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귀여운데?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소리라는 생각이 들기 전에 외형에 대한 감상이 먼저였다.
뱀은 뭘 먹고 살더라. 키워야겠다는 결심이 서기도 전에 앞서나간 이성이 새끼 뱀은 뭘 먹고 사는지부터 고민했다.
쓸데없이 맑은 눈이 얌전히 세라를 주시했다. 갓 눈을 떴으니 주변에 뭐가 있는지, 자신이 어떤 상황인지 궁금해할 만도 한데. 보석을 가르고 태어난 어린 뱀은 오로지 세라에게만 시선을 고정한 채 두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냈다.
그게 꼭 갓 태어난 새끼가 제 어미를 인식하는 것만큼이나 맹목적이었다.
뀨우우우…….
그때 유르아의 어깨에 달려 있던 검은 덩어리가 뱀을 향해 길게 울었다. 비단 뱀에게 알은 체를 해 대는 덩어리는 그 하나만이 아니었다. 바닥에 쓰러진 수십 명의 암살자. 그들의 어깨에 매달려 있는 모든 덩어리들이 뱀을 향해 뀨뀨 거리며 한마디씩 덧붙였다.
“……뭐가 어떻게 되는 거야?”
꼭 구면인 양 열렬한 반응들에 세라가 저도 모르게 뱀도 덩어리들을 볼 수 있도록 자세를 옆으로 틀었다.
뀨?
그에 의아한 표정을 짓던 뱀이 그제야 검은 덩어리에게 관심을 보였다. 똬리를 튼 몸을 움직여 아래를 굽어보던 검은 뱀은 또 한동안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뀨.
세라의 몸을 타고 내려가 순식간에 바닥에 내려앉았다.
스르륵, 미끄러지듯 사막의 모래 위를 유영한 뱀이 자신을 부른 검은 덩어리 앞에서 멈춰 섰다. 유르아의 검은 덩어리는 다른 모든 덩어리를 대표하듯 앞으로 몸을 빼 뱀을 맞이했다.
초롱초롱. 예쁘게도 빛나는 두 쌍의 눈동자가 서로를 바라본다.
뀨우우우?
뀨?
뀨우?
뀨.
알 수 없는 대화를 주고받으며 서로 고개를 갸웃거린다.
제법 중요한 말이 오가고 있는지 그들을 지켜보는 다른 덩어리들도 뱀을 향해 한마디씩 보탰다.
작고 무해해 보이는 것들이 마주 보고 있으니 상황과 상관없이 눈이 편안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던 찰나.
“……?!”
순진무구하게 검은 덩어리를 바라보던 뱀이 입을 쩍 벌려 그것을 한입에 잡아먹었다.
와드득. 와드득. 단단한 무언가가 잘게 부서지는 소리가 들린다.
“…….”
소란스럽던 검은 덩어리들이 한순간에 입을 다물었다.
싸늘하다. 덩어리들의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꽂힌다.
와그작. 와그작. 검은 뱀이 유르아의 검은 덩어리를 꼭꼭 씹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맑은 두 눈으로 자신을 주목하고 있는 나머지 덩어리들을 눈으로 세다가.
꼴깍.
삼킨다.
뀨.
만족스러운 식사를 끝낸 뱀이 새카만 혀를 날름거린다.
뀨?
그리고 방금 전 자신이 잡아먹은 덩어리에게 했던 것처럼 고개를 갸웃거린다.
살얼음판 같던 침묵이 쨍그랑 깨어진 건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뀨우우웃! 뀨우웃!
뀨! 뀨우우!
덩어리들의 비명이 높이 치솟았다, 눈물이 그렁그렁하여 소리치는 덩어리들은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은 것처럼 몸을 들썩였지만, 암살자들의 어깨에서 떨어질 수가 없는지 꼼짝도 하지 못했다.
뀨.
무서워 벌벌 떨어대는 몸짓이 가엽지도 않은지, 태연하게 거리를 좁힌 뱀이 가까이 있는 덩어리부터 자비 없이 꿀떡꿀떡 잡아먹기 시작했다. 콰드득. 콰득. 귀여워 보이는 외양과는 다르게 뱀은 무자비하게 오열하는 덩어리들을 야무지게도 씹는다.
“아니, 왜. 아니…….”
다소 충격적인 전개에 세라가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잡아먹히는 덩어리들만큼이나 혼란스럽게 흔들리는 동공이 당연하다는 듯이 배를 채우고 있는 검은 뱀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저걸 왜 먹지? 어떻게 먹지?
아니, 그 전에 저거 먹어도 되는 거야……?!
“야! 아무거나 주워 먹으면 안-.”
덜컥, 편파적인 걱정이 든 세라가 뒤늦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쿨럭! 켁! 콜록!”
하지만 입을 열기가 무섭게 안쪽에서 한 번 더 울컥, 핏물이 올라와 제대로 말리지도 못했다.
“잠, 쿨럭! 잠깐만, 멈춰 봐. 그만 먹어!”
아까보다는 짧게 끝났지만 그래도 제법 길게 피가 섞인 기침을 토해 내던 세라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끄억.
그사이 검은 덩어리를 모조리 먹어 치운 뱀이 우렁차게 트림을 하고는 세라의 발치로 쪼르르 기어 와 발등에 톡, 하고 대가리를 올려놓는다.
세라에게 가장 중요한 부위를 의탁한 뱀이 만족스럽게 눈을 감았다.
제법 통통해진 몸이 위아래로 오르내리며 새액, 새액, 고른 숨을 내쉰다.
믿을 수 없지만 잠든 것이다.
“이러고 잠들면 어떻게 하니…….”
황당해진 세라가 곤란한 눈으로 검은 덩어리 하나 없이 깨끗해진 주변을 둘러봤다.
조각의 도움 없이 검은 덩어리가 사라졌다.
이러면 어떻게 되는 거지?
한 번도 이렇게 운명을 고쳐 본 적이 없어서 제대로 끝이 난 건지 아닌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 뜨거!”
그때, 그녀의 의문에 응답하듯 형량이 새겨진 살갗이 뜨거워진다.
며칠간 조금도 깎지 못했던 형량이 흐트러지며 촤르륵, 숫자가 줄어들었다.
뱀이 검은 덩어리를 잡아먹은 것도, 비틀린 운명을 바꾼 것으로 계산해 주는 걸까?
세라는 별 기대가 섞이지 않은 눈으로 자신의 새로운 형량을 지켜보았다.
한참을 돌아가던 숫자들이 1의 자리에서부터 차례대로 멈추기 시작했다.
0……0……0……0…….
제법 길게 이어지는 0의 행진 끝에,
250,000,000.
무려 육천만 년이나 깎인 형량이 새로이 새겨졌다.
“……!”
육천만 년? 미친 건가. 여태 제법 많은 운명들을 고쳐 왔지만 이렇게 파괴적인 감면은 또 처음이라 이게 현실인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이로써 처음 그녀가 부여받은 형량에서 절반이나 깎여 나갔다.
경악과 감격을 동시에 느낀 세라가 부르르 몸을 떨며 진저리를 쳤다.
동그랗게 홉뜬 두 눈이 제 발등에 머리를 얹고 태연히 잠든 뱀에게로 향했다.
당장에 뱀을 들어 올린 세라가 다소 흥분한 목소리로 그를 깨웠다.
“뭐야? 방금 그거 어떻게 한 거야? 이, 일어나 볼래?”
하지만 똬리를 튼 몸을 쓸어내리는 손길은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어디서 이런 복덩이가……. 경이로운 눈으로 뱀의 자태를 두 눈에 새기던 세라가 불현듯 스치는 깨달음에 얼굴을 굳혔다.
“나도, 먹었어야 했나……?”
어딘가 허탈한 시선이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본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에 쨍하니 떠 있는 태양이 시리게 눈을 찔렀다.
그게 너무 눈부셔서 윽, 하고 눈매를 찡그리는데, 여태 조용하던 별의 조각이 뒤늦게 쩍, 갈라졌다.
맑았던 하늘에는 먹구름이 밀려들고, 천둥이라도 내려칠 듯 하늘이 우르릉! 하고 울렸다.
메마른 숲에 시커먼 밤을 몰고 온 먹구름을 뚫고 빛줄기가 내려왔다.
쏟아진 빛줄기가 서로 겹쳐 무언가의 형상을 이룰 듯 말 듯 일렁였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제대로 보이지 않겠지만, 보석의 표면처럼 갈라져 빛을 산란하는 세라의 눈에는 명확한 사람의 형체로 비쳤다.
태양을 가리며 나타난 존재가 첫마디를 내뱉었다.
“세라 로젠바움.”
그 한 번의 부름에 대기가 요동쳤다.
공기 중에 닿은 세라의 육체마저 저릿저릿해지는 바람에 순간 무릎이 꺾일 뻔했다.
먹구름을 몰고 온 존재가 무거운 것처럼 저 높이 떠 있던 하늘이 코앞에 닿을 정도로 낮아졌다. 공기는 대지에 내려앉은 빛에 닿을까 두려워 저 멀리 도망치고, 대지는 자신을 비추는 빛이 그저 황송하여 벌벌 떨어댔다.
온 세상이 그저 같은 공간에 함께 숨 쉬는 것도 버거워 머리를 조아렸다.
세라는 이렇게 당연하다는 듯이 기를 질리게 만드는 존재가 누구인지 익히 알고 있었다.
부르르, 어깨를 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손안의 뱀을 등 뒤로 감춰 허리띠에 칭칭 감아 매달았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그래야겠다는 직감이 세라를 움직였다.
“……이런 누추한 곳엔 어쩐 일로.”
답지 않게 긴장한 두 눈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얼굴을 마주 보았다.
지상에 올라온 뒤 처음으로 재회한, 신이었다.
강림이라고 하기엔 머리뿐이긴 하지만, 그래도 신인데 이렇게 지상에 막 나타나도 되는가 싶어서.
“흑마법을 사용했나. 독한 냄새가 진동을 하는군. 세라 로젠바움.”
우리 대단하신 신께서는 개코이신지 보자마자 세라가 흑마법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빛으로 얽어진 얼굴이 미미하게 찡그려졌다.
그저 눈매가 살짝 좁아 든 것뿐이었는데, 죽을죄라도 지은 것처럼 심장이 철렁 내려앉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이를 악물고 힘주어 버틴 세라가 힘든 티를 내지 않은 채 너스레를 떨었다.
“네. 제가 참 열심히 살았죠.”
“틀린 말은 아니구나.”
개소리하지 말라고 할 줄 알았더니, 신은 웬일로 그녀의 말을 인정해 주었다.
“벌써 형량을 절반이나 줄였더군. 세라 로젠바움.”
심지어 그녀의 업적에 대해 칭찬 비슷한 것을 해 주는 분위기였다.
지옥에 떨어진 죄인이라며 벌레만도 못한 취급을 하던 예전과는 확실히 다른 대우였다.
“환생에 대한 네 강력한 의지를 봐서 작은 선물을 하나 주도록 하지.”
고고하게 턱을 치켜든 신의 형상이 그녀를 내려다보자, 그의 얼굴을 이루는 빛무리 중 몇이 방향을 바꿔 세라에게 향했다. 정확히 두 눈을 겨냥한 빛줄기에 좋지 않은 기억이 떠오른 세라가 불안한 얼굴로 뒷걸음질 쳤으나.
“잠깐, 이거 설마 또-.”
푹!
어떠한 무력도 없이 두 눈이 찔리는 듯한 아찔한 통증과 함께 눈앞에 번쩍! 스파크가 튀었다.
“아악! 내 눈!”
두 눈을 부여잡은 세라가 빼액, 비명을 내질렀다.
“앞으로 별의 조각이 네가 가야 할 길을 더 정확히 알려 줄 것이다.”
이전에는 볼 수 없는 것까지 보여 주겠지.
끙끙대는 그녀의 머리 위로 근엄한 신의 전언이 내려앉았다.
이게 무슨 선물인지는 모르겠지만, 정황상 그녀의 눈에 박힌 별의 조각에 뭔가를 더 해 주기는 한 모양이었다.
“너로 인해 비틀린 운명들. 지상을 병들게 하는 썩은 열매를 도려내라. 세라 로젠바움.”
신은 눈이 아파 낑낑대는 죄인 따윈 가엽지도 않은지, 재차 그녀가 해야 할 일을 강조했다. 벌써 형량을 반이나 줄였냐며 칭찬해 준 지 얼마나 됐다고 어서 나머지 절반을 해내라며 재촉이었다.
“네에, 뭘 원하시는지 잘, 알겠는데요…….”
겨우 눈을 뜰 수 있게 된 세라가 고개를 주억거리면서도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말끝을 길게 끌었다.
“말끝마다 제 이름 부르시는 건 그만하시죠? 온 세상에 저 여기 있다고 알려 주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아주 불안해 죽겠다는 얼굴로 ‘그 이름’만큼은 말하지 말아 달라 간청했다. 신이 입을 열 때마다 온 지상이 계시라도 받들 듯이 쩌렁쩌렁 울려대는데, 누가 지나가다 듣기라도 할까 봐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어차피 더 말할 필요도 없었는지, 신은 이번에도 흔쾌히 죄인의 청을 들어주었다.
“그러지. 이 정도면 충분할 테니.”
“……?”
뭐가 충분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