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에 나라를 팔았습니다-109화 (119/131)

#109

씩씩대며 술잔을 내려놓은 세라가 딱 잘라 선을 그었다.

“걔랑 나는 그냥 주인이랑 노예 관계야!”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어. 진짜 아무것도.

신경질적으로 중얼댄 세라를 향해 청년이 포도알을 내밀었다.

이번에도 손으로 받아먹은 그녀가 제 입 안에 든 게 에녹이라도 되는 양 와그작, 와그작 가차 없이 씹어 과육을 삼켰다.

그래. 모든 건 저 말이 문제다.

괜히 특별 취급이 뭐라느니 하는 말을 들어서, 아무 생각 없이 넘길 수 있는 행동 하나하나를 신경 쓰며 갈팡질팡하던 세월만 떠올리면 절로 이가 갈렸다.

다리 아프다는 말에 군말 없이 안아서 옮겨 주면 이거 혹시 특별 취급인가.

아침잠이 많아 식사를 하지 않겠다는 그녀에게 손수 밥을 먹여 주면 이거 혹시 특별 취급인가.

추워서 코를 훌쩍이는 그녀를 위해 제 침대를 놔두고 좁은 침대에 들어와 안아 줄 때면 이거 혹시 특별 취급인가…….

만약 이게 착각이라 하더라도 세라에게는 죄가 없을 정도로, 에녹은 여행길 내내 세라를 살뜰히 챙겼다. 귀찮은 일은 죽어도 안 하는 양반이 말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시그너스 길드를 떠나 에스텔라로 오는 동안 세라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다.

‘아야.’

‘다쳤어? 어디 봐.’

간혹 세라가 어딘가에 긁히거나 가벼운 상처를 입으면 그 부위를 혀로 사악, 핥아 주기만 했다. 그러면 상처가 나았다.

‘내가 노예 덕분에 겨울 온천을 다 와 보네.’

‘……온천 계란 드실래요?’

‘먹여 줘.’

함께 다 벗고 온천에 들어갔을 때도 순수하게 목욕만 즐겼다. 장난으로라도 야릇한 분위기가 형성되는 일 따윈 없었다.

‘노예야. 추워? 잠을 못 자네.’

‘조금요.’

‘난방 세게 틀어 달라고 해 놨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예전엔 춥다는 말만 해도 못 들러붙어서 안달이더니, 갑자기 정상인인 척 난방 타령을 하기 시작했다.

분명 그 전날까지만 해도 잡아먹을 듯이 그녀를 파고들었던 주제에, 그는 더 이상 그런 야릇한 충동일랑 세라에게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담백하게 굴었다.

그렇다고 욕구를 다른 곳에서 푸느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몇 번인가 스쳤던 마을에서 그를 유혹하던 사람들도 몇 있었지만 에녹이 자연스럽게 거절하는 모습을 몇 번이나 보았다.

하루라도 여자를 안지 못하면 도진다던 우울증도 여행 내내 잠잠했다.

사람의 욕구라는 게 이렇게 갑자기 사라질 수도 있는 거였나?

세라도 바보는 아니어서, 에녹이 자신에게 주는 것들이 일반적인 게 아니라는 건 알았다. 뭐라도 있으니 귀찮은 걸 싫어하는 인간이 이렇게나 살뜰히 챙겨 주는 거겠지.

문제는 그 정도가 어느 수준이냐는 거다.

자신은 에녹에게 좀, 많이, 특별한 사람일까?

이런, 얼굴을 하고 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저 두 문장이 머릿속을 지배하는 시간이 점점 늘어갔다.

그때마다 세라는 스스로가 구제할 수 없는 도끼병 환자가 된 것 같아 괴로웠다. 하지만 그것이 저울질을 그만둘 이유가 되어 주지는 못했다. 자신이 에녹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큰일이었다.

안 그래도 생각해야 할 게 산더미인데.

의뢰, 에델, 스노우, 형량 그리고 환생까지. 세라의 머리는 중첩되어 굴러가는 문제들은 고민하고 또 고민해도 모자랐다.

이건 시간 낭비야.

그래도 멈춰지지가 않는다.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의식이 자꾸만 에녹에게 가 붙었다.

세라는 자석처럼 들러붙는 의식의 끈을 확실하게 끊어 내고 싶었다.

결론이 필요했다.

더는 이 문제로 골머리 썩지 않을 수 있는 확실한 결론이.

그래서 한번 시험해 보기로 했다.

에스텔라에 도착한 세라는 기회를 노려 에녹을 환락가로 밀어 넣었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 그의 반응에 따라 낼 결론을 차근히 정리했다.

등 떠밀어 준다고 밤새워 놀고 다음 날 들어오면 앞으로 에녹에 관해서는 신경 쓸 일 없을 테고.

적당히 놀다 늦지 않게 들어온다면 같이 사는 동거인에 대한 배려 정도일 것이고.

곧장 숙소로 돌아간다면 특별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고.

결론은 허무할 정도로 금방이었다.

‘그거 좀 등 떠밀어 줬다고 감격할 건 또 뭐야.’

에녹의 반응은 그동안 신경 쓰던 게 허무할 정도로 빠르고 확실했다.

그녀가 자유라며 등을 떠밀고, 오늘 밤은 들어올 필요 없다며 등을 돌려 사라질 때까지도 그는 조용했다. 좋다 싫다 이렇다 할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돈주머니를 쥐고 감격하던 얼빠진 표정만큼은 확실했다.

다시 생각해 보면 그건 너무 좋아서 웃음을 참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별것도 아닌 게 왜 사람 오해하게 만들어.

세라가 짜증스럽게 눈썹을 찡그렸다.

그러면서도 향락이 줄줄 흐르는 거리에 두고 온 남자가 지금쯤 뭘 하고 있을지 유추해 보았다.

헤어진 게 삼십여 분 전이고, 손만 뻗으면 응해 줄 사람은 도처에 널렸고, 에녹은 손이 빠른 남자였다. 에스텔라의 밤은 몹시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분위기니까. 아무리 처음 만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아마 지금쯤이면…….

“에이씨.”

살색 향연 한 상상을 하던 세라가 거친 욕지기를 내뱉었다.

얼굴 없는 여자와 헐벗고 뒹구는 에녹의 모습에 술기운에 잠시 눌러 놓았던 조바심이 다시금 목 끝까지 치고 올라왔다.

왜 이렇게 기분이 더럽지.

세라는 그토록 원하던 결론에 도달하고서도 자신이 또 에녹을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이 못마땅했다.

결말을 알게 되면, 깨끗하게 머릿속에서 지워 버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내가 대체 왜 이러지.

그 문란한 남자가 다른 누군가와 뒹구는 건 이제 와선 놀라운 일도 아니었는데.

여태 누구랑 뒹굴어도 아, 그런가 보다 하고 신경조차 쓰지 않았는데.

아무 관계 없는 내가 왜!

‘이래서야 내가 걔를 특별히 의식하고 있는 것 같잖아.’

낚아채듯 술잔을 틀어쥔 그녀는 누가 말릴 새도 없이 또 끝까지 쭈욱 들이켰다.

난데없는 변화에 시중을 들던 청년이 토끼 눈을 하고 그녀를 쳐다봤다. 그러면서도 세라에게 포도알을 내미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상한 곁다리 빼고 용건만 간단히 해.”

신경질적으로 잔을 내려놓은 세라가 괜히 엉뚱한 곳을 향해 화풀이를 했다.

얼른 돌아가고 싶은 티를 팍팍 내는 그 물음에 니르샨이 곰방대를 뻐끔뻐끔 피워댔다.

“별 뜻은 없어. 내가 고용한 사람과 인사나 나누고, 격려 좀 하려던 것뿐이야.”

느릿하게 이어지는 발음이 어딘가 헐거웠다.

세라를 내려다보는 눈이 묘하게 흐릿했다. 술은 그녀가 다 먹었는데 그 또한 무언가에 단단히 취한 눈치였다.

그래. 저 상태로는 뭐 대단한 대화를 주고받기가 어렵긴 할 것 같았다.

정말 인사만 하자고 부른 건가. 세라가 찝찝한 표정으로 으적으적 포도를 씹으며 니르샨을 훑었다.

하체만 겨우 가린 채 허연 연기를 뻑뻑 피워대고 있는 남자는 아무리 좋게 봐줘도 뒷골목 조직 보스쯤이 어울렸다. 그런 자에게 순수한 의도가 있으리라고 믿는 건 어렵다.

꿀꺽, 다 씹은 과육을 삼킨 세라가 네가 잘도 그러겠다며 빈정거렸다.

“앞으로의 경기에서 도움을 달라거나, 여차하면 당신 대신 떨어져 달라고 할 줄 알았더니?”

니르샨은 그거야말로 금시초문이라는 듯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내가 그렇게 멋없어 보이나?”

“아니면 그게 더 이상하거든.”

이번에는 세라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그런 하수 같은 이유도 아니라면 그림이 우스워졌다.

니르샨과 세라가 동시에 아케이드에 참가한 시점에서, 그의 의뢰는 굳이 생돈 들여 머나먼 곳에서 경쟁자를 초빙해 온 것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의뢰 내용은 변하지 않아. 내가 원하는 건 당신의 아케이드 우승이야.”

니르샨은 자신이 그런 우스운 그림을 그리고 있노라 시인했다.

진심인가.

술기운이 올라오는 와중에도 심상치 않은 직감이 든 세라가 기민한 눈으로 그를 관찰했다.

“마지막에 당신과 나 둘만 남게 되면?”

“그렇다면 내가 경기를 포기하지. 그럼 부전승으로 손쉽게 우승할 수 있겠군.”

그녀의 가정에도 니르샨은 흔들리는 법이 없었다.

술을 짧게 홀짝인 의뢰주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아케이드의 우승은 반드시 너의 것이어야 한다고 못 박았다.

옛 성현이 남긴 말이 있다.

재채기와 사랑은 숨길 수가 없다고.

비슷한 맥락에서 세라가 맹신하는 말이 있다.

탐욕과 살의는 숨길 수가 없다.

니르샨이 이렇게나 시원하고, 이렇게나 커다란 방을 홀로 독차지하고서는 예쁜 미인들 사이에 둘러싸여 그녀를 맞은 건 분명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함일 것이다. 내가 이렇게 가진 게 많으니 잘하라는 의미에서.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이토록 속물적인 경고를 하면서도 니르샨의 눈에는 탐욕이랄 게 없었다.

“당신, 보물에 관심이 없구나?”

“고용인이 눈치가 빨라서 다행이군. 근데…….”

어렵지 않게 속내를 밝힌 니르샨의 시선이 세라의 얼굴에서 바닥까지 쭈욱 떨어져 내렸다.

“안 먹겠다고 하지 않았어?”

그의 시선 끝에는 어느새 또 비어 버린 세라의 술잔이 있었다.

내가 언제 또 마셨지.

세라는 당황한 눈으로 빈 잔을 내려다보았다.

분명 청년이 새 술을 따라 준 것까진 기억이 나는데, 자신이 언제 마셨는지는 기억이 뚜렷하지 않았다.

자기가 해 놓고서도 기억을 못 하는 행태에 니르샨이 귀엽다는 듯이 픽, 웃으며 그녀를 도발했다.

“많이 마시는 것 같은데. 괜찮은가? 그 정도면 꽤 취했을 것 같은데.”

“그저 맛있어서 먹었을 뿐이야. 난 멀쩡하거든?”

세라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녀는 조금도 멀쩡하지 않았다.

빈속에 들이켠 독주가 세라의 배 속에 똬리를 뜬 채 독한 기운을 풀풀 풍기고 있었다.

조금 많이 마셨다는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열 오른 정신이 순식간에 몽롱해졌다.

세라는 직감했다.

아씨, 취했구나.

하지만 어쩐지 목적이 의뭉스러운 의뢰주를 앞에 두고 흐트러지기에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녀는 최대한 멀쩡한 척을 하기 위해 일부러 눈에 힘을 빡 줬다.

겨우 한 잔을 비워 낸 니르샨이 새로운 흥밋거리를 찾은 것처럼 끈덕지게 물고 늘어졌다.

“술이 맛있을 때는 인생이 쓸 때뿐인데. 고민거리라도 있나 보지?”

그때, 새로이 술잔을 채운 청년이 어김없이 세라의 입 앞에 포도알을 내밀었다.

“……그런 거 아니니까 신경 꺼.”

세라는 취하지 않은 척 냉정한 얼굴을 하고서 그것을 입으로 받아먹었다.

어, 보기 좋은 미소를 짓고 있던 청년이 일순 당황하여 소리를 내었지만, 세라는 이마저도 듣지 못했다.

그저 제 입술 안쪽을 스친 남자의 손가락이 꼭 얼음처럼 차갑다는 사실에만 집중했다.

이토록 다른 사람이 차갑게 느껴지는 건 그녀의 체온이 비이상적으로 높기 때문이다.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이곳에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딱 좋을 정도로 시원했는데.

문득 뺨이 화끈해질 정도로 끓어오른 열기를 느낀 세라가 손부채질을 해 댔다.

“여기 좀, 덥지 않아?”

“취했구만.”

두서없는 대화에 니르샨이 쯧쯧쯧, 안타깝다는 듯이 혀를 찼다.

언뜻 인생이 많이 썼던 모양이지? 하는 장난 섞인 농담을 들은 것 같았지만 붕 뜬 머리가 대답을 해야 한다는 생각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근심이 많으면 몸이 무거워지지. 마음속의 걱정거리가 있다면 하루가 지나기 전에 전부 털어 내는 게 좋아.”

그러고 나면 다음 날 머릿속이 깨끗해질 테니까.

곰방대를 입에 문 니르샨이 제법 연장자다운 조언을 해 주었다.

“어떻게 털어 내는데?”

갑자기 그 조언이 듣고 싶어진 건 어디까지나 취기의 힘이었다.

내내 성가시게 들러붙는 상념을 털어 낼 수 있는 그런 마법 같은 일이 가능하다면 시도해 봐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녀가 대화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마음에 들었는지 니르샨이 위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여태 그녀의 곁에서 시중을 들었던 남자를 턱짓했다.

“그 아이, 제법 괜찮지 않아?”

세라의 시선이 처음으로 눈앞의 청년을 면밀히 살폈다.

적당히 마른 근육이 잡힌 몸에, 조막만 한 얼굴, 그 속에 담긴 이목구비가 제법 반듯했다.

여기 와서는 우락부락한 남자들만 봤는데 이런 사람도 있었군.

“……예쁘긴 하네.”

특히나 밝은색의 눈이 별처럼 반짝이는 게 눈길을 끌었다.

제 노예의 미모를 인정받은 게 기쁜 걸까 니르샨이 만족스럽게 눈꼬리를 휘었다.

“그래. 침실 노예로 제법 인기가 많은 녀석이지.”

그리고 바로 문란한 소리를 입에 올렸다.

“어때? 오늘 밤은 그 녀석에게 신세를 져 보는 건.”

“…….”

그에 세라의 얼굴에서 일말의 흥미가 모조리 사라져 버렸다.

뭐 얼마나 대단한 해결책을 제시해 주나 했더니, 결국 섹스냐.

질색하는 기색을 느꼈을 텐데도, 니르샨은 새겨들으라며 연설을 이어 나갔다.

“근심거리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땀 한번 쭉 빼고 나면 내가 뭣 때문에 그렇게 괴로워했는지도 기억 안 날걸.”

아주,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이었다.

저토록 있어 보이는 척 무게를 잡고 있는데, 입에서 나오는 단어 하나하나가 깃털처럼 가볍기도 쉽지 않은 일이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삶의 태도에 세라가 없던 정도 다 떨어진 얼굴을 했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섹스 못 해서 환장한 놈들밖에 없나.

그게 그렇게 아무나랑 뒹굴 정도로 좋은가.

“아니. 나는-.”

문란하기 짝이 없다며 꿍얼댄 그녀가 평소와 똑같이 딱 잘라 거절하려다가.

“……?”

새삼스러운 깨달음을 얻고는 말끝을 흐렸다.

순간적으로 자신이 왜 굳이 거절해야 하느냐는 근본적인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나는 왜 당연하게 거절하려고 했지?

이유를 찾아보려 애써도 이렇다 할 무언가가 떠오르지 않았다.

에녹이 아닌 다른 사람과 몸을 섞는다.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한 전개다. 떠올리자마자 미약한 거부감이 들었지만 그보다 ‘왜 나는 하면 안 되는데?’ 하는 오기가 먼저였다.

원래 처음이 어렵지 두 번, 세 번은 쉬운 법이야.

어쩌면 세라의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은 이유는 그런 경험을 한 상대가 에녹뿐이라서가 아닐까. 라는 의문도 함께.

평소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사고에 취기가 더해지니 멈추는 법을 모르는 경주마처럼 생각이 내달렸다.

“그게 그렇게, 효과가 좋아?”

그렇게 내달린 곳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건 선량한 호기심의 가면을 쓴 위험한 충동이었다.

“물론이지.”

내 모든 인생을 걸고 보증할 수 있어.

솔깃해하는 세라를 향해 니르샨이 강하게 긍정했다.

뭘 또 인생까지. 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저렇게까지 말하니 없던 믿음이 솟아났다.

에녹도, 니르샨도 그리고 그 외 많은 사람들도 저렇게 사는데 자기라고 못 할 거 없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솟아올랐다.

“……그래.”

그래. 어쩌면.

다른 사람과 하고 나면 에녹이 그녀에게 유일해질 일이 없으니 그가 더 이상 신경 쓰이지 않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까짓거 시도해 봐서 나쁠 것 없-.”

그리하여, 마침내 결단을 내린 세라가 자신을 기다리는 청년을 향해 손을 뻗은 순간.

“지랄하네.”

그녀의 등 뒤, 방 안의 조명이 닿지 못한 어둠 속에서 싸늘한 욕설이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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