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하지만 모른다고 해서 알아서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세라는 이대로 에녹의 손에만 맡겨 놓는다면 결투는 고사하고 아케이드에서 실격당할 것이라는 미래가 선명하게 그려졌다.
그러니 누군가가 기준을 세워야 한다면 그건 세라여야 했다.
적어도 둘 중 그나마 평균에 가까운 사람은 그녀일 테니까.
한참을 고민하던 그녀는 나름대로 타협점을 찾아냈다.
“주먹만…… 안 쓰면 되지 않을까?”
“아아, 주먹.”
알았어. 알았어.
말하는 사람은 반신반의하는 어조였는데, 에녹은 확실히 느낌이 왔는지 고개를 주억거렸다.
“노예들 앞으로.”
때마침 니르샨이 결투의 때가 왔음을 알렸다.
그의 부름에 황금색 목줄을 맨 노예 둘이 서로를 향해 섰다.
우오오오! 관중들이 흥을 돋우는 함성을 내질렀다. 예나 지금이나 싸움 구경만큼 재미있는 게 없는 모양이다.
“준비.”
니르샨의 신호에 맞춰 두 사람이 동시에 목줄을 풀었다.
차르륵,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내린 금빛의 줄이 사막의 모래 위로 툭, 떨어졌다.
“……살살 해라. 살살.”
죽이지 마라. 어디 부러뜨리지도 말고, 터뜨리지도 말고.
눈앞에 임박한 승부에 세라가 두 손을 꼭 쥔 채 읊조렸다.
그 모습이 언뜻 보기에 노예를 위해 기도하는 상냥한 주인님처럼 보였다.
설마 저렇게 커다란데 맷집이 약하진 않겠지?
불안한 눈으로 에녹을 내려다보는 노예를 힐끗거리는데, 그 뒤에 빼꼼 고개를 내민 유르아와 눈이 마주쳤다.
두 손 모아 기도하는 세라를 귀엽다는 듯이 바라본 그녀가 야릇하게 윙크해 온다.
세라가 누구를 위해 기도하는 줄 모르기 때문에 부릴 수 있는 여유였다.
“시작!”
잠깐 한눈을 판 사이, 니르샨이 기습적으로 결투의 시작을 알렸다.
뜨거워질 대로 뜨거워진 관중들의 분위기와는 달리 대치하는 두 노예는 곧장 움직이지 않고 서로를 탐색했다.
잠시 둘 사이에 팽팽한 신경전. 그 비슷한 것이 내려앉았다.
“겁쟁이 새끼.”
먼저 움직인 쪽은 지루함을 참지 못한 유르아의 노예였다.
비뚜름하게 입매를 비튼 그가 자신만만하게 에녹을 향해 달려들었다.
보기에도 둔해 보이는 두꺼운 몸을 하고서도 움직임만큼은 날렵한 표범처럼 재빨랐다.
단숨에 거리를 좁힌 남자는 눈 깜짝할 사이에 에녹의 빈틈을 파고들었다.
옆으로 몸을 틀거나, 기회를 노린다거나 하지 않은 시원시원한 정면 돌파였다.
부우웅. 에녹의 얼굴과 비슷한 크기의 거대한 주먹이 휘둘러졌다.
와아아!
마침내 내질러진 첫 공격에 관중들이 뜨거운 호응을 보냈다.
그 순간 싸움을 구경하는 모든 이들의 머릿속에, 커다란 주먹에 맞아 저 멀리 날아가는 에녹의 모습이 스쳤다.
아마 주먹을 휘두르고 있는 당사자도 그다지 다르지 않은 상상을 하고 있을 터였다.
그렇게, 남자의 공격이 에녹의 얼굴에 닿기 바로 직전.
“……?!”
맞을 일만 남아 있던 에녹의 신형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부우웅. 목표를 잃은 주먹이 공간을 갈랐다.
어찌나 빠르게 피했는지, 헛손질을 하는 주먹 끝에 미처 사라지지 않은 에녹의 형체가 안개처럼 흐트러졌다.
그 찰나에 일어난 놀라운 현상을 오로지 남자만이 목격했다.
난생처음 목격하는 기이한 몸놀림에 거구의 두 눈이 튀어나올 듯 커다래졌다.
이, 이게 뭐야……!
차마 소리도 내지 못하고 속으로만 경악하고 있는데, 지근거리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기척을 감지한 시선이 몸보다 먼저 반응했다.
그리하여 보게 된 것이다.
자신이 내지른 팔의 바로 옆.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지지 않은 채 나타난 검은 머리의 노예를.
심각하게 얼굴을 굳힌 노예가 남자를 향해 팔을 높이 들어 올린다.
그 순간이, 남자에게는 영겁과도 같이 느리게 느껴졌다.
“히이익……!”
“아.”
새파랗게 질린 남자의 얼굴에 에녹은 자신의 계산에 착오가 있음을 인지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쐐애액.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에녹의 손이 상대의 뺨을 향해 휘둘러졌다.
그리고.
쫘악-!
명쾌한 타격음이 울렸다.
싸움을 구경하고 있는 자들이라면 누구라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크게.
“으웨엡!”
이상한 소리를 내지른 거구의 얼굴이 옆으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힘 그대로 그 커다란 몸이 부웅 떠올랐다.
공중에 높이 뜬 노예는 팽이처럼 같은 자리를 팽그르르 돌다가.
그대로 곤두박질쳐 바닥에 쿵! 하고 떨어졌다.
“…….”
그것으로 끝이었다.
남자는 더 이상 일어서지 못했다.
“…….”
“…….”
투전판을 방불케 할 정도로 시끌시끌하던 공기가 찬물을 맞은 듯 고요해졌다.
“어……?”
순식간에 끝나 버린 결투에 누군가 얼빠진 소리를 냈다.
같은 소리를 들은 관중들이 비슷한 탄성을 내며 어. 어. 거렸다.
끓어오르던 열기가 주춤 멈춘다.
모두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쓰러진 채 미동도 하지 않는 노예를 한 번, 멀쩡히 서 있는 에녹을 한 번 번갈아 쳐다보았다.
흐트러진 공기를 가로지른 건 마찬가지로 완전히 얼이 빠진 니르샨의 목소리였다.
“죽은 거 아니야……?”
다급하게 다가온 그가 쓰러진 노예를 뒤집어 상태를 살폈다.
눈을 까뒤집은 채 기절한 거구의 입에는 허연 거품이 뽀글뽀글 올라오고 있었다.
에녹에게 얻어맞은 한쪽 뺨은 벌써부터 잔뜩 부어올라 얼굴이 완전히 짝짝이였다.
보기에도 아파 보이는 꼴에 본능적으로 움찔한 니르샨이 열심히 노예의 맥을 짚어 보았다.
가슴에 귀를 대어 심장이 뛰는지 확인을 해 보기도 하고, 손끝으로 두개골을 눌러 혹시 어디 부러진 곳이 있지는 않은지 점검하고, 뺨은 물론 입 안쪽까지 살펴 피가 나지는 않는지도 확인했다.
모든 확인을 끝낸 니르샨은 곧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일어섰다.
“……정말 놀랍군. 꼴이 엉망이긴 하지만 그냥 기절한 게 맞아.”
어이가 없다는 듯이 중얼댄 그가 에녹의 손을 들어주며 결투의 끝을 선언했다.
“승자는 이쪽이다.”
예상과는 완전히 뒤집힌 결과에 숨죽여 상황을 관망하고 있던 관중들로부터 경악 어린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니 무슨 눈 한번 깜빡였더니 결투가 끝나.”
“생긴 건 허여멀겋게 생겨 가지고 제법인데?”
“무슨 따귀가 이렇게…….”
어떻게 승부가 났는지 제대로 보지도 못했던 이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하며 크게 술렁거렸다.
“……말도 안 돼. 어디서 저런 놈을.”
그중 가장 기가 막힌 사람은 승리를 자신하던 유르아였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주저앉은 그녀는 한 방에 나가떨어진 제 노예를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러게. 왜 겁도 없이 덤벼. 덤비길.”
그에 세라는 낄낄대며 그 꼴을 비웃었고.
“내가 해냈어…….”
에녹은 멍한 눈으로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손끝에 남은 감촉을 되새기듯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주먹은 안 될 것 같다는 말에 그럼 손바닥이 나을까 싶어 해 본 건데 이게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언제나 검을 들던 손으로 누군가의 따귀를 때려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생각보다 좋았던 손맛이 아직도 짜릿하게 손바닥을 간질였다. 뭐랄까. 중독적이다. 박수를 많이 치면 건강에 좋다더니 딱 그런 느낌이었다.
……난 어쩌면 적당히 상식적인 싸움이 체질일지도 몰라.
쓰러진 노예가 들었다면 피거품을 물 생각을 하던 그때, 곁으로 다가온 세라가 살갑게 그를 칭찬해 주었다.
“잘했어. 까망아.”
네가 해낼 줄 알았어.
에녹의 승리를 한 번도 의심치 않았다며 입바른 소리를 해대는 여자의 눈매는 못된 생각을 하는 아이처럼 짓궂은 장난기가 가득 반짝이고 있었다.
“목줄, 다시 차야지?”
여우 같은 미소를 지은 세라가 결투를 위해 잠시 떨어뜨려 놓은 목줄을 다시 들이밀었다.
“노예가 예쁜 짓 했는데, 포상은 없나요. 주인님?”
덩달아 짓궂게 눈을 반짝인 에녹이 느른하게 허리를 숙이며 상을 졸랐다.
찰칵. 그의 목에 줄을 매단 주인님께서 노예의 곁에 바짝 붙어서며 속삭였다.
“밤에 줄게.”
아주, 뭘 줄지 벌써부터 좆이 두근거리는 말이었다.
그 한마디에 에녹이 참지 못하고 픽, 웃었다.
문득 노예질도 이 정도면 제법 괜찮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아케이드고 나발이고 얼른 끝내고 돌아가 주인님과 둘이 되고 싶었다.
“이로써 아케이드 참가자 유르아 델라리오 하심은 자격을 박탈당했다. 아케이드가 끝나기 전까지 유르아의 것은 전부 승자의 것임을 선언한다.”
주인과 노예 간의 계산은 끝났지만, 아직 승자와 패자 간의 계산이 남아 있었다.
결투의 결과와 함께 패배자의 처우에 대해 선언한 니르샨이 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그러자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를 흰머리 독수리가 그의 팔에 내려앉았다.
샛노란 맹금류의 다리에는 질 좋은 종이가 푸른 리본에 감겨 묶여 있었다.
종이를 빼낸 니르샨이 손끝을 깨물어 피를 냈다.
능숙하게 서류 하단에 지장을 찍은 그가 그것을 다시 독수리의 발목에 묶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저건 방금 일어난 결투와 관련된 서류인 모양이다.
그대로 독수리를 날려 보내려던 그는 아직도 몰려들어 있는 구경꾼들을 발견하고는 멈칫했다.
그러고는 설마 그럴 리 있겠느냐는 어조로 유르아의 뒤에 줄을 서 있던 무리를 향해 물었다.
“혹시, 설마, 또 결투 신청할 사람이 있나?”
“…….”
“…….”
좌중은 침묵했다.
유르아의 뒤에서 이죽거리던 도전자들도, 그들과 함께 위협적으로 근육을 꿈틀거리던 노예들도 약속이나 한 듯 슬그머니 니르샨의 시선을 피했다.
“없군.”
깔끔하게 상황을 정리한 니르샨이 홀가분하게 독수리를 날려 보냈다.
높이 떠오른 맹금류가 푸른 하늘을 가르며 저 멀리 황금 궁전을 향해 날아갔다.
“허허, 참. 별일이 다 있구만. 그래.”
“가자고. 가. 가서 까마귀나 잡읍시다!”
구경거리를 잃은 사람들이 하나둘 흩어지기 시작했다.
방금 전의 결투가 어떤 교훈이라도 주었는지, 결투 상대를 찾으려 어슬렁대던 이들도 갑자기 까마귀를 찾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흩어지는 인파들에 섞여 도망이라도 쳤는지.
유르아와 그녀의 노예는 어디로 갔는지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왜 그런 노예와 함께 다니나 했더니. 이런 쓸모가 있었군.”
마지막까지 세라의 곁에 남은 건 니르샨이었다.
새삼 이제 와 에녹이 탐이 나는지 세라의 곁에 얌전히 서 있는 늘씬한 남체를 유심히 훑었다.
그에 세라는 가진 자의 여유가 물씬 느껴지는 미소로 화답했다.
“왜. 당신도 결투 신청하게?”
“설마. 나는 평화주의자라고.”
섬뜩한 제안에 니르샨이 두 손을 들어 올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면서도 마지막에는 아쉬운 듯이 쩝, 입맛을 다시는 게 아예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닌 모양이다.
“덕분에 재밌는 구경 했어. 기회가 되면 다음에 또 보자고.”
정중하게 인사를 건넨 니르샨이 세라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래. 뭐, 또 볼일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것을 마주 잡은 세라가 대충 두어 번 위아래로 흔들어 주었다.
그때, 니르샨이 세라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거의 그의 품에 안기다시피 한 세라의 귓가에 니르샨이 무언가를 빠르게 속삭였다.
“……!”
그의 말을 들은 세라의 눈에 날카로운 이채가 서렸다.
숨을 들이켠 그녀가 퍼뜩 고개를 들어 니르샨을 바라봤다.
“당신-.”
“어디다 손을 대.”
세라가 막 말문을 연 순간. 쏜살같이 다가온 에녹이 거칠게 니르샨을 밀쳤다.
제 주인을 돌려받은 노예는 감히 제 눈앞에서 세라를 품에 안은 남자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와우.
순간적으로 폭발하는 살기에 니르샨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진정하라는 듯이 뒤로 한 걸음 더 물러난 그가 과장스럽게 너스레를 떨었다.
“노예의 질투가 심한 편인가 보지?”
“…….”
세라는 아직도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느라 대답하지 못했다.
“그럼 또 보자고-.”
원래도 답변은 중요하지 않았는지 유쾌하게 작별 인사를 한 니르샨이 인파들 사이로 사라졌다.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팔짱을 낀 에녹이 니르샨이 서 있던 자리를 대신 차지하며 세라를 추궁했다.
“저놈이랑 무슨 이야기 했어?”
세라는 어딘가 얼이 빠진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그냥. 별거 아니었어요.”
까아악.
때마침 머리 위를 지나는 까마귀가 크게 울어 멍하게 흩어지는 정신을 일깨웠다.
“이제 날파리들도 치웠으니 우리도 까마귀나 찾아-.”
해야 할 일을 떠올린 그녀가 다시 해야 할 일로 관심을 돌리며 의욕적으로 정원을 향해 한 걸음 내디뎠을 때였다.
“잡았다!”
떠들썩한 고함에 두 사람의 시선이 사이좋게 한곳으로 쏠렸다.
아까부터 열심히 까마귀를 쫓아다니던 무리 중 하나가 감격한 표정으로 까마귀를 들어 올린 채 방방 뛰고 있었다.
“잡았다! 잡았어! 나, 나도 통과야!”
그 뒤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또 다른 성공을 알리는 환호성이 울렸다.
별생각 없이 또 그쪽으로 눈을 돌리던 세라는 어쩐지 휑해 보이는 정원을 발견하고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야. 다 어디 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