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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에 나라를 팔았습니다-116화 (126/131)

#116

끝까지 선량한 척 연기를 하던 암살자가 가면을 집어던진 것도 그즈음이었다.

“눈치가, 큭, 빠르군.”

짧은 숨을 허덕인 남자가 입술을 비틀었다.

그것만으로도 친절해 보이던 인상이 완전히 달라졌다. 현행범으로 붙잡힌 상황인데도 남자는 여유로워 보였다.

비릿한 미소를 지은 암살자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품에서 단검을 뽑아 든 그가 능숙하게 검을 내려찍었다.

순간, 검 끝이 에녹을 향하는 줄 안 세라가 다급하게 마력을 끌어올렸으나 남자가 한발 먼저였다.

푹, 살이 베여 나가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사방에서 비명이 쏟아졌다.

스스로의 손목을 그어 버린 암살자에게서 새빨간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꺄아악!”

“자기 팔을 찔렀어!”

갑작스러운 남자의 자해에 구경하던 사람들이 기겁을 하며 뒷걸음질 쳤다.

무분별하게 튀어 오른 핏물이 에녹의 뺨과 오른쪽 어깨를 흥건히 물들였다. 부상을 입은 건 본인인데도, 암살자는 이겼다는 표정으로 제 피를 뒤집어쓴 에녹을 바라보았다.

“쯧, 더럽게.”

상체에서 느껴지는 기분 나쁜 감촉에 불쾌한 듯 미간을 구겼지만 그뿐이었다.

피를 뒤집어쓰기는 했지만 그는 멀쩡했고, 암살자가 기대할 법한 변화 같은 건 일어나지 않았다.

“어, 어떻게-.”

크게 당황한 암살자가 말을 더듬었다.

결코 이럴 리가 없다는 반응이었다.

산만하게 허공을 헤매던 시선이 마지막 기대를 담아 에녹의 어깨 너머로 향했다.

에녹이 그 너머에 있을 누군가를 떠올린 순간.

“아야야…….”

등 뒤에서, 이변을 알리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게 유난히 에녹의 귀에 꽂혔다.

“…….”

그가 미간을 구긴 표정 그대로 뒤를 돌아보았다.

“대체 뭘 처먹고 다녔길래. 이딴…….”

에녹만큼은 아니지만, 세라도 남자의 피를 어느 정도 뒤집어쓰고 있었다.

불만스럽게 투덜댄 그녀는 어깨 부근이 불편한지 한 손으로 감싼 채였다.

남자의 피에 닿은 새하얀 살갗이 치이익. 끔찍한 연기를 뿜으며 벌겋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환부에 닿은 에녹의 동공이 깊게 조여들었다.

“……더럽게 아프네.”

고통으로 찡그려진 얼굴에 송골송골 식은땀이 솟아났다.

한순간에 시체처럼 창백해지는 모습 위로, 신이 난 암살자가 친절한 설명을 덧붙였다.

“평생, 독을 먹어 응축시킨, 혈액이다. 큭, 이제 저 여자는 온 구멍에서 피를 쏟다가 죽게 될- 커헉! 컥!”

세라의 끔찍한 최후를 예견하던 남자가 재차 목을 졸려 꺽꺽거렸다.

목을 부러뜨릴 기세로 쥐어 오는 악력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암살자는 온몸으로 발버둥 쳤다. 하지만 바위처럼 단단한 팔뚝은 흔들리는 법이 없었고, 에녹은 그를 쳐다보고 있지조차 않았다.

“……어, 진짜네.”

그때, 그의 말을 증명하듯 세라의 코에서 새카맣게 변한 핏줄기가 주륵, 미끄러졌다.

그것을 손끝으로 찍어 확인한 그녀가 그제야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후회할 때는 언제나 늦다고, 에녹만 믿고 경계를 너무 풀고 다녔다는 걸 인정한 것이다.

남자의 혈액 그 자체인 맹독은 과연 비장의 무기로 숨겨 둘 정도로 효과가 굉장했다.

아직 독에 노출된 지 몇 분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부터 손끝이 저렸다.

이건 좋지 않다.

빠르게 핏기가 가신 얼굴이 시체처럼 창백해졌다.

농담으로 듣고 흘렸는데, 에녹이 했던 말처럼 한 방에 잘못 가는 수가 정말로 있을 것 같다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내심 불안해진 세라가 어색하게 웃으며 에녹에게 매달렸다.

“까망아. 너 해독할 수 있지?”

“…….”

그런데 어째서인지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까망아?”

설마 이건 안 되나? 덜컥 걱정이 된 세라가 식겁한 눈으로 그를 올려 봤다가.

“……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에녹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부름을 멈추었다.

그녀는 마치 봐서는 안 될 것을 본 사람처럼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까부터 말이 없는 에녹은 실시간으로 생기가 빠져나가는 그 얼굴을 보고서도 조용했다.

그는 숨을 쉬는 것도 잊은 채 세라만을, 오직 그녀만을 바라봤다.

에녹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세라의 위치에서만 확인할 수 있었다.

그녀는 가까스로 유지하고 있던 어색한 미소를 사그라뜨렸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

“…….”

동공이 바짝 조여든 시선이 세라를 훑는다.

솜털 하나하나까지 망막에 새길 기세로 뚫어져라 쳐다본다.

삐걱대며 움직인 시선은 유난히 창백한 얼굴에 오랫동안 머물렀다.

시체처럼 창백해진 얼굴, 점점이 튄 핏자국. 어지럽게 방황하던 시선이 핏기를 잃은 입술에 닿았을 때.

“……!”

에녹이 그제야 참고 있던 숨을 터뜨렸다.

암살자의 목을 쥔 강건한 팔이 미세하게 떨렸다.

아니, 사실 움직인 건 에녹이 아니었다.

드드드드-.

멀리서부터 조금씩, 하지만 확실하게, 땅이 울렸다.

점점 진폭을 키운 진동이 그들을 향해 가까워졌다.

어어, 익숙지 않은 상황에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웅성거렸다.

그러다 쨍그랑! 진동을 이기지 못한 테이블이 쓰러지며 날카로운 파열음이 울렸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쿠르릉! 쿠릉! 땅이 뒤흔들리며 흩날린 모래가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쩌저적! 쩌적! 진동을 이기지 못한 건물 벽에 살벌하게 금이 갔다.

갑자기 밀려온 땅 울음은 금방 사그라들 기미 없이 점점 거세지기만 했다.

“꺄아악! 가, 갑자기 땅이 왜……!”

“지진인가 봐!”

“이, 일단 도망쳐!”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래!”

심상치 않은 위기감을 느낀 사람들이 하나둘 대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에스텔라는 평소 지진 활동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던 지역이라 체계화된 행동 강령이 있을 리 만무했다.

개미 떼처럼 흩어지는 사람들 때문에 안 그래도 정신이 없던 시가지가 한층 더 혼돈의 도가니가 되었다.

그 난장판 속에서 대피하지 않은 사람은 세라뿐이었다.

“야! 너 왜 그래!”

그사이 더 핼쑥해진 그녀가 에녹을 붙잡고 늘어졌다.

마치 이 모든 사달이 전부 그 때문에 일어난 일인 것처럼.

그리고 정말 기가 막히게도, 이 갑작스러운 자연재해는 에녹의 탓이 맞았다.

세라는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무시무시한 기운에 압사당할 것 같았다.

에녹이 화났다.

그것도 아주 미친 듯이.

자연을 비틀어 버릴 정도로 폭발하는 기운의 원천은 비단 분노만이 아니었다.

“새삼스레 뭐 이런 걸로 이렇게 화내고 그래? 어?”

세라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의 격한 반응이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인간이 뭘 겨우 이런 일로 길드 하나를 뒤집어 버릴 듯이 구는지.

“그만 좀 해! 걔 이미 눈 까뒤집고 기절했구만!”

세라가 게거품을 물고 늘어진 암살자를 가리키며 적은 이미 쓰러졌음을 알렸다.

우르릉!

하지만 그 언급이 도리어 에녹의 화를 돋웠는지 그들의 등 뒤에 있던 가게가 기어코 무너져 내렸다. 에녹에게는 지금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야, 임마!”

참다못한 세라가 젖 먹던 힘까지 끌어모아 에녹의 싸대기를 갈겼다.

쫘아악!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에녹의 고개가 돌아갔다.

“아파 죽겠으니까, 빨리 치료 좀 해 달라고!”

“……아-.”

그 말 때문인지, 아니면 얻어맞은 충격 때문인지 에녹이 처음으로 대답 비슷한 것을 흘렸다.

길드를 부숴 버릴 듯이 뒤흔들던 지진이 삽시간에 멎었다.

“……이리 줘.”

제정신이 돌아온 사람처럼 눈을 껌뻑인 그가 서툴게 세라의 손을 찾아 쥐었다.

깜빡, 깜빡, 그가 눈을 한 번씩 깜빡일 때마다 집 나간 이성이 서서히 돌아오는 게 눈에 보였다.

그와 함께, 세라를 괴롭히던 중독 증상도 서서히 걷혀 나갔다.

“하아, 이제야 좀 살겠네-.”

숨통이 좀 트인 세라가 안도 섞인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짧은 시간 동안 생명력이 몸 밖으로 쭉쭉 빠져나가는 경험은 여태까지 중에 가장 죽음과 닮아 있었다.

다음부턴 진짜 조심해야지.

새로운 교훈을 가슴에 묻은 그녀가 힐끗, 에녹을 올려다보았다.

아까보다는 낫지만, 그는 아직까지도 나사 하나가 빠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일단 다른 사람들 몰려오기 전에 튀자.”

목격자가 남아 있지 않음을 확인한 세라가 범행 현장을 벗어나려는 용의자처럼 서둘러 에녹을 재촉했을 때였다.

“동작 그만.”

분명 방금 전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했는데도, 뒤에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거기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마라.”

갑자기 솟아난 불청객이 세라와 에녹에게 경고한 순간.

“……!”

헉, 소스라치게 놀란 세라가 숨을 들이켰다.

아직 누구인지 얼굴조차 확인하지 못했지만, 한 가지만큼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마법사다.

남자의 말에 따라 위협적으로 꿈틀대는 마력의 움직임이 여실히 느껴졌다.

흑마법사도 아닌데 이렇게나 강력한 언령이라니. 적어도 수백 년은 살아온 강력한 마법사였다.

“누가 내 축제를 망치고 있나 했더니 너였군. 에녹 소서.”

심지어 그 마법사는 에녹의 정체마저 한 번에 꿰뚫었다.

움찔, 이번에는 에녹도 놀랐는지 턱 근육이 딱딱하게 일어섰다.

허어억, 기겁을 한 세라가 반사적으로 에녹과 남자 사이를 가로막았다.

“……사,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남자와 가까워지자 그녀의 영혼에 새겨진 마력 회로가 기이하게 술렁였다.

예로부터 신의 선물인 마법과 신의 금기인 흑마법은 상성이 좋지 않았다.

같은 극을 맞댄 자석처럼 세라와 남자의 마력 회로는 서로를 멀리 밀어내고 있었다.

강력한 척력을 느낀 남자가 처음으로 세라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녀는 사람의 시선에 물리력이 실릴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너는 누구지?”

못마땅한 눈으로 세라를 살핀 남자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내가 계약한 건 분명 스노우. 그 남자였을 텐데.”

넌 뭐냐는 시비조의 물음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예?”

“뭐?”

마법사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튀어나온 스노우의 이름에 세라와 에녹이 동시에 반문했다.

네가 왜 거기서 나와?

딱 그 표정으로 바라보는 둘에, 남자가 일말의 불안감이 섞인 어조로 덧붙여 설명했다.

“에스텔라 길드가 시그너스에 요청한 의뢰 말이다.”

“의뢰-?”

“그래. 아케이드의 우승이 달린.”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내용에 둘의 표정이 한층 더 미묘해졌다.

“스노우는 어디 있지? 함께 오지 않은 건가?”

“……그 사람은 사정이 생겨서 내가 대신 온-. 아니, 잠깐.”

순순히 대답하던 세라가 두 손을 앞으로 내밀어 남자의 말을 저지했다.

그러니까, 이 남자가 스노우에게 의뢰를 넣었는데 세라가 대신 오게 되었고, 중간에 스노우의 부탁을 받은 제릴이 세라를 안내해 주고, 세라는 아케이드에 참여하고, 니르샨을 만나고, 근데 그 남자도 이 의뢰의 의뢰주이고…….

뒤죽박죽이 된 생각들이 엉망으로 엉켜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조차 명확하지 않았다.

끙끙대며 머리를 부여잡던 세라가 자신이 의뢰주라 주장하는 남자를 미심쩍게 바라보았다.

“의뢰주가 정말 당신이라고? 그럼 니르샨은. 그 남자는 뭔데?”

“니르샨?”

아는 사이인 걸까.

니르샨의 이름을 들은 마법사의 얼굴이 한순간에 똥 씹은 것처럼 구려졌다.

“설마 ‘황금 새’의 전 주인을 말하는 건가?”

“그래. 그 사람!”

“그 이름을 너희가 어떻게 알고 있지? 악독한 놈이긴 했지만, 시그너스에 닿을 정도까진 아니었을 텐데.”

악독?

가혹하기까지 한 평가에 세라와 에녹이 시선을 주고받았다.

물론 니르샨은 처음 만난 자에게 서슴없이 침실 노예를 권할 만큼 이상한 사람이지만, 저 정도는 아니었다.

마법사가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 온 건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그래서 20년도 더 전에 처형당했지.”

“……?!”

“그놈은 에스텔라의 신성한 노예 제도를 이용해 사악한 죄를 저지른 구제 불능의 악인이었다.”

역시, 동명이인인가 봐.

세라는 그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다.

“특히 미인만 노리기로 유명했지. 제 마음에 드는 아름다운 여자가 있으면 침실 노예를 빌려주겠다는 핑계로 침대에 끌어들여 약에 중독시키지. 그렇게 본인이 데리고 놀다가 질릴 때쯤 원래 노예도 아닌 자들을 노예 신분으로 탈바꿈해서 블랙 옥션에 내다 팔아 돈을 벌었지.”

“……!!!”

하지만 무섭도록 익숙한 그의 일화를 전해 들었을 때.

어쩌면 그게 아닐 수 있겠다는 벼락같은 깨달음을 얻어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세라와 에녹의 시선이 다시 한번 마주쳤다.

그 또한 세라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표정이 좋지 못했다.

“죄가 그토록 무거우니 지금쯤 지옥 밑바닥을 구르고 있을 텐데?”

그사이 설명을 마친 마법사가 그래서 니르샨은 왜 찾느냐 물었다.

“…….”

“…….”

물론,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두 사람 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지 감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돌아오고 있습니다.”

갑자기 허공에서 솟아난 여자가 마법사를 향해 보고를 올렸다.

새하얀 가면을 쓴 여자는 남자가 고개를 짧게 끄덕이자 다시 공기 중에 녹아 사라져 버렸다.

“너희는 일단 나와 함께 간다.”

모습을 보여선 안 되는 사정이라도 있는지, 남자가 멋대로 세라와 에녹의 거처를 정해 버렸다.

“얘들아.”

그가 허공을 향해 손을 두어 번 휘젓자, 방금 전과 마찬가지로 허공에서 솟아난 병사들이 세라와 에녹을 에워쌌다. 번쩍이는 황금 창을 든 병사들이 어서 가자며 은근히 세라와 에녹을 압박하여 걸음을 옮기도록 종용했다.

“잠깐, 잠깐. 그래서 당신은 대체 누군데?”

병사들 사이를 비집어 연 세라가 벌써 저만치 멀어진 남자를 향해 큰 소리로 물었다.

“정말 멍청한 거야? 의뢰서에 떡하니 적혀 있잖아.”

짜증을 섞어 대꾸한 마법사가 검지로 척, 자신을 가리키며 입술을 달싹였다.

“‘에스텔라.’”

“……?!”

위대한 제 이름은 바로 에스텔라. 그 자체라고.

“돌아간다.”

더 이상의 대화는 사절이라는 듯 냉정하게 등을 돌린 남자가 성큼성큼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황금 창을 탕, 탕, 바닥에 내리찧은 병사들이 멀어지는 등을 향해 우렁차게 대답했다.

“예! 길드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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