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에 나라를 팔았습니다-121화 (131/131)

#121

굳이 이유를 쥐어짜 보자면 딱 하나 걸리는 게 있기는 했다.

마지막으로 얼굴을 마주했을 때 물어봤던 질문 때문에.

‘나 좋아하냐고 물어본 게 그렇게까지 충격적인가?’

만약 그렇다면 더더욱 결론은 묘해진다.

그 말이 에녹에게 충격으로 다가가려면, 반드시 한 가지의 필요충분조건을 채워야 하기 때문이다.

‘……걔 진짜 나 좋아하나 봐.’

설마 했던 그 결과에 상념에 빠졌던 세라의 표정이 기묘하게 뒤틀렸다.

단순히 궁금하고 신경 쓰여서 물어봤을 뿐, 대답을 듣고 나서 뭘 어쩌겠다는 계획 따윈 없었다. 에녹이 정말 그렇다고 대답하는 장면을 상상하자 그 순간 머릿속이 새카매지면서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거 진짜 큰일이잖아…….”

뒤늦게 위기감이 몰려온 세라가 심각하게 표정을 굳혔을 때였다.

“아-.”

무심코 시선을 옮기던 그녀와 니르샨이 정통으로 눈이 마주쳤다.

그녀를 발견한 니르샨이 유쾌하게 한쪽 눈을 찡긋대며 알은체를 한다.

대놓고 사기를 친 주제에 거리낄 건 아무것도 없는 양 여유로운 작태였다.

“저렇게 간이 배 밖으로 나오기도 힘든데…….”

세라는 끝까지 여유를 잃지 않는 니르샨을 수상쩍은 눈으로 노려보았다.

처음 니르샨의 정체를 알게 되었을 때, 세라는 그가 단순히 길드장에게 앙심을 품고 의뢰를 가로채려 한 삼류 사기꾼 정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곱씹을수록 정말 삼류인지 헷갈렸다.

의뢰를 중간에서 가로챈 것치고는 세라의 아케이드 참가를 전혀 방해하지 않았고, 에스텔라가 나타나 말만 하면 금방 들킬 거짓말을 하고서도 그것을 적극적으로 숨기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허술하다 얕잡아 보기엔 제릴을 쥐도 새도 모르게 납치해서 없애 버리고, 세라에게 암살자를 보낸 배후인 게 분명하지만 물증을 조금도 남기지 않을 정도로 치밀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한다.

하지만 치밀할 수 있는 놈들은 그것마저 계산해서 한다.

니르샨이 바로 그런 놈이었고,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세라의 결론은 언제나 같은 곳에 다다랐다.

‘……처음부터 거짓말을 숨길 생각 따윈 없었던 거야.’

어째서 그런 비효율적인 짓을 하지.

이래서야 나 좀 수상하게 여겨 달라고 소리치는 꼴 아닌가?

“요즘 생각할 게 왜 이리 많을까…….”

이러다 머리 터지겠네.

침통한 한숨을 내쉰 세라가 힐끗, 제 옆자리로 시선을 던졌다.

그녀의 곁에는 에녹 대신 에스텔라가 함께였다.

마지막 경기를 부득불 직관해야겠다며 옆자리를 차지한 그는 에녹처럼 긴 머리를 검게 물들이는 것으로 변장을 끝냈다.

제가 연 축제에 참가하고 있으면서도 에스텔라는 아무런 감흥 없이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누구는 바로 옆에서 사기꾼의 속내를 열심히 고민하는 중인데.

정작 사칭 당한 당사자는 영 관심이 없어 보였다.

……아끼던 부하를 죽였을지도 모를 유력한 용의자가 눈앞에 있는데도.

“당신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네.”

세라는 너도 참 대단하다며 칭찬을 해 주었다.

“그러기엔 난 너무 늙고 지쳤거든.”

그 속에 든 빈정거림을 찰떡같이 알아들은 에스텔라는 죽기 직전의 노인네나 할 법한 말로 스스로를 변호했다. 속에 든 알맹이야 어쨌든 겉으로는 피부가 팽팽한 20대 청년이 저런 말을 하고 있으니 세상은 요지경이라는 게 다시 한번 실감 났다.

어련하겠느냐며 맞장구를 쳐 준 세라가 여전히 찝찝함을 떨쳐 내지 못한 어조로 에스텔라의 옆구리를 찔러댔다.

“제대로 알아보기는 했어? 20년 전에 죽었다던 그 흉악범과의 관계 같은 거.”

세라는 아무래도 니르샨과 그 흉악범의 관계가 몹시 의심스러웠다.

외부인이 제 길드 일에 이렇게까지 열성이면 갸륵해서라도 관심을 가질 만한데, 에스텔라는 여전히 별 흥미 없다는 투였다.

“아니. 같은 건 이름뿐이고 얼굴이나 골격은 전혀 다른 사람이던데.”

단순한 동명이인이 아닐까.

에스텔라는 어린아이도 할 수 있을 법한 허접한 추리를 갖다 붙였다.

이러니 보고 있는 세라의 속이 안 터질 수가 있나.

“자세히 좀 봐. 에스텔라에서는 제법 유명한 범죄자였다며. 정말 그놈이면 어쩌려고?”

태평하기 이를 데 없는 에스텔라의 태도에 세라는 제법 터무니없는 가설로 위기감을 조성했다.

남들은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다니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냐 할지 몰라도. 정말로 살아 돌아온 죽은 사람인 세라의 입장에서는 아예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세라는 악인의 이름에 우연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녀의 악명이 대륙에 퍼진 후로 ‘세라’라는 이름의 아이들이 사라진 것과 같은 이치이다.

니르샨이 세라만큼 유명한 악인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에스텔라에서는 제법 이름이 알려진 범죄자였다.

그러니 누구도 불길한 이를 연상시키는 이름으로 살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 당사자가 아닌 이후에야.

“경쟁자 말고 아케이드에나 신경 쓰는 게 어때?”

이런 깊고 심오한 뜻도 모르고, 에스텔라는 감히 세라에게 네 일이나 잘하라며 충고를 해 왔다. 와아아아-. 그의 어깨 너머로 환호하는 사람들이 점점 멀어져 간다. 어느새 끝에 다다른 퍼레이드는 아케이드가 열리는 저택의 정원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에스텔라는 지긋지긋해 죽겠다는 눈으로 저택을 올려다봤다.

그러면서 세라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단단히 일렀다.

“너 이거 꼭 해결해야 돼.”

매우 협박조로 들렸으므로, 세라는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당신이 만든 거잖아. 근데 왜 나더러 해결하라고 난린데.”

그러자 에스텔라가 엄청난 모욕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눈매를 찡그렸다.

“내가 이런 어린애들이나 할 법한 경기를 구상했을 것 같아?”

그 어린애들이나 할 법한 경기에 누구보다 진심으로 보이는 사람이 할 법한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세라는 그런 사소한 문제 정도는 가뿐히 넘어가 주기로 했다. 그보다 더 놀라운 사실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신이 만든 게…… 아냐?”

“당연하지.”

의외의 사실에 세라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에스텔라 길드에서 주최하는 축제인데, 길드장이 설계한 게 아니라니. 이건 또 처음 듣는 소식이었다. 이놈의 양파 같은 의뢰는 깔수록 자꾸만 새로워진다.

“나도 정답을 모르니까, 네가 여기에 있는 거야.”

그렇구나.

세라는 감회가 새로운 눈으로 저택을 둘러보았다.

“그럼 대체 누가 만든 거야 이건?”

“내 제자.”

“오-.”

이 게으른 마법사에게 제자가 있었다니.

누군지 몰라도 이런 스승을 모시고 살았을 제자가 불쌍했다.

제자 생각이 났는지, 에스텔라가 제법 오래 침묵하다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참, 똘똘한 녀석이었는데.”

“……과거형이네.”

“죽었으니까.”

제자의 죽음을 입에 담는 에스텔라는 그제야 제법 감정이 있는 인간처럼 보였다.

세라는 제릴 때와는 사뭇 다른 반응에 당신이 어쩐 일이냐며 눈을 흘겼다.

“그런 거 일일이 기억하면 제정신에 못 산다더니?”

“양아들의 죽음을 잊을 정도로 냉혈한은 아니야.”

“오-.”

세라는 다를 수밖에 없던 이유를 납득했다.

“당신이 생각하기에 제자가 왜 이런 걸 만든 것 같아?”

그토록 친밀한 사이였다니 힌트라도 얻어 볼 생각에 은근슬쩍 그를 떠봤다.

에스텔라는 언제 감상에 젖었냐는 듯 심드렁히 대꾸했다.

“죽고 나서도 유지되는 마법을 뭐 하러 남겼겠어.”

유언.

세라는 그 우울한 단어를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제자가 죽고 난 뒤, 세계를 한 바퀴 유랑하고 온 에스텔라는 양아들과 지냈던 사막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함께 살던 저택에 마법이 걸려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세 번의 놀이를 모조리 통과하면, 아이가 숨겨 둔 보물 상자가 열리는 아주 간단한 마법.

그는 곧장 상자를 열기 위해 시도했고, 실패했다.

한번 실패하자 저택은 4년 뒤에나 문을 열어 주었다.

그 뒤에도 몇 번이나 시도해 봤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집단 지성의 힘에 기대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 혹시나 하는 희망으로 아케이드를 개최하고는 있으나, 역시 상자가 열리는 일은 없었다.

무려 120년 동안이나.

“매번 아케이드의 우승자는 있었던 걸로 아는데…….”

세라는 아까 전보다 의욕이 뚝 끊어진 어조로 중얼거렸다.

120년 동안 한 번도 풀지 못한 마법이라니.

이야기를 들을수록 이 의뢰는 사기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다 떨어뜨리기 뭐해서 개중에 열심히 한 놈 뽑아 우승시켰지.”

“으음…….”

하지만 난 열심히 한다고 우승 안 시켜 줄 거잖아.

세라는 어렵지 않게 제 처지를 실감했다.

에델을 만나려면 아케이드에서 우승을 해야 하는데, 돌아가는 상황이 영 시원치 않다.

아무리 그녀라고 해도, 120년간 누구도 풀지 못했던 문제를 풀 수 있다 자신하기 어려웠다.

……이러다 허탕 치는 거 아니야?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슬슬 걱정이 밀려왔다.

“지금부터 아케이드 마지막 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계단을 깊이 내려가 지하층에 닿자, 진행 요원이 목적지에 다다랐음을 알렸다.

“참가자와 노예들은 각자 위치로 이동해 주세요.”

그가 가리키는 방향에는 오각형 모양의 도형이 정확히 5등분으로 잘려 있었다.

마지막 경기까지 살아남은 참가자들도 딱 다섯 명이었기에 각자 알아서 도형을 하나씩 차지하고 섰다.

세라가 의견을 묻듯이 에스텔라를 쳐다보자 그는 알아서 하라는 의미로 어깨를 으쓱했다.

어느 자리를 선택하는지는 딱히 큰 영향이 없는 것 같았다.

안심한 그녀는 에스텔라와 함께 대충 빈자리에 가 섰다.

그들이 모두 자리를 잡자 진행 요원이 무언가를 조작했다.

그러자 바닥에서부터 올라온 유리벽이 참가자들 사이를 가르며 완벽하게 공간을 분리했다.

갑작스럽게 공간이 변화하는 바람에 몇몇이 크게 당황하며 무어라 말을 해 왔지만 뭐라고 하는지 들리지 않았다. 두꺼운 유리 벽이 소리를 차단하는 역할을 하는 것 같았다.

세라는 흥미로운 눈으로 유리 벽이 만들어 낸 공간을 둘러보았다.

그녀가 있는 자리에서부터 원뿔 형태로 퍼지는 유리 벽이 천장에 닿자, 정면의 벽이 움직이며 커다란 양문형 입구로 모습을 바꾸었다.

앞도, 뒤도, 옆도 전부 밀실로 만들어 버리고 난 뒤에야, 진행 요원이 본격적인 설명을 시작했다.

“참가자들은 모두 같은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문제를 해결한 뒤,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해서, 정답을 유추하세요.”

여태까지와 마찬가지로 간단하고, 명확한 요구 사항이었다.

짤막한 설명을 마친 진행 요원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리고 머지않아 머리 위에서 그의 음성이 다시 한번 쏟아졌다.

“행운을 빕니다.”

담백한 인사를 끝으로 땅이 크게 진동했다.

쿠궁. 쿠궁. 유리 벽에 갇힌 공간이 서서히 액체처럼 변하더니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그러고는 스스로 어떤 모양을 잡고 싶은 것처럼 출렁이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 세라는 자신도 참 대책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에델을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 그 중요한 결정을 판가름하는 순간을 목전에 두고서도 머릿속 한구석으로는 지금쯤 혼자 궁전에 남아 있을 에녹이 뭘 하고 있을지가 궁금한 것을 보면 말이다.

“멍때리지 말고 집중해. 돈값을 하란 말이야.”

그녀가 딴생각을 하고 있음을 눈치챈 에스텔라가 엄하게 주의를 주었다.

고용주로서는 당연한 발언이었으나, 같이 참여한 주제에 날로 먹으려는 수작임을 모르지는 않았다.

“그렇게 다 나한테 달려 있다는 식으로 말하지 말아 줄래?”

예리한 눈으로 그를 흘겨본 세라가 너 또한 노동력을 제공해야 한다는 사실을 주지시켰다.

“여긴 노예가 주인을 돕는 게 규칙이거든? 조금이라도 가능성을 높이고 싶으면 당신도 구경할 생각만 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 날 도울-.”

그녀는 뻔뻔하게도 ‘내가 왜?’라는 말을 이마에 써 붙여 놓은 게으른 고용주에게 아케이드의 정신을 가르치려다가.

“……?”

에스텔라의 어깨 너머로 완성되어 가는 주변 풍경을 바라보고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이봐?”

말을 하다 갑자기 끊어 버리는 세라에 에스텔라가 툭, 그녀의 어깨를 건드렸다.

답답하게 하지 말고 마저 말하라는 재촉이었으나 세라의 관심은 이미 그쪽으로는 완전히 끊어진 채였다.

“……이게-.”

다만 혼란스러운 눈으로 주변을 훑어볼 뿐이다.

처음 와 본 사막, 처음 와 본 길드, 처음 참가하는 아케이드인데도 눈앞의 공간은 무서울 정도로 눈에 익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그래서도 안 되는데.

비슷한 곳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여 보지만 몇 번을 다시 보아도 결론은 같았다.

여기는……. 이곳은…….

쿠궁.

공간을 바꾸느라 울리던 진동이 멎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천장이 빛을 내뿜더니 진짜 하늘처럼 바뀌었다.

머리 위로 펼쳐지던 새파란 하늘은 순식간에 해가 기울어 붉은 석양이 내려앉았다.

헉, 그와 동시에 세라가 크게 헛숨을 들이켰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멍한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이게 왜 여기서 나와?”

바짝 얼어붙은 숨을 내쉰 그녀가 연신 불안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 장소, 이 위치, 이 시간.

모든 게 소름 끼칠 정도로 생생했다.

이 광경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사시사철 푸르른 봄의 정원.

500년의 역사 속에서 한 번도 더럽혀진 적이 없던 상앗빛의 성벽.

유리 벽 안쪽으로 모습을 드러낸 그 장소는.

세라가 제 손으로 무너뜨린 페이덴의 왕궁이었다.

끼이이익-.

모든 준비를 끝낸 경기장의 문이 열린다.

성벽의 정중앙에 붙어 있는 왕궁의 문이 열린다.

“…….”

세라의 고개가 느릿하게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돌아갔다.

그 너머에 어른대고 있는 과거의 그림자와 마주하기 두려운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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