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4 - 74화 - 아카데미(25)
74화 - 아카데미(25)
수련성지.
모든 차원침식이 인간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것은 아니었다. 극히 일부는 오히려 인간에게 유리했다.
성지는 그런 곳 중 하나였다.
다른 곳보다 마력 농도가 높고 위협적인 식생이 거의 없는 특이한 곳.
하늘이 내린 수련지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였다.
***
이틀이 흐르고 성지에 입장하는 날이 됐다.
헬레나는 조금 초췌한 안색이었다.
‘하아..’
결국 고모의 입을 여는데 실패했다. 기분나쁘게 웃으며 그녀에게 장난만 쳤다. 절대로 썸녀가 누군지 말해주지 않았다.
그녀는 투명한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살폈다. 푸른기가 감도는 긴 생머리와 꽉 조여졌음에도 불구하고 존재감을 과시하는 가슴.
잡티하나 없는 새하얀 피부에 수려한 이목구비까지. 누가 봐도 미인으로 생각할 외모였다.
‘나일 수도 있잖아? 밥 먹자고도 했는데···’
맹한 얼굴로 시우님을 졸졸 따라나니는 아멜리아를 째려본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때가 아니지...’
수련성지는 다른 곳보다 마나 농도가 비정상적으로 높은 곳. 그래서 영약을 먹고 경지를 돌파하는데 최적의 장소였다.
마나 농도가 높다는 것은 단순히 양이 많다는 것을 넘어 한차원 높은 격을 가진 마나란 뜻이었다.
약간이지만 자신보다 높은 경지의 마나를 인위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곳.
이번 기회에 폐관 수련으로 경지를 높일 생각이었다. 그를 위해 가문에서 영약도 가져 왔다.
*
시우는 일부러 아멜리아에게 바짝 붙었다.
강수호는 그녀와 자신의 뒤에 있는 앤을 번갈아 보더니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질투에 가득 찬 눈으로 그를 노려봤다.
“너, 너가 왜 여기 있어?!”
“왜? 뭐 문제있냐?”
“당연하지! 내가 일등인데..!”
“불만이면 학장님께 따지던가.”
원래라면 수련성지 입장은 균열실습 1등 조에게 주어지는 보상이었다. 그런데 이 자리에는 그와 강수호조 두 조가 있었다.
인솔자 역으로 나온 릴리네 교수가 입을 열었다.
“최시우 생도 조는 테러를 해결하는데 큰 공을 세워서 온 것이다. 그러니 너무 짜증내지 말도록.”
이제서야 자신의 모습이 어떤지 알아차린 강수호가 뒤늦게 이미지 관리를 했다.
“아, 절대 아닙니다! 짜증이라뇨. 그.. 아멜리아 너가 와서 싫다는 게 아니야. 오히려 좋아. 내 말은···.”
“됐어. 신경 안 쓰니까 사과 안 해도 돼.”
아멜리아는 정말로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태도에 강수호의 표정이 굳었다.
“수다 그만 떨고 따라와라.”
릴리네 교수를 따라 어떤 건물로 들어섰다. 수십 명의 경비병들이 엄중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몇 차례의 보안 절차를 거쳐서 사방이 막힌 방으로 이동했다. 바닥부터 시작해 벽까지 가득채운 마법진이 보였다.
이곳이 바로 성지의 입구였다.
‘이게 양방향 이동 마법진인가..?’
성지는 물리적인 입구가 없었다. 마법적인 이동만 가능한 형태였다.
모두가 올라서자 마법진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번쩍.
약간의 어지럼증과 함께 주변 풍경이 바뀌었다.
“모두 정신 차려라. 음.. 다 왔군. 따라와라.”
가장 먼저 보인 것은 거대한 호수였다. 수평선이 보일 만큼 넓어서 끝이 보이지 않았다. 맑은 물이 반짝이며 햇빛을 반사시키고 있었다.
입구 주변에 두 개의 건물이 있었다. 풍경 좋은 호숫가에 세워진 별장처럼 보였다.
이곳이 바로 수련성지였다.
‘생각보다 더 진한데?’
실제로 느껴지는 마나농도가 엄청났다. 손으로 만져질 것처럼 농밀한 기운이었다.
숨만 쉬어도 강해지는 기분.
최대한 높은 마력 농도를 유지하고자 극소수에게만 개방하는 장소다웠다.
‘과연.’
겉으로 보기에 넓고 아름답게만 보이는 호수는 평범한 물이 아니었다. 전부 마력을 머금은 마력수였다.
그곳에서 농밀한 마력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여기서 머물 수 있는 기간은 5일이다. 그리고 너희에게 기쁜소식이 있다. 내일 하루 동안 검성께서 오셔서 가르침을 주실 것이다. ”
강수호의 두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그는 검성의 광팬이었다.
“자, 잠시만요 검성님이요?”
“그래. 내일 점심쯤에 오실 것이니 가르침을 바란다면 여기 중앙 공터로 나오면 된다.”
“세상에 거, 검성님이라니···!”
호들갑을 떨어대는 강수호를 무시한 교수가 말했다.
“폐관 수련을 하려거든 저기 오른쪽에 있는 건물에서 지내면 된다. 주변의 방해 없이 수련에 집중하기 좋은 곳이다.”
시우는 헬레나의 시선이 그쪽을 향하는 것을 보고 물었다.
“폐관 수련하려고?”
“아, 네. 다음 경지를 노려볼 생각이어서요.”
“그럼 5일 뒤에 보는 건가?”
“네. 그런데··· 으음.. 저기..”
“응?”
“아, 아니에요. 나중에 봬요.”
*
무언가 머뭇거리던 헬레나가 떠나고 시우는 고민하다가 일반 수련지로 가기로 했다.
혼원기공은 색공이기도 했으니 그에겐 수련 상대가 필요했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는 아멜리아와 이곳에서 하면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다.
‘설마 쾌감 5배는 아니겠지?’
농밀한 마력이 피부로 느껴지자 살짝 기대감이 들었다.
그리고 내일 온다는 검성.
‘고수 같긴했는데 검성이었다니.’
알아보니 그녀는 수많은 생도들의 우상이었다. 살아있는 위인으로 여겨질 만큼 존경 받는 초인이었다.
그럴 만 했다. 그녀에게 짧은시간 배웠는데 진전이 있었으니.
‘일단 영약부터 먹자.’
릴리네 교수에게 각자 방을 배정받고 시설을 둘러봤다. 대련실, 훈련실 등등이 있는 현대식 건물이었다.
아멜리아와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방으로 되돌아왔다.
“괜찮겠어?”
“응. 보혈단은 마력보단 육체를 강하게 하는 영약이니까 딱히 위험하진 않을 거야. 시우 너는 괜찮아..?”
그는 마력코어에 담긴 재생 특성만 해도 어지간해선 위험해질 일은 없었다. 몸 안에서부터 퍼지는 재생력은 특히 내상에 효과적이었으니까.
“걱정 마. 그럼 영약 먹고 보자.”
“응.”
그녀와 안부 인사를 나눈 뒤 각자 방으로 들어갔다.
식사 대용으로 쓸 만한 에너지바가 한 켠에 쌓여 있는 것만 제외하면 침대까지 있는 평범한 방이었다.
‘깔끔하네.’
주변을 둘러보다가 한가운데 자리 잡았다.
인벤토리에서 고급스러운 목곽을 꺼냈다. 영약의 기운을 손실 없이 보관하기 위한 상자였다.
딸각
조심스럽게 목곽을 열자 시원한 공기가 느껴졌다. 푹신해 보이는 비단천 위에 새하얀 꽃송이가 올려져 있었다.
얼굴까지 풍기는 차가운 기운이 아니었다면 단순히 예쁜 꽃으로 보이는 영초.
월광초를 망설임 없이 집어 들었다. 하얀 꽃잎을 하나씩 떼어먹고 남아 있는 꽃받침까지 한입에 털어 넣었다.
‘아무 맛도 안 나네.’
처음엔 별 반응 없었다. 그냥 조금 차가운 것을 먹은 정도. 하지만 10초도 되지 않아서 몸속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으음..”
뼈 속까지 스며드는 한기라는 말이 비유가 아니었다. 실제로 새어 나오는 숨결에 서리가 끼었다.
심지어 피까지 얼어붙은 것 같았다.
피대신 송곳처럼 날카로운 얼음덩어리가 흐르는 느낌. 착각이라고 마음을 다잡았지만 고통은 실제였다.
본능적으로 불의 기운을 만들어 한기에 대항하려 했다. 아직 제 것이 되지 않은 기운을 적대시 한 것이다.
‘아니야.’
하지만 이성은 이것을 막아선 안 된다고 판단했다. 영약의 기운과 싸워 이겨봤자 남은 일부만 흡수할 수 있을 뿐이다.
얼음장 같이 싸늘한 기운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아무런 저항 없이 전신에 한기가 스며들었다.
‘한기라는 생각을 버리자. 이건 그냥 기운이다.’
얼어붙어 가는 육체에도 불구하고 혼원기는 끊임없이 흐르고 있었다. 의식적으로 고통을 무시하고 그 흐름에만 집중했다.
혼원기공의 요체는 천변만화하는 기를 다루는 것. 이 차가운 기운도 결국엔 수많은 기운 중 하나일 뿐이다.
억지로 흡수하려는 생각도 접고 혼원기를 운용하는데 집중했다.
무아지경
시간의 흐름을 잊었다. 찰나와 같은 영원이 흐르자 어느 순간 새어 나오는 숨이 따뜻해진 것을 알아차렸다.
격랑이 몰아치던 바다에 평화가 찾아온 기분이었다.
평온해진 심상을 보다가 깨달았다.
그를 고통스럽게 하던 월광초의 기운은 혼원기 속에 뒤섞여 사라진 지 오래였다.
“후우···”
가는 숨을 내뱉으며 눈을 떴다.
- 영초. 월광초(月光草)를 복용하였습니다.
- 모든 스탯이 20 상승합니다.
- 마력이 추가로 11 상승합니다.
- 완벽히 흡수하였습니다. 가호, 음양지체를 획득합니다.
[음양지체(A)]
- 화기와 냉기 속성에 저항력을 얻습니다.
- 음기와 양기를 다루는데 보정받습니다.
시스템의 알람이 아니라도 알 수 있었다.
망망대해를 헤쳐 나가는 느낌에서 한걸음 나아갔다. 저 멀리 자신이 도달해야 하는 목표점이 보였다.
당장에 도달할 수는 없었다. 그곳에 닿으면 절정 고수가 되리란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빙(氷).’
손가락 끝에 맺힌 푸른 기운. 주변 온도가 확 낮아졌다. 조금 전까지 느낀 한기 덕에 차가운 것이 무엇인지 온몸에 새겨진 기분이었다.
내친김에 검기까지 생성했다.
두 눈을 감고 한계까지 집중했다. 검성이 말하길 잔류사념이 남을 정도의 의지라면 검기를 늘리는 것이 가능하다고 했다.
웅웅
정신을 집중한 끝에 검기가 흔들렸다. 티끌만큼 약간이지만 확실히 늘어났다.
‘아..’
다시 한번 시도하려다 찌릿한 두통에 그만뒀다. 정신적인 피로감이 상당했다.
조급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어차피 하루 이틀 새에 절정에 도달할 수는 없었다.
‘몇 시지?’
시계를 확인해 보고 조금 놀랐다. 잠깐 앉아 있었던 것 같은데 벌써 하루가 지나 있었다.
어느새 검성이 온다는 다음날 점심이었다.
방을 나서자마자 검성이 아멜리아에게 무언가 가르치고 있는 것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