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에 나라를 팔았습니다-120화 (130/131)

#120

그래서 걔는 날 좋아한다는 거야. 만다는 거야?

세라는 결국 답을 듣지 못한 질문에 대해 고민하다 뜨는 해를 보고야 말았다.

밤을 새웠다는 자각이 들었을 땐 피곤이 몰려올 줄 알았는데 의외로 쌩쌩했다.

그래도 침대로 들어갈까 고민했지만, 이참에 뒤바뀐 밤낮을 원래대로 돌리는 것도 괜찮겠다는 결론에 이르러 바깥으로 나섰다.

에녹이나 찾으러 가 볼까.

문밖으로 나서는 순간, 지난 며칠간 보고도 못 본 척 피해 다닌 게 무색하게도 세라는 곧장 에녹을 생각했다.

어제 못다 한 이야기를 마저 해야겠다는 목적이라기보다는 내장까지 토해 낼 기세로 구역질을 해대던 게 신경 쓰였다. 숙취에는 꿀물이 좋다던데 하나 정도 타서 먹여 볼까. 아마도 지금쯤 자고 있을 테지만 깨우면 일어는 날 것이다.

계획을 세운 세라가 주방으로 가 꿀물을 타서 들고나왔다. 하지만 막상 찾아가려는 에녹이 어느 방에 머물고 있는지 모르고 있다는 게 떠올랐다. 순식간에 계획이 무계획이 되었지만 세라는 굴하지 않고 계속 걸음을 옮겼다.

몰라. 어떻게든 되겠지.

목적지도 없이 헤매는 꼴이었지만, 어쩐지 원하면 만날 수 있으리란 예감이 들었다.

근거 없이 샘솟는 긍정의 힘으로 중앙에 위치한 중정을 지나던 때였다.

마침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던 남자와 딱 마주쳐 버린 건.

“윽.”

“드디어 얼굴을 보는군.”

남자를 발견한 세라는 반사적으로 얼굴을 구겼다.

나무 그늘 아래에 마련된 테이블에 앉은 남자는 오늘도 못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번쩍였다.

허리까지 오는 하늘색 머리칼은 한쪽으로 땋아 내려 금사로 된 장식줄을 달았고, 몸에는 하얀 린넨으로 된 천을 두르고 있었으며, 턱을 괴고 있는 손가락에는 큼직한 보석이 박힌 반지를 여러 개 끼고 있었다.

“에스텔라…….”

세라는 누가 황금 궁전의 주인 아니랄까 봐 눈이 멀어 버릴 정도로 화려하게 꾸민 남자에게 알은체를 했다.

그리고 권하지도 않았는데 터덜터덜 걸어가 에스텔라의 맞은편에 가서 앉았다.

여태 한 번도 마주치지를 않다가 하필 오늘, 이 시간에 마주친 이유가 우연일 리 없었다.

정답이었는지, 에스텔라가 픽, 웃으며 세라에게 앞에 놓인 포도를 권했다.

알이 통통하게 차오른 포도에는 보기에도 시원한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마침 목이 말랐던 세라가 사양하지 않고 하나를 톡 떼어 입에 털어 넣었다.

“제릴은 죽었어.”

그와 동시에 에스텔라가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 왔다.

“켁, 뭐라고?!”

갑작스러운 부고에 당황한 그녀는 달콤한 과육을 제대로 즐기지도 못하고 뱉어 냈다.

에스텔라는 순간 더럽다는 듯이 세라를 쳐다보았으나,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아니, 이 마법사는 왜 이런 중요한 이야기를 포도 먹다 하는 거야……?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던 세라는 이내 뭔가 떠오른 바가 있는 표정을 지었다.

잠시 주변을 살피더니 에스텔라를 향해 은밀하게 속닥거렸다.

“당신이 죽였어?”

진짜 의뢰주인 에스텔라와 엇갈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날.

세라는 에스텔라에게 그동안의 일을 간단히 전달했다. 제릴의 안내를 받아 에스텔라에 왔고, 첫 번째 경기를 치르는 와중에 니르샨이라는 남자를 만나 그의 초대로 황금 새에 갔었다고.

그 남자가 제릴의 이름과 의뢰의 내용을 알고 있길래 당연히 그쪽이 의뢰주인 줄 알았다고 말이다.

‘제릴이라는 남자부터 조사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때, 세라가 마지막에 이렇게 말했었다.

앞뒤 상황을 전부 보자면, 아무래도 제릴이라는 그 정보원이 수상하다고. 에스텔라는 그 뒤로 어디론가 사라졌고, 갑자기 나타나 제릴이 죽었다고 말했다.

세상이 배신과 음모로 가득하다고 믿는 그녀의 머리로는, 에스텔라가 배신자 제릴을 찾아내 없애 버렸다는 쪽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내가 왜?”

하지만 에스텔라는 이상한 소리를 다 듣겠다는 얼굴로 눈썹을 까딱였다.

“제릴은 꽤 예전에 죽었어. 고문당한 시체가 하수구에 버려져 있더군.”

아마 정보를 빼낸 뒤 죽인 것 같다.

그것이 에스텔라가 생각하는 제릴의 사인이었다.

“정황상 니르샨인가 뭔가 하는 남자가 범인인 것 같군.”

에스텔라는 제릴을 살해한 용의자로 니르샨을 의심하고 있었다.

세라가 생각하기에도 그게 가장 가능성이 높았다. 중간에서 정보를 가로채고 흔적을 지운 것이다.

“아쉽게 됐어. 내가 아끼던 아이였는데.”

허망하게 죽었을 제릴이 떠올랐는지 에스텔라가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내일 아케이드가 재개될 거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멀쩡한 낯빛으로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해댔다.

“잠깐, 그게 끝이야?”

그 뒤에 마땅히 제릴을 죽인 상대에 대한 추적이나, 복수 따위의 말이 따라올 줄 알았던 세라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가 희한하다는 낯으로 에스텔라를 바라봤다.

아끼던 사람이 무참히 살해당했다는데도 그는 몇 초 우울했을 뿐,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말끔한 얼굴이었다.

“아끼던 사람이었다며. 누가 죽였는지. 왜 죽였는지. 어떻게 갚아 줄 건지 같은 건 생각 안 해?”

오죽했으면 제릴과 몇 시간 본 게 전부인 세라가 나서서 복수를 종용할 지경이었다.

그녀도 그렇고 그녀의 지옥 동기들도 어디 가서 이름만 대면 욕부터 튀어나올 정도로 악명이 자자한 놈들이지만, 그런 그들도 아끼던 부하가 사라지면 소소하게라도 복수 정도는 해 주었다.

“안 하는데?”

하지만 에스텔라는 그딴 게 나랑 무슨 상관이냐는 반응이 전부다.

진심으로 자신이 왜 제릴의 죽음에 대해 다른 감상을 가져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갸웃거린 그가 별 대수롭지 않은 어투로 덧붙였다.

“어차피 사람은 다 죽어.”

포도알을 떼어 먹은 마법사는 갑자기 필멸자의 운명을 들먹이며 제릴의 죽음을 정당화했다. 어차피 결말이 다 같으니 일찍 가나 늦게 가나 그에게는 매한가지라고.

그런 말을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입에 담는 에스텔라는 참으로 오만하면서도.

“그런 거 일일이 다 기억하면 제정신으론 못 살지.”

쓸쓸해 보였다.

“그러니까, 마지막 경기에는 에녹 소서 말고 나와 함께 가도록 해.”

“……이야기가 왜 그렇게 돼?”

하지만 쓸쓸한 건 쓸쓸한 거고 에스텔라의 대화 방식이 좆같은 건 좆같은 거였다.

“스노우는 왜 굳이 자기 대신 널 보냈을까?”

“이봐.”

“너는 왜 순순히 이곳에 왔지?”

이번에는 뜬금없이 스노우를 언급하더니 예리한 눈으로 세라를 추궁한다.

괜히 찔리는 바가 있던 세라는 항의하려던 것도 잊은 채 입을 다물었다.

“그 남자가 생각하기에 네가 이 일을 해결하는 최선책이었던 거지.”

그녀의 사정 따위 별로 궁금한 건 아니었는지 에스텔라가 자연스럽게 제 할 말만 해댔다.

“그러니 내일은 내가 네 노예를 할게.”

“…….”

세라는 아까부터 앞뒤 맥락 없이 중구난방으로 튀는 에스텔라를 불만스럽게 노려봤다.

대화를 하는 게 아니라, 생각나는 대로 휘갈긴 메모장에 답변을 달아 주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런 식의 문답은 세라가 좋아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눈앞의 질문을 해결하는 데에만 급급해서,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할 때가 많으니까.

“그게 의뢰의 핵심이야.”

남이야 혼란스러워하거나 말거나, 에스텔라는 자신의 페이스대로 대화를 이끌었다.

의뢰 내용이 아케이드 우승이라는 걸 너도 알고 나도 아는데, 이 뻔뻔한 마법사는 이제 와 은근슬쩍 다른 조건을 끼워 넣었다.

“그런 말 들은 적 없어. 목표는 우승이었을 텐데?”

“마음이 바뀌었어.”

“얼씨구.”

상대를 호구 취급하는 요구에 순순히 응해 줄 세라가 아니었다.

추가하려면 돈 내. 근엄하게 경고하자 에스텔라가 공중에 손을 한 번 휘저었다.

쿵, 테이블 위로 묵직한 돈주머니가 떨어졌다.

이게 다 얼마냐. 함박웃음을 지은 세라가 얼른 그것을 받아 챙겼다.

“너도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결과보다는 과정을 함께하는 게 좋겠어.”

좋았던 기분은 에스텔라의 말 한마디에 곧장 나락으로 떨어졌다.

꼭 세라가 내일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은 말을 하는 바람에, 손안에 쥔 돈이 보상금이 아니라 노잣돈처럼 느껴졌다.

에이씨. 세라가 거칠게 돈주머니를 털어 내며 툴툴거렸다.

“에녹한테 물어봐야 돼.”

이렇게 이야기하니 꼭 무슨 말을 하든 부모에게 물어보고 오겠다는 애새끼가 된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녀야 누구와 아케이드를 가든 상관이 없었지만, 우리 속 좁은 주인님께서는 자기 두고 다른 사람이랑 가겠다고 하면 아주 난리가 날 테니까. 특히 저번 침실 노예 사건 이후로 세라가 다른 사람과 말을 섞는 것도 싫어하던 차라 이번엔 또 어떻게 설득을 해야 할지 벌써부터 눈앞이 캄캄했다.

“그럴 필요 없어.”

골치 아파하는 세라의 기색을 눈치챈 에스텔라가 걱정하지 말라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톡, 탐스러운 포도알을 입에 털어 넣은 그가 물 많은 과육을 으적으적 씹는다.

“에녹 소서와는 이미 이야기가 끝났어.”

꿀꺽, 입에 든 걸 삼킨 남자가 또 한 번 놀라운 소식을 전해 준 건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마음대로 하라던데?”

“……?”

그 말의 의미를 받아들이기까지 제법 시간이 걸렸다.

“뭐라고?”

잠시간의 침묵 끝에 세라가 멍청한 얼굴로 물었다.

에스텔라는 왜 이 간단한 말을 되묻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한 번 더, 이번에는 좀 더 상세하게 에녹의 발언을 설명해 주었다.

“아케이드. 거기에 참가하게 널 빌려달라고 했더니 마음대로 하라고 했어.”

그건 분명한 허락이지.

그렇게 덧붙인 에스텔라가 문제 될 건 아무것도 없으니 준비나 제대로 하라 이른 뒤 중정을 떠났다.

“…….”

세라는 에스텔라가 사라지고 나서도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연신 끔뻑이는 모습이 적잖이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녀는 아직도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하고선 에스텔라가 했던 말을 찬찬히 곱씹고 있었다.

마음대로 해.

에녹이 자신을 두고 타인과 그런 말을 주고받았다고 생각하자 가슴께가 크게 술렁였다.

당사자도 없는 자리에서 사람을 물건처럼 거래하다니. 이래서야 영락없는 노예 신세가 아닌가.

물론 영락없는 노예 신세가 맞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태까지 에녹은 세라에게 한 번도 그렇게 행동한 적이 없었다.

남에게 그녀의 신변을 넘기는 일은 더더욱.

‘뭔가 있는 것 같은데…….’

세라의 시선이 꿀물이 든 잔에 머물렀다.

콕 집어 설명할 수는 없지만, 굉장히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기분 나쁜 예감이 들었다.

까닭 모를 조바심이 세라를 괴롭혔다.

“…….”

안 되겠다.

자꾸 뒷덜미에 들러붙는 더러운 예감을 견디다 못한 세라가 꿀물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당사자도 없이 혼자서 끙끙대 봤자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역시 이럴 땐 헤매지 않고 당사자에게 곧장 묻는 게 가장 속 시원했다.

빠르게 판단을 내린 세라가 씩씩하게 걸음을 옮겼다.

***

잠시 중지되었던 아케이드가 재개되자, 침체되었던 에스텔라의 거리가 빠르게 활기를 되찾았다.

에스텔라의 황금 궁전에서는 지진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길드원들을 위로하기 위해 평소보다 더 많은 포도주와 고기를 풀었다.

길드장의 통 큰 선물은 집과 가게가 부서져 침울해하던 이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고, 길드에 대한 자부심에 젖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래서인지 세 번째 아케이드가 열리는 날에는 평소보다 참가자들을 응원하기 위해 저택 주변으로 몰려 있는 이들이 많았다. 경기를 직접 볼 수는 없지만 마지막 관문이기 때문인지 주최 측에서 세 번째 아케이드까지 살아남은 참가자들의 퍼레이드까지 열어 주었다.

“니르샨! 니르샨!”

“거기! 예쁜 언니! 힘내라고!”

“바커스! 이번에도 우승 못 하면 아케이드 때려치워라!”

“와하하하!”

생명력 강한 사막의 후예들답게, 근심을 모조리 떨쳐 낸 이들은 저마다 응원하는 자의 이름을 외치며 왁자지껄 떠들어댔다.

하늘에는 마법으로 만든 꽃비가 쏟아지고, 정원으로 가는 길에는 무희들이 음악에 맞춰 아름다운 군무를 뽐냈다. 거리에는 포도주와 고기가 마를 일이 없었고, 사람들의 얼굴에는 온통 웃음꽃이 만개해 있었다.

그야말로 축제였다.

기분이 꿀꿀한 이들도 이곳에만 오면 분위기에 취해 절로 어깨춤을 추게 될 정도로 쾌활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는 겉도는 이가 한 명쯤 있기 마련이었고.

“씨발. 더럽게 시끄럽네.”

세라가 바로 그 사람이었다.

화사한 축제에 어울리지 않게 그녀는 퍼레이드 내내 똥 씹은 표정이었다.

사람들이 내뿜는 긍정적인 에너지나 유쾌한 공기도 세라가 내뿜는 우중충한 기운에 쫓겨 가까이 다가올 수 없었다.

그녀의 기분이 이토록 땅바닥에 처박힌 이유는 하나였다.

바로 어제, 에녹과 만나기 위해 궁전을 몇 바퀴나 빙빙 돌았지만 내내 허탕이었다.

그의 그림자조차 보지 못하고 헤매는 동안 세라는 뒷덜미를 간지럽히던 더러운 예감이 구체적인 현실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에녹이 자신을 피하고 있다.

‘대체 왜?’

문제는 그 이유를 도무지 모르겠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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