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그드라실 (6)
한가을은 성수호가 떠난 뒤에 갑자기 실실 웃기 시작했다.
“흐흐… 이게 뭐람….”
자칫 외부인이 보면 떠나간 성수호를 보며 흥얼거리는 것처럼 비칠 수 있는 모습이었다.
당연하지만 한가을이 실실 웃는 이유는 성수호가 떠나간 것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남겨 놓은 한가을의 추억 덕분이었다.
“살다 보니 내가 오빠라는 말을 다 하네.”
평생 입 밖에 꺼내지 않을 것 같았던 단어.
굳이 가족이 아니더라도 오빠라는 단어를 쓸 사람은 널리고 널렸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가을은 누구에게도 오빠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건 한겨울도 마찬가지였다.
이유는 단순했다.
“아후… 벌써 두드러기가 날 것 같아.”
저 멀리 추한 자세를 하고 있는 한여름 때문이었다.
저런 존재가 오빠라는 사실에 치를 떨었고, 그 결과 오빠라는 단어 자체가 뇌세포를 파괴하는 촉진제 역할을 해 온 것이었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한가을은 더 이상 오빠라는 단어를 혐오하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흐흐… 오빠라….”
그 단어의 매력에 푹 빠져 버린 것이었다.
한가을은 한여름과 최대한 멀리 떨어진… 아까 성수호와 살을 섞었던 장소에 가서 조심스럽게 앉았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바닥을 손바닥으로 훑으며 중얼거렸다.
“이런 곳에서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네.”
한가을도 다른 여자들처럼 첫경험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한가을은 한봄과 다르게 평생 혼자 살 생각을 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민하연과 한봄을 대하는 한여름을 보다 보니 그나마 미세하게 꿈틀거리던 연예 세포도 동면기에 접어들 듯 한가을의 정신 속 심연 깊숙이 파고들어 갔다.
그래, 한가을이 이렇게 남자를 만나지 못하게 된 건 한여름의 탓이었다.
그리고 반대급부로 성수호와 이어지게 된 것도….
“저 새끼 덕분이네.”
한여름 덕분이었다.
눈동자가 어둠에 익숙해졌음에도 떨어진 거리 때문에 한여름의 모습은 자세히 볼 수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사실은 추잡하게 그가 엉덩이를 위로 치켜올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한가을은 혐오스러운 눈으로 한여름을 보다가 문뜩 한봄이 떠올랐다.
“하아… 언니한테 어떻게 해명하지?”
성수호와 관계를 맺은 건 한가을의 의지였다.
처음에는 한봄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하지만 어느 순간 퍼져나온 성욕은 미래를 걱정하는 한가을의 불안감을 삼켜 버렸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욕망에 지배된 한가을은 결국 성수호와 수차례 섹스하면서 한봄에 대한 걱정을 완전히 지워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현자 타임이 오자, 욕망은 그동안 쌓여 왔던 한가을의 죄책감을 그녀에게 전부 내뱉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래. 거짓말은 좋지 않지.”
한가을은 한봄에게 구타당하는 것을 각오하더라도 진실을 말하기로 결심했다.
왜냐면….
“오빠가 솔직하게 말하자고 했으니까.”
성수호의 의지 때문이었다.
성수호는 이미 한봄과 민하연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사실대로 말하겠다고 이야기했다.
한가을은 성수호의 의견은 따를까 고민하는 게 아닌, 따르는 게 당연하다고 느낀 것이었다.
“진짜 대단하네. 뭐랄까… 실실 웃으면서 사람 휘어잡는 건 엄청난 능력인데.”
성수호는 카리스마로 사람을 휘어잡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런 실력이 있으면 답답해서라도 그렇게 못할 텐데.”
한가을의 말대로 대개 실력이 뛰어나면 카리스마와 강단으로 사람을 이끌어가는 게 대부분이었다.
사람을 편하게 대해준다는 건 자신의 편안함을 포기하는 것과 같은 행위였다.
성수호는 동료들과의 친분을 위해 자신의 편안함을 포기한 셈이었다.
“…진짜 대단한 사람이네.”
그저 성수호를 좋아해서 내뱉는 칭찬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성수호라는 존재를 대단하게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그에 대한 동경이 셈 솟아오르자, 한가을은 의욕이 팍팍 솟아나기 시작했다.
“그래. 나도 따라다니다 보면 언젠가 도움이 될 거야. 처음에는 빌붙는 모양새가 되겠지만… 그게 어디야. 같이 갈 수 있으면 그만이지.”
한가을은 그렇게 생각하며 성수호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늦네.”
그에 대한 믿음은 굳건했지만, 시간의 흐름으로 인해 생기는 불안감까지 막을 도리는 없었다.
거기다 이곳은 어두컴컴한 동굴.
조용히 혼자만 동굴에 갇히면 시간관념이 바깥과 다르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성수호를 초조하게 기다리던 한가을은 고개를 저으며 일어섰다.
“아냐. 오빠가 오겠다고 했잖아. 실력을 의심할 이유가 없어.”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이 해야 할 일은 하기 시작했다.
“일단 이걸 한여름한테 흡입시키라고 했지?”
한가을은 [메두사의 머리카락 마비독]이 담긴 병을 가지고 한여름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게 가는 도중에….
스스스슥!
눈앞에 노이즈가 끼면서 이질적인 시야가 자리를 잡았다.
‘뭐? 또 확정 예지?’
한가을은 확정 예지가 나오는 순간 온 신경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확정 예지에 좋은 일이 생기는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대부분은 최악의 상황을 알려주는 스킬이다 보니 스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제발 나오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바로 확정 예지였다.
‘제발 별일 없길….’
한가을은 그렇게 생각하며 노이즈가 잔뜩 낀 시야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확정 예지는 그저 미래의 장면만 보여주는 스킬이 아니었다.
미래의 감각도 그녀의 온몸으로 전해지는 스킬이었다.
한가을은 자신의 상태를 확인하기 전에 눈앞에 걸린 두 사람이 들어왔다.
(자, 여기 네가 원하는 계약 파기서다.)
(흐흐… 좋아.)
한가을과 한여름을 붙잡았던 레드 소환사의 리더였다.
그리고 그 리더에게 아이템을 받는 한여름.
‘뭐, 뭐야! 왜 한여름이….’
그나마 한여름은 상태가 괜찮았다.
딱히 묶여 있거나, 위협을 당하는 모양새는 아니었다.
그에 비해서 한가을은 저번과 마찬가지로 묶여 있었다.
한가을은 뒤로 묶인 손목에서는 이미 압박으로 인해 통증이 몰려오고 있었다.
‘아윽…. 내가 이렇게 잡혔다는 건….’
성수호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였다.
최악의 경우에는….
‘아냐! 그럴 리가 없잖아! 오빠가 당했을 리가 없어.’
한가을은 단정 짓지 않았다.
확정 예지에서 성수호의 모습은 없었다.
최악의 미래를 보여주는 확정 예지는 한가을에게 언제나 미래로 나아가는 데에 큰 걸림돌이었다.
‘최대한 상황을 파악하자.’
한가을은 그렇게 생각하며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가을의 그런 열정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당황 시키는 일이 발생했다.
그 당황 시키는 일이란….
(그럼 수고해라! 얼간이들아!)
한여름이 [계약서 파기] 아이템을 사용한 뒤, 갑자기 줄행랑 치기 시작했다.
한가을을 놓고!
‘뭐, 뭐야!? 바보 아냐? 도망칠 수 있을 리가….’
한가을의 예상대로 한여름은 도망치는 중에 레드 소환사가 쏜 무기에 등이 꿰뚫렸다.
(커억!)
(얼간이 같은 새끼… 설마 나한테 도망칠 수…. 어!? 뭐, 뭐야!)
한여름은 분명 등이 꿰뚫려 죽었다.
하지만 쓰러지지 않고, 그대로 일어서서는 피를 토하며 뛰었다.
(어, 어떻게 살아 있는 거지!? 아니, 지금 그걸 따질 때가….)
레드 소환사가 당황하는 사이에 한여름은 미궁 코너를 돌아서 사라졌다.
그렇게 사라진 한여름을 보며 레드 소환사가 외쳤다.
(이 새끼! 네 여동생이 죽는 거 보고 싶지 않으면 당장 돌아와!)
레드 소환사는 한가을을 놓고 한여름을 쫓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되돌아온 한여름의 목소리는….
(알 게 뭐야! 그딴 창녀 따위 나랑 상관없어!)
(어….)
한가을뿐만 아니라, 레드 소환사까지 당황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스스스슥!
노이즈가 걷히면서 현실로 돌아왔다.
“어… 이, 이 씨….”
한가을은 저 멀리 보이는 한여름을 보며 콧김을 씩씩 내뿜었다.
자신을 버리고 도망치는 한여름.
사실 한가을도 처지가 바뀌었다면 비슷한 행동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한가을이 화가 난 이유는 그의 행동 때문이 아니었다.
“차… 차… 창녀….”
평생 고고하게 살아온 자신을 그렇게 부르는 남자가 설마 피붙이일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한가을은 떨리는 목소리와 노기가 잔뜩 낀 얼굴로 한여름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이 거지 같으…. 꺄아악!”
콰당!
시야가 좁아진 한가을은 바닥에 튀어나와 있던 돌부리를 보지 못한 채 걸려 넘어졌다.
그렇게 넘어진 한가을은 무릎을 돌바닥에 찧고는 고통스럽게 흐느꼈다.
“아… 아, 아파….”
흙으로 된 평평한 바닥이 아닌 울퉁불퉁한 돌바닥이었다.
한가을은 마치 연골이 찢겨나갈 것 같은 고통을 느끼며 천천히 일어났다.
“아흐… 아파… 이대로는 뛰기는커녕 걷는 것도 힘들겠어… 어?”
한가을은 절뚝거리며 일어선 뒤 자기 손에 있어야 할 물건이 사라진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아까까지 손에 들려 있던 병은….
“어… 어… 어어… 어….”
바닥에 있던 물웅덩이에 깨져서 물에 녹아서 흩어지고 있었다.
***
나는 [비겁자의 술법]을 이용해서 주변을 돌아다니며 붉은 초승달 조직원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콰직!
“끄어억! 가, 갑자기 어디서…!”
“그건 나중에 네 동료한테 물어봐라.”
“끄어어….”
나는 미리 봐둔 기질창과 [비겁자의 술법]을 이용해서 과녁 맞추기 게임을 하듯 녀석들을 학살했다.
그리고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기질창에 없던 녀석들도 마주할 수 있었다.
“조심해라. 보통 실력의 소유자가 아니니까.”
“네!”
하지만 그들의 눈에 나는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또 인원 충당했나 보네.’
생각보다 레드 소환사가 많다는 사실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지금까지 돌아다녔던 마을에서 레드 소환사를 만나는 일은 0%에 가까우니까.
하지만 그들의 대화를 몰래 엿듣고는 대충 사정을 알 수 있었다.
“이제 베르덴 님의 인원도 끝 아닙니까? 저희가 마지막일 텐데….”
“…너희도 슬슬 다른 분 밑으로 들어갈 준비 해라.”
“크으… 양지현 쪽 새끼들이랑 싸워놔서 거기로는 못 갈 텐데….”
다들 자신이 잡았던 줄이 끊어지게 생기자 막막한 듯 보였다.
레드 소환사도 결국 인간이고, 그들이 사는 곳도 인간이 사는 세계와 다를 게 없었다.
소수만 모이는 조직에서 소수의 위치에 있는 것만큼 위험한 것이 없다.
거기다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이 위그드라실 내부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고….
하지만 그들은 운이 좋았다.
푸슉!
“끄에엑!”
“뭐, 뭐야! 커억!”
나를 만나서 내세의 귀찮음을 벗어던질 수 있게 되었으니까.
‘2층에 가서 편히 싸워라.’
[…..]
나는 배반 모의를 하던 무리를 죽이고 나서도 계속해서 녀석들을 죽여 나갔다.
‘다행히 돌아다니는 녀석 중에 양지현 부하는 없나 보네.’
양지현의 부하가 죽든 말든 그건 내 알 바 아니다.
하지만 양지현의 부하들이 허무하게 죽게 되면 필시 그녀도 징계받거나 위험한 상황에 놓이게 될 것이다.
‘양지현은 이용해 먹을 게 많으니까 최대한 도와줘야지.’
나는 실실 웃으며 계속 베르덴의 부하들을 죽여 나갔다.
그렇게 주변에 붉은 초승달의 기질창이 싹 다 사라진 것을 확인하자, 한숨이 새어 나왔다.
‘휴우… 얼추 정리된 거 같지?’
[그런 것 같습니다. 다만 베르덴은 아직 잡지 못했습니다.]
‘하아… 그 녀석만 잡으면 끝인데. 나 동굴 떠난 지 얼마나 지났어?’
[대략 7시간 지났습니다.]
‘워우… 엄청나게 지났네.’
집중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그렇게 흘렀나.
나는 활을 인벤토리에 집어넣고, 한가을과 한여름이 숨어 있는 동굴로 향했다.
‘일단 가서 얼굴이나 비춰주고 오자. 그리고 한여름 상태도 확인해보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동굴 근처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뭐야?’
동굴 안에 들어가기도 전에 이질적인 부분을 알아챌 수 있었다.
‘아르모니아. 혹시 기질창 접었어?’
[…아닙니다. 기질창을 접은 적은 따로 없습니다.]
‘설마….’
나는 아르모니아의 대답을 듣고, 황급히 동굴 안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외부에서 봤을 때는 그저 갈라진 틈으로 보이는 균열.
가까이 가서도 딱히 내부가 있을 것 같이 보이지 않는 그런 곳이었다.
내가 그렇게 열심히 비집고 들어간 균열 안에는….
“하아… 미치겠네.”
분명히 있어야 할 두 사람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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