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7화 〉 457화 위그드라실 (45)
* * *
혼령들은 자신들의 은신처에 한꺼번에 들이닥친 뒤,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젠장… 이게 무슨 일이야 도대체!”
“죽은 거야? 아까 그 녀석들 죽은 거냐고!”
“나도 몰라!”
“죽고 싶지 않아!!”
“좀 조용히 해!”
정신없이 떠드는 혼령들 사이에서 그나마 그들을 타박하고 진정시킨 건 벤 크래쉬였다.
“전멸도 아니고 당한 놈들도 고작 해봐야 열 명도 되지 않아.”
“씨발 열 명이든, 백 명이든 뭔 상관이야!? 죽었다고!! 죽었는데, 이번에는 진짜 죽었어!!”
“씨발….”
그도 성수호의 마법에 휩쓸려서 연기가 되어 사라질 뻔했지만, 운이 좋게 그와 떨어 져 있던 곳에 터진 번개 덕분에 안개가 되는 꼴은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이 그에게 더 큰 공포심을 부추기고 있었다.
‘씨발… 분명 그 새끼들 살아서 나갈 방법을 알고 있을 거야! 하지만….”
절박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입술은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다시 성수호가 있는 곳으로 향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다.
‘뭐, 그런 괴물 같은 새끼가 있어!? 살아 있을 때는 강했다고 해도, 어떻게 영혼들까지 죽이는 거냐고!!’
생전에 자신뿐만 아니라, 백 명이 넘는 동료들을 전멸시킨 괴물.
이곳에서 그 녀석을 만났을 때만 하더라도 그가 죽었다는 사실에 기뻐하던 벤 크래쉬였다.
하지만 죽기는커녕 죽지 않는다는 영혼까지 태워버리는 성수호의 모습에 영혼 상태로도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낄 수 있었다.
‘…안돼. 이대로 갔다간 분명 개죽음이야.’
벤 크래쉬는 깔끔하게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살아나고 싶다는 욕구보다, 죽고 싶지 않다는 욕구가 더 그의 정신을 휘어잡기 시작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지금 벤 크래쉬는 개똥밭 같은 이곳에라도 남고 싶은 심정이었다.
영혼조차 지워지면 그다음은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두려움이 그를 감싸기 시작했다.
그리고 벤 크래쉬의 결심처럼 다른 영혼들도 똑같은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나… 이제 그냥 마을로 돌아갈래.”
“나도….”
“그래, 여기서 이렇게 해서 뭐해. 어차피 죽었는데….”
“….”
그동안 살아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으며 무리를 이뤘던 동료들이 점점 의지를 잃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모든 혼령의 의지가 꺾이는 순간이었다.
어둠 속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가관이군.”
“!?”
벤 크래쉬를 포함한 모든 혼령이 어둠을 향해 일제히 바라봤고, 그곳에는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자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냐?”
“그… 그게….”
벤 크래쉬는 큰 덩치를 이끌고 그에게 다가가서 사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든 사정을 설명하는 내내 어둠 속의 남자는 어떠한 대답도 없었다.
모든 사정을 설명한 벤 크래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마지막 마침표를 찍었다.
“그래서 우리는 돌아갈 거야. 이제 더 이상 안 돼.”
“…정말 산자였나?”
“그렇다니까!”
“그런 녀석을 두고 그냥 이렇게 두고 온 거냐? 진짜 쓸모가 없군.”
“…지금 뭐라고 했냐?”
벤 크래쉬의 말을 시작으로 혼령들이 일제히 일어나서 어둠 속에 있는 남자에게 점차 다가가기 시작했다.
“뭐? 쓸모?”
“지금 그게 우리한테 할 말이야!?”
“너, 이 새끼 전부터 얼굴도 보여주지 않고 우리를 막 부려 먹고 있었지?”
다른 혼령들의 반기 속에 벤 크래쉬가 고개를 끄덕이며 남자에게 점점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래, 생각해보면 우리는 너의 설득에 넘어가긴 했지만, 이렇게 대접받을 이유가 없어. 매번 혼자 숨는 꼬락서니도 마음에 안 들었는데. 잘됐군. 야, 이 새끼 한번 다구리나 치고 뜨자.”
“그래! 분풀이라도 해서….”
다들 그렇게 아우성치며 어둠 속의 남자에게 다가가는 순간이었다.
사아아악….
어둠 속 남자의 얼굴 쪽에서 보랏빛의 안광이 쏘아지더니, 혼령들의 눈을 흐릿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어… 저거 본 기억이….”
“나, 나도…. 뭐더라….”
보랏빛 안광을 보던 혼령들이 갑자기 얌전해졌고, 어둠 속에 있던 남자가 한심하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다들 살고 싶지 않아?”
“사, 살고 싶어….”
“그럼 내 말을 잘 따라야겠지?”
“그, 그래. 아, 알았어….”
벤 크래쉬의 대답과 함께 다들 그의 말에 동조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남자는 한숨을 쉬더니, 벤 크래쉬에게 다가가서 조심스럽게 그에게 거울 하나를 건네줬다.
“거… 울?”
벤 크래쉬의 물음에 남자는 그에게 보랏빛의 안광을 보여주면서 조곤조곤 설명을 시작했다.
“명령한다. 지금부터 너는 이제 이 거울을 가지고….”
남자의 설명은 금세 끝났고, 벤 크래쉬는 꼭두각시 인형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알았다.”
“대답이 짧군?”
“아, 알겠습니다. 명령을 이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주인님….”
“좋아. 이제 가봐.”
남자의 목소리가 동굴에 울려 퍼지면서 꼭두각시처럼 서 있던 혼령들이 서열을 맞추며 이동하기 시작했다.
남자는 모든 혼령이 떠난 것을 확인하고는 벤 크래쉬에게 들은 정보를 떠올리며 혼자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산자…? 정말 살아날 수 있는 건가? 살아나는 건 바라지도 않았어. 그저… 그 녀석이 이곳에 오면 철저하게 복수하기 위해 준비한 것뿐인데. 정말… 살아날 수 있는 건가?”
어둠 속에 묻혀 있던 남자의 하관이 얕은 빛을 받으며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둠 속의 남자는….
“흐흐흐. 살아나갈 수만 있다면 죽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이 뭔지 느끼게 해주마.”
자신의 붉은 입술을 초승달처럼 길게 찢으며 웃기 시작했다.
***
성수호는 소멸하는 영혼을 확인한 뒤, 고개를 돌려서 멤버들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다들 괜찮아?”
“응, 우리는 괜찮아.”
성수호 뒤에 붙어 있던 민하연의 대답에 동조하듯 파티원들 전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민하연은 영혼이 사라진 자리를 유심히 보면서 성수호에게 나지막이 소곤거렸다.
“갑자기 왜 미친놈들처럼 덤벼드는 걸까?”
“글쌔….”
성수호는 쉽사리 대답하지 않았다.
아까 성수호의 마법을 본 혼령들은 그의 마법에 소멸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발에 부리나케 뛰어서 도망갔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룹을 나눈 뒤, 다시 일행을 습격하기 시작했다.
습격 자체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성수호의 마법에 바로 먼지가 되어 사라져 갔으니까.
그런데….
‘아까랑 다르게 광신도처럼 덤벼들고 있어. 영혼 상태라서 불안정해서 그런가?’
아까와 다르게 겁이라는 것이 없어진 상태로 달려들고 있다는 점이었었다.
혼령들의 모습은, 광신도들이 온몸에 불을 붙이고 뛰어드는 모습과 유사해 보였다.
성수호는 골똘히 생각하더니, 민하연을 안심시키듯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해결해줄게. 최대한 다들 뭉쳐서 주의만 해줘.”
민하연은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응.”
아까 격렬한 전투로 인해서 민하연뿐만 아니라, 한봄과 삼인방은 지쳐서 더 이상 싸울 기력이 없는 상태였었다.
그나마 민하연은 기력이 남아 있어서 성수호를 도와서 적을 요격했지만, 성수호는 바로 고개를 저으며 저지했었다.
(한동안 싸우지 말고, 쉬어.)
(응? 아냐, 나 아직 싸울 수 있어.)
(최대한 쉬어둬. 그러다가 오히려 탈 날 수도 있잖아.)
(응….)
민하연은 성수호의 배려를 받으며 씁쓸하게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기뻤다.
그가 그렇게 자신을 지켜주기 위해 싸우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하지만 민하연의 불안한 마음은 쉽사리 꺼지지 않고 있었다.
‘나도 도움이 돼야 해. 이대로는….’
아까 너무 다급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성수호의 말을 들었음에도 쉽게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었다.
너무 큰 격차.
그 격차가 처음에는 남자로서 매력으로 다가왔지만, 너무 크게 벌어지자 더 이상 매력 이상의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 두려움은 성수호에 대한 두려움이 아닌….
‘만약 내가 쓸모가 없어지면… 버려지는 거 아닐까?’
버려질 것이라는 두려움이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라고 해도 결국 목숨이 걸린 상황에서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지는 여자를 누가 사랑해줄까 싶은 것이었다.
민하연은 훗날 도움은커녕 방해되는 자기 모습을 과연 받아줄 것인가라는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민하연의 시선에는 한봄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봄이는 아마 끝까지 데리고 가겠지.’
힐러.
민하연 일행은 지금까지 수많은 소환사를 만나면서도 한봄과 같은 힐러를 본 적이 없었다.
한봄이 그만큼 희귀한 특성이라는 사실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에 비해서….
‘나는 수호보다 활도 못 쏘고… 약하고….’
민하연에게 자신만만해하던 양궁은 실전에서 효용성이 많이 떨어졌다.
아무리 활을 잘 쏜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조용하고, 고요한 환경을 기본으로 한 양궁 한정이었다.
실전에 들어오니, 그동안 배웠던 양궁이 오히려 그녀의 발목을 붙잡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오랜 시간 집중하는 버릇 때문에 조준하던 적이 이미 죽어서 타겟을 다른 곳으로 바꾸느라 시간을 허비하는 경우가 허다했었다.
‘하아… 처음 직업 선택에서 좀 더 신중하게 찾아볼 걸 그랬나?’
추천 항목에 여러 가지가 나왔었지만, 민하연은 그런 것들을 무시하고 궁술에 눈을 돌린 케이스였다.
‘아냐… 궁술에 추천이 있었잖아. 하지만….’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만, 어느새 벌써 후회하는 지경에 다다른 것이었다.
민하연은 조심스럽게 인벤토리에서 아이템을 하나 꺼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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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권
위그드라실의 특수 직업권.
모든 소환사는 1인 1직업으로 규정되어 있어서 만약 새로운 직업을 얻고 싶다면 원래 직업을 버려야만 한다.
하지만 이 직업권이 있다면 두 개의 직업을 동시에 갖는 것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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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층 보스전을 클리어한 보답으로 받은 보상.
이 보상은 민하연뿐만 아니라, 성수호와 한여름도 가지고 있었다.
민하연은 눈에 다시 힘을 주며 직업권을 바라보며 다부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번에는 직업을 고를 때 신중하게 결정하자. 분명 좋은 직업이 나오는 날이 올 거야.’
민하연이 그렇게 다짐을 하는 순간, 성수호의 외침이 들려왔다.
“적이에요! 다들 주의하세요!”
“아! 응!”
민하연은 성수호의 외침에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뒤에 서서 그의 등을 조심스럽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자신감을 갖자. 그게 내 장점이잖아.’
민하연은 지금까지 혹독한 환경을 거쳐서 양궁 국가대표 양궁 선수가 될 수 있었다.
올림픽 금메달보다 훨씬 어렵다는 한국의 양궁 국가대표.
그 자리까지 올라가는 동안 피나는 노력을 했던 민하연이었다.
‘언젠가… 나도 옆에서 당당하게 서는 날이 올 거야. 노력하자.’
민하연은 달려드는 영혼을 모조리 증발시키는 성수호를 보면서 나긋하게 미소를 지었다.
“끼아아아악!!”
그렇게 또 영혼 한 무리가 성수호의 손에 의해서 진짜 죽음을 체험하며 증발했다.
민하연은 사라져가는 혼령을 보면서 성수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진짜 대단하다. 한순간에 증발 시키네.”
“그러게…. 아저씨, 진짜 원래 뭐하던 사람이에요?”
“….”
“수호야?”
“아저씨?”
민하연과 한봄의 부름에도 성수호는 대답하지 않고, 저 멀리 어둠 너머를 향해 바라보며 협박조로 입을 열었다.
“거기 숨어서 꼼지락거리지 말고 나와. 방금 동료들처럼 증발하고 싶지 않으면.”
“헉….”
어둠 속에서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민하연에게도 들려왔었다.
민하연은 어둠 너머를 노려보는 성수호의 모습에 매혹되듯 빤히 쳐다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전혀 보이지 않는데, 도대체 어떻게 알아낸 걸까?’
그냥 기척을 알아내는 것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사람이라면 알아낼 수 있다고 해도 상대는 죽은 영혼이다.
기척도 없는 존재의 기척을 알아차린 성수호의 모습은 민하연에게 평범한 범주의 인간을 넘어서는 존재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빤히 쳐다보고 있을 때, 어둠 너머에서 영혼 하나가 조심스럽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사, 살려줘… 제발….”
벤 크래쉬였다.
민하연과 한봄은 허탈하게 웃으며 긴장을 풀기 시작했다.
“뭐야… 아까 그 녀석이네.”
“난 또… 악령인 줄 알았잖아.”
심지어 상대방은 백기를 투항하는 쭈구리 모습으로 파티원에게 슬금슬금 다가오고 있었다.
“제발 부탁이야… 살려줘….”
“좋아. 살려줄게. 대신 질문에 제대로 대답해. 그렇지 않으면….”
성수호가 그를 향해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순간이었다.
“죽어라!!”
“?”
벤 크래쉬가 갑자기 성수호를 향해 달려드는 것이었다.
“수호야! 조심…!”
민하연은 재빠르게 활을 들어서 그의 미간에 화살을 꽂으려고 했지만….
지지직!!
“끄아아악!!”
활시위에 화살을 걸기도 전에 그의 몸은 이미 증발하고 없어지고 있었다.
민하연은 뚱한 표정으로 성수호를 바라봤고, 성수호는 민망한 표정으로 민하연을 바라봤다.
“어…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마법을 쏜 거라….”
“….”
“미안….”
“흥….”
민하연은 자기도 모르게 삐져서는 성수호의 사과에도 고개를 팽 돌려서 어둠 너머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마침 그녀의 눈에 뭔가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뭐지?”
혼령들은 기본적으로 죽으면 그냥 증발하면서 어떠한 아이템도 떨어뜨리지 않았었다.
그런데 벤 크래쉬가 죽은 장소에는 이곳의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반짝이는 무언가가 떨어져 있었다.
민하연이 그 물건을 들어서 빤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물건의 정체는….
‘…거울?’
손바닥만 한 고풍스러운 거울이었다.
그리고 그 거울을 바라보는 순간….
“흐으읏….”
갑자기 주변이 흔들거리며 현기증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현기증은 오래가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두통에 민하연은 머리를 쥐며 정신을 차리려고 할 때, 그녀의 뒤에서 성수호의 목소리가 하울링과 함께 들려왔다.
(하연아, 괜찮아?)
“아….”
민하연은 입을 벌리며 성수호에게 괜찮다고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응, 나 괜찮아.)
“…?”
분명 자신의 목소리였다.
그런데… 자기 입 밖에서 나온 목소리가 아니었다.
민하연은 억지로 눈을 뜨고 뒤를 돌아왔다.
그리고 민하연의 눈에는….
“저… 저게 뭐야?”
아까까지 없었던 거대한 거울이 있었고, 그 거울 너머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며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민하연이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 아무 일도 아냐. 흐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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