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에 나라를 팔았습니다-104화 (114/131)

#104

지금 어마어마한 발언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지나간 것 같은데.

세라는 제 귀를 할퀴고 간 문장들에 멍하니 두 눈을 끔뻑거렸다.

“……뭐가, 어째요?”

하지만 정작 그 말을 한 사람은 여전히 태연하기만 했다.

“둘 중에 선호하는 쪽으로 골라 주세요. 그래도 의뢰 수행 기간 동안 계속 붙어 있어야 하는데. 이왕이면 취향에 맞는 놈으로 구해 드리는 게 능률이 좋을 것 같아서요.”

놀라운 점은 얼굴 마주 대고 나누기에는 낯부끄러운 주제였는데도, 물어보는 사람의 표정이 하도 건조해서 별로 음란한 주제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어떤 놈이 좋으십니까?”

집요하게, 도무지 세라가 말을 흐리며 얼버무릴 수도 없이.

콕 집어 둘 중에 하나를 골라 달라 재차 요청했다.

“아, 예. 저는…….”

거기에 휩쓸린 세라도 덩달아 고민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제릴은 그녀의 취향을 물었지만,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영역이라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고 보니 내 취향은 어느 쪽이지? 동정 노예와 노련한 노예 중 누가 좋을까. 노련하다는 게 어디가 얼마나 어떻게 노련하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처음인 사람보다는 그쪽이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아무래도, 노련한-.”

“미친 건가.”

그렇게 막 대답을 하려던 찰나에.

에녹이 말허리를 싹둑 잘라 버렸다.

스산하게 표정을 굳힌 그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묻는다.

“너 지금 뭐 고민해. 노예야?”

“…….”

꼭 잘못을 추궁하는 듯한 태도에 세라의 입이 자연스럽게 다물어졌다.

고르라고 해서 고른 건데, 그러면 안 됐던 모양이지.

“새로운 놈 필요 없어.”

대화를 끊어 낸 에녹이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들었다.

“내가 해. 노예.”

세라를 등 뒤에 둔 그가 노예 역할을 자처하고 나섰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썩 내키지 않은 듯이 굴었으면서 하여간 변덕이 심한 남자였다.

“으음…… 그렇, 그렇군요.”

대체 얼마나 살벌한 표정을 하고 있는지 내내 무미건조하던 제릴의 얼굴이 눈에 띄게 핼쑥해졌다. 널따란 등만 쳐다보고 있던 세라가 그의 뒤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예? 하지만 주인님은 못 들어간다면서요.”

서로를 마주 보고 있던 두 남자의 시선이 동시에 세라를 향해 꽂혔다.

먼저 대답한 사람은 에녹이었다.

“이름을 바꾸고, 머리색만 바꾸면 돼. 그건.”

걱정될 정도로 단순한 해결책에 세라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샜다.

“그거 너무 눈 가리고 아웅…….”

“괜찮아. 어차피 여기서 내 얼굴을 알아보는 놈은 없을 거고, 문제만 일으키지 않으면 되니까.”

“그래도…….”

머리색을 덮으면 뭐 해. 얼굴이 눈에 띄지 않나요. 몸이랄지…….

세라는 반박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차마 입에 담지 못하고 어물거렸다. 언뜻 칭찬 비슷하게 들리는 소리를 했다가, 에녹이 으스대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심하십시오. 저 말씀은 진짜이니.”

다행히 제릴이 끼어들어 세라의 불안을 잠식시켜 주었다.

“드러내 놓고 에녹 소서 행세만 하지 않는다면, 들킬 일은 없을 겁니다. 붉은 머리만 아니면, 일단 곧장 영웅과 연결 지어 생각하진 않을 테니까요.”

“으음…….”

“아, 제약이야 많이 걸리겠군요.”

“제약이라면. 어느 선까지……?”

“그냥 상식적인 수준에서 행동하시면 됩니다. 성검을 뽑으면 안 되고, 비이상적인 무력을 행사해서도 안 되고, 다른 누군가에게 위화감을 줄 만한 행동은 하지 않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뭐 얼마나 대단한 제약일까 싶었더니, 이 정도면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이야기였다. 에녹의 메리트를 완전히 깎아 먹는 조건에 세라가 눈에 띄게 실망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저렇게 신경 쓸 게 많으면 차라리 그냥 평범한 노예를 구해 가는 게 더 낫지 않나.

그런 생각을 그대로 입에 담으려다가.

“……그 정도면 그냥 새 노예를 구하는 게 더-.”

“야.”

“-불편하겠네요. 주인님이 나서 주셔서 너무 기뻐요.”

서늘한 살기를 느끼고는 재빨리 우회하며 합, 입을 다물었다.

“네. 정말 다행입니다. 영웅께서 나서 주신다니 의뢰가 한층 수월해지겠군요.”

다소 어색한 마무리였으나 제릴이 물 흐르듯이 맞장구를 쳐 준 덕분에 한층 자연스러워졌다.

“사실 요즘 쓸만한 노예 구하는 게 하늘의 별 따기 거든요. 정말 잘된 일이죠.”

영혼 없이 잘된 일이라며 상황을 마무리 지은 그가 메고 있던 가방을 뒤져 자그마한 유리병 하나를 건넸다.

“여기. 염색약입니다. 이쪽은 검은 머리가 흔해서, 그 색으로 준비했습니다. 사용 방법은-.”

“알아. 예전에도 써 봤으니까.”

쌀쌀맞게 염색약을 가로챈 에녹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쾅. 닫힌 문 너머에서 곧장 물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무래도 곧장 약을 사용하려는 모양이었다.

“…….”

“…….”

덩그러니 남겨진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제릴과 눈이 마주친 세라가 겸연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뭔가, 굉장히, 얼렁뚱땅 마무리된 것 같지만 어쨌든 들어야 할 말도 다 들었고, 받아야 할 물건도 다 받았으니 어떻게든 의뢰를 수행할 준비가 끝난 모양이었다.

“노예가 생겼으니 내일 당장 에스텔라로 출발하시면 되겠군요. 다행입니다. 아케이드가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도착할 수 있게 되어서.”

……인 줄 알았는데, 아직도 알아야 할 게 더 남아 있었다.

유난히 귀에 꽂히는 고유 명사에 세라가 그건 또 뭐냐는 눈으로 제릴을 바라보았다.

“……아케이드?”

“이런……. 의뢰서를 제대로 읽어 보지 않으셨습니까?”

제릴은 어떻게 그걸 모를 수 있느냐며 펄쩍 뛰었다.

“에스텔라의 길드장이 4년에 한 번씩 개최하는 경기를 아케이드라고 합니다. 경기에서 승리한 마지막 한 사람만이 에스텔라의 보물 창고에 들어가 원하는 보물을 얻어 나올 수 있죠. 전 대륙의 값진 것들이 모조리 모여 있다는 그 보물 창고요.”

그의 반응으로 보건대 사막의 아케이드는 제법 유명한 경기이자 축제인 것 같았다.

제릴은 에스텔라 길드 소속이 아님에도, 아케이드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을 때엔 은근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보물 창고? 그런 게 있다고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정작 세라의 관심은 아케이드 그 자체보다는 뒤에 등장한 보물 창고로 쏠렸다. 전 대륙의 값진 것들을 모조리 모아 놓은 창고라니. 절로 귀가 뜨이고 눈이 번쩍 떠지는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예. 있습니다.”

제릴은 허탈한 얼굴로, 그러나 이제 와서는 의뢰 수행인의 산만함이 그다지 놀랍지도 않다는 태도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얼마간의 대화로 세라의 성격을 파악한 그는 정색하며 의뢰서 좀 잘 읽어 보라 타박하지 않았다.

“세라 님이 해 주실 일은 아케이드에서 승리해 ‘어떤 물건’을 창고로부터 가지고 나오는 일입니다.”

“‘어떤 물건’? 그게 뭔데요?”

“그건 의뢰서에 적혀 있을 겁니다.”

다만, 부드럽고도 자연스럽게 스스로 의뢰서를 찾아보고 싶도록 만들었다.

“다시 한번 잘, 볼게요.”

“네. 꼭 좀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그 방법은 제대로 먹혀들었다.

세라로 하여금 내일이 오기 전에 읽다 포기한 그 의뢰서를 확인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므로.

전에 없이 의욕을 불태우는 모습을 확인한 제릴이 한시름 놓은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케이드 과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험한 일은 참가자 대신 노예가 대행해줄 겁니다. 어디까지나 재미를 위한 행사인데다가, 중립지역이라 다치면 곤란한 사람이 부상을 입었다간 여러모로 골치 아파지거든요.”

그때, 욕실에 들어갔던 에녹이 밖으로 나왔다.

“뭐야. 아직도 안 갔어?”

타월로 머리를 탈탈 털어 내며 걸어온 그는 아직도 떠나지 않은 제릴을 못마땅한 눈으로 흘겨보았다.

그러다 다 털었는지 세라와 가까워졌을 즈음에 머리에 얹어 두었던 타월을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았다.

“…….”

세라는 다소 낯설어하는 표정으로 검은 머리의 에녹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왜. 뭐.”

그 시선을 느낀 에녹이 할 말 있으면 해 보라며 턱을 치켜들었다.

은근히 칭찬을 바라는 얼굴이었다.

“……주인님.”

세라는 거기다 대고 ‘머리빨이셨군요.’ 라는 말을 하지 않을 정도로는 눈치가 있었다.

머리를 검게 물들였다고 해서, 에녹의 미모가 어디 가는 건 아니었지만. 새삼 붉은 머리가 그에게 얼마나 잘 어울렸는지 깨닫게 해 주기는 했었다.

검은 머리의 에녹은 뭐랄까.

위험한 느낌이 더 강해진 느낌이었다.

어둠 속에서 몸을 낮추고 사냥감을 기다리는 흑표범 같달까. 잘 먹어서 달빛을 받으면 검은 털 위로 윤기가 차르르 흐르는 그런 짐승.

그것도 나쁘진 않지만 그 특유의 화려함이 사라져 살짝 아쉬운 감이 있었다.

이런 게 취향이라는 거겠지.

의외의 곳에서 취향을 발견하게 된 세라가 늦지 않게 뒷말을 이어 나갔다.

“검은 머리도 잘 어울리시네요.”

“당연하지.”

듣고 싶은 말을 들은 에녹이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넌 볼일 다 봤으면 이만 가.”

도도하게 제릴을 내려다본 그가 재차 축객령을 내렸다.

“아, 다 보지 않았습니다. 제가 염색약만 드리고 중요한 걸 드리지 않아서요.”

쌀쌀맞은 태도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제릴이 가방을 뒤져 은빛으로 빛나는 무언가를 에녹에게 건넸다.

“깨끗이 미십시오. 에스텔라의 노예에게 허락된 건 머리털뿐이니까.”

그건 몸의 털을 밀 때 사용하는 여성용 면도기였다.

“…….”

에녹은 차마 곧장 받지 못하고 하염없이 그것을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세라보다는 눈치 없는 제릴이 직업병처럼 또 구구절절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설명을 덧붙였다.

“붉은 체모가 난다는 걸 들키지 않게 이틀에 한 번은 밀어 주시고…….”

“알았으니까. 꺼져.”

들을수록 수치스러워지는 말을 중간에 잘라 낸 에녹이 우악스럽게 면도기를 가로챘다.

쿵, 쿵, 쿵, 쿵. 발 뒤꿈치를 찧으며 걸어간 그가 쾅! 부서져라 욕실 문을 닫았다.

솨아아-. 똑같은 물소리가 이어졌지만 이번에는 어쩐지 심통이 잔뜩 난 것처럼 느껴졌다.

“…….”

세라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입 안으로 꾸욱 말아 넣어야만 했다.

“아케이드 참가자는 따로 신청서를 내야 해서요.”

제릴은 자신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 자랑스럽지도 않은지 예의 무미건조한 낯으로 침대에 올려 두었던 서류 한 장을 집어 들었다.

이미 세라의 이름이 적혀 있는 참가 서류 옆으로 펜을 갖다 댄 그가 물끄러미 올려다보며 물었다.

“서류에 적을 노예의 이름은 무엇으로 하실 겁니까?”

***

“얘. 까망아.”

머지않은 과거를 회상하던 세라는 일부러 목소리를 간드러지게 하여 제가 붙여 준 노예의 이름을 불렀다. 덩치 산만 한 성인 남성에게 갖다 붙이기엔 깜찍하다 못해 끔찍한 명칭이었으나 세라는 그렇기에 더더욱 에녹을 까망이라고 부르고 싶었다.

“어서 일어나. 우리도 까마귀 잡으러 가야지.”

“…….”

넌 애가 이렇게 게을러서 어디다 써먹니?

놀리는 게 다분한 어조로 목줄을 잡아끌자 에녹이 순간 ‘죽일까?’ 하는 얼굴로 그녀를 올려다봤다.

“노예 교육 중인가 보지.”

그때, 두 사람의 근처를 지나가던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세라의 등 뒤에서부터였다.

“……?”

소리가 나는 쪽으로 돌아보니, 웬 남자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곳 사람인지 건강하게 그을린 구릿빛 피부의 남자는 삼십 대 후반 정도는 되어 보였다. 노예들과는 달리 흰 천으로 만들어진 옷을 몸에 대충 걸치고 있는 그의 손에는 황금으로 된 목줄이 세 개나 쥐어져 있었다.

세라에게 자신을 살펴볼 시간을 준 남자가 짙은 갈색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느른하게 말을 이었다.

“그렇게 여유 부리고 있다가 딴 놈들한테 당할 텐데.”

상냥하게 휘는 황금빛 눈동자가 지그시 세라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시선에서 촉감이 느껴지기는 처음인데, 어쩐지 잘 벼려진 검날을 연상케 하는 눈빛이었다.

“저건 또 뭐야.”

그녀와 비슷한 속도로 남자를 훑은 에녹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조금도 노예답지 않은 성질머리에 세라가 ‘어허’ 하고 주의를 주었다.

“……다들 까마귀 잡느라 바쁘잖아.”

다시 남자에게 고개를 돌린 세라가 소란스러운 주변을 턱짓했다.

“쏴! 어서!”

“이 주변을 샅샅이 뒤져!”

그녀의 말대로, 노예를 앞세운 사람들이 날아다니는 새를 잡으려 애쓰는 중이었다.

첫 번째 아케이드의 목표가 특정한 표식을 지닌 까마귀를 잡아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떠한 무기도, 마법도 쓰지 않고 순수하게 머리만 써서.

표식을 단 까마귀의 수는 정해져 있고, 지금 세라는 까마귀 근처에도 다가가지 않았기 때문에, 경쟁자들이 그녀를 견제할 필요는 어디에도 없었다. 물론, 세라가 저들 중 하나였다면 순수하게 까마귀만 잡으려고 애쓰지 않을 테지만.

“시키는 대로 하는 쟤네는 착한 애들이고.”

그녀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남자가 귀엽다는 듯이 입매를 비틀어 웃었다.

“진짜로 나쁜 애들은 다른 걸 잡거든.”

바로 저놈들처럼.

은밀하게 속삭인 남자가 에녹의 등 뒤를 가리켰다.

“……?”

세라는 남자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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