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침대에 벌러덩 누우며 흥얼거렸다.
‘역시 기숙사가 최고다….’
교장실에 있는 비서에게 견학에 대동할 경비원들의 명단을 넘겨주고 일과를 마무리했다.
통보받은 경비원들의 표정이 썩 좋지는 않았다.
그중에서 고충신의 표정은 예술 작품의 하나로 승화해도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경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제목… 절망.
‘캬… 그 표정 사진으로 찍어놨어야 했는데.’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함선에 저장되어 있으니 나중에도 보실 수 있습니다.]
‘역쉬~ 우리 CEO님!’
나는 아르모니아의 말을 듣고 웃으며 주변을 살펴봤다.
내 눈에 VR 헤드기어가 들어오는 순간 윤지아와 고충신에 관한 생각이 떠올랐다.
‘고충신, 언제쯤 접속하기 시작할까?’
[꾸준히 접속해서 확인하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만약 그가 수호 님을 노리는 것이라면 부계정이 아닌, 본 계정으로 들어올 확률이 높습니다.]
지금 나와 윤지아의 랭크는 플래티넘이었다.
대략 상위 10퍼센트의 등급.
그런데도 딱히 고충신 쪽에서는 반응이 오지 않았다.
고충신의 본캐 아이디가 뭔지도 모르고, 무슨 랭크인지도 모르기 때문에 하염없이 게임을 즐기며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설마 이미 나한테 처발린 상태는 아니겠지?’
[윤지아의 행동을 보면 딱히 이상한 점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뭐, 안 나타나면 그냥 윤지아랑 놀면 그만이지.’
나는 동물의 마을에 접속하기에 전에 윤지아를 만나기 위해 워오레에 접속했다.
***
윤지아는 대기실에 강탈자와 앉아 있는 상태로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확실히 랭크가 높아져서 그런지 대전이 잘 안 잡히네요.”
“지금 이 정도면 윗등급에선 더 오래 걸리겠네요.”
두 사람은 대기실에서 대전을 신청하고 3분 정도가 소요된 상태였다.
오래 기다린 건 아니지만 10초 안에 잡히던 대전이 20초, 30초 늘어나더니 현재는 5분 정도를 기다려야지 한판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VR 게임 특성상 대중화가 되어 있지 않았고, 그런 와중에 상위권으로 갈수록 사람의 숫자도 줄어들어서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었다.
그래도 강탈자는 딱히 불만을 제기하지 않고, 기다리는 동안 잡담을 나누며 즐거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윤지아는 강탈자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의 안정감을 찾을 수 있었다.
‘오빠였다면 지금쯤 투덜대고 있었을 텐데….’
윤지아는 고충신을 사랑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짜증을 내거나 불만을 토해내는 것을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윤지아는 기본적으로 소심한 인간이고, 옆에서 누군가가 화를 내면 상대방의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런데도 윤지아는 사람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고 그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리고 분명 그녀가 느끼는 장점도 있었다.
‘오빠도 가끔 과격할 뿐이지 평소에는 친절하니까.’
그렇게 고충신에 대해 이해하며 강탈자와 대전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윤지아의 친구창에 회색이었던 고충신의 아이디가 초록색으로 바뀌었다.
“응?”
“왜 그러세요?”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
강탈자가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을 때, 고충신으로부터 귓속말이 전해져 들어왔다.
(지아야 나왔어… 어? 뭐야? 너 랭크 왜 그렇게 높아?)
윤지아는 강탈자가 듣지 못하게 고충신에게 귓속말로 이야기를 해줬다.
(아, 게임하다 보니까 올라갔어.)
(…지금 그 새끼 옆에 있어?)
(응. 지금 대전 신청하고 기다리는 중이야.)
(좋아!)
고충신은 그렇게 소리치더니 갑자기 게임을 나가버렸다.
‘…괜찮으려나.’
윤지아는 고충신의 실제 게임 실력을 정확히 알고 있는 건 아니었다.
언제나 초보자들을 학살하는 모습만 봐왔기 때문에 어느 정도 할 줄 안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윤지아에게 의문의 사람이 친구 요청을 걸어왔다.
‘벌레학살자… 누군지 알만하네.’
윤지아는 헛웃음을 내면서 친구 요청을 받아줬다.
(후… 아직 대전 안 잡혔지?)
(응.)
(그 녀석 전처럼 원딜하고 있지?)
(응, 계속 똑같은 캐릭터만 하고 있어.)
(좋아….)
귓속말로 고충신의 웃음이 들려왔다.
(만약 대전 잡히면 바로 말해줘. 저격하게.)
(저격? 그게 뭐야?)
(아… 그냥 대전 잡히면 말해주면 돼. 혹시라도 내가 말하기 전에 절대 수락 누르지 마!)
(아오… 귀야…. 알았어. 소리 지르지 말고….)
그리고 윤지아가 찡그리며 고막의 통증을 식히고 있을 때, 대전이 잡혔다는 신호가 나왔다.
(어!? 지금 대전 잡혔어?)
(응, 마침 잡혔네. 어떻게 해? 눌러?)
(어! 수락 눌러!)
윤지아는 고막에 울리는 고충신의 목소리를 최대한 참으며 수락을 눌렀다.
***
‘이상한 거 같지?’
[지금까지 보여줬던 모습과 꽤 달라진 표정입니다.]
윤지아는 자기 얼굴이 보이는지도 모르고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거기다 혼자 뭔가 여기저기 눈을 굴리는 게 뭔가 하고 있다는 게 티가 났다.
나 다른 사람이랑 이야기하고 있어요!
라고 대놓고 보여주는 분위기였다.
왠지 느낌상 고충신과 대화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기대감이 들었다.
그렇게 기대감에 젖어 있을 때, 마침 대전이 잡혔다는 안내 창이 띄워져 있었다.
나는 바로 수락을 눌렀다.
그런데 옆에 있는 윤지아는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 보이며 창에 수락 버튼을 누를까 말까 고민하는 눈치였다.
사실 고충신을 만나면 묵사발을 내줄 자신은 있었지만, 걱정이 드는 부분이 있었다.
이 게임은 혼자 하는 게 아니다.
다섯 명이 팀을 짜고 각자의 담당 위치로 가서 작은 싸움으로 성장한 뒤에 중반부부터 큰 싸움으로 주도권을 잡는 게임이다.
문제는 내가 아무리 라인을 박살 내도 탑과 미드가 터지면 복구가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나마 플래티넘까지는 어찌저찌 밀어서 이길 수 있었지만, 여기서부터는 좋은 팀원이 걸리는 것도 하나의 실력으로 작용하는 곳이었다.
그렇게 고민하고 있을 때, 윤지아가 수락 버튼을 눌렀다.
캐릭터 픽 장소로 소환됐고, 나는 언제나 고르던 활쟁이를 골랐다.
팀원들은 나를 보고 한숨을 쉬었지만, 간신히 설득해서 게임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상대편에는 눈에 띄는 녀석이 한 명 있었다.
벌레학살자….
‘네이밍 센스하고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어떻게 하긴….’
나는 아르모니아의 질문에 일말의 고민도 없이 미소를 지으며 소리쳤다.
‘학살의 시간이다!!!!’
[….]
(윤지아! 방해하라고!)
(….)
윤지아는 고충신의 고함이 담긴 귓속말에 울상을 지으며 스킬을 허공에 난사했다.
윤지아는 노멀전에서도 하지 않을법한 실수를 연발하며 속으로 울먹였다.
‘이게 뭐야….’
처음에는 최대한 눈치채지 못하게 스킬을 덜 활용했고, 그것도 통하지 않아서 어느 순간에서 스킬을 허공에 난사하기도 했다.
하지만 성수호는 그런 윤지아의 실수조차 커버하면서 완벽하게 고충신을 학살하고 있었다.
강탈자는 2:1… 아니, 3:1에 가까운 상황에서도 전혀 밀리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고충신의 캐릭터가 성수호의 스킬을 맞고 바닥의 누우면서 윤지아의 귓속에 엄청난 고음이 울려 퍼졌다.
(씨발!!!!)
(….)
고충신이 승부욕에 집착한다는 사실은 진작 알고 있었다.
윤지아는 고충신과 1, 2년 알고 지낸 사이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윤지아는 오히려 고충신이 가지고 있는 승부욕에 끌리기도 했었다.
고충신은 전투적인 실력은 낮을지언정 자신이 가진 능력을 활용해서 사회적인 성과를 내는 인물이었다.
비록 능력만 들으면 조촐한 능력으로 치부될 수 있었지만, 그가 가진 첩보 능력은 교단에서도 인정하고 있었다.
윤지아는 자신에게 없는 자기애와 승부욕, 집착을 가진 고충신에게 오히려 끌린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 윤지아 앞에서 절대 추잡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하지만 윤지아는 오늘 처음 고충신의 본성을 봐버렸다.
(씨발! 씨발! 씨발!!!)
(오빠, 제발 침착해….)
(내가 지금 침착하게 생겼어!?)
윤지아는 어느 순간 눈가에 눈물이 고인 채 귀를 막고 있었다.
하지만 윤지아가 귀를 막아도 고충신의 귓속말은 그녀의 머릿속을 울리며 계속 괴롭혀왔다.
고충신이 내보내는 본성은 지금까지 그녀가 봐왔던 흥분과 차원이 달랐다.
언제나 자신이 제어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고충신은 현재 조절 장애가 걸린 인간처럼 날뛰고 있었다.
‘빨리… 그냥 빨리 끝내고 싶어….’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생각에 윤지아는 바들바들 떨면서 빨리 이 상황이 끝나기만을 간절히 빌었다.
분명 고충신이 윤지아를 향해서 화를 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고충신의 고함이 윤지아를 위축시키면서 그녀의 객관적인 판단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녀는 모든 상황이 엉망이 되더라도 좋으니 이 게임이 빨리 끝나기만을 빌고 있었다.
그렇게 눈물을 글썽이고 있을 때, 강탈자가 옆에 다가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어디 아프세요?”
“그, 그게….”
윤지아의 실수는 주위에서 봐도 이상할 정도로 엉성했었다.
그리고 강탈자의 실력이라면 고의성도 캐치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윤지아를 감싸기 시작했다.
고충신에 이어서 강탈자에게도 욕을 먹을 것이 두려웠던 윤지아는 자기 어깨에 손을 올린 강탈자를 보면서 몸을 흠칫 떨었다.
‘어떻게… 이분도 나한테 화내면….’
그리고 강탈자는 침착하게 그녀에게 말했다.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실수한다고 너무 위축될 필요 없어요.”
“그, 그렇지만… 제가 계속….”
“저희 게임하는 거잖아요.”
“…네?”
“즐겁게 해야죠.”
“아….”
강탈자는 비록 활을 쓰는 캐릭터로 아바타가 되어있었지만, 캐릭터의 웃는 모습이 윤지아에게도 확실하게 전해지고 있었다.
비록 아직도 귓속말로 고충신의 욕설이 들려오고 있었지만, 윤지아는 잠시 귀를 닫고 마음이 안정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게임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화만 낼 줄 알았는데, 이 사람은 다르네.’
윤지아는 그제야 희미한 미소를 보이며 입을 열 수 있었다.
“고마워요.”
간신히 안정감을 찾은 윤지아는 다시 게임에 집중할 수 있었다.
..
..
“오늘 즐거웠습니다. 내일 봬요.”
“네, 들어가세요~”
윤지아는 강탈자에게 인사를 하고는 그가 나가는 것을 지켜봤다.
그리고 그가 나간 것을 확인하고 나서, 크게 한숨을 쉬면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게임은 고작 두 판만 했을 뿐이었지만, 그녀는 혼이 빠져나간 경험을 체험할 수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고충신은 욕설과 함께 게임을 바로 나간 사실이었다.
“하아… 제발 포기했으면 좋겠다.”
윤지아는 자기 입으로 그렇게 말했지만, 고충신이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패배하고 물러날 성격이 절대 아니었다.
그리고 그와 대조되는 강탈자가 또 떠올랐다.
“친절한 사람이라 다행이다.”
강탈자는 게임의 승패는 별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문제가 발생하면 윤지아와 소통하면서 게임을 풀어나가려고 같이 노력하려는 모습을 보여왔다.
하지만 그의 친절함이 윤지아의 마음속에 죄책감을 불어넣고 있었다.
“…싫다.”
윤지아는 기운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워오레를 종료했다.
***
고충신은 VR 헤드기어를 벗어 던지면서 소리를 질렀다.
“씨발!!!”
(조용히 좀 하자고!!)
고충신은 옆 방의 항의를 듣고 이빨을 갈면서 최대한 욕을 삼키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의 폐와 목구멍은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욕을 내뱉어냈다.
“씨발… 씨발… 좆같은 새끼….”
고충신은 작은 소리로 욕을 중얼거리며 아까 강탈자에게 죽었던 일들을 전부 떠올렸다.
떠올리고 싶어서 떠올리는 게 아니었다.
강제였다.
고충신은 아까 있었던 일들이 뇌 속을 자유롭게 유영했고, 굴욕적인 장면이 하나하나 빠지지 않고 뇌세포에 노예 낙인처럼 각인되어가고 있었다.
그냥 단순히 게임에서 질 수 있었다.
고충신도 그동안 수없이 게임을 해왔고, 패배로 당한 굴욕을 아군에게 풀면서 기분을 풀고는 했었다.
하지만 압도적인 실력 차이로 분쇄기에 갈리듯이 죽은 고충신은 아군들에게도 멸시받으면서도 계속 게임을 플레이했다.
한 번, 딱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죽이고 싶은 마음에 비아냥을 참고 견뎌냈다.
하지만 그 한 번은 찾아오지 않았고, 결국 완벽한 패배자로 게임을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죽여버린다… 씨발 새끼….”
고충신은 자신의 머릿속에 윤지아에 관한 생각을 전혀 넣지 않고 강탈자에 관한 생각으로 가득 채운 채 잠자리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