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수로는 군데군데 랜턴이 설치되어 있어서 문제는 없었다.
[수호님.]
‘응?’
[양지현이 가지고 있는 야간 투시 스킬을 배워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야간 투시 LV 11]-
설명을 보니 어둠 속에서도 대낮처럼 훤히 볼 수 있는 능력이었다.
마나 소모가 적지만, 레벨당 1분의 지속 시간과 사용 후 어지러움이 몰려오는 부작용이 있다고 적혀 있다.
레벨이 올라가면 지속 시간이 증가하고 부작용이 적어지는 듯했다.
‘있으면 좋겠지만…일단 킵!’
[알겠습니다.]
양지현이 위험하긴 하지만 일단 얌전히 던전을 진행하는 것 말고는 수상한 행동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이 장소가 어두운 편에 속하긴 해도 딱히 위험한 몬스터도 나오지 않았기에 굳이 야간 투시 스킬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던전을 진행하는 중에 안전지대가 눈에 들어왔다.
“아! 안전지대가 있네요.”
“다행이다.”
다들 몬스터와 싸우면서 자신감을 얻었고, 안전지대의 유무가 확인되자 아까처럼 불안한 표정을 싹 걷어낸 상태였다.
지금 파티원에게 던전은 그저 필드보다 귀찮은 수준의 난이도일 뿐이었다.
다들 안전지대에 들어가서 휴식을 취했다.
휴식을 취하는 동안 미녀 삼인방이 코를 막으면서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이거 난이도가 문제가 아니네.”
“다시 오고 싶다는 생각이 싹 사라지고 있어….”
“맞아. 다른 마을에서 왜 사람들이 안 돌아오는지 알 거 같아.”
던전 난이도는 문제가 아니었다.
만약 마을과 마을 사이의 거리와 같은 3일간 이 던전을 진행해야 한다면 한번은 몰라도 두 번 경험하고 싶지 않은 던전이었다.
하물며 안전지대 안에 있어도 하수도의 냄새가 스멀스멀 들어오고 있었다.
이런 곳에서 노숙하고 밥을 먹는 것 자체가 고역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말에 한봄은 진중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저는 다시 올 거예요. 다른 분들에게 알려줘야 해요.”
“그래…. 봄아 니 말이 맞아. 나중에 다시 돌아올 때는 나도 같이 가자.”
“…고마워, 언니.”
딱히 여자 삼인방의 말이 문제가 있는 발언은 아니었다.
당연한 생각일 것이다.
힘들게 다른 마을에 안착했는데, 또 힘들게 중앙 마을로 돌아갈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한봄은 달랐다.
그녀는 책임감을 느끼고 다시 돌아갈 생각이었다.
‘책임감 하나는 끝내주네.’
[한여름을 지독하게 싫어하는데도 그를 계속 챙기는 것을 보면 친분이 있는 사람을 보살피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듯합니다.]
한봄에 대한 호감도가 올라가는 중에 양지현이 입을 열었다.
“자, 다시 출발하죠.”
..
..
다들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몬스터 자체는 강하지 않았지만, 햇볕 한 줄기 들지 않는 이곳에서 하수도 냄새를 맡으며 진행하다 보니 심리적인 부분이 위축되고 있었다.
나름 정신력이 높은 민하연도 기력이 떨어지는 게 눈에 보였다.
무엇보다 제일 큰 문제는 안전지대의 숫자였다.
아까 초기에 하나 봤던 것을 제외하고 7시간가량 걸어오는 동안 안전지대를 하나도 보지 못했다.
나는 지친 사람들을 둘러보면서 입을 열었다.
“다음 안전지대 나오면 무조건 자리를 잡고 텐트를 쳐야 할 거 같아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다들 힘내세요.”
다른 건 몰라도 안전지대 없이 노숙하는 건 피해야 했다.
가뜩이나 피곤한데, 몬스터 습격을 걱정하면서 자는 건 정신적 피로가 너무 크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런 곳에서 불침번까지 서게 되면 사기가 바닥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컸다.
‘갔다가 다시 오지 않는 이유를 알 거 같아.’
이런 곳을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건 나조차도 사양하고 싶었다.
[조디악 측에 의하면 난도가 높은 던전에는 안전지대가 없다고 합니다.]
‘하긴… 던전이 괜히 던전은 아니겠지… 아! 안전지대다!’
나는 바로 파티원들이 들을 수 있게 소리쳤다.
“저기 안전지대 있어요!”
“와!!”
다들 사막 한가운데서 오아시스를 찾은 것처럼 환호를 내지르며 안전지대 안으로 들어갔다.
다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고, 양지현은 전혀 힘든 기색을 내비치지 않고 차분히 이야기했다.
“일단 여기서 텐트를 치고 자죠. 각자 챙겨오신 텐트를 이용해서 주무시고, 8시간 후에 다시 출발하겠습니다.”
“네.”
대답과 동시에 한봄이 민하연에게 후다닥 달려가서 팔짱을 끼고는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언니! 같이 자자!”
“아… 그, 그럴까.”
“…왜? 혹시 별로야?”
“아냐! 같이 자자.”
민하연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한봄이 꺼낸 일회용 텐트로 그녀와 같이 들어갔다.
그리고 내 옆에 있던 한여름은 두 사람을 지그시 응시하다가 고개를 돌려서 나를 보고는 조용히 욕설을 내뱉었다.
“병신….”
“아니, 이 새끼는 뭐 말만 하면 욕이야.”
“나는 널 볼 때마다 욕할 생각이니까, 기분 더러우면 내가 없는 곳으로 평생 꺼져버려.”
“호오….”
명백한 도발이었다.
그냥 자기 기분 나빠서 하는 욕이 아니라, 내 기분을 어떻게든 상하게 만들려는 의도였다.
나는 텐트를 만들면서 중얼거렸다.
“너, 하연이 보고 싶지 않아?”
“뭔 개소리를….”
나는 한여름만 들을 수 있게 조용히 속삭였다.
“내가 떠나면 하연이가 내 자지에 맛 들여서 나 따라올 텐데?”
“씨발 새끼가!!”
나는 한여름에게 도발하고 나서 텐트 안으로 쏙 들어갔고, 한여름의 외침에 짜증이 난 한봄이 텐트 안에서 소리를 질렀다.
“시끄럽게 굴지 말고 빨리 자기나 해!”
“크윽…. 씨발….”
고놈 쌤통이다.
나는 간이 텐트 안을 둘러보면서 통신으로 감탄했다.
‘오… 생각보다 괜찮은데?’
[일회용에 천 포인트라 비싼 감이 있지만, 괜찮아 보입니다.]
사실 에넬로 텐트를 만들면 더 싸게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 눈이 있으니, 그냥 포인트로 산 것뿐이다.
나는 드러누운 상태에서 민하연과 한봄의 속닥거리는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언니랑... 이렇게 자는….”
“그러게….”
바로 옆에 텐트를 쳤어도 목소리를 줄이니 잘 들리지 않았다.
싱그러운 여자의 목소리가 비록 내 품에서 들려오는 건 아니었지만, 내 기분을 즐겁게 해주기에는 충분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속삭임이 어느새인가 잠잠해졌다.
‘피곤했나 보네.’
[아마 이런 환경이라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잠깐.’
[…?]
나는 한봄과 민하연이 만들어놓은 텐트 쪽을 바라보면서 통신했다.
‘…침몽 해보자!’
나는 침몽을 하자마자 주위를 둘러보며 위치를 확인했다.
내가 있는 장소는 웬 아파트 단지에 있는 놀이터였다.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놀고 있었고, 나는 벤치에 앉아서 조용히 아이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어디냐? 이거 설마 하연이 꿈에 들어온 거 아니겠지?’
한봄과 민하연은 같은 텐트에서 자고 있었다.
침몽이 성공하긴 했지만, 텐트 안을 볼 수 없어서 마법진이 한봄에게 정확히 구사됐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이 친분이 있으니 하연이 꿈에 들어가도 한봄과 장면이 공유돼서 헷갈릴 수도 있었기 때문에 세심하게 관찰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왜 하필 놀이터인가….
나는 혹시 몰라서 주위를 둘러봤지만, 지금 여기에 있는 건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꼬마들 뿐이었다.
남자아이 한 명이 여자아이 두 명을 끼고 놀고 있었다.
‘이런 개 같은….’
설마 침몽 하자마자 빡치는 상황이 나올 줄이야….
꼬마 주제에 여자랑 놀아?
남자 꼬마는 바로 누군지 알 수 있었다.
한여름.
싹수없는 표정이 어린 시절에도 트레이드 마크처럼 얼굴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그리고 옆에 있는 두 여자아이.
‘캬!! 하연이는 어렸을 때도 예뻤네.’
한 명은 딱 봐도 민하연이라는 것을 단박에 할 수 있었다.
현재 겉으로는 차가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민하연이지만, 어렸을 때는 싱글벙글 웃으며 놀이터에서 놀고 있었다.
저런 딸 낳으면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리라.
그리고 옆에 있는 여자아이.
‘한봄? 맞나?’
외형은 대충 한봄과 비슷하게 보였다.
그런데 분위기가 너무 달랐다.
입에 욕설을 담으며 거친 눈매를 담고 있는 얼굴이 아니었다.
순딩순딩한 얼굴로 민하연과 한여름을 쫄래쫄래 따라가고 있었다.
그야 어린 시절부터 그런 언어와 표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겠지만, 너무 다른 분위기 때문에 다른 동생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렇게 한여름과 민하연의 뒤를 따라가던 여자아이가 모래사장에서 넘어졌다.
철푸덕.
“흐아아앙!”
“봄아! 괜찮아?”
어린 민하연이 넘어진 한봄을 보며 놀라서 일으켜 세우려는 순간 한여름이 민하연의 팔을 잡고 끌고 갔다.
“그냥 가자! 맨날 귀찮게 따라와서 짜증 나!”
“보, 봄이 데리고 가야지!”
“됐어! 맨날 따라와서 귀찮게 하잖아!”
“으아아아앙!”
민하연은 어떻게든 한봄을 데리고 가려고 했지만, 한여름이 그녀의 팔을 잡고 억지로 끌고 갔다.
놀이터에는 어느새 하염없이 울고 있는 한봄만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냥 시끄러운 나머지 일단 한봄에게 다가가서 일으켜 세웠다.
“괜찮냐?”
“흐으윽… 감사합니다….”
인사성은 밝네.
나는 보면서 고개 숙여 인사하는 모양을 보니, 대충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싸가지없던 건 아니네.’
그리고 한여름은 어린 시절부터 싸가지 없었고.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앞에 있던 꼬마 한봄이 사라지고, 장소가 바뀌었다.
‘집안? 은신!’
장소는 내가 모르는 타인의 집 안이었고, 나는 급하게 은신을 시전했다.
꿈속이라고 해도 무단 침입이 걸리면 좋을 건 없으니까….
조심히 집 안을 돌아다녔고, 두 사람이 다투는 것을 보고 누구 집인지 알 수 있었다.
“오빠! 그 여자애들이랑 친하게 지내지 말라니까!”
“아, 씨발, 꺼져. 짜증 나게 하고 있어.”
“욕 좀 하지 말고!”
한여름과 한봄이었다.
한여름은 교복을 입은 모양새를 보니, 중학생인 듯했다.
한봄은 외형을 보니, 아직 초등학생 정도의 나이처럼 보였다.
한여름은 한봄과 대화를 나누면서 욕을 하지 않는 부분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심하게 욕설을 내뱉었다.
“씨발, 기분 잡치네.”
“그 애들이 하연이 언니 뒷담화 까는 애들이라고 몇 번을 말해!”
“씨발, 좆같네….”
“오빠!”
한여름은 한봄의 외침을 무시하고 현관문을 부서질 듯이 닫으며 집을 나갔다.
한봄은 그런 한여름을 보면서 애처롭게 속삭였다.
“오빠….”
“….”
이건 사이가 안 좋냐를 떠나서 일방적으로 싫어하는 수준이었다.
한봄이 처음부터 한여름을 싫어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한여름은 처음부터 한봄을 싫어한 듯 행동하고 있었다.
그렇게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구고 있는 한봄을 보고 있을 때, 또 주위 환경이 바뀌었다.
집은 그대로였다.
“아오, 존나 무거워….”
한봄은 마트에서 산 식료품을 한가득 채운 봉투를 양손으로 들고 낑낑거리며 집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딱 보니, 고등학생 정도 되었고 지금 외형과 비슷하게 성장한 상태였다.
“개새끼, 반찬 좀 사 오라고 해도 쳐 듣질 않아.”
“….”
이제 막 입이 험해진 한봄이었다.
‘한봄이 욕을 이렇게 하게 된 건 한여름 때문 같네.’
그야, 성인이 되면 누구든 욕을 할 수 있었지만, 한봄의 욕은 딱 들어보면 한여름의 욕설 톤이 담겨 있었다.
“아, 개더워…. 일단 좀 씻고 옷 갈아입자….”
한봄이 투덜투덜하며 거실에 봉투들을 놓고 자신의 방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야… 니… 그….)
(꺼….)
한봄은 갑자기 멈춰선 다음에 다른 방에 눈이 갔다.
“뭐야? 집에 누구 있었나?”
한봄은 딱 봐도 집에 누가 있어서 인기척을 내기 위해 방으로 접근하는 순간이었다.
열린 방문으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존나 부럽다. 나도 한봄이랑 한 지붕 아래서 살았으면 좋겠다.”
“미친놈… 눈깔 뼜냐?”
“….”
비아냥거린 건 한여름이었고, 나머지는 친구였다.
“네 여동생 존나 예쁘잖아.”
“꺼져. 나는 볼 때마다 좆같아.”
지금까지 한여름이 한봄을 칭찬하거나 긍정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건 꿈속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니네, 지금은 그래도 좀 얌전히 말이라도 듣는 거 보면…. 내 덕분이겠지?’
한여름이 0층에서 회귀로 승승장구해서 올라왔다면 한봄을 보자마자 쌍욕을 했을 가능성이 컸다.
“…개새끼.”
“….”
한여름의 비아냥에 기분이 상한 한봄은 조용히 욕하면서 자신의 방으로 가려고 했다.
그 순간이었다.
“야, 걔랑 그렇게 하고 싶으면 천만 원 주면 한번 하게 해줄게.”
..
..
나는 침몽에서 튕겨서 당황한 채 속으로 중얼거렸다.
‘미친….’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