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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에 나라를 팔았습니다-118화 (128/131)

#118

불쌍해 보이면 가서 술친구라도 해 주면 될 텐데. 이상하게 발걸음이 선뜻 떨어지질 않았다.

사실, 지난 닷새간 세라는 에녹을 꽤 많이도 마주쳤지만 한 번도 먼저 다가가지 않았다.

‘오히려 피했다고 할 수 있지…….’

에녹을 바라보던 세라가 머쓱한 눈으로 천장을 올려다봤다.

딱히 이제 와서 그가 죽도록 미워졌다거나 한 건 아니었다.

좀. 껄끄럽다고 해야 하나.

독살당할 뻔했을 때 보았던 그 표정이 자꾸만 둥둥 떠다녀서 시선을 마주치기가 영 어색했다.

길을 가다가 저 동그란 뒤통수만 보이면 괜히 심장이 쿵, 떨어지고.

그때 에녹이 지었던 눈빛, 호흡, 표정 하나하나까지 꼭 선명한 초상화처럼 되살아났다.

그 생각 좀 그만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그쳐 놓고, 눈으로는 자꾸만 그의 그림자를 좇고.

어차피 다가가 말을 걸지도 않을 건데 오늘도 혹시 볼 수 있지 않을까 있을 만한 곳에 기웃거린다.

그러다 조금만 정신을 놓으면, 에녹에게 달려가 뭘 자꾸 물어볼 것 같았다.

그때, 왜 그렇게 놀랐어?

손은 왜 그렇게 떨었는데?

예전에는 안 그랬잖아.

뭐가 널 화나게 만들었어?

맨몸으로 가시에 밀어 넣을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그래.

요즘 여자는 왜 안 만나?

여러 가지. 두서도 없고, 그저 세라의 호기심만 해소해 줄 뿐인 그런 질문들.

아니, 아닌가.

사실 묻고 싶은 말은 단 하나였지만, 그 하나를 하지 못해 주변을 뱅글뱅글 도는 것 같기도 했다.

찾아가서 속 시원하게 물어보면 간단하겠지만, 그게 막상 하려니 생각만큼 간단하지가 않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자연스럽게 묻고 싶은데. 그건 어떻게 했던 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떤 표정을 하고, 어떻게 눈을 마주치고, 어떤 말투를 썼는지. 바보가 된 것처럼 단 하나도.

누군가 세라의 머릿속에 들어와 그 부분만 말끔히 지우고 빠져나간 것 같았다.

예전이라면 아무렇지 않게 했을 일들이 지금은 그저 까마득하기만 했다.

지독하게 무능한 인간이 되어 버린 기분이다.

그러니 오늘도 지나갑니다.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준 세라가 여태까지처럼 눈에 밟히는 검은 뒤통수를 못 본 척 슬그머니 지나가려다가.

“에이씨.”

성질을 내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모른 척해 주기에, 오늘따라 처진 어깨가 유독 눈에 박힌 것이다.

이상한 정이 들어 버렸어…….

나 원래 이렇게 순순한 사람이 아니었는데.

낮게 투덜거린 그녀가 저 멀리 청승을 떨고 있는 남자를 향해 터덜터덜 걸어갔다.

***

내가 왜 그랬지.

이 여섯 글자는 지난 며칠 동안 에녹의 가장 큰 난제였다.

누군가에게 속 시원하게 털어놓지는 않았지만, 그는 내심 지난번 지진을 일으킨 일에 대해 진심으로 반성하는 중이었다.

성검을 쥐게 된 이후로, 그는 최대한 제 감정을 죽이는 연습을 해 왔다.

혹시라도 자신이 감정에 취해 검을 휘두르게 되면 그거야말로 재앙이었으므로.

마침 무늬만큼은 황족으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인내심을 기르는 교육 정도야 질릴 정도로 받았었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쉬웠느냐 하면 그건 아니었지만.

그도 사람인지라 동정심이 일 때도 있었고, 증오가 들끓어 전부 쓸어 버리고 싶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에녹은 이를 악물고 버텼으며 제가 하는 일에 사감이 섞이지 않도록 노력했다.

이런 딜레마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결정을 앞에 두고도 동일하게 찾아왔다.

하지만 그것마저 해내고 나자, 에녹에게는 더 이상 할 노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예전처럼 죽을힘을 다해 애쓰지 않아도, 해야 할 일을 앞에 두고 감정이 이는 법이 없었다.

꼭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검은 방을 홀로 차지하고 있는 사람처럼.

그렇게 꽤 오랜 시간을 문제없이 지내 왔다.

그래서 방심했다.

아무리 소름 끼치도록 닮은 사람이라도, 그를 뒤흔들 수 없으리라고.

전적으로 그의 실책이었지만, 변명의 여지는 있었다.

이번이 너무 특수한 상황이었다.

하필 핏기 없는 얼굴이 제 손에 죽어 가던 그때 같아서.

그 사람의 죽음과 유난히 겹쳐 보이는 바람에 자기도 모르게 감정이 새어 나오고 말았다.

그러니 아직은 괜찮았다.

아직은. 진짜. 정말. 맹세코…….

“우울하면 여자를 만나. 여자를.”

그렇게 혼자 중얼대고 있자니, 맞은편에서 쯧쯧쯧, 혀를 찼다.

방금 전까지 나름 심도 있는 고민을 하던 에녹을 원초적으로 후려치는 발언이었다.

단박에 상대를 알아챈 에녹이 픽, 웃었다.

며칠 동안 봐도 못 본 척하더니 이제야 알은체를 해 주네. 하고.

쏟아 놓았던 고민을 갈무리하듯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뜬 에녹이 짐짓 근엄한 척 목소리를 깔았다.

“……내가 알아서 한다고 했지.”

세라를 마주 본 에녹은 내심 안도했다.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도 심장이 술렁거린다든가, 저번처럼 감정이 폭발할 것 같다든가 하는 극적인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냥, 오랜만에 봐서 반가운 정도.

이것 봐.

역시 저번이 특수한 상황이었고. 자신은 아직 괜찮았다.

“알아서 안 하니까 하는 말이잖아. 대체 뭐가 문젠데?”

그의 고뇌를 알 리 없는 세라가 지랄하지 말라는 투로 쪼르륵, 제 잔에 술을 따랐다.

안 서? 낯가려? 무서워? 하면서 덧붙이는 목소리에는 그것 외에는 문제가 있을 리 없다는 확신이 깔려 있었다.

가끔 보면 제 노예는 자신의 주인님을 여자면 전부 좋아하는 난봉꾼인 줄 아는 것 같았다.

반쯤 맞기는 했다.

찰랑. 찰랑. 넘칠 듯이 차오른 표면을 바라보던 에녹은 잊고 있던 우울증이 도질 것 같다는 강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나한테도 취향이라는 게 있거든?”

사막은 나하고 안 맞아. 미의 기준이. 전혀. 완전.

드문드문 이어지는 설명에 세라가 경멸의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넌 그 와중에 찬물 더운물도 가리니?”

“야.”

“어휴.”

그런 거 아니라고 반박하기엔 너무나 더운물을 가려 왔기에 할 말이 없었다.

아, 점점 우울해진다. 에녹은 세라가 먹으려 따라 놓은 술잔을 제거 홀랑 마셔 버렸다.

야악! 세라는 감히 제 몫을 탐낸 그를 구박했으나 곧 의미를 알 수 없는 자애로운 표정을 지었다.

“……네 취향이 뭔데. 말해 봐.”

“……?”

방금 찬물 더운물 거리지 않았니?

에녹이 딱 그렇게 묻는 눈으로 쳐다보자, 세라가 깊게 생각하지 말라며 손사래를 쳤다.

“내가 잘 들어 놨다가 네 취향인 애 지나가면 알려 줄게.”

첫 잔을 쭉 들이켠 그녀가 크으, 소리를 내며 잔을 탁,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쪼르륵, 쉬지 않고 연달아 잔을 채운다.

“쉽지 않을 텐데?”

에녹이 짐짓 까다로운 척 거드름을 피웠다.

세라는 두 번째 잔도 한 번에 비워 내고는 용맹하게 맞섰다.

“또 모르지. 내가 그 어려운 걸 해낼지.”

“……으음.”

재차 캐묻는 말에 에녹이 내키지 않는 낯으로 눈매를 좁혔다.

그는 요즘 들어 제 노예가 자신의 여자관계에 관심을 가지는 게 불편했다.

예전에는 같이 살 적에도 집에 누굴 데려오든 말든 관심도 없었으면서. 갑자기 그의 침대 사정을 걱정해 주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혹시 얘도 섹스에 눈을 떠 버렸나?

그래서 내 사정이 궁금해진 건가?

별 시답잖은 가정을 세우며 혼자 킥킥대고 있는데, 어느새 정색을 하고 있던 세라가 싸늘하게 명령했다.

“하라고. 말.”

“……그러니까-.”

기백에 눌린 에녹은 마지못해 말문을 열었다.

그의 취향이라고 한다면 시그너스 길드에서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공공연하게 알려진 고정값이 있었다.

살결이 하얗거나, 손이 예쁘거나, 가슴이 크거나, 체구가 작거나, 곱슬머리거나, 등에 점이 있는 여자. 분명 예전엔 이게 전부였는데. 어느새 구체적인 설명이 하나씩 붙기 시작했다.

하얗기만 한 게 아니라 피부도 연해서, 순흔을 새기면 아주 오래 유지되었으면 좋겠어.

손은 예쁘지만 주먹이 매웠으면 좋겠고.

체구가 작아도 끌어안았을 때 품에 들어차는 느낌이 있으면 좋겠어.

가슴은 마냥 크기보단 얼굴을 묻었을 때 딱 포근한 정도.

등의 점은 뒤로 할 때 잇자국을 내기 좋은 위치에 있다면 더할 나위 없지.

“됐지?”

손가락까지 꼽아 가며-일부러 빠르게- 설명해 준 에녹이 새침하게 세라를 내려 보았다.

“…….”

그 말을 들은 세라는 말이 없었다.

설마 이렇게까지 열심히 이야기해 줄지는 몰랐던 걸까. 한 방 먹은 표정이었다.

왠지 이긴 것 같은 기분에 에녹이 과장스럽게 눈을 크게 뜨며 깐족거렸다.

“왜. 너무 길어서 못 외우겠어?”

“아니…….”

나 다 외웠는데.

세라가 어딘가 허망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저 구구절절한 조건들. 저걸 모조리 하나로 합치면 한 단어로 설명할 수 있었다.

그걸 세라는 알았는데, 에녹은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응. 그래. 그러시겠지.”

그때, 에녹이 조금도 안 믿는 어조로 세라의 머리를 톡톡 쓰다듬었다.

어른이 아이를 귀여워해 주는 것처럼. 정수리에서부터 매끈한 옆통수까지 스륵, 스륵 미끄러지면서.

“그렇다고 이상한 사람 갖다 붙이지 말고 그냥 가만히 있어.”

“…….”

“자꾸 은근슬쩍 반말하는데 노예인 것도 잊지 말고.”

“…….”

말은 얄미운데 손길이 닭살 돋을 정도로 다정했다.

그의 손길이 스친 세라의 귓가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쪽으로는 손도 안 댔는데 가슴팍이 간질거렸다.

시선이 마주친다.

달빛에 비치는 연둣빛 눈동자가 나붓이 접어 웃음 짓는다.

쿵, 세라의 심장이 으깨질 정도로 세게 뛰었다.

지금인 것 같아.

그런 속삭임이 들렸다.

뭐가 지금인데?

그런 의문을 가지기도 전에 세라의 입술이 먼저 움직였다.

“에녹.”

주인님도 아니고, 까망이도 아니고, 에녹.

세라가 그를 이렇게 부르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런 흔치 않은 일이 일어났으니, 에녹은 그 부름의 무게를 미리 인지해야 했다.

“왜. 뭐.”

그랬다면 이렇게 가볍게 방심했다가.

“너 나 좋아하지?”

거하게 얻어맞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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