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0 - 50화 - 아카데미(1)
50화 - 아카데미(1)
공녀는 심장을 꿰뚫리고도 특유의 무표정이 깨지지 않았다. 고통스러운 감각에 아주 작게 찡그린 것이 변화의 전부였다.
서큐버스 퀸이 불쾌한 듯 얼굴을 찡그렸다.
“아직도 그따위 표정이라니··· 아쉽네. 네가 조금만 더 약했어도 사로잡아서 돼지우리에 처넣었을 텐데.”
공녀는 모욕적인 말을 들었지만 화도 내지 않았다. 돌아가면 없는 일이 될 테니 모든 것이 무의미했다.
“이렇게 된 이상 시체라도 돼지우리에 넣어야겠어. 발정 난 돼지들이 시체에다가 박을지 모르겠네?”
이제야 공녀가 눈동자를 돌려 서큐버스 퀸을 마주 봤다.
“네년도 돼지한테 따먹히는 건 싫나보지? 그런데 어쩌지? 네년이 싫어하는 걸 보니 제대로 해야겠는걸? 흑마법사한테 시체를 구울로 만들어서··· 어어?“
공녀가 여러 번의 회귀끝에 가장 자신 있는 것은 바로 자살하는 것이다. 특히 모든 마력을 폭주시켜서 주변과 자폭하는 것이 특기였다.
공녀의 마력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정밀하게 제어 된 폭탄이 터질 것 같은 위기감에 서큐버스퀸의 목소리가 떨렸다.
“자, 잠깐..”
공녀가 입술을 비죽 올리며 섬광에 휩싸였다.
***
아주 살짝 비틀거린 공녀가 미간을 짚었다. 역시나 또 아카데미로 돌아왔다.
주변을 둘러보지 않아도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있었다. 첫 학기 동안 부여 될 등급 배정을 위한 대련시간.
옆에서 지켜보던 귀족처럼 생긴 청년이 호들갑 떨며 말했다.
“헬레나 공녀님! 괜찮으십니까?”
공녀 헬레나가 그를 힐끗 보곤 무시했다. 원래도 냉랭하던 그녀는 회귀가 반복되면서 더욱 차가워졌다.
‘이번이 몇 번째지? 4번, 5번?’
최소한의 평판관리를 위한 예의도 집어치웠다. 어차피 정을 붙여 봐야 모든 기억이 사라진 그들을 보는 자신만 힘들다.
회귀 후 그들이 자신을 모르는 사람으로 대하는 것은 정말 끔찍한 일이었다.
정신이 망가질 정도로.
하지만 망가지고도 회귀는 멈추지 않았기에 그녀는 결국 체념했다.
‘이들은.. 그래. 인형.. 인형이라고 생각하자.’
잘 만들어진 장난감. 게임 속 NPC, 연기하는 배우들. 그런 식으로 생각하자 버틸 만 해졌다.
하지만 동시에 세상은 회색빛이 돼 버렸다.
그녀가 툭 누르면 똑같이 반응하는 일생.
어렵고 불공평한데다가 재미도 없는 게임을 강제로 하는 기분이었다.
같은 사람. 같은 대화. 같은 반응.
교수가 번호가 적힌 구슬을 뽑았고 공녀는 불리기도 전에 고개를 들었다.
“헬레나 공녀님! 그리고 132번! 그래 너! 뭐 하나 빨리 안 오고.”
망해 버린 북한에서 내려오는 몬스터를 막는 북부대공의 딸인 그녀에겐 공손하게. 반대로 선천마력이 형편없는 132번 생도는 대놓고 무시한다.
계급주의가 뼈 속까지 스며든 대한제국에서 유일하게 평등의 가치를 추구하는 곳. 아카데미 마저도 이렇다.
공녀가 사뿐사뿐 걸어서 대련장으로 향하며 생각에 잠겼다.
‘혼자선 불가능해.’
회귀 초반엔 그녀도 모든 것을 독식했다. 하지만 처절한 실패 끝에 깨달았다.
동료가 필요했다. 벌벌 떨며 올라온 132번 같은 얼간이가 아니라 제대로 된 사람이.
퍼억!
“아악!”
역시나 얼간이는 그녀의 마탄 한 방을 제대로 버티지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주변 사람들이 감탄한 얼굴로 박수를 쳤지만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어차피 허수아비들이니까.
“역시 헬레나 공녀님이십니다!”
뻔한 아부를 해대는 남자는 무시하고 다음에 이어질 대련을 떠올렸다.
‘1번하고 22번..’
교수가 뽑기를 통해 다음 상대를 골랐다.
“1번, 22번! 나와라.”
“꺄악! 수호야 힘내!”
가슴팍에 1번 명찰을 찬 잘생긴 남자가 금발 머리를 찰랑거리며 당당하게 걸어 나왔다.
선천마력도 높고 잘생긴 외모 덕에 주변에 여자들이 가득했다. 게다가 자신만만한 태도덕에 외모가 한층 더 빛나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공녀는 전생까지만 해도 그를 무시했다. 가진 재능을 제대로 살리지도 못하고 근성이 썩어빠진 이를 동료로 삼을 이유는 없으니까.
하지만 전생에 그는 달랐다.
소꿉친구인 여자가 죽자 태도가 돌변했다. 복수의 길을 선택한 그는 끝도 없이 강해졌다.
그가 죽기 전에 내지른 마지막 일검은 지금도 눈에 선했다. 별 무리가 담긴듯한 그 아름다운 검.
그에게 비법을 물었을 때 말해 준 특성. 죽기 직전에 알려 줬으니 아마 사실이지 않을까?
-[전설]일로정진(一路精進) : 길이 정해지면 한계를 깨고 끝없이 나아간다.
‘이번에도 그 여자는 죽게 내버려 둬야 하나···.’
게다가 1번 생도는 운이 엄청나게 좋았다. 회귀자인 헬레나가 놀랄 정도로 수많은 기연을 얻어낸 그였다.
공녀는 내심 이번에 집중적으로 키울 사람을 저 남자로 정했다.
1번 생도 덕에 알아낸 기연과 그녀가 본래 알고 있던 기연을 몰아줬을 때 얼마나 성장할지 기대 될 정도였다.
1번과 22번의 싸움이 끝을 향해 달려갔다.
훌륭한 재능이고 싸움이지만 따분했다. 몇 번이고 본 장면에 감흥은 없었다. 그냥 꽤 쓸 만한 도구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하하하. 끝이다!”
퍼억!
1번 생도가 상대의 검을 피하고 호쾌하게 주먹을 내질렀다. 길게 기른 머리카락이 찰랑거리며 햇빛을 반사시켰다.
그 장면을 본 수많은 여자 생도들이 침을 삼켰다.
땅바닥을 구르며 흙투성이가 된 22번은 이를 악물었다. 그런 그에게 1번 생도가 다가 갔다.
쓰러진 상대에게 손을 내미는 행동에 여성들이 눈을 반짝였다.
“수고했어. 제법이더라?”
얼굴을 일그러뜨린 22번을 향해 1번이 미소 지었다. 그의 얼굴에 헬레나도 내심 생각했다.
‘얼굴 하나는 봐줄 만하네.’
주변에 있는 수많은 여자 생도들이 얼굴을 붉히며 그를 보고 있었다.
“꺅! 수호야 괜찮아? 어머! 여기 먼지 묻은 것 좀 봐.”
대련이 끝나자 어떤 정신머리 없는 여자가 달려와 먼지를 털어댔다. 그는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저런 성격 때문에 그동안 무시했는데···.
‘하아.. 어쩔 수 없지. 인재가 없어..’
잘생긴 얼굴에 넘어가기에는 그녀가 본 것이 너무 많았다.
헬레나는 1번 생도에게 관심 끄고 앞으로의 일정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먼저 시계탑부터 처리해야···.’
다음 대련이 시작됐으나 공녀의 관심은 식어 버렸다.
다른 이들은 별거 없었다. 대련이 끝나갈 때쯤이야 몇몇 눈여겨볼 녀석들이 나온다.
헬레나는 눈을 감고 계획을 세우다가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하하! 저놈 좀 보세요 공녀님. 웃기지 않습니까? 저런 얼간이가 아카데미생이라니요. 학장님께 말씀드려서 퇴학시켜야 하는 거 아닙니까?”
주제도 모르고 학장을 입에 담는 남자를 살짝 째려봤다.
대련장 위에는 52번과 3번 생도가 서 있었다. 스치듯 52번을 보던 공녀가 기억을 더듬었다.
워낙 존재감이 없어서 기억하기 힘들었지만 결국 떠올랐다.
‘왕따를 당하던 학생이었던가···?’
3번이 앵무새처럼 했던 말을 반복했다.
“흐흐흐··· 박진구. 같은 아카데미로 올라오다니 너무 반갑네.”
피어싱을 한 3번이 갑자기 정색했다.
“그런데··· 친구를 봤는데 반응이 왜 이래? 안 반가워?”
52번은 어색하게 웃으며 반갑다고 하겠지···.
‘하아. 이딴 장면을 몇 번이나 봐야 하다니.’
그런데.
조용했다.
52번은 미간을 찡그리며 허공을 보고 있었다. 그런 후엔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에 잠겼다.
3번의 이마에서 혈관이 튀어나왔다.
“어이! 박진구. 내 말 안 들리냐? 혼날래?”
평소의 52번이라면 이 말만 듣고 오줌을 지릴 정도로 겁먹을 것이다.
저 말이 있고 난 후로는 ‘교육’이 진행됐으니까.
교수가 혀를 차며 말했다.
“장난 그만치고 빨리 시작해라.”
3번이 재미없다는 듯 투덜거렸다.
“아, 예~ 칫! 있다 보자.”
3번이 주먹을 뚜둑거리며 다가 갔다. 허리에 찬 검은 뽑지도 않았다.
그걸 보던 52번이 갑자기 피식 웃었다.
3번이 매섭게 표정을 굳히더니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웃어..?”
이때쯤 해서 공녀는 경악하고 있었다.
무언가 이상했다.
낯설었다. 분명히 봤던 장면인데도 불구하고 무언가 조금씩 엇나가기 시작했다.
‘낯...설다고···?’
52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래 시발. 좆 같은 게. 넌 뒤졌다.”
처음 들어 보는 어투.
시작 지점인 이 아카데미는 공녀에게 가장 친숙한 공간이었다. 그녀의 행동이 변하지 않으면 불변하는 정교한 세상.
그곳에 불순물이 끼어들었다.
52번이 3번을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이 꽉 깨물어라. 명치! 명치! 명치!”
퍽! 퍽! 퍽!
“끄으..! 이, 이 깨물라고..”
짝!
“아악!!”
“어허 입! 다시 명치!”
52번 생도가 검을 빼 들려는 3번의 손목을 후려쳐 빈손으로 만들곤 계속해서 두들겨 팼다.
“그, 그만해..!”
“뭘 그만해 새끼야!”
공녀가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조그맣던 입도 벌어지기 시작했다.
“아아···!”
정교하게 돌아가던 세상에 끼어든 불순물.
그것이 회색빛 세상을 색으로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그 불순물이 너무도 반가워 공녀는 왈칵 울음을 터뜨릴뻔했다.
허수아비로 가득 찬 연극같던 공간에 생겨난 유일한 ‘사람’.
“좆밥 새끼가 까불긴.”
그의 목소리가 감미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