 혼자 중얼대는 모습에, 그녀를 음흉한 눈으로 훑어보던 암살자 하나가 희롱하듯 느물거렸다. 그와 함께 주변에 있던 암살자들이 하이에나처럼 기괴한 웃음을 흘렸다.
번들거리는 눈동자들이 세라를 향해 집중되었다.
도망치는 것도 포기한 채 그들을 기다리는 아름다운 여인은 암살자들로 하여금 폭력적인 충동과 파괴욕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 와중에도 여자의 기도는 계속되고 있었다.
“안됐군. 그래 봤자 바뀌는 게 아무것도 없을 테니.”
“괴롭히지 않고 편하게 보내 주지!”
히히! 광기 어린 웃음을 지은 암살자가 세라의 지척까지 다가와 빠르게 달려들었다.
“어이! 새치기하지 마!”
“저 목을 비트는 건 내 몫이라고!”
하나가 움직이자 주변에 있던 다른 암살자까지도 경쟁하듯 세라를 향해 튀어 나갔을 때였다.
“아……!”
짝, 손뼉을 친 세라가 비로소 좋은 생각이 난 것처럼 탄성을 내뱉었다.
마침내 가장 적절한 방법을 찾아낸 암살자의 칼날이 제게 닿기 직전에 입술을 달싹였다.
자라.
짤막한 명령이 마력을 타고 메마른 숲에 퍼져 나갔다.
불길한 마력을 실은 바람이 암살자들을 훑고 지나간다. 그들의 귓구멍으로 스며든 숨이 자신의 주인이 원하는 바를 속삭였다.
그 소리가 귀를 통해 그들의 뇌리까지 번진 순간.
“……!”
공중을 날아가던 암살자들의 신형이 가을의 낙엽처럼 우수수 땅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고통스러운 비명이나,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는 호들갑도 없었다.
그저, 쓰러진다.
쿠궁, 쿵, 쿵! 세라와 가까운 위치에 선 자들부터 가장 멀리 서 있는 사람까지. 풀썩, 풀썩, 무릎을 꺾으며 무력하게 추락했다.
쿵! 그리하여 마지막 맨 뒤에서 여유롭게 부하들을 지켜보던 유르아까지 쓰러지자, 죽은 나무숲에 깨어 움직이는 사람은 또다시 세라 하나만 남게 되었다.
고작 몇 초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쿨럭! 쿨럭!”
마법이 완성되었음을 확인한 세라가 격하게 기침을 토해 냈다.
이렇게 많은 인원에게 강력한 암시를 건 적은 지상에 올라오고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엄청난 마력이 흘러나간 자리가 불에 타는 것처럼 아파 왔다.
이러다 늑골이 부러지겠다 싶을 정도로 기침을 해대던 세라가 종국에는 퉤, 하고 핏물을 한 움큼 뱉어 냈다.
“어우, 죽는 줄 알았네.”
세라가 겨우 기침을 멈춘 건 그로부터 한참만이었다.
입술을 훔쳐 피를 닦아 낸 그녀는 잠든 암살자들을 지르밟으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살아 있는 사람을 바닥인 양 밟고 지나가는데도, 누구 하나 반응하는 이가 없었다.
“이상하단 말이야.”
그러다 곧 목적지에 도착하여 제자리에 쭈그려 앉았다.
“분명, 에스텔라에는 운명이 비틀린 사람이 없었던 것 같은데-.”
그녀의 발아래에는 부하들과 함께 세상 모르고 잠든 유르아가 쓰러져 있었다.
“갑자기 이것들이 다 어디서 튀어나왔지?”
고개를 갸웃거린 세라가 손끝으로 툭, 유르아 어깨에 들러붙어 있는 것을 건드렸다.
불시에 찔린 검은 덩어리가 몸을 안쪽으로 움츠리며 길게 울었다.
뀨우우우…….
소심하게 눈을 꼼빡거린 덩어리가 봐달라는 듯이 그녀를 그렁그렁하게 올려다봤다.
분명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았는데, 이곳, 죽은 나무숲에서 재회했을 때 보란 듯이 어깨에 달고 있어 조금 놀란 참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유르아의 검은 덩어리는 여태껏 본 것 중에 가장 작았다.
기껏 해 봐야 손가락 하나 정도?
“그나마 이게 제일 큰 건데-.”
콕, 한 번 더 검은 덩어리를 찌른 세라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바닥에 널브러진 수십 명의 시체, 아니, 남자들의 어깨 위에는 이것보다 더 작은, 그러나 확실한 검은 덩어리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흐음…….”
그것들과 한 번씩 더 눈을 맞춰 본 세라가 근심 어린 침음을 삼켰다.
아까부터 계속해서 노려보고는 있는데, 이상하게 별의 조각이 갈라지지 않았다.
“어떻게 없애라는 거야. 그럼.”
불만스럽게 꿍얼댄 세라가 골치 아픈 표정으로 이마를 긁적거렸다.
지금까지는 운명이 비틀린 자의 어깨에 매달려 있는 검은 덩어리와 눈을 맞추면 상대의 운명을 볼 수 있었다.
원래 나아갔어야 하는 길과 비틀어져 버린 길.
별의 조각이 비추는 상대의 운명은 세라에게 있어 해결의 실마리를 전해 주는 아주 중요한 길잡이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무슨 일인지 아무리 눈을 맞춰도 별의 조각이 묵묵부답이었다.
마치 자신이 비출 건 아무것도 없다는 듯이 말이다.
“고장 났나?”
별의 조각이 단서를 주지 않으니 저들의 몸에 들러붙어 있는 검은 덩어리를 떼어 낼 방법도 요원했다.
이제 와서 복잡해지는 건 원치 않는데…….
피곤하다는 듯이 머리를 쓸어 넘긴 세라가 우선 자리에서 일어섰다.
뀨우우……. 뀨. 뀨우웃.
그러자 사방에 깔려 있던 검은 덩어리들이 일제히 울음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이것들이 갑자기 왜 이래?
영문을 모르는 세라가 주춤대고 있자니 잠잠해졌던 손안의 보석이 크게 진동했다.
뜨거워진다.
“……?”
갑작스러운 이변에 세라가 다급히 보석을 들여다봤다.
보석 안에 갇혀 있던 에델의 마력이 무언가에 공명하듯 크게 일렁거렸다.
우웅! 우웅! 우우우웅! 안쪽에 든 검은 연기가 맹렬하게 휘몰아치자 보석이 살아 있는 생물처럼 이리저리 몸을 들썩거렸다.
툭, 툭, 손바닥 위에 움직이는 힘이 조금씩 강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즈음.
반질반질한 표면에 쩍, 하고 크게 금이 갔다.
“……아?!”
그에 세라가 저도 모르게 소리를 높였다.
겨우 손에 넣은 가족의 물건에 손상이 가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당황하여 동생의 유골함과 보석을 번갈아 쳐다보던 세라가 어떻게든 그것을 붙여 보려 허둥지둥 만져도 봤지만 그렇다고 한 번 가 버린 금이 사라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쩌저적! 쩌적!
세라의 애타는 마음 따위 무시한 균열이 순조롭게 온 표면으로 뻗어 나갔다.
그리하여 굵직한 균열이 끝에서 끝점까지 도달했을 때.
완전히 두동강이 난 보석이 양옆으로 쩍, 하고 벌어졌다.
“아, 안 돼!”
보석 안쪽에 드글대던 마력이 동그란 구체처럼 모여들었다가 곧 울룩불룩 불규칙하게 늘어나며 조금씩 형태를 갖추었다.
불안정하게 들썩이던 마력은 가늘고, 길게, 하지만 양감을 유지하며 늘어나 지렁이치고는 좀 크지만, 그렇다고 뱀이라고 하기엔 작은 크기에서 멈추었다. 마력이 안정되고, 형태가 고정되자 세라의 손바닥에 길게 얹어져 있던 덩어리가 꿈틀, 움직였다.
기분 탓이 아니라면 지금 제 손 위에 올려진 이게, 숨을 쉬고 있는 것 같았다.
“……대체 뭘, 남긴 거야. 에델?”
규칙적으로 들썩이는 검은 물체에 세라는 절로 동생을 찾게 되었다.
그러다 뿅. 시커멓기만 한 몸체에 동그랗고 반질반질한 두 개의 점이 생겼다.
보석과 닮은 투명하고 반짝이는 그 점은 눈동자였다.
뱀……?
그것과 시선이 마주친 세라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녀의 말에 생명을 얻은 것처럼, 축 늘어져 있던 검은 물체가 꿈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대가리를 높이 치켜든 검은 뱀이 말간 눈으로 세라를 빤히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옆으로 갸웃, 기울이며 울었다.
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