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3 - 73화 - 아카데미(24)
73화 - 아카데미(24)
“내가 좀 알려줄까?”
뒷짐을 쥐고 있던 여자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의 표정은 마치 어린아이가 무언가 기대하는 것 같았다.
“누구···?”
“허.. 이 몸을 모른다고?”
뭘 기대했는지 그녀의 표정이 실망으로 물들었다. 얼굴에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어이없다는 듯 턱선을 치켜세우며 자세를 잡았다. 은근히 허리를 틀며 검집을 내보였다.
“이래도? 이래도 몰라?”
모델처럼 포즈 좀 잡는다고 모르는 사람을 알게 되진 않는다. 전생체나 그나 견식이 짧은 건 매한가지였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어디서 본 거 같긴 한데.’
한참 동안 여러 자세를 보여주던 그녀가 미간을 찡그렸다.
“정말 모른다고···? 이 몸을? 이럴 수가···”
검집에 그려진 방패문양을 눈앞까지 들이밀었지만 그런다고 모르는 것을 알게 되진 않는다.
“이거 신선한 기분이구나. 아카데미 생도란 녀석이 나를 모르다니.“
정체는 알 수 없었지만 고수란 것은 명확했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외모와 달리 말투는 약간 고풍스러웠다. 나쁜 말로 하면 꼰대스러웠다.
“그래서 누구신데요?”
“내 입으로 말하기도 민망하구나. 내 정체는 됐고.. 검이나 휘둘러보거라.”
고민하다가 검을 붙잡았다. 고수로 보이는 여자가 가르침을 주려하니 거부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그것을 보던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기본이 부실하구나.”
“부실하다고..요?”
반말과 동시에 그녀의 미간이 찡그려지자 살짝 말을 높였다. 그제야 찡그려졌던 안색이 펴졌다.
적어도 생도는 아닌 것 같았다. 외모와 달리 나이도 많아 보였다. 언뜻 보기엔 비 각성자 같았지만 빈틈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평범하게 서 있는 자세만 봐도 경각심이 느껴졌다.
‘못 이긴다.’
아까 봤던 학장이 떠올랐다. 그녀와 학장 모두 규격 외의 강자란 것만 알 수 있었다.
“그래. 잘 봐라.”
그녀가 검을 가볍게 휘둘렀다. 하지만 그것을 보자 신선한 충격이 왔다.
“허..”
무언가 달랐다. 검기도 서려 있지 않은 단순한 검격을 보니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공기가 반으로 갈려 나간 것처럼 보였다.
그의 검이 저기 있었다면 수수깡처럼 잘려 나갔으리란 직감이 들었다.
“대단하시네요.”
“흠흠.. 제법 눈이 있구나. 이걸 보고도 나를 모르진 않겠지?”
집요하게 자신에 대해 묻는 태도에 조금 깨는 기분이었지만 그녀의 검 하나는 대단했다.
‘이 정도면 이름이 알려져 있을 듯한데.. 누구지?’
본래 전생체도 그렇고 그도 유명인에 대해 거의 모른다. 그래서 그녀가 누군지 알순없었다.
그가 빤히 보고 있자 그녀는 검을 강조하면서 자세를 잡았다.
‘예쁘긴 하네···.’
검지 손가락으로 턱을 쓸어올리며 미모를 과시했다. 짐짓 고고한 표정을 짓던 그녀가 웃으며 고개를 까닥거렸다.
“하핫..! 그 눈을 보니 알아차린 것 같구나. 미안하지만 사진은 안 된다. 아, 물론 포옹도 안 돼. 음··· 너무 박한 것 같은데 사인이라도 해 줄까?”
기대에 가득 찬 눈초리에 차마 모른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됐습니다.”
조금 전 동작을 떠올리며 검을 휘둘렀다. 사인을 거부당하고 입술을 삐죽이던 그녀의 눈에 이채가 흘렀다.
“호오··· 제법이구나. 다시 해 보거라.”
집중해서 내려 베기를 했다. 내공만 담으면 검기가 발현될 만한 집중력을 담았다.
“네 녀석, 딱 봐도 실전으로 검을 익혔구나.”
“···.”
“어린 녀석이 얼마나 싸워댔는지 살기가 가득한 게 신기할 지경이군.”
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검기나 사용해봐라.”
“음..”
이 세상에 들어와서 단 한 번도 검기를 사용한 적이 없었는데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 그의 경지를 꿰뚫어 봤다.
잠시 고민하다가 보여주기로 했다. 배우는 사람이 경지를 숨겨봤자 제대로 배우지 못할 뿐이다. 그녀는 순수한 호의로 보이니 믿어보기로 했다.
‘관찰.’
- 대상의 메인 기질은 ‘구도자 : 검’입니다.
다행히 기질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검을 집어 들고 집중했다.
웅웅
푸른 아지랑이가 검에서 피어오르고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녀석 더 이상 진전이 없지?”
“예, 어떻게 아셨습니까?”
“방향을 잃었으니 당연한 일이지.”
고개를 주억이더니 입을 열었다.
“자, 봐라 내가 관상을 좀 보는데 너는 이렇게 가르치는 게 맞을 것 같다.”
우웅
그녀의 검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며 검기가 만들어졌다. 점점 선명해지더니 길이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검에서 한 치가량 떨어진 거리에 불투명한 막같은 것이 감싸여 있었다.
“너도 해 봐라.”
눈앞에 생생한 교본이 있으니 감이 잡힐 듯 말듯싶었다.
웅웅
검기를 생성했다.
“거기서 검기를 늘린다고 생각해 봐라.”
“검기는 집중아닙니까? 그걸 어떻게..”
엄해진 그녀의 얼굴을 보다가 일단 해봤다.
검기는 벤다는 생각의 집중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늘리라고? 집중과 팽창은 정반대의 성질이다. 그걸 동시에 하려니 머리가 아파 왔다.
“그게 아니다. 먼저 한계까지 집중해. 극에 달한 의지는 잔류사념이 남게된다. 일단 거기까지 도달해야 한다.”
“후우..”
눈이 빠져라 집중한 끝에 점점 주위가 조용해졌다. 불타는 모닥불을 보듯 아무 생각 없이 검기만 보고 있는데 어느 순간 집중없이도 검기가 유지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 순간 검기를 아주 조금 늘릴 수 있었다.
‘아..”
그것을 자각함과 동시에 검기는 촛불꺼지듯 사라져 버렸다.
“허.. 진짜 할 줄이야.”
그녀는 약간 놀란 표정으로 그의 어깨를 탁탁 치더니 기분좋게 웃었다.
“하하하! 너 이름이 뭐냐?”
“최시우입니다.”
“마음에 들었다. 그나저나 좋을 때구나. 하하.”
그녀는 이곳을 보고 있는 아멜리아를 보더니 피식 웃었다. 그러곤 눈으로 보고 있는 와중에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아멜리아가 뒤늦게 잠에서 깬 얼굴로 말했다.
“거, 검성..?”
***
헬레나가 응접실로 보이는 공간에 홀로 앉아 있었다.
약속 시간은 지난 지 오래였지만 상대가 아직도 안 왔다.
‘하여간.. 이럴 줄 알았으면 시우님이랑 밥이라도 같이 먹는 건데...’
그에 대해 생각할수록 마음 한 켠에 두려움이 자라났다. 만약 이번에도 실패하고 회귀했는데 그마저 기억을 잃으면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눈을 감고 명상으로 마음을 다스렸다. 그녀가 깊은 숨을 내뱉었다.
‘이번 생에 성공하면 돼.’
검성 이사벨 아이헤른.
고모이자 북부방벽 절반을 책임지는 부사령관인 그녀에게 부탁할 일이 있었다.
원래라면 강수호에게 돌아갈 그녀의 관심을 시우에게 돌릴 생각이었다.
‘마검사 강수호보다는··· 항마력을 가진 기사가 더 유용하니까..’
사적인 감정을 배제하고도 이것이 옳은 선택이다. 본인의 선택을 합리화한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컥
노크도 없이 문이 열렸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가 웃으며 들어왔다.
“하하하. 우리 공주님. 오랜만이네?”
“···안녕하셨습니까.”
헬레나의 얼굴이 어두운 것을 보고 그녀가 시계를 힐끔거렸다.
“흠흠.. 늦어서 미안하구나. 오랜만에 아카데미를 둘러봤는데 재능있는 녀석을 발견했지 뭐니.”
그녀의 말에 헬레나의 표정이 조금 찡그려졌다. 그녀와 약속을 잡은 이유가 있었는데 설마 벌써 늦은 건가 싶었다.
“재능있는 생도요?”
“그래. 제법 싹수가 보이더구나.”
“설마 제자로 들일 생각이신가요?”
“흐음.. 그건 졸업 후에 방벽으로 온다면 생각해 봐야지.”
“아..”
“그런데 그 녀석 관상이 아무리 봐도 바람둥이 같아서 걱정이다.”
바람둥이라 하니 한 명이 떠올랐다. 강수호. 아무래도 이번 생에도 그녀는 그의 스승이 될 운명인 것 같았다.
강수호가 본격적으로 마검사가 되기 시작하는 게 그녀의 가르침을 받고 나서였다.
고집이 대단한 그녀의 마음을 돌리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아쉽네..’
그녀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된 이상 다른 식으로 그에게 도움을 줘야 했다.
고민에 빠져 있던 그녀는 탁자 두드리는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그나저나 그 녀석. 벌써 연애질을 하는 것 같더구나. 요즘 말로 썸이라고 하던가? 나 때는 몰려오는 몬스터를 죽이느라 그런 여유는 부리지도 못했는데.”
“그건 그렇지요.”
대충 흘려들으며 대꾸했다.
흥미진진해진 이사벨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녀는 남의 연애사에 관심이 엄청나게 많았다.
“내가 그쪽에 눈치가 빠르잖니? 딱 보자마자 알았지. 그 녀석 썸녀가... 애야 듣고 있니?”
“그럼요. 썸녀가 있다고요?”
“그래. 머리길고 가슴도 큰 것이 예쁘장하더구나. 마치... 너처럼 말이다.”
이사벨은 의미심장한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야기가 조금 샜구나. 아무튼 최시우라던가? 내가 보기엔 크게 될 녀석이야.”
“···잠시만요. 강수호 아니었어요?”
“음? 걘 또 누군데?”
“아니에요. 그럼 제자로 생각 중인 생도가 시우님. 아니 시우씨였나요?”
“그렇다만?”
헬레나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그럼 아까 그 썸녀는 누군데요?”
그런 그녀의 반응에 이사벨이 눈을 빛냈다. 턱을 쓰다듬더니 장난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호오..! 그건 말이지···.”
이사벨은 입을 열었다 닫으며 자꾸만 그녀를 약 올렸다. 오랜만에 평정을 잃을 뻔한 헬레나가 눈을 감고 심호흡했다.
“하핫! 우리 공주님 다 컸구나. 썸녀가 누군지는... 비밀이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꾸나.”
“으...”
그대로 자리를 떠나버린 검성을 보며 헬레나가 미간을 찡그렸다.
‘썸녀라고?’
설마···
머릿속에 떠오르는 여자가 한 명 있었다. 순진한 얼굴로 시우님을 꼬시는 여우 같은 여자.
답답한 마음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야.’
그러던 그녀는 전신거울이 눈에 들어왔다.
한 여자가 보였다.
‘가슴 크고.. 머리는 허리까지...’
그리고 예쁜. 그런 여자가 거울 속에서 헬레나를 마주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