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사람이 상상 이상으로 의외의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면 비명도 못 지른다고 했던가.
세라가 바로 딱 그랬다.
아니, 세라뿐만이 아니라 같은 공간에 있는 모두가 그랬다.
하지만 그중에서 가장 소스라치게 놀란 사람을 꼽자면.
“허, 허억……!”
세라의 술 시중을 들어 주던 청년이었다.
그녀의 뒤편을 올려다본 청년은 대체 무엇을 봤는지 그 곱던 얼굴이 새하얗다 못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두 눈을 크게 홉뜬 채, 입을 다물지도 못하는 모습이 꼭 어두운 산에서 굶주린 맹수를 만난 사람 같았다. 니르샨이라고 해서 청년과 딱히 사정이 다르지는 않았다. 그만큼 창백한 낯은 아니었지만, 그도 그 주변의 여자들도 못 볼 것을 본 표정으로 어둠의 저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뚜벅, 그때, 발소리가 들렸다.
세라의 등 뒤에서였다.
유난히 크게 울린 발소리가 그녀의 뒷덜미를 물어뜯는 맹수의 이빨처럼 세라의 신경을 깨웠다. 등골이 쭈뼛해졌다.
“…….”
불길한 예감이 든 세라가 숨죽여 뒤를 돌아봤다.
“어딜 가려고 거리를 빙빙 도나 했더니.”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그녀의 등 뒤까지 바짝 쫓아온 어둠 속, 형형하게 빛나는 맹수의 눈동자였다. 그것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동공이 바짝 조여든 맹수의 눈동자에 번쩍 불꽃이 튀었다.
닿는 모든 것을 재로 만들어 버릴 것처럼 맹렬하게 타오르지만 그 속에 단단하게 자리 잡고 있는 건 놀라울 정도로 차가운 냉기였다.
“이딴 곳을 와?”
너무 시려서, 순간적으로 술이 확 깨 버렸다.
헉, 숨을 들이켠 세라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꼭 나쁜 짓을 하다 들켜 버린 것처럼.
“잘못한 줄은 아나 보지.”
세라와 눈이 마주친 맹수가 그녀를 향해 성큼 거리를 좁혔다.
짐승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찰랑이는 금속음이 났다.
그게 꼭, 성난 짐승을 옭아맨 쇠사슬 소리처럼 들렸다. 그가 함부로 인간을 해치지 못하도록 옥죄는 마지막 남은 이성의 끈 같은 것 말이다.
찰그랑. 찰그랑. 맑게도 흔들리는 황금 장식 줄이 조명 빛을 반사했다.
어둠과 희끄무레한 연기를 뚫고 다가온 짐승의 형체가 뚜렷해진다.
시커먼 어둠 속에서, 그것보다 더 시커먼 머리카락을 한 커다란 남자가 나타났다.
결코 이곳에 있을 리 없는 남자가.
“……에-.”
반사적으로 에녹의 이름을 부를 뻔했던 세라가 황급히 말을 바꿨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
“언제부터 거기 있었지?”
그녀의 목소리 위로 다른 이의 물음이 겹쳤다.
니르샨이었다.
“바깥에 분명 경비를 세워 뒀을 텐데.”
그는 기가 막힌 얼굴로 당연하다는 듯이 제집 안에서 걸어 나오는 남의 노예를 쳐다봤다.
꿈틀, 나른하게 풀어져 있던 눈에 총기가 돌아온다.
세라를 이 안에 들이고 꽤 시간이 흘렀지만, 대체 저놈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들어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에스텔라의 고위층들이 은밀한 밤놀이를 즐기는 ‘황금 새’는 단순해 보이는 외양과는 달리 경비가 몹시 삼엄했다.
허가받지 않은 자에게는 문이 열리지도 않았고, 행여나 무력으로 밀고 들어오는 이들을 경계하기 위해 방문객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위치에 내로라하는 전투 노예들이 매일 3교대씩 경비를 섰다.
그래도 밀고 들어오려고 하면, 비상등이 켜지면서 황금 새와 근교에 있는 니르샨의 사병 주거지에서 수십 명의 전투 노예들이 달려오도록 설계되어 있다.
니르샨은 이 과하다 싶을 정도의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 수백 명의 전투 노예를 상시 대기시키고, 그들을 먹이고, 재우고, 입히는 데에만 천문학적인 돈을 지불하고 있었다.
그의 허락 없이는 개미 새끼 한 마리도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는 철통 보안이 핵심이었다. 가진 게 많은 놈들일수록 비밀이 많았고, 그 비밀을 마음 놓고 떠들어댈 수 있는 장소는 에스텔라에서 바로 이곳. 니르샨이 운영하는 ‘황금 새’뿐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동안의 명성이 무색하게도 지금, 바로 여기.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 버젓이 제 눈앞에 걸어 나왔다. 심지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아무런 보고도 듣지 못했다.
“……경비 체계에 구멍이 생긴 건가?”
아니면 그동안 헛돈을 쓰고 있었다던가.
심각하게 얼굴을 굳힌 니르샨이 에녹의 대답을 애타게 기다렸다.
“내 주인님이 저 불여우 같은 새끼를 침대에 끌어들인다는데.”
그러나 세라의 노예는 니르샨의 사정일랑 제 알 바 아니라는 듯 불량하게 되받아쳤다.
“지금 그게 중요할까?”
응? 네가 대답해 봐.
재차 고개를 기울인 그가 세라와 가장 가까이 있는 청년을 향해 물었다.
노려보는 눈빛에 살기가 풀풀 풍겼다.
“아, 아니요. 중요하지 않습니다……!”
청년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어 그가 원하는 답을 바쳤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인간의 가죽을 뒤집어쓴 짐승이 당장이라도 제 목부터 물어뜯을 것 같은 위협을 느꼈다.
“……거, 생사람 잡지 말고 살기를 좀 줄이지 그래.”
보다 못한 니르샨이 애꿎은 사람을 잡지 말라며 에녹을 말렸다.
“네 주인도 받아들인 일이야.”
“…….”
“노예로서 주인을 독차지하고 싶은 마음이야 알겠지만, 같은 노예라도 각자 맡은 바가 다른 법이니까.”
나름 너와 저 청년의 쓰임새가 다르니 받아들이라 좋은 말로 타이른 것이었으나, 효과는 정반대로 작용했다.
“네가 순진한 남의 주인님을 꼬드겼으니까 그렇지.”
“……허어.”
졸지에 순진한 여자 등쳐먹는 사기꾼이 되어 버린 니르샨이 얼빠진 소리를 냈다.
난생처음. 노예에게 반말을 들어 봤다. 노예 주제에 하대가 자연스럽다. 그리고 자신도 이상했다. 감히 노예 따위가 어디다 대고 반말이냐며 타박해야 하는데, 기분이 조금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들어야 할 말을 들은 것처럼 편-안했다.
침착한 니르샨과는 달리, 제대로 화를 내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그를 에워싸고 있던 여자들이다.
“감히! 한낱 노예 따위가 우리 주인님께!”
“노예의 기본이 안 되어 있는 자군요!”
제 주인이 당한 무례를 참지 않은 노예들이 한마디씩 쏘아붙였다. 니르샨을 향하던 에녹의 시선이 스르륵 그들을 향해 미끄러졌다.
그리고 또 묻는다.
“중요한가?”
점점 짧아지는 질문에는 이번에도 진득한 살기가 묻어 나왔다.
그는 여자, 남자, 주인, 노예 가리지 않고 제 안의 불편한 심기를 마음껏 분출하는 중이었다.
“……!”
“니, 니르샨 님…….”
뒤늦게 기겁을 한 여자들이 굴속으로 피신하는 토끼들처럼 니르샨의 등 뒤로 숨었다.
그러다 빼꼼 고개를 내밀어 두려운 눈으로 에녹을 살폈다.
무슨 노예가 저렇게 당당하고 살벌해? 너 노예 아니지…….
같은 노예인데 동질감은커녕 매초마다 저 멀리 동떨어진 이질감이 느껴졌다.
“나 참-.”
제 노예들이 에녹의 눈치를 보는 동안 니르샨은 가소롭다는 듯이 곰방대만 뻑뻑 피워댔다.
가끔 있었다.
자신이 주인에게 뭐라도 된다고 착각하는 노예들이.
노예에게 주인은 하나뿐이지만, 주인에게 노예는 여럿일 수 있다는 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어리숙한 놈.
한심하다는 눈으로 에녹을 바라본 니르샨이 그의 주제 파악을 위해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까지 흥분하지? 분명 네 주인은 너와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그리하여, 니르샨이 세라가 했던 말을 고스란히 읊어 준 순간.
“……!”
시커멓게 물든 연둣빛 눈동자를 마주하고는 저도 모르게 합, 하고 입을 다물었다.
어둠을 등지고 선 노예의 어깨 위로 시뻘건 기운이 일렁이는 듯한 착시가 일었다.
그저 상대가 눈빛 한 번 바뀌었을 뿐인데, 숨을 통해 들어오는 공기가 묵직해졌다.
니르샨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는 살기는 마치 거인의 발길질과도 같아서, 가만히 있어도 온몸이 짓눌려 죽어 버릴 것 같은 섬뜩한 위기감이 들었다.
니르샨이 조용해지자, 흉흉한 시선이 곧장 세라에게로 떨어졌다.
딸꾹. 겁이 나기는 주인도 마찬가지인지. 아플 정도로 강렬한 눈 맞춤에 세라가 요란하게 딸꾹질을 해댔다.
그럼에도 에녹은 그녀를 봐주지 않고 추궁했다.
“해명해.”
“……난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세라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거짓 증언을 했다.
이렇게 손바닥 뒤집듯 낯을 바꾸는 이유는 취한 와중에도 송곳처럼 솟아나는 생존 본능의 작품이었다.
에녹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는다.
“그래?”
의미심장하게 말끝을 올렸다. 웃고는 있지만 믿지 않는 눈치였다.
당연했다. 그는 세라가 이 거지 같은 방에 발을 들인 그 첫 순간부터 쭉 거기에 있었으니까.
하지만 굳이, 제 주인의 거짓말을 들춰내지 않았다.
다만, 들었냐는 표정으로 의기양양하게 니르샨을 쳐다본다. 그러면서 명령했다.
“채워.”
“뭘……?”
“목줄.”
네가 멋대로 풀어 버린 목줄을 다시 원상 복귀시켜 놓으라고.
“어, 어, 응.”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인 세라가 자리에서 일어나 후다닥 에녹에게로 다가갔다.
그녀로서는 똑바로 달려갔다고 생각했는데, 술에 취한 걸음이 불안하게 휘청거린다. 그래서인지 목줄을 채우는 손이 자꾸만 빗나갔다.
“이게 왜, 세 개로 보이지.”
눈을 게슴츠레 뜬 세라가 낑낑댔다.
철컥, 철컥. 계속해서 빗나가는 게 답답할 만도 하건만.
에녹은 처음부터 끝까지 세라가 제게 목줄을 채우는 광경을 빠짐없이 지켜보았다.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무섭도록 집중한 표정으로.
“아, 됐다.”
철컥. 한참을 헤매던 고리가 비로소 제자리에 들어갔다.
그제야 에녹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참 잘했어요. 주인님.”
커다란 손이 칭찬하듯 동그란 군청색의 머리통을 슥슥 쓸어내렸다.
말로만 주인님이라고 하지, 행동은 이쪽이 주인님처럼 보였다.
그만큼 노예가 하기엔 더없이 무례한 행동이었으나, 그것을 지적하는 사람은 없었다.
“보다시피 우리 주인님이 아직 초짜라서, 노예 다루는 법을 잘 몰라.”
거의 끌어안듯이 휘청대는 세라를 품에 안은 에녹이, 뜨끈한 정수리에 턱을 얹고서는 자신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는 니르샨과 눈을 맞췄다.
“그러니 새 노예 같은 건 필요 없어.”
뭐야 쟤. 눈이 이상해…….
생리적인 거부감이 든 니르샨이 움찔, 입매를 꿈틀거렸다.
누군가의 밤을 책임지는 일을 하다 보니, 니르샨은 살면서 별의별 미친놈을 다 만나 봤다.
덕분에 니르샨은 가짜 광기와 진짜 광기를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
그리고 다년간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저놈은 진짜였다.
“이의 있는 사람?”
그 진짜 돌은 새끼가, 시선이 닿는 모든 사람과 하나하나 눈을 맞추며 의견을 물었다.
언뜻 다정하고 민주적인 소통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보기도 하나, 정답도 하나뿐인 객관식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동시에 대답했다.
“없어.”
“없어요.”
“없, 없어요오.”
에녹이 송곳니를 번뜩이며 쌔액, 입술을 찢어 웃었다.
“참 잘했어요.”
세상에서 제일 음산한 칭찬이었다.
***
쾅!
문이 거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열린 틈 너머로 한 덩이처럼 얽힌 두 사람이 밀고 들어왔다.
한 명은 여자, 한 명은 남자였다.
남자의 강인한 팔이 한 줌도 되지 않는 여자의 허리를 단단히 휘감고 있었다. 희고 가느다란 여자의 팔은 남자의 목에 매달려 있었다.
남자의 품에 안긴 여자는 키 차이 때문에 두 다리가 땅에 닿지 못하고 있었다.
쭈웁, 쭙, 둘 사이 한 치의 틈도 허용치 않겠다는 듯이 밀착한 그들은 입을 맞추는 중이었다. 빠르고, 동물적이었다. 맞닿은 고개가 여러 방향으로 돌아가며 거친 숨을 토해 냈다. 언뜻 보기에 두 사람 모두 열렬하게 입맞춤을 나누는 것으로 보였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자는 힘없이 몸을 늘어뜨리고 있었고, 달려드는 쪽은 오로지 남자뿐이라는 게 보였다.
쾅! 다시 문이 닫힌다.
약간의 빛마저 잃어버린 방 안이 다시 암흑에 잠긴다.
고요한 어둠 속에서 입술이 무언가를 물고 빠는 소리만이 적나라하게 울려 퍼졌다.
으응, 응. 가끔 여자의 신음도 함께였다.
쩝, 추웁, 남자는 게걸스럽게도 여자의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그러다 돌연 키스를 멈추고는 여자를 뒤로 내팽개쳤다.
풀썩, 가느다란 몸이 그대로 침대 위에 엎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