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으나 대화가 끝나 가는 분위기였기에 굳이 말을 보태지 않았다. 신과 대화를 나누는 일은 한낱 인간이 감당하기엔 몹시나 피곤하고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그녀는 이 갑작스럽고도 당혹스러운 면담을 되도록 빨리 끝내 버리고 싶었다.
“이런 좋은 게 있었으면 진작에 주시지…….”
아직도 얼얼한 눈가를 문지른 세라가 못내 불만스러운 어조로 꿍얼거렸다.
어차피 줄 거였으면서 굳이 두 번에 나눠서 눈을 찌르는 저의에 합리적 의심이 치밀어 올랐다.
“모든 건 무르익을 때가 따로 있는 법.”
오늘따라 친절한 신께서는 죄인의 사소한 불만까지도 모조리 해결해 주셨다.
“기다린 만큼 과실은 달콤할 것이다.”
“예……?”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면, 그 또한 아직 때가 아니라는 뜻이겠지.”
“……?”
해결……해 준 건가?
조언 같기도 하고, 예언 같기도 한 거창한 은유에 세라가 의욕 없이 ‘허허’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그것으로 볼일은 끝났는지, 신의 형체를 이루는 빛무리가 흐릿하게 일렁거렸다.
“그럼, 남은 시간도 착하게 살거라. 세라 로젠바움.”
이제 그만하겠다는 말이 무색하게도, 마지막 쐐기를 박듯 그녀의 이름을 한 번 더 강조해서 부르는 걸 잊지 않았다.
기대도 안 했다는 낯으로 세라가 에휴, 한숨을 내쉬었다.
“……흑마법 쓴다고 방해나 하지 마시죠.”
지옥에 있을 때처럼 사회생활용 미소를 짓지 않는 건 그녀의 작은 반항이었다.
“행운은 빌어 주마.”
축복 비슷한 말을 남긴 신의 형상이 서서히 흩어져 사라졌다.
쿠르릉. 쿠릉. 위엄 있게 울음을 낸 먹구름이 느릿하게 걷혀 가기 시작했다.
“어우, 기 빨려.”
마침내 신에게서 해방된 세라가 두 번은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라며 크게 진저리 쳤다.
쓰러지지 않으려 몸에 힘을 주고 버텼더니 괜히 이곳저곳 뻐근하고 쑤신 기분이다.
가볍게 몸을 푼 그녀가 궁으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가, 제 발밑에 널브러진 습격자들을 발견하고는 아, 하고 소리를 냈다.
“이것들은 다 어떻게 하지?”
일단 뭐라도 뒤처리를 해야 할 것 같은데, 혼자서 하자니 벌써부터 귀찮아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고 싶지 않았다.
귀찮을 땐 역시 흑마법이지.
고민을 끝낸 세라가 조심스럽게 자신의 회로를 점검했다.
성검에 박힌 상흔 쪽이 많이 벌어졌긴 했으나 앞으로 한 번 정도는 ‘목소리’를 쓰는 게 가능할 것 같았다.
근데 대상이 없잖아.
문제는 이 주변에 살아 있는 생물이라곤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는다는 거였다.
그때, 신이 돕기라도 한 것처럼 새카만 독수리 한 마리가 쓰러진 암살자의 등 위로 안착했다.
부리로 콕콕 찍어 반응을 확인하는 모양새가 시체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것 같았다.
“진짜 축복을 해 줬나……?”
공교로운 타이밍에 세라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하늘을 두어 번 곁눈질했다.
진실이야 어쨌든 그녀에게는 잘된 일이었다.
짝, 손뼉을 부딪친 세라가 독수리의 주의를 자신에게로 끌었다.
굶주린 짐승과 눈을 맞춘 그녀는 마지막 남은 마력을 끌어모아 ‘목소리’를 속삭였다.
너, 에스텔라를 이리로 데려와
푸드덕-.
세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독수리가 커다란 날개를 펼쳐 숲을 떠났다.
저 새는 그녀보다 먼저 궁으로 돌아가 에스텔라를 이곳으로 데려올 거다.
에스텔라는 제법 오래 산 마법사니 독수리를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 금방 알아챌 것이고.
“오면 알아서 하겠지.”
다소 무책임한 뒷정리를 한 세라가 유유히 숲을 떠났다.
사박, 사박, 걸음을 옮긴 그녀가 왔던 모랫길을 되짚어 돌아갔다.
멀어지는 세라의 등 뒤로 숲에 짙게 드리워졌던 먹구름이 완전히 걷힌다.
그리하여 마침내, 어둠 속에 숨어들어 있던 또 다른 불청객이 태양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커다란 키, 새카만 머리카락. 태양에 그을리지 않은 하얗고 건강한 몸.
머리카락 아래 자리 잡은 연둣빛의 눈동자가 신을 맞이한 지상보다 더 속절없이 뒤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세라가 사라지고도 꽤 오랫동안, 자신이 보고, 들은 것들이 믿기지 않는 것처럼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
핏기가 싹 가신 입술이 무슨 말이라도 쏟아 낼 것처럼 뻐끔거리다가.
“…….”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손바닥 아래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다 한참이나 지난 뒤에야 그 입에서 억눌린 비명이 튀어나왔다.
“으으읍?!”
그것이, 300년 만에 제 첫사랑을 마주한 에녹 소서의 첫마디였다.
***
남자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새하얀 붕대에 가려진 두 눈이 제 손을 향해 떨어진다.
“이상하군.”
화려한 황금 궁전을 등진 그의 손에는 자그마한 상자가 들려 있었다.
원래는 타오르는 불꽃처럼 새빨간 상자가 짙은 색으로 물들었다. 상자를 모조리 적시고 뚝, 뚝 흘러내리는 액체 또한 상자를 닮은 붉은색이었다.
비릿한 피 냄새가 가득한 남자의 발치에는 거칠게 잘려 나뒹구는 손 하나가 널브러져 있었다.
“어째서 공격하지 않는 거지. 마법사?”
의문을 표한 남자가 그것을 발끝으로 툭, 걷어찼다. 낮게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손이 잘린 손목을 부여잡은 채 주저앉은 에스텔라의 근처에서 멈춰 섰다.
“어, 어떻게. 네가…….”
쿨럭, 핏물을 쏟아 낸 에스텔라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꼭 그곳에 있으면 안 될 사람을 알아본 것처럼.
그는 니르샨의 이름을 빌려 자신을 만나러 온 남자가 방 안에 들어섰을 때부터, 숨조차 쉬지 못한 채 굳어 있었다. 그래서, 자랑하는 마법 한 자락 사용해 보지 못했다.
……붉은 상자가 제 손과 함께 뜯겨져 나갈 때까지도.
“날 알고 있나?”
하지만 알아본 건 에스텔라뿐인지, 남자는 약간의 흥미만 내비쳤을 뿐.
그가 누구인지, 어떤 사이였는지와 같은 자세한 사연 따위 조금도 궁금하지 않은 얼굴로 선심 쓰듯 읊조렸다.
“그럼 옛정을 생각해서 살려는 줘야겠군.”
콰직.
오만한 선언을 한 남자가 에스텔라에게서 빼앗은 상자를 단번에 부숴 버렸다.
마법이 깨어지자 단단히 뭉쳐 있던 모래가 금방 물러져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쿨럭, 또 한 차례 핏물을 토해 낸 에스텔라가 상대의 헛수고를 알려 주었다.
“그거, 빈 상자야…….”
“알아.”
남자는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상관없어.”
손을 기울여 여남은 모래마저 모조리 털어 낸 그가 에스텔라를 향해 다가왔다.
그와 에스텔라 사이에 넓게 고인 피 웅덩이 위로, 군청색의 그림자가 불길하게 너울거렸다.
눈을 완전히 가려 놓았는데도, 남자의 걸음은 마치 눈앞이 훤히 보이는 사람처럼 한번을 휘청거리지 않았다.
“내가 갖고 싶은 건 저 안에 든 물건 따위가 아니라-.”
정확히 에스텔라의 한 걸음 앞에 멈춰 선 남자가 뒤늦은 고백을 속삭였다.
“너였거든. 마법사.”
그리고 다음 순간, 남자를 이루는 공기가 일변했다.
“……!”
무거운 농도의 마력 소용돌이가 에스텔라를 덮쳤다.
형체를 갖춘 불길한 힘이 그의 목을 붙잡아 공중으로 잡아끌었다. 덕분에 남자는 무릎을 굽히지 않고도 에스텔라와 시선을 맞출 수 있었다. 이를 으득 사리문 에스텔라가 남자 못지않게 강력한 마력을 끌어올렸다.
우우웅. 우웅. 서로 상반되는 마력이 부딪혀 공간을 날카롭게 파쇄했다.
그 바람에 에스텔라를 구속하던 남자의 마력 중 일부가 잘려 나가 멀쩡한 쪽의 팔이 자유로이 풀려났다.
에스텔라가 팔을 들어 올리자 날카롭게 벼려진 신성한 마력이 일제히 남자를 향해 겨누어졌다. 이대로 손짓 한 번이면 즉시 남자를 향해 달려들 것이다.
하지만.
툭, 차마 그것을 휘두르지 못한 에스텔라의 손이 힘없이 아래로 떨구어졌다. 남자를 위협하듯 휘몰아치던 날카로운 힘이 한순간에 흩어져 사라진다.
커헉, 꺽, 숨이 막혀 공기가 넘어가지 못하는 목에서 꺽꺽대는 소리가 났다.
에스텔라는 남자를 공격하려던 손으로 눈앞의 얼굴을 더듬었다. 힘이 거의 실려 있지 않은 손끝이 소중한 것을 대하듯 조심스럽다.
“……?”
친밀한 행위에 남자의 미간이 불쾌한 듯이 좁아 들었다.
“왜…… 왜애…….”
이유를 묻는 그의 두 눈동자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이 일렁이고 있었다.
“개인적인 감정은 없어.”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차갑기만 했다.
“신의 축복을 받은 것들이 싫을 뿐.”
에스텔라의 얼굴을 향하던 고개가 무방비하게 드러난 그의 가슴팍으로 떨어진다.
불길한 마력이 고여 꺼멓게 색이 죽은 남자의 손이 에스텔라의 육체를 통과해 그 속에 든 무언가를 움켜쥐고는.
우드득!
그것을 가차 없이 그에게서 뜯어냈다.
바깥으로 빠져나온 주먹 사이로 금빛의 실이 뜯어진 거미줄처럼 흐늘거렸다.
에스텔라의 영혼 한가운데 박혀 있던 마력 회로의 일부였다.
“아아악!!!”
찢어질 듯한 비명이 공간을 울렸다.
산채로 영혼의 일부가 뜯겨 나간 그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졸도했다.
에스텔라의 몸이 일시에 축 늘어졌다.
손에 엉겨 붙은 금빛의 실을 더럽다는 듯이 털어 낸 남자가 그다지 다르지 않은 손길로 에스텔라를 바닥에 던져 버렸다.
“아버지.”
그와 동시에, 남자의 그림자 속에서 사람 하나가 솟아올랐다.
“이만 돌아가실 시간입니다.”
한쪽 무릎을 굽혀 앉은 이방인이 남자를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머리까지 뒤집어쓴 로브 사이로 눈부신 금발이 쏟아져 내렸다.
“로제.”
반가운 존재였는지 남자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자신을 아버지라 칭한 금발의 남자를 부른다.
“자리를, 너무 오래 비우셨어요. 이 이상은 육체가 버티지 못합니다.”
피 웅덩이에 바지가 젖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남자를 우러러본 그는 자못 걱정스러운 어조로 귀가를 재촉했다. 고개를 주억거린 남자가 제 아들을 향해 발길을 돌리며 물었다.
“니르샨은 어떻게 됐지?”
“아버지 말씀대로 임무에 실패하자마자 도망쳤습니다.”
“죽였니?”
“아니요.”
“잘했다. 아들아.”
“…….”
에스텔라를 대할 때와는 다르게 로제의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은 다정하기 이를 데 없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둘 모두 동년배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다른지 그의 칭찬을 들은 로제의 귓바퀴에 붉은 기운이 어렸다.
“언제 처리할까요?”
“내버려 두렴.”
신이 나 도망자의 뒤처리를 묻는 아들을 향해, 남자는 되었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참에 지옥에서 긁어 온 영혼이 홀로 얼마나 버티는지 실험해 보는 것도 좋겠지.”
잔인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한 그가 아직까지도 무릎을 꿇고 있는 로제를 향해 일어나라는 듯이 손짓했다.
“돌아가자꾸나. 아들아.”
로제를 지나쳐 걷는 그의 어깨 위로 새카만 형상을 한 새들이 내려와 아양을 떨듯이 울어댔다.
“그래. 너희도 고단했지?”
남자는 기꺼이 로제에게 한 것처럼 그것들의 머리도 다정히 쓸어 주었다.
뒤따라 일어선 로제가 남자의 곁으로 가 섰다. 로브 속에 감춰진 보랏빛 눈동자가 서늘하게 아버지의 손길을 받고 있는 검은 새들을 주시했다. 남자는 곁에 선 아들의 심기가 불편해지는 걸 알고서도 그것을 방치했다.
마침내 나란히 선 부자의 형체가 시커멓게 녹아 바닥을 향해 추락했다.
철퍽! 남자의 마력이 남긴 새카만 흔적이 새하얀 대리석 바닥에 상흔을 남겼다.
불청객이 사라진 자리에는 엉망이 되어 사경을 헤매는 주인만이 남게 되었다.
***
쟤가 왜 아직도 저기 있지?
느긋하게 궁으로 돌아온 세라는 먼저 보낸 독수리가 황금궁의 하늘 위를 빙빙 도는 것을 보고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결계라도 쳐 놨나-.”
허락받지 않은 외부의 생명체는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마법적인 처리라도 되어 있는 건가 싶어 유심히 살폈지만, 딱히 이렇다 할 마법적인 흔적을 찾지 못했다.
궁에 없나.
태평한 생각을 한 세라가 터벅터벅 그 안으로 들어섰다.
원래도 소란스러운 적이 없던 황금 궁전은 오늘따라 유독 조용했다. 꼭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것 같은……. 바깥에는 아직까지도 아케이드의 끝을 기념하는 축제가 한창이라 괜히 더 비교가 되는지도 몰랐다.
‘지금쯤 물건 빼돌린 거 걸렸겠지?’
추궁해 올 에스텔라에게 할 변명을 생각하던 세라가 등 뒤를 더듬어 뱀이 잘 매달려 있는지 확인했다. 이쯤 되면 깰 만도 한데, 허리띠와 완전히 물아일체가 된 뱀은 여전히 숙면을 취하고 있었다.
골똘히 생각에 잠긴 세라가 막 에스텔라의 방이 있는 복도에 발을 내디뎠을 때였다.
“……!”
그러기가 무섭게 그녀의 발끝을 타고 찌릿한 감각이 올라붙었다.
꼭 상종 못 할 악귀가 영혼을 헤집고 지나간 것처럼 섬뜩한 소름이 돋았다.
헉, 소리를 낸 그녀가 저도 모르게 한 발 물러섰다.
혼란스러운 시선이 바닥을 타고 쭈욱 미끄러지다가.
“에스텔라……?”
반쯤 열린 에스텔라의 방문 앞에서 멈춘다.
그곳에서 눈을 떼지 못한 세라가 다시 복도에 발을 들여놓았다.
처음보다는 덜하지만 방금 전에 느낀 감각이 또 한 번 그녀를 훑고 지나갔다.
늪에 빠진 것처럼 질척이고 물컹한 공기의 흐름.
세라는 단숨에 이 공간을 가득 채운 게 무엇인지 눈치챘다.
흑마법이다.
세라조차 진저리 칠 정도로 짙고, 어두운 흑마법의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에스텔라의 방에서부터.
그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서둘러 달려 나간 세라가 거칠게 문을 열어젖혔다.
어떤, 끔찍한 예감에 휩싸인 채 홉떠진 두 눈이 기민하게 방 주인을 찾아 안쪽을 살폈다.
다행이지만 불행히도, 세라는 금방 에스텔라를 찾을 수 있었다.
피에 젖어 볼품없이 바닥에 흩날린 하늘색 머리카락을 발견한 그녀가 비명처럼 그의 이름을 내질렀다.
“에스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