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에 나라를 팔았습니다-107화 (117/131)

#107

참가자와 까마귀로 바글바글하던 정원은 눈에 띄게 깨끗해진 상태였다.

그녀가 결투에 시간을 허비하는 사이 성실하게 까마귀를 찾았던 이들의 대부분이 이미 통과를 해 버린 탓이었다.

“……그러게. 이제 와서 찾으려면 쉽지 않겠는데.”

에녹이 조금의 위기감도 느껴지지 않는 어조로 중얼거렸다.

까마귀 하나 없이 멀끔한 하늘을 올려다보던 그는 까마귀를 잡았다며 기뻐하는 남자 하나를 콕 집어 턱짓했다.

“저거, 뺏어 올까요. 주인님?”

영웅의 입에서 나오기에는 너무 비열한 말이었다.

“……너는 뭐, 양아치야?”

너무 당당해서 맡겨 놓은 줄 알았다.

그를 삐딱하게 흘겨본 세라가 한심한 어조로 아케이드가 시작하기 전, 주최자가 늘어놓았던 연설을 고스란히 읊어 주었다.

“그딴 짓 하면 실격인 거 몰라? 정정당당하게 하라잖아. 정정당당!”

영웅이라는 놈이 진짜 왜 이 모양이지?

딱 그런 생각을 하는 눈으로 쳐다보자 에녹이 어쭈, 하는 표정으로 눈썹을 까딱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아무리 저라도 없는 새를 만들어 올 순 없는데요.”

“없으면 길을 만들어야지. 노예야.”

엄격한 주인님께서는 잘했다고 칭찬해 줄 때는 언제고, 그새 안면을 바꿔서 그를 구박했다.

좀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라 핀잔을 준 세라가 저 멀리 모여 있는 무리를 가리키며 명령했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결투를 구경하느라 때를 놓쳐 뭐라도 해 보려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이들이었다.

“저기 가서 모이라도 좀 얻어 와.”

“예. 예.”

신경질적으로 세라의 손에 들린 목줄을 빼앗아 든 에녹이 의욕 없는 걸음걸이로 사람들을 향해 멀어져 갔다.

“아케이드에 관심 없는 거 너무 티 난다.”

에녹이 충분히 멀어질 때까지 기다리던 세라가 못마땅한 듯 쯧쯧 혀를 차다가.

“그치?”

제 머리 위를 올려다보며 동의를 구했다.

까악!

그러자 세라의 머리 위로 드리워진 가지에 앉아 있던 까마귀가 날개를 크게 펼쳐 울었다. 크게 부푼 새카만 몸체에는 푸른 표식이 빛나고 있었다.

얼마나 관심이 없으면 이렇게 가까이에 있는 걸 못 보고 그냥 갈까. 하여튼 게을러터져서는.

속으로 실컷 에녹의 욕을 하면서도 제 노예를 다시 부르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가 멀어질수록 그녀에게는 유리했다.

몸을 튼 세라가 신중한 얼굴로 까마귀를 향해 손을 내뻗었다.

겁 많은 어린아이에게 다가가듯 조심스럽고, 조용하게.

까악?

제게 다가오는 기척을 느낀 까마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새카만 짐승의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괜찮아. 해치지 않아요-.”

달콤한 거짓말을 속삭인다.

방긋 웃어 보인 세라는 첫 경기의 통과를 목전에 둔 지금 아케이드의 규칙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어떠한 무기도, 마법도 쓰지 않고 순수하게 머리만 써서.

결투에 필요한 건 건강한 두 팔과 다리. 무기도, 유혈 사태도 없이 순수하게 지혜만을 겨뤄 승자를 가려낼 것.

건강한 정신과 건강한 신체를 가진 용감한 자만이 보물을 가질 수 있다.

그것이 사막의 축제. 아케이드의 정신이었다.

하지만.

흥, 코웃음을 친 세라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까마귀를 향해 입술을 달싹였다.

이리 와.

안 들키면 그만 아니냐?

***

정정당당하고 공정하게.

이런 말을 내세운 주제에 아케이드의 주최자는 인간이 얼마나 비열하고 불공정한지 이미 다 아는 사람처럼 한 치의 틈도 주지 않고 철저하게 준비를 해 두었다.

아케이드가 열리는 정원에는 참가자들을 감시하는 독수리와 마력의 움직임을 막는 장치가 설치되어 있었다.

하늘을 날며 모두를 굽어보는 독수리는 누군가 무기를 들어 올리면 벼락같이 내려와 실격을 알리고, 정원을 빙 둘러 빼곡히 박혀 있는 결계석이 내부에서는 절대 마력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꽉 붙잡아 웬만한 대마법사가 아닌 이상 마법이든 흑마법이든 시도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 웬만한 대마법사지.”

히죽, 세라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나뭇가지에 걸터앉은 그녀의 두 다리가 기분 좋게 교차했다.

그녀의 품에는 방금 전까지 그곳에 앉아 있던 까마귀가 얌전히 안겨 있었다.

세라는 정원에 반마력 장치가 설치되어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환호성을 지르고 싶은 걸 꾹 참느라 혼이 났다.

마력을 묶어 놓는 장치라고 해서, 이 세상 모든 마력을 전부 묶어 둘 수는 없었다.

어디까지나 묶어 둘 수 있는 양의 한계가 있었고 그 이상의 마력을 운용할 수 있는 자가 온다면 장치는 아무런 작용을 하지 못한다.

예를 들면 위대한 대마법사 세라 로젠바움 같은.

“덕분에 나만 마력을 쓸 수 있게 됐네~.”

그러니까, 아케이드 경기장에 반마력 장치가 설치되어 있다는 말은 이곳에서 마력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세라뿐이라는 의미와 일맥상통했다.

남들은 못 하는 걸 혼자서만 할 수 있으니, 누구보다 세라에게 유리한 경기였다.

물론, 적당히 수상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남들을 감쪽같이 속이기 위해 귀찮게 잔머리를 굴려야 하고, 아주 간단한 마법을 쓰는 데에도 어마어마한 양의 마력을 들이부어야 하는 비효율이 발생하지만 무슨 상관인가.

“통과하면 그만이지.”

룰루. 콧노래를 부르며 품 안의 까마귀를 쓰다듬은 세라가 불어오는 바람을 한껏 음미했다. 여전히 텁텁한 모래를 동반한 뜨거운 공기였지만, 지금은 그것조차 기꺼웠다.

바람아 불어라. 쌩쌩 불어서 내게 나고 있을 흑마법 냄새를 멀리멀리 흩어 줘다오.

옛날 동화에 나오는 마법사의 흉내를 내며 흥얼거린다.

“돌아올 때가 됐는데?”

그러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 때, 시야를 가리는 나뭇가지를 헤치고 에녹이 사라졌던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예상대로 모이를 얻으러 갔던 에녹은 빈손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딱히 의욕이 없기는 했지만, 막상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돌아오니 어딘가 찜찜한 표정이었다.

당연했다. 맨몸으로 들어온 이들에게 어디에 모이가 있었겠는가. 그냥 세라가 그를 잠시 떨어뜨려 놓을 핑계가 필요했을 뿐이었으니 말이다.

세라가 속여야 하는 사람들에는 에녹도 포함되어 있었다.

흑마법에 누구보다 유감이 있을 사람이니 가장 들켜선 안 될 사람이었다.

“심통 난 것 좀 봐.”

점점 명확해지는 에녹의 표정을 훔쳐보며 키득거리던 세라가 쥐고 있던 가지를 놓아주고 자세를 바로 했다.

그리고 속으로 숫자를 셌다.

열…… 아홉…… 여덟…… 일곱…….

점점 줄어들기 시작하는 숫자가 모조리 사라졌을 때. 까마귀를 품에 안은 그녀의 몸이 옆으로 스르륵 쓰러졌다.

파스스. 가지가 크게 흔들리며 세라의 몸이 아래로 추락했다.

까아악! 그녀와 함께 추락하게 된 까마귀가 놀라서 바르작거렸다.

파란 하늘이 멀어진다.

떨어지는 순간, 마침 나무 근처를 지나가고 있던 에녹과 시선이 마주쳤다.

“……!”

그녀를 알아본 에녹이 두 눈을 부릅떴다.

편안하게 풀어져 있던 동공이 바짝 조여지고, 입술을 소리 없이 뻐끔거린다.

흔치 않게 진심으로 놀라는 표정이 제법 구경할 맛이 났다.

그래서 세라는 자신이 추락하고 있는 중인데도 그만 웃어 버렸다.

일부러 가까이 왔을 때 떨어졌으니, 에녹이 그녀를 못 받아 낼 리 없었다.

단숨에 거리를 좁힌 에녹이 얼른 세라를 제 품으로 받아 냈다.

그에게는 어려운 일도 아니었을 텐데 붙잡아 오는 손길이 어딘가 허둥지둥했다.

쿵, 쿵, 쿵, 쿵. 팔에 맞닿은 맨가슴 너머로 심장이 요동치는 맥박이 느껴졌다.

하지만 얼어붙은 호흡은 내쉬어지는 법 없이 멈춰 있었다.

많이 놀랐나?

의아한 낯으로 올려다보자 험악하게 인상을 구긴 에녹이 버럭, 호통을 내질렀다.

“너 미쳤어?! 나무엔 왜-!”

“짠. 이거 봐라~?”

하지만 그의 분노는 해맑은 목소리에 가로막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자랑스럽게 품을 열어젖힌 세라가 내내 소중히 품고 있던 짐승 하나를 그의 앞에 들이밀었다.

“내가 잡았어. 까마귀.”

까악-! 체감상 죽다 살아난 까마귀가 어떻게 좀 해 보라는 것처럼 푸드덕거렸다.

“잘했지?”

“하-.”

에녹이 기가 막힌 표정으로 세라와 까마귀를 번갈아 보았다.

차갑게 가라앉은 시선이 ‘겨우 이것 때문에 거기까지 올라갔다고?’ 하며 그녀를 질책하는 것 같았다.

“그래. 장하다. 장해.”

한껏 빈정거린 에녹이 먹고 떨어지라는 식으로 그녀를 칭찬했다.

세라를 땅에 내려 준 에녹이 그녀의 품에서 까마귀를 거칠게 빼앗아 들었다. 끄아악! 우악스러운 힘에 까마귀가 구슬프게도 울었다.

“얼른 가기나 해.”

쌀쌀맞게 대꾸한 에녹이 혼자 성큼성큼 앞서 나갔다.

그가 없는 사이에 문제를 해결했으니 일 안 해도 된다며 좋아할 줄 알았더니 이건 또 의외의 반응이었다.

에녹의 뒤를 쪼르르 따라붙은 세라가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빼꼼 고개를 들이밀었다.

“왜 심통이 났지? 안 신나? 조금 있으면 상 받잖아. 노예야.”

은근한 목소리로 포상을 들먹거려도 단단히 마음이 틀어졌는지 흥, 콧방귀를 뀌었다.

“뭐 얼마나 대단한 상 줄 건데.”

그는 딱히 세라의 상상력이 궁금하지 않다는 듯이 굴었다.

“우리 노예가 가장 좋아하는 거.”

하지만 그 무심함은 바로 이어진 세라의 말 앞에 와르르 무너졌다.

우뚝, 걸음을 멈춘 에녹이 얼마간의 기대가 담긴 어조로 되물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게 뭔데?”

목소리를 낮춘 세라가 그만 들을 수 있게 속닥거렸다.

“그거잖아. 그거.”

“…….”

“…….”

농염한 빛을 띤 눈짓이 둘 사이를 오갔다.

그 과정에서, 세라는 에녹을 둘러싸고 있는 쌀쌀맞은 공기가 실시간으로 녹아내리고 있는 걸 여실히 느꼈다. 그녀가 준비한 포상이 그의 흥미를 끌고 있다는 증거였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세라가 한 번 더 속삭였다.

아마 깜짝 놀랄걸?

그에 에녹의 눈 밑이 순간적으로 움찔, 반응을 보였다.

“……그, 정도야?”

금세 뜨거워진 페리도트 색 눈동자가 세라를 훑는다. 지금 당장 깜짝 놀랄 만한 무언가를 찾아내려는 것처럼 집요하기 그지없는 시선이었다.

한참 동안 그녀를 관찰하던 에녹의 목울대가 꿀꺽. 넘어간다.

그러고는 방금 내려놓은 세라를 번쩍 들어서는 아까보다 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여기. 우리 주인님이 잡은 까마귀.”

눈 깜짝할 사이에 심판대에 닿은 그가 다급한 손길로 까마귀를 내려놓았다.

맹렬한 기세에 찔끔하던 감독관이 눈앞에 들이밀어진 까마귀를 살폈다.

“음. 통과.”

그리하여 세라의 손에 쥐어진 합격 목걸이.

그녀가 첫 합격을 기뻐할 새도 없이 다시 번쩍 세라를 안아 올린 에녹이 빠르게 정원을 벗어나며 속삭였다.

“가. 지금. 당장 가. 포상 지금 당장 줘.”

누가 봐도 급해 보이는 그 얼굴에 세라가 못 말리겠다는 듯이 픽, 웃었다.

“밝히기는.”

***

그리고 에녹은, 세라가 단언했던 대로 제법 놀랐다.

당장 숙소로 돌아갈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세라는 에녹을 전혀 예상치 못한 곳으로 데려왔다.

“……주인님.”

북적이는 거리를 바라보던 에녹이 황망히 입술을 달싹였다.

“환락가에 맛 들였어?”

새카맣게 물든 그의 머리 위로 높이 걸린 홍등과 청등의 빛이 내리쬐고 있었다.

아직 해가 완전히 지기 전인데도, 에스텔라의 환락 거리는 벌써 그곳을 찾은 손님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세라는 눈을 찌르는 살색의 향연 앞에 지그시 두 눈을 감았다.

안 그래도 입을 게 별로 없는 곳이었는데, 그나마 낮에 입었던 옷이 얌전한 축에 속한 것이었다는 걸 여실히 깨닫게 해 주는 순간이었다.

이제 겨우 거리의 초입에 서 있을 뿐인데 성감을 돋우는 최음 향의 달큼한 냄새가 진동을 하고 있었다. 여기가 이런데,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상상하자 절로 눈앞이 아찔해졌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 아찔함을 환장하게 좋아할 것이다.

그리고 세라는 그 누군가의 이름도 알고 있었다.

“나 말고, 네가 들였겠지.”

비장하게 대꾸한 세라가 서슴없이 거리를 좁혀 높이 까치발을 들었다.

훅, 가까워진 얼굴에 입맞춤을 예감한 에녹이 우, 하고 입술을 내밀었다.

하지만 돌아온 건 보드라운 접촉이 아니라 철컥, 하고 목줄이 풀리는 소리였다.

“……?”

에녹은 뜬금없이 자신을 풀어 준 세라를 의아한 눈으로 쳐다봤다.

“길드에 있을 때도 일주일에 한 번은 꼭 이렇게 놀았다며?”

목줄을 든 채 떨어진 세라가 자애로운 미소와 함께 그의 등을 가볍게 떠밀었다.

“자, 가서 놀아.”

오늘 밤은 자유야.

선뜻 자유를 선사한 세라는 이것만큼 에녹을 기쁘게 할 포상이 없으리라 확신했다.

이 뒤끝 길고, 게으르고, 제멋대로인 노예를 다루기 위해서는 적절하게 당근을 건네주는 게 중요했다.

무사히 목적을 이루기 위해 고민하고 또 고민한 결과. 세라가 도달한 결론이 바로 이곳이었다.

듣자 하니 사막의 밤은 시그너스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문란하고 개방적이라지.

그래도 반신반의하고 있었는데, 넋이 빠진 에녹의 반응을 보아하니 탁월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뿌듯한 미소를 지은 세라가 에녹의 손에 준비해 온 주머니를 쥐여 주었다.

하룻밤 놀고도 남을 정도로 넉넉한 금화였다.

자유도 주고, 돈도 줬지만, 아직 세라가 내리는 포상은 끝나지 않았다.

“오늘은 안 들어와도 돼.”

화끈하게 외박까지 허락한 세라가 홀가분한 표정으로 그에게서 떨어졌다.

“…….”

얼마나 감격이 컸는지, 에녹은 세라가 나무에서 떨어졌을 때보다 더 놀란 낯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말 안 해도 알아. 고마운 거.

코끝을 찡긋하며 웃어 준 세라가 툭, 툭. 격려하듯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좋은 시간 보내. 까망아~.”

해맑게 손을 흔들어 준 세라가 미련 없이 등을 돌려 가 버렸다.

자신의 뒤에 남겨진 노예가 어떤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줄 꿈에도 모르고.

“하……!”

헛웃음을 터뜨린 에녹이 제 손에 쥐어진 돈주머니를 꽉 움켜쥐었다.

까드득. 그의 손안에서 금속이 부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제법 큰 돈을 돌덩이로 만들어 버렸음에도, 전혀 아쉽지 않은 기색이었다.

“……우리 주인님이.”

시퍼런 시선이 오직 멀어지는 작은 등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노예 부릴 줄 모르시네.”

가르쳐 주고 싶게.

기이한 방향으로 비틀린 입술 사이로 날카로운 송곳니가 번쩍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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