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한 햇살이 비추고, 포근한 기운이 감도는 거실이었다.
자신이 살던 집이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서도 민하연의 부모님의 보살핌으로 이사를 하지 않고 계속 그곳에서 지낼 수 있었다.
거실 소파에 앉아 있던 한봄은 왠지 모를 편안함을 느끼며 눈을 감고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좋다….”
그렇게 흐뭇하게 미소를 지으며 배 위에 손을 올리는 순간이었다.
“…?”
자신의 배의 형태가 다르다는 것을 직감했다.
평생 뱃살이라는 걸 가져본 적이 없던 한봄이었다.
그녀는 어떤 식으로 과식을 해도 살이 붙지 않는 체질이었다.
그런 그녀가 손바닥으로 느껴지는 촉감은 평생 느껴보지 못했던 이질적인 감각이었다.
뭔가 싶어서 고개를 내리고 자신의 배를 내려다봤다.
“어… 이거….”
그냥 살이 붙었다는 레벨이 아니었다.
누가 봐도 그녀의 상태는 단번에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임신? 어… 내가?”
그녀의 머릿속은 기억들이 젤리들이 엉키듯 마구잡이로 섞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불쾌감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젤리로 인해 달콤함이 느껴질 뿐이었다.
꿈이라는 생각조차 못 하는 한봄은 배를 쓰다듬으면서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흐흐….”
너무나 익숙한 느낌이었다.
오히려 자신의 안에 뭔가 있다는 신기한 기분이 들뿐이었다.
그렇게 웃으며 배를 쓰다듬고 있을 때, 누군가가 거실로 들어왔다.
“혼자 너무 웃고 있는 거 아냐?”
“…?”
한봄은 커다란 배를 낑낑거리며 간신히 뒤를 돌아봤고, 그곳에는 이 장소와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는 남자가 서 있었다.
“…아저씨?”
“그놈의 아저씨는 평생 아저씨냐.”
“아하하…. 습관이야, 습관….”
성수호는 한봄의 옆에 앉아서 그녀의 배를 쓰다듬었다.
그런 그의 행동에 한봄은 오히려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어때? 아들 같아, 딸 같아?”
“어느 쪽이든 나는 좋은데.”
“아… 진짜 김빠지게 하네.”
“하하… 미안.”
하지만 한봄의 얼굴에 기분 나쁜 기색은 전혀 비치지 않았다.
허탈하게 웃으며 성수호의 어깨에 기댈 뿐.
“계속 이렇게 있고 싶다….”
“있으면 되지?”
확신에 찬 성수호의 대답에 한봄은 그의 팔을 꽉 끌어안고 조용히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절대 나 떠나지 마… 알았지?”
하지만 성수호가 입을 열려는 순간 주위가 암흑으로 바뀌었고, 한봄은 깨고 싶지 않았던 꿈에서 깨어나 결국 현실을 마주하게 되었다.
..
..
한봄은 꿈에서 깨자마자 성수호의 다리를 보고 기겁했다.
“아, 아저씨… 다, 다리에서 피가….”
“그게….”
성수호가 모든 상황을 설명해줬다.
한봄의 돌발행동과 갑자기 나타난 레드 소환사들….
그 후에 싸움이 일어났고, 간신히 사태를 정리했다는 이야기였다.
한봄은 성수호의 말을 듣고 나서 눈가에 눈물이 고여서는 해명을 하기 시작했다.
“내, 내가 왜… 모, 모르겠어요! 나… 진짜… 몰라요…. 나 진짜 그런 기억 없어!”
“알고 있어요. 보니까 저 녀석들 우리 파티원 중의 한 명이랑 내통하고 있었던 거 같아요.”
“…내통이요?”
“누군지는 듣지는 못했지만, 접선했다는 식으로 이야기했어요. 그리고 우리를 노린 것도 일부러 그런 거고. 아마 한봄씨가 그렇게 된 건 내통한 사람이 뭔가 꾸민 거겠죠.”
“말도 안 돼….”
성수호는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리고 있는 한봄의 오른팔을 잡았다.
한봄은 성수호가 갑자기 자신의 팔을 잡자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도 거부하지는 않았다.
“아, 아저씨?”
“한봄씨….”
“네, 네!”
얼굴을 붉힌 한봄은 나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우물쭈물하는 한봄을 보면서 나지막이 속삭였다.
“지금 문제가 있어요….”
“…? 무슨 문제요?”
“하아… 하아… 상처가 치료가 안 돼요.”
“네? 무, 무슨…. 어….”
성수호는 인벤토리에서 아이템을 하나 꺼냈다.
피가 묻어 있는 단도였다.
성수호가 꺼내 들은 단도를 본 한봄의 얼굴이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밤이라 달빛만이 비추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한봄의 창백함이 성수호에게도 느껴지고 있었다.
“아, 아저씨… 아, 아까 내가 찔렀다는 게… 설마….”
“이거에요…. 다른 건 다 치료가 되는데… 하아… 하아… 이건 뭔 짓을 해도 치료가 안 되고 있어요.”
한봄은 순간 손바닥으로 입을 막고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아까 한여름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무기 자체는 약한데, 일단 한번 찌르면 출혈이 멈추지 않아서 언젠가 죽는다고 설명에 나와 있어. …정말 위험하면 주저하지 말고 써.)
당시에 한봄은 별 관심 없이 아이템을 받고 인벤토리에 넣었다.
일회용인데다가 근접전을 하지 못하는 한봄에게 굳이 쓸모 있는 아이템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사용했다.
다름 아닌 성수호에게….
한봄은 피로 물든 성수호의 허벅지를 손으로 대면서 주문을 외쳤다.
“치, 치료! 치, 치료를 빨리! 피, 피가!”
하지만 한봄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고작 손가락 한 뼘 정도 되는 상처는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적은 양이지만 피가 계속 흘러내릴 뿐이었다.
“하아… 하아… 한봄씨… 저 아이템 어디서 났어요?”
“그, 그게… 모, 그.. 아… 어, 어떻게! 피, 피가!”
“침착해요!”
“허윽….”
한봄은 성수호의 호통에 놀라서 몸을 웅크리고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성수호는 한봄의 어깨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소리쳐서 미안해요.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저 아이템이 뭐였는지 알아야 해요.”
“흐윽… 네….”
한봄은 흘러나온 눈물을 닦은 뒤에 이실직고 설명했다.
실명탄과 단도는 한여름이 준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봄은 한여름이 설명해준 것을 그대로 읊어줬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성수호가 힘이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너무 절묘하네요.”
“아, 아니에요! 아무리 그래도… 오빠가….”
“아까 저놈들이 제가 눈이 멀고 다리에 상처가 난 걸 보고 계획대로 됐다고 말했어요.”
“말도 안 돼….”
한봄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심하더니, 다시 내 다리에서 나오고 있는 피에 눈이 돌아갔다.
“이, 일단 치료부터 해요!”
“…지금 말대로라면 저주인데, 해주 물약을 만드는 건 지금 제 마나로는 턱없이 부족해요.”
성수호의 말에 의하면 지금 가진 마나로는 해주(解呪)-저주 해제- 물약을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만약 마나가 풀로 채워져 있는 상태라고 해도 안 될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해줬다.
한봄은 성수호의 설명을 듣고 얼굴이 새하얘진 상태로 되물었다.
“그럼… 잠깐만요. 아니죠?”
“…이거 치료 못 할 거 같아요.”
“말도 안 돼! 아저씨 뭐든 다 잘하잖아요! 빨리 치료해봐요!”
한봄은 성수호의 옷깃을 잡아 흔들며 애걸복걸했다.
성수호는 깊은숨을 내쉬더니, 한봄의 팔을 잡고 포인트를 넘겨줬다.
한봄은 자신의 팔등에 표시된 100만 포인트를 보고 놀란 나머지 동공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건… 왜요?”
“한봄씨, 혹시 상태 이상 치료 같은 스킬 있어요?”
“네…. 아! 그거 올려볼게요!”
“일단 10까지 올려보세요.”
한봄은 성수호가 해결할 방법을 제시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성수호의 말을 듣고 기쁜 마음으로 상태 이상 해제 스킬을 10까지 올린 뒤에 스킬을 사용해봤다.
하지만….
“아, 안 돼요…. 어, 어떡해….”
“그리고 나머지 회복 스킬도 10까지 올리세요.”
“네? 그, 그렇지만 지금 회복 스킬은 의미 없잖아요! 빨리 저주를!”
“일단 하세요.”
“…네.”
한봄은 단호한 성수호를 보면서 확신이 들었다.
‘뭔가 있는 거야. 이것저것 잘하는 사람이니까, 치료할 방법이 있는 걸 거야.’
그렇게 기대감에 부풀어 오른 한봄은 모든 포인트를 쓰면서 스킬을 올렸고, 성수호에게 보고했다.
“올렸어요! 자, 이제 뭐 해야 해요?”
“….”
한봄은 침묵하고 있는 성수호의 허벅지에서 새어 나오는 피를 막으면서 다급하게 물었다.
“빨리 말해봐요! 지금 어물쩡 거릴 시간이….”
“한봄씨, 부탁이 있어요.”
“부탁이요? 지금 그럴 시간이 아니잖아요! 빨리….”
성수호는 느긋한 표정을 지으며 한봄의 손등에 자신의 손을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 정도 스킬 레벨이면 어디 가서 무시당하지 않을 거예요.”
“…무슨 소리예요.”
“하연이 잘 부탁해요.”
“그게 무슨 소리냐고!!!”
한봄은 거친 함성과 함께 성수호의 옷깃을 잡고 흔들었다.
성수호는 자기에게 소리치는 한봄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토닥거렸다.
“이미 출혈이 심각해요. 죽기 전에 한봄씨가 깨어나서 다행이에요.”
“싫어… 나 때문에… 나 때문에 아저씨가… 흐으윽….”
“솔직히 지금까지 살았다는 게 더 신기한 상황이에요. 죽는 모습 보여주고 싶지 않네요. 떠나요, 빨리….”
“싫어… 싫다고!!”
한봄은 성수호에게 달려들어서 껴안고 폭포수 같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성수호에게 도움받고, 또 도움받고, 계속 도움받은 결과가 이런 참담한 말로가 되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단 한 번도 남자에게 애정 비슷한 것을 느껴본 적이 없었던 한봄이었다.
하지만 아까 꿈속에서 그와 오손도손 대화를 나누었을 때,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그에게 애정을 표시했다.
평생 같이 있고 싶은 ‘남자’가 생긴 것이었다.
“가지 마… 제발 부탁이야…. 내가 잘할게요… 흐으윽….”
“…참 신기해요.”
“흐으윽… 뭐가요?”
한봄은 눈물을 하염없이 쏟아내면서도 그의 말에 경청했다.
“저는 처음에 한봄씨 싫어했어요.”
“끄읍…내가 성격이 지랄 맞아서요?”
“하하… 아뇨. 한여름 가족이라서요.”
“….”
성수호는 힘겹게 숨을 쉬어대면서도 한봄을 진정시키고 서글서글한 목소리로 이야기해 줬다.
성수호는 처음 위그드라실에 와서 한여름과 꽤 큰 대립을 했다고 설명했다.
사실 대립보다는 일방적으로 호구 취급을 했다는 식이였다.
그러던 중에 민하연이 눈에 들어왔다고 했다.
“어제 물어봤었죠? 하연이… 강간….”
“…자는 척 한 거였어요?”
“네, 솔직히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몰랐어요.”
성수호는 한여름의 계속되는 멸시에 짜증이 나는 참이었고, 그게 아이러니하게도 민하연과의 관계가 개선되는데 한몫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우연히 보스전에 들어가서 관계가 깊어졌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성수호도 모든 것을 사실대로 말한 것은 아니었다.
강간 플레이와 회귀는 뺀 상태로 설명해준 것이었다.
“하연이가 저한테 호감이 있었어도 제가 그런 짓을 한 건 결국 복수심 때문이었어요.”
“…아직도 그 녀석 싫어하세요?”
한봄이 말한 그 녀석은 한여름이었다.
“네… 아마 평생 좋아하는 일은 없겠죠? 그리고 그건 그 녀석도 마찬가지겠죠.”
“….”
한봄은 어느새 성수호에게 안겨서 평안하게 주위를 둘러봤다.
수면으로 자는 사람들을 시신으로 착각하고 있는 한봄은 그 모습도 별로 개의치 않아 했다.
오로지 자신의 가족 때문에 성수호가 자신을 싫어했다는 사실에 침울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한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결국 누군가를 좋아하는 건 분노랑 상관없더라고요.”
“아저씨….”
“…제일 후회되네요. 개인적인 감정으로 한봄씨랑 빨리 친해지지 못했던 거요.”
“흐으으윽… 가지마….”
한봄은 그렇게 울다가 눈물을 닦고는 입을 열었다.
“아저씨… 저 싫어했다고 했죠?”
“…예전 일이죠.”
“그럼 그때도 나한테… 그런 짓 하고 싶었어요?”
한봄이 말한 건 강간이었다.
어느새인가 한봄은 성수호에게 속에 있는 생각을 거리낌 없이 내뱉고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녀의 거침없는 대화에 성수호가 당황하면서 짧게 말했다.
“…노코멘트 할게요.”
한봄은 성수호의 노코멘트라는 단어로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는 성수호의 대사에 피식 웃으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어차피 나 같이 가슴 작은 애랑 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겠지….”
“한봄씨.”
“…네?”
“한봄씨는 제가 인생 살면서 본 여자 중에 제일 예뻐요. 솔직히 하연이보다 더 예뻐요.”
“….”
성수호는 한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일단 달려드세요. 한봄씨가 좋아하는데, 거절할 남자 따위는 없을 거예요.”
“…아저씨는 저 어때요?”
“…저는 이미 늦었어요. 이제 가세요. 지금 레드 소환사가 또 나타나면… 흐읍….”
“츄읍….”
한봄은 성수호의 말을 끊고 그에게 달려들어서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껏 성수호의 체액을 음미한 한봄은 눈물과 함께 입을 열었다.
“아저씨가 나를 좋아했었다는 증거… 가지고 싶어요.”
“어? 여기 어디야?”
“마을…인 거 같습니다.”
민하연과 양지현, 한여름은 오른쪽 통로로 나가자마자 처음 보는 마을 중앙으로 텔레포트 되었다.
그리고 주위를 돌아본 결과 이곳은 중앙 마을과 다르게 여관이 넘쳐나는 상태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후하… 진짜 하수도 냄새 지독했는데, 여기는 천국이네요. 천국.”
“일단 잘 도착해서 다행입니다만, 다른 멤버들이 걱정이네요.”
양지현은 비록 진심을 담지 않았지만, 표정만큼은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었다.
“일단 이 마을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찾아보고 다시 중앙 마을로 돌아가죠.”
“일단 봄이는 다시 중앙으로 갈 거 같은데… 나머지 세 분이 걱정이네요.”
민하연은 한봄이 무조건 중앙 마을로 갈 것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지독한 냄새와 불쾌감으로 무장한 수로의 특성상 다른 방향으로 간 세 여자가 중앙으로 온다는 보장은 없었다.
“일단 내부에 위험이 없다는 것을 알았으니, 저희만 돌아간다면 남은 분들을 여유롭게 다른 마을로 이동시킬 수 있을 겁니다. 저희는 오늘 여기서 쉬고, 내일 수로로 들어가서 다시 중앙으로 가보죠.”
“네.”
현재 한봄과 성수호의 상황을 모르는 민하연은 그녀의 말에 수긍하고는 한여름을 바라봤다.
한여름은 미간을 찌푸리고 정신 사납게 다리를 떨어대고 있었다.
그 모습에 민하연은 못마땅하다는 듯이 그를 보면서 한소리를 했다.
“야, 정신 사나워! 왜 그래?”
“아, 아냐…. 하연아.”
“왜?”
제피룸 마을에서 민하연은 아무리 귀찮아도 한여름의 부름에 귀찮은 티를 꾹꾹 눌러 넣으며 대답했었다.
하지만 성수호와 확실한 관계를 맺고 나서는 아예 그를 애물단지 취급을 할 뿐이었다.
“잠깐 얘기 좀….”
“아씨, 됐어! 계속 귀찮게 ‘얘기 좀….’ 이러고 있어.”
“어, 어차피 지금 당장 할 것도 없잖아. 같이 밥이나 먹으면서….”
“됐어. 나 혼자 먹을래. 내일 아침에 다시 중앙 마을로 출발하는 거죠?”
“네, 일단 내일 다시 여기서 모여서 가는 걸로 하죠.”
“그럼 내일 봬요.”
“자, 잠깐! 같이 가!”
민하연은 인상을 찌푸리며 자리를 떠났고, 한여름은 그런 민하연은 뒤따라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