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에 나라를 팔았습니다-105화 (115/131)

#105

그곳에는 웬 여자가 서 있었다.

몰래 다가와 놀라게 할 작정이었는지 세라와 눈이 마주치자 김빠진 목소리로 남자를 타박했다.

“니르샨. 그걸 가르쳐 주면 어떻게 해?”

“어차피 실패했을걸. 유르아.”

느물거리며 여자의 타박을 흘려 넘긴 남자가 에녹을 눈짓했다.

“이쪽 노예는 아까 전부터 네가 오는 걸 알고 있었거든.”

“그래도!”

둘은 이미 아는 사이인지 허물없이 대화를 나눴다.

어색하게 둘 사이에 낀 세라가 빠르게 여자를 훑었다.

검은 머리. 황금색 눈동자. 건강하게 그을린 피부. 언뜻 니르샨이라 불린 남자와 수상할 정도로 닮아 보이는 생김새였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세라는 이쯤에서 상대에게 용건을 물었을 것이다.

세라의 뒤를 노리고 있던 게 이 여자 하나뿐이었다면, 말이다.

“…….”

에녹의 곁으로 가까이 붙어선 세라가 유르아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를 찾아온 여자의 뒤로, 십여 명은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줄을 이루고 있었다. 남녀가 섞였지만 대체적으로 남자의 비율이 훨씬 높았다.

까아악.

그들의 머리 위로 까마귀 한 마리가 날았다.

푸드덕거리는 날개 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하지만 세라를 만나기 위해 모여든 이들은 그쪽으로 시선 한 자락 주지 않았다.

대신 각자 손에 쥐고 있는 노예의 목줄을 바투 쥐며 무언가에 대한 의지를 다졌다. 그들과 나란히 선 노예들이 커다란 근육을 과시하듯 팽팽하게 부풀리며 이를 드러내 웃었다. 산처럼 거대한 장정들이 저러고 있으니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왜…… 저렇게 웃지?

어색해 보이는 미소의 저의는 모르겠지만, 비제와 제릴이 건네준 서류를 정독한 세라는 이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았다.

아케이드에 참가하는 사람이 다른 참가자에게 관심을 보일 이유는 딱 한 가지였다.

“무슨 결투 신청을 이렇게 몰려와서 해?”

결투.

“난 혼자 왔어. 저 사람들은 모르는 사람들이야.”

“어차피 결투는 일 대 일 승부니까 괜찮지 않아?”

핀잔 섞인 세라의 말에 유르아와 니르샨이 차례로 대답했다.

“첫 번째 경기부터 결투 신청이라니…….”

죽이 잘 맞는 모습에 세라가 성가신 한숨을 내쉬었다.

참가자들은 아케이드 기간 동안 언제, 어디서든 증인이 되어 줄 심판만 있으면 딱 한 번, 다른 참가자에게 결투를 신청할 수 있다. 정말 웃긴 점은 결투 신청을 받은 상대에게는 거절할 수 있는 권리가 없다는 거다. 일단 시비가 걸리면 하기 싫어도 결투에 임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렇게 싸워서 뭘 얻느냐.

승자가 상대의 모든 것을 얻는다.

승리한 사람은 패배자의 전부를.

패배한 사람은 승자에게 전부를.

결투에서 패배한 자는 자동으로 아케이드에서 탈락하게 되고, 모든 경기가 끝날 때까지 승자에게 귀속된다.

그에 귀찮다는 듯이 표정을 굳힌 세라가 작게 투덜거렸다.

“……잡으라는 까마귀는 안 잡고.”

언뜻 듣기에는 참가자들에게 큰 부담이 되는 것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결투에 임하는 사람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도 그렇게까지 무겁게 여기지는 않는다고들 한다.

왜냐하면 결투를 신청하는 자들이 노리는 건 대부분.

“가끔은 승리보단 미인을 얻는 게 더 급한 사람도 있는 법이지.”

상대가 가진 노예였으니까.

“……흐음. 미인-.”

유르아의 말을 곱씹던 세라가 목줄을 당겨 에녹을 불렀다.

남의 일인 양 상황을 방관하고 있던 노예의 상체가 앞으로 숙여졌다. 딱 깨물기 좋게 대령한 귓가에 입술을 붙인 그녀는 남이 들을세라 목소리를 한껏 낮춰 속닥였다.

“제대로 변장한 거 맞아요? 왜 염색을 했는데도 사람이 꼬이지?”

“뭘 물어.”

간지러운 숨을 한껏 즐긴 에녹이 가소롭다는 듯이 픽, 실소를 내쉬었다가.

“염색해도 예쁘니까. 그렇죠. 주인님.”

바로 다음 순간 낯을 바꿔 간드러지게 대꾸했다.

그러고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두 눈을 빠르게 끔뻑거리며 예쁜 척까지 해댔다.

“…….”

그것을 정면으로 마주한 세라가 으, 하고 뒷걸음질 쳤다.

“오, 노예랑 사이가 좋은가 보지?”

일단 겉보기에는 다정해 보이는 한때에, 지켜보고 있던 유르아가 큰 흥미를 보였다.

“그럼 더 좋지.”

갈라놓는 재미가 있잖아.

성격 나쁜 고양이처럼 눈을 빛낸 유르아가 적극적으로 나섰다.

“니르샨. 당신이 심판 좀 봐줘.”

결투에 반드시 필요한 조건인 심판 역할을 떠넘기자, 니르샨이 과장스럽게 곤란한 티를 냈다.

“어이쿠, 이 많은 사람들을 다? 난 언제 아케이드를 즐기라는 거야?”

샛노란 황금빛 눈동자가 유르아의 뒤로 길게 늘어선 줄을 가리켰다.

그러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 것으로 봐서는 마냥 싫지만은 않은 눈치다.

“오래 안 걸려. 어차피 내 차례에서 끝날 거거든.”

코웃음을 친 유르아가 오만할 정도로 당당하게 자신의 승리를 단언했다.

“당신도 후회하지 않을걸.”

에녹에게로 시선을 옮긴 그녀는 검은 머리 아래 숨겨져 있는 연둣빛 눈동자를 빤히 올려다보며 입맛을 다셨다.

“미인을 빼앗기를 걸 보는 것만큼 재밌는 구경거리가 어딨어?”

“아, 그건 그렇지.”

그럼, 심판을 해 볼까.

유쾌하게 고개를 주억거린 니르샨이 못 이기는 척 심판 역할을 받아들였다.

주고받는 농담 속에 분명한 뼈가 있었다.

아직 결투는 시작도 안 했는데, 두 사람은 벌써부터 승자가 갖게 될 미인을 어떻게 할지 농지거리를 주고받고 있었다.

여기서 등장하는 ‘미인’은 세라의 까망이가 틀림없고 말이다.

비릿한 미소를 지은 유르아가 의미심장한 눈으로 연신 에녹을 흘깃거렸다. 비단 에녹을 향해 끈적한 시선을 보내는 이는 그녀 혼자만이 아니었다.

유르아의 뒤에서 결투를 대기하는 다른 이들도, 그들의 노예도, 심지어는 결투와는 상관없이 심판 역할을 맡게 된 니르샨조차 에녹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마음에 안 드는데…….’

사방에서 쏟아지는 불순한 시선에 세라의 심기가 크게 꿈틀거렸다.

일시적이라고는 하나 일단 지금은 내 건데. 감히 제 것에 함부로 눈독을 들이는 게 몹시 거슬렸다.

‘이게 왜 마음에 안 드는지 모르겠지만 마음에 안 들어.’

못마땅한 시선으로 아직도 미인이 어쩌고저쩌고하며 말을 주고받는 유르아와 니르샨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렇게 둘이서 힘을 합쳐 은근히 한쪽으로 분위기를 가져가는 건 상대를 위축시키기 딱 좋은 전략이었다. 남들과는 달리 태양에 그을리지 않은 새하얀 피부의 세라는 누가 봐도 외부인이었고, 보물에 혹해 아케이드에 참가한 어중이떠중이 중 하나처럼 보였으니까.

“결투하러 와선 왜 이렇게 혀가 길어?”

하지만 안타깝게도 세라는, 그런 도발에 익숙한 사람이었고.

“말 더 얹지 말고 빨리 시작하지?”

성격이 조금, 많이 나빴다.

그녀는 노예를 건 결투에는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지만, 제 앞에서 잘난 척하는 재수 없는 놈들의 마음을 짓밟는 데에는 큰 흥미를 느끼는 부류의 악당이었다.

자신을 상대로 마음 놓고 방심하다가, 예상과 다르게 흘러갔을 때 상대방의 얼굴에 피어나는 짙은 낭패감을 좋아했다.

심지어 지금은 아케이드.

승자가 패자의 모든 것을 가져갈 수 있는 축제의 시간.

패배하여 제 손아귀에 떨어진 누군가를 어떻게 구워삶아도 전부 합법이 되는 기간이었다.

“당신이 심판해.”

상상만 해도 재미있는 전개에 두 눈을 반짝인 세라가 유르아와 마찬가지로 니르샨을 심판으로 내세웠다.

“오-. 이쪽도 의욕이 생긴 모양인데.”

니르샨은 갑자기 의욕적으로 구는 세라의 반응을 흥미롭게 지켜봤다.

“좋아! 에스텔라 아케이드의 규칙에 따라 결투를 시작하지.”

짝. 손뼉을 친 그가 결투가 성사되었음을 선언했다.

신나는 구경거리가 생겼음을 알게 된 참가자들이 그쪽으로 몰려들어 커다랗게 원을 이루었다.

“벌써 결투를 신청했다고?”

“저거 유르아 아니야?”

“쯧쯧, 상대가 잘못 걸렸군.”

“유르아 쪽에 10골드!”

자연스럽게 생겨난 결투장이 금세 시끌벅적해졌다.

세라에게 결투를 신청한 여자는 이 근방에서 꽤 유명 인사였는지 그녀를 못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자신만만해하던 태도를 뒷받침해 주듯 결투를 지켜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녀의 승리를 예측했다.

“결투에 필요한 건 오직 건강한 두 팔과 다리. 먼저 무기를 들거나, 유혈 사태를 일으키는 쪽이 패배다.”

양팔을 활짝 펼친 니르샨이 세라와 유르아를 바라보며 결투의 규칙을 일러 주었다.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본 그는 곧이어 둘의 노예를 향해서도 알아들었냐는 눈짓을 했다.

결투의 당사자는 세라와 유르아지만, 사실상 결투에 임하는 이들은 그들의 노예인 에녹과 이름 모를 거대한 근육 덩어리였다.

“…….”

그에 에녹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피부가 연약해서 스치면 피를 줄줄 쏟을 것 같은데. 내가 너무 불리한 거 아니야?”

유르아의 노예는 비웃는 게 역력한 얼굴로 그를 빈정거렸다.

덩치가 오백 년은 자란 떡갈나무처럼 거대한 남자는 인간이 아니라 거의 거인에 가까울 정도로 위협적인 덩치의 소유자였다.

여태 세라가 본 사람 중 가장 덩치가 큰 사람은 마커스였는데, 곰 같던 마커스도 저 남자의 옆에 서면 아기 곰처럼 보일 것 같았다.

그러니 에녹과 붙여 놓았을 때. 얼마나 큰 대비를 이루는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두꺼운 근육을 갑옷처럼 두르고 있는 커다란 거인과 비교하자면 에녹은 못 먹어서 비쩍 마른 약골처럼 느껴졌다.

“이거 곤란한데…….”

그래서 세라는 조금, 걱정이 되었다.

“살살해. 아무리 험악해도 저쪽은 인간이니까. 적당히 상식적인 수준에서 이기라고.”

에녹이 저 노예의 덩치를 믿고 힘 조절을 못 해 죽여 버릴까 봐…….

심각한 얼굴로 주의를 준 세라는 자신이 에녹을 괴물 정도로 생각하고 있음을 자연스럽게 들켰다.

“결투 중에 상대를 죽이면 바로 실격이야. 알지?”

“……알지. 그런데 주인님-.”

다행히 에녹은 그녀의 실수를 눈치채지 못한 듯 부드럽게 넘어갔다. 아까부터 무언가를 골똘히 고민하는 것처럼 말끝을 늘인 그는 도저히 모르겠다는 얼굴로 작게 속살거렸다.

“적당히 상식적인 수준은 어느 정도야?”

“그건-.”

대답하려던 세라가 선뜻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막상 그 애매한 경계를 정의할 순간이 오니 자신도 미처 생각지 못했었다는 걸 깨달은 것처럼.

그러고 보니 적당히 상식적인 평범한 사람 행세는 어떻게 할 수 있는 거지?

“그, 그건-.”

“그건……?”

괜히 시간을 끌어 보며 머리를 열심히 굴려 보지만, 적당한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

“…….”

답을 찾지 못하고 표류하는 두 시선이 공중에서 부딪힌다.

둘 사이에 내려앉은 숨 막히는 침묵 속에서 그들은 그제야 둘 중 누구도 ‘적당히 상식적인 수준’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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