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에 나라를 팔았습니다-103화 (113/131)

#103

“으음.”

그 호칭에 세라가 만족스럽게 침음했다.

저 오만한 남자 입에서 저런 말을 들어 볼 줄 상상이나 했던가.

신분 역전이나 금의환향하는 내용의 동화를 왜 그렇게들 좋아하나 했는데, 이런 짜릿함 때문에 그런 모양이었다.

에녹이 분하다는 얼굴로 세라를 주인님이라 부를 때마다, 맺혀 있는 줄도 몰랐던 체증이 한 방에 쑥쑥 빠지는 것처럼 속이 다 시원했다.

“그거 그렇게 하는 거 아니야. 더 공손하게 불러야지. 자, 다시-.”

결국 참지 못하고 히죽거린 세라가 말투만 공손하고 눈빛이 불손한 노예를 향해 부드럽게 채근했다.

“여기까지 굳이 따라온 건 노예 너잖니? 그러니까 좀 더 제대로 해 보는 건 어때?”

목줄까지 살랑살랑 흔들어댄 그녀가 작정이라도 한 듯 이죽거렸다.

미래에 돌아올 후환을 생각한다면 결코 해서는 안 될 일이었으나, 그러기엔 눈앞의 남자를 노예로 부릴 수 있다는 현실이 너무나도 달콤했다.

온 힘을 다해 놀려 주마.

두 눈을 번뜩인 세라가 자, 어서 공손하게 주인님. 해 보라며 연신 깝죽거렸다.

“이게 진짜-.”

영민한 노예님께서 주인님의 진심을 모를 리 없었다.

세라가 정말 개에게 하듯 손으로 제 턱을 살살 긁어대기까지 하자, 손모가지를 부러뜨릴 기세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어휴, 노예가 성질이 더럽네.”

그에 한숨을 내쉰 세라가 숨을 들이켜자 숨이 닿는 모든 곳을 구워 버릴 것처럼 뜨거운 열기가 폐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러자 살을 녹여 버릴 듯 내리쬐는 햇빛에 달아오른 살갗이 뜨겁다 못해 따가웠다.

으, 불쾌해. 적응되지 않는 사막의 뜨거움에 세라의 미간이 절로 구겨졌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뜨겁지만 습기가 없어 고통스러울지언정 불쾌하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땀이 솟기가 무섭게 증발을 해 버려서, 까딱 정신을 놓았다가는 언제 그렇게 됐는지도 모르게 탈수 증세로 말라 죽기 딱 좋았다.

불편하게 미간을 찡그린 세라가 머리 위로 뒤집어쓰고 있는 하늘하늘한 베일로 그늘을 만들어 보지만, 눈부심이나 조금 덜할 뿐 더위는 가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얼음 누에의 실로 지어 만든 것이라 하더니 영 사기를 당한 것 같았다.

‘내 돈 주고 산 옷은 아니지만.’

신경질적으로 손부채질을 한 세라가 짜증스럽게 태양을 올려다보았다.

휘이잉-.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그녀를 쓸고 지나갔다. 짤랑짤랑. 옷에 붙어 있는 금속 장식들이 바람에 나부껴 소리를 냈다.

이 의복을 가져다준 자의 말에 따르면, 골반을 따라붙어 있는 황금 장식들이 내는 소리는 삿된 기운을 내쫓아 주는 성스러운 것이라 했으나, 세라가 듣기에는 그저 금화 짤랑이는 소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별로 시원하지도 않고, 이런 불편한 옷은 왜 입는 거야…….”

덕분에 괜히 허리춤만 무거워진 세라가 짜증스럽게 짤랑이는 금줄을 탁탁 내려쳤다. 그러고는 머리에 두르고 있는 베일을 제 몸에 뱀처럼 칭칭 휘감아 뭐라도 가려 보려 용을 썼다.

그녀는 지금 사막 지역에 위치한 에스텔라 길드의 전통 복식을 입고 있었다. 기후 때문에 치마를 입지 않는 에스텔라에서는 여자든 남자든 전부 바지만 입고 있었는데, 특히 여자들이 입는 바지가 문제였다.

이곳 사람들은 옷을 만들 때 실을 쓰다가 말았는지 그 속이 훤히 다 비쳤다. 그러니까, 그 속에 무슨 속옷을 입고 있는지도 남들 눈에 다 보인다는 뜻이었다.

거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허벅지에서부터 발목까지 일직선으로 죽 트여 있는 바람에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지 밖으로 무릎이 보였다.

게다가 위로는 속옷이나 다름없는 의복 하나 걸친 게 전부여서 풍만하게 모인 가슴이나 새하얀 배를 내내 바깥에 내보이고 다녀야 했다.

“단체로 더위를 먹었나. 어떻게 이딴, 이딴 옷을 입고…….”

거의 벗은 것과 다름없는 제 차림을 내려다본 세라가 말세는 말세라며 웅얼거렸다. 제 꼴이 보기 싫어 시선을 돌려보지만, 눈 둘 곳을 찾지 못하고 서서히 초점이 흐려져 갔다.

그녀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방금 전에 보았던 복식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을 한 여자들이 한가득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과 세라 사이에 다른 점이 있다면, 저들은 그녀처럼 자신의 몸을 가리려고 베일을 칭칭 둘러대지 않는 거다.

“좋은 곳이라고 하더니.”

그녀와 같은 광경을 보고 있을 에녹이 여전히 원망이 가시지 않은 어투로 투덜거렸다.

“왜. 넌 좋지 않아? 헐벗은 여자가 저렇게나 많은-.”

세라는 의외라는 얼굴로 에녹을 돌아보았다가.

“어우.”

눈을 찌르는 강렬한 차림새에 두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렸다.

“왜 눈을 돌리지? 주인님. 지금 내가 부끄러워?”

그에 눈썹을 까딱인 에녹이 당장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겠느냐며 성화를 부렸다. 그는 제 목줄을 쥔 주인님의 손이 나부낄 지경으로 짤짤 흔들어 재꼈다.

그 움직임에 맞춰 짤랑이는 금속음이 함께였다.

삿된 기운을 내쫓아 주는 성스러운 소리.

이번에 울려 퍼지는 그것은 세라가 아니라 에녹에게서 나는 소리였다.

“봐. 날 똑바로, 보라고.”

험악하게 목소리를 깐 노예가 감히 주인님에게 썩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겠느냐 을렀다.

쌕쌕거리는 숨이 세라의 뺨에 와 닿았다. 금방이라도 목덜미를 뜯어 버릴 것처럼 으르렁대면서도 끝끝내 그것을 행하지는 못한다.

대신 부리부리한 눈으로 그녀의 얼굴을 뚫어져라 노려보는 게 고작이었다.

“날 이 꼴로 만든 건 주인님이잖아요. 네?”

시비에 가까운 그 말에 세라가 마지못해 에녹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어디서도 눈에 띄던 붉은 머리를 새카맣게 물들인 그는 세라와 마찬가지로 이곳의 복식에 걸맞게 옷차림이 바뀌어 있었다.

……저걸 옷이라고 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태양 아래 훤히 드러난 그의 몸에는 황금으로 덧칠된 얇은 금속 줄이 거미줄처럼 내걸려 있었다. 목줄에서부터 뻗어 나온 금색의 줄들은 어깨에서 팔, 팔에서 팔목, 팔목에서 손가락까지 이어져 있었으며, 가슴에서 보였다가 다시 탄탄한 복근을 타고 유일한 의복인 하의 밑으로 모습을 감췄다.

그리고 아마 저 하의 안쪽에는…….

“어딜 봐. 지금.”

그녀의 불순한 시선을 감지한 에녹이 송곳니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언제는 보라고 성화더니 하여튼 변덕이 죽 끓듯 하는 괘씸한 노예다.

“어허, 어딜 주인님한테 함부로 으르렁대.”

누가 봐도 버릇없는 행동이었기에 세라가 근엄한 목소리로 키우는 개에게 하듯 단호하게 소리쳤다.

“앉아!”

그녀가 명령하자 에녹이 매고 있던 목걸이가 순간적으로 콱, 조여들었다.

목걸이에서 시작된 조임은 그것과 이어진 금줄을 타고 파동처럼 이어져 나갔다. 찰칵. 찰칵. 찰칵! 가위가 찰칵이는 듯한 소리를 내며 에녹의 상체를 휘감고 있는 장식이 차례로 조여들었다.

그렇게 어깨, 팔, 가슴, 배를 타고 내려간 조임이 마침내 그 아래까지 내려갔을 때.

찰캉!

“윽, 씨발…….”

고통스럽게 욕설을 내뱉은 에녹의 무릎이 풀썩, 사막의 모래 위로 내려앉았다.

아픈 듯이 미간을 구긴 그의 입에서 연신 씨발. 씨발 하는 욕설이 쏟아져 나왔다. 차마 아픈 곳을 만지지도 못하고 애꿎은 모래만 움켜쥐던 그가 원통한 어조로 씨근덕거렸다.

“남의 의뢰 대신해 주는 줄도 모르고 쫓아온 내가 병신이지…….”

“어허, 다 들린다.”

입술 앞에 검지를 내세우며 입을 다물라 채근하자, 핏발이 선 눈동자가 와락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들으라고 한 말이거든? 요? 주인님. 저 보면 미안하지도 않아? 요?”

“……아니. 몇 번을 말해-.”

그에 타이르듯 그의 머리를 토닥거린 세라가 제게는 아무런 죄가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며 수십 번도 더 한 변명을 입에 담았다.

“나도 이런 곳인 줄은 몰랐다니까?”

그녀를 올려다보는 노예의 어깨 너머로, 황금으로 지어진 궁전이 태양 빛을 받아 번쩍거렸다. 지글지글 끓어오르는 아지랑이와 함께 흔들리는 황금빛 그림자를 보고 있자면, 확실히 차가운 겨울비가 내리던 곳에서 멀리 떨어져 나왔다는 게 실감이 나기는 했다.

어쩌다 이 더운 곳까지 흘러들게 되었나.

“내가 어쩌다가……. 씨발.”

그렇게 생각하기가 무섭게, 에녹이 비슷한 말을 중얼거렸다.

비슷하기는 했지만 그 속에 담긴 감정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아픔이 조금 가셨는지 에녹의 낯빛이 아까보다는 괜찮아 보였다.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는 그의 얼굴에는 짙은 자괴감이 서려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술에 술 탄 듯, 물에 물 탄 듯 잘도 넘길 것 같았건만, 아무리 그라도 노예가 된 건 좀 충격적인 모양이었다.

300년간 노예는 되어 본 적 없는 모양이지.

흥, 콧방귀를 뀐 세라가 겁주듯 목줄을 흔들어대며 에녹을 다그쳤다.

“스읍, 조용! 조용!”

안 그러면 확 또 조여 버린다?

험악한 목소리로 으름장을 놓자 에녹이 입술을 물어뜯으면서도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게 제대로 하랄 때 말을 들었어야지.”

코끝으로 에녹을 내려다본 세라가 만족스럽게 킬킬거렸다.

“……제기랄.”

나중에 돌아가서 두고 보자며 이를 바득바득 가는 에녹을 내려다보면서, 그녀는 이 버릇없는 노예를 손에 쥐던 순간을 회상했다.

***

스노우가 미리 준비해 둔 정보 길드원이 세라를 찾아온 건 이틀 전의 일이었다.

“혹시, 세라…… 님?”

늦은 밤, 그녀의 방문을 두드린 청년은 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쓰레기 같은 이름의 주인이 너냐는 눈으로 세라를 쳐다봤다.

“제릴입니다.”

그녀의 의뢰 수행이 끝날 때까지 도와줄 심부름꾼이라며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막무가내로 방 안에 밀고 들어와 짐을 풀어 놓기 시작했다.

“스노우 님이 맡겨 두신 의복과 통행증입니다. 에스텔라에 들어갈 때 꼭 필요한 것들이니 잃어버리지 않게 주의해 주십시오.”

제릴이 펼쳐 놓은 물건이란 이곳의 기후에 맞게 지어진 의복과 통행증, 그리고 간단한 봇짐이었다.

그것을 구경하던 세라의 감상은 하나였다.

특이한 옷을 입네.

그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자신이 가야 할 곳이 사막 지대라는 걸 조금도 모르고 있었다가.

“에스텔라는 물이 귀한 사막 지대이니, 가시기 전에 수통을 제대로 채워 두는 걸 추천드립니다.”

곧 알게 되었다.

사막이라니. 그런 덥고 척박하고, 볼 것도 없는 곳으로 가고 있었단 말인가.

마침내 행선지의 정체를 알게 된 세라의 미간이 팩 찌푸려진 건 덤이었다.

“여기, 인수증에 사인 부탁드립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짐을 전부 털어놓은 제릴이 세라를 향해 서류를 내밀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펜을 든 세라가 건성으로 사인을 휘갈겼다.

“에스텔라?”

음산한 목소리가 끼어든 건 그즈음이었다.

“갈 곳이라는 게 에스텔라 길드였어?”

“……으음.”

“심지어 여행도 아니고, 스노우? 의뢰?”

정확한 행선지를 알게 된 에녹이 해명하라는 얼굴로 세라를 노려보았다.

그녀가 남쪽으로 향한다는 사실을 눈치챈 뒤부터, 그는 세라가 원하는 여행지가 에스텔라가 아닌 그 인근에 있는 오랜 휴양지인 잉그리드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면 달라질까요?”

그걸 다 알면서도 여태 묵인했던 세라는 다소 뻔뻔한 낯으로 되물었더랬다.

에녹 대신 답을 해 준 이는 제릴이었다.

“에스텔라는 기본적으로 여성의 인권이 강한 길드이니까요.”

“아, 그런가요.”

딱히 별 감상이 들지 않아 여상히 고개를 주억거리는데, 뭔가 방 안의 분위기가 이상했다.

“아, 그런가요. 가 아닙니다.”

“……?”

아니나 다를까, 진지하게 얼굴을 굳힌 제릴이 비장한 어조로 설명을 덧붙였다.

“그곳에서는 웬만한 지위의 남성이 아니고서는 전부 노예로 취급합니다.”

“와우.”

그렇게까지 극단적일 줄은 몰랐던 세라가 순수하게 감탄했다.

난생처음 들어 보는 형태의 지배 구조에 절로 흥미가 돋았다. 그러나 그뿐, 제릴의 말을 에녹의 반응과 연결 짓지는 못했다.

“하지만 주인님은 그 ‘웬만한 지위의 남성’이시잖아요.”

왜냐하면 아무리 인권이 어쩌고저쩌고 떠들어대 봤자, 지상의 모든 인간들은 에녹 소서의 발치 아래 머리를 조아려야 하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문제없지 않나요.

대수롭지 않게 흥얼거리자 푹 한숨을 내쉰 에녹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난 거기 못 가.”

“예. 저분은 못 들어갑니다. 일단, ‘에녹 소서’로는요.”

제릴이 곧장 맞장구를 쳤다.

“네?! 왜요?!”

화들짝 놀란 세라가 서둘러 이유를 캐물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설마 에녹이 못 가는 곳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둘의 목적지를 알고 있는 비제가 아무 말도 하지 않길래 괜찮을 줄 알았는데…….

“조약 때문에.”

골치 아픈 얼굴로 머리를 긁적인 에녹이 간단명료하게 답했다.

딱 거기서 끝났을 불친절한 설명을 풀어 준 건 이번에도 제릴이었다.

“그 길드는 중립 지대라서, 갈등을 일으킬 수 있는 주요 인물들은 입장 자체가 불가능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에녹 소서’는 가장 먼저 제외된 인물이죠.

남의 일이라서 그런지 반갑지 않은 소식을 전하는 말투가 유쾌하기 그지없었다. 모든 설명을 마친 청년은 이제 어떻게 할 것이냐며 세라를 빤히 쳐다보았다.

멍하니 눈을 끔뻑이던 세라가 그 시선을 그대로 에녹에게 돌려주며 물었다.

“그럼 어떻게……. 여기서 헤어져요?”

“…….”

망설이는 법이 없던 양반이 웬일로 그렇다. 아니다 확실하게 말하지 않고 꾹 입을 다물었다. 아직 소리 내어 답을 하지는 않았지만, 미미하게 찡그린 표정은 누가 보아도 긍정보다는 부정에 더 가까워져 있었다.

“여기서 헤어지실 겁니까? 그럼 새 노예를 구해야 하니 하루 이틀 정도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눈치 빠른 제릴은 에녹의 저울이 어느 방향으로 기우는지 읽어 냈고, 그보다 한발 먼저 세라가 의뢰를 수행하는 데 도움이 되는 선택지를 준비해 대령했다.

“노예는 동정이 좋으십니까. 아니면 노련한 놈이 좋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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