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0 - 80화 - 클랜(3)
80화 - 클랜(3)
헌터들은 대부분 아카데미 출신이다.
이연희처럼 곧바로 현장으로 뛰어드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 그랬다.
이번 졸업생 기수에서 가장 유망주로 평가받는 사람이 두 명 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둘 모두 시우의 클랜에 지원했다.
한소영이 그중 남자 지원자의 서류를 내밀며 말했다.
“이 사람 진짜 떨어뜨려? 엄청 유명하던데. 처음부터 C등급으로 각성했어. 능력도 원소조작이고.”
지원서 사진에 눈썹 짙은 남자가 있었다. 대놓고 여자만 뽑을 수는 없어서 남자도 신청은 가능하게 해놨다.
중간중간에 은근히 여자들을 우대하는 뉘앙스를 풍겼다.
그런데 진짜로 신청한 남자가 있었다. 이 송충이 눈썹이 유일한 남자 신청자였다.
“어 떨어뜨려. 생긴 거만 봐도 알겠네.”
“음..? 뭐가 문제야?”
한소영이 보기에는 아카데미를 우수한 성적으로 수료한 인재였다.
“딱 봐도 말 안 듣게 생겼잖아. 탈락이야.”
“···알았어. 그럼 서류 탈락 통보한다?”
“어. 문자로 대충보내.”
그녀가 살짝 눈을 흘겼다.
“하여간 밝히긴···.”
“여자만 뽑는 건 현실적인 이유도 있어.”
“하..! 그러셔?”
“들어봐. 나하고 하면 강해지지?”
얼굴이 조금 붉어진 한소영이 시선을 피했다.
“그, 그렇긴 하지.”
“그럼 초창기 멤버들은 나하고 많이 했으니 더 강하겠지?”
“응..?”
“그런데 남자여봐. 강해지지 못하고 그대로일 거 아니야. 그럼 나중에 들어온 신입한테 따라잡힐 거야.”
“그렇긴 한데···.”
“한두 명이야 상관없지만 절반이 남자면 문제가 심각해져. 서열이 제대로 잡히질 않잖아. 그렇다고 약한 사람을 계속 윗사람에 둘 수도 없고.”
“하여튼 말은···. 알았으니까 그만해. 탈락 통보할 테니까.”
***
S급 헌터 태백검문주. 그의 유일한 외동딸.
서가윤.
막 씻고나온 그녀가 기지개를 켰다. 얇은 나시만 입은 탓에 앙증맞은 배꼽이 살짝 드러났다.
스마트폰을 집어 든 그녀가 침대에 풀썩 뛰어들었다.
은은한 샴푸향이 코끝에 멤돌아 기분이 좋았다. 그녀는 침대에 누워 다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지금은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고된 수련을 마치고 씻은 뒤 침대에서 뒹굴거리는 이 순간.
“흐응..”
푹신한 침대 덕에 콧소리가 절로 나왔다. 안락함을 즐기며 스마트폰을 가지고 놀던 그녀의 인상이 찡그려졌다.
‘으.. 이게 뭐야.’
서가윤은 제 아버지에 대한 기사에 싫어요를 마구 눌렀다.
‘검의 명가는 무슨!’
태백검문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검술은 정말 엉터리였다. 전혀 실전적이지 못했다.
검을 찌르는 동작부터 문제였다. 도대체 허공에 한 바퀴 돌리면서 폼잡는 동작이 왜 있는지 모르겠다.
어릴 때부터 검을 배워온 탓에 그녀는 어느새 검을 좋아하게 됐다.
‘그래도 이건 아니야.’
아버지가 강한 것은 단순히 각성 등급이 높기 때문이다. 검으로 몬스터를 베는 척하지만 사실 강력한 염동력으로 찍어누르는 것이다.
단단한 피부 때문에 몬스터가 베이지 않으면 염동력으로 잡아 찢기도 한다.
중검의 묘리로 적을 꼼짝 못 하게 한다? 그냥 염동으로 묶어놓고 내리치는 것이다.
알 사람은 다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다.
‘에휴.. 창피해서 정말.’
페이지를 넘기다가 우연히 눈에 들어온 기사가 있었다.
[구원클랜의 최시우를 말하다.]
썸네일에 있는 검만 아니었다면 관심도 주지 않았을 것이다.
‘음··· F에서 한 달도 안 돼서 C..?’
터무니없는 성장 속도. 믿기지 않았다.
인상을 찡그리며 댓글을 확인했다. 부럽다느니 버스충이라느니 하는 댓글들이 대다수였다.
유난히 추천수가 높은 댓글에 눈이 갔다.
‘나의시우님? 아이디가 뭐 이래.’
댓글의 내용은 영상 플랫폼에 올려진 동영상 주소였다.
[스피드맨 참교육 당하다?]
스피드맨이라면 악질로 유명한 뉴튜버. 눈살이 찌푸려질 만큼 어그로를 끌어대서 좋아하진 않았다.
‘각성한지 한 달도 안 돼서 스피드맨한테 걸린 건가. 운도 없네 이 사람.’
분명 영상 제목과 달리 스피드맨이 상대를 일방적으로 때리는 영상일 것이다. 그는 항상 그런 식으로 어그로를 끌었다.
‘움··· 그래도 한 번 봐볼까.’
고민하다가 호기심에 영상을 틀었다. 항상 알면서도 이렇게 속았다. 그런데 이번엔 진짜 참교육이었다.
‘어..?’
고급 제품으로 유명한 회사 칼이 나뭇가지 처럼 잘려 나갔다. 그리고 이어진 일방적 폭행.
눈이 빠져라 영상에 집중했다.
“아..”
절로 신음성이 튀어나왔다. 달랐다. 그녀가 아버지에게 한평생 배워왔던 검과 전혀 달랐다.
쓸데없는 동작이라곤 일절 없었다.
그야말로 상대를 죽이기 위한 실전 검술. 간결한 동작에서 형용할 수 없는 감동을 느꼈다.
몇 번이고 영상을 본 끝에 결정했다.
“아, 아빠아!! 나 집 나갈래!!”
***
면접장.
서가윤은 아버지와 한바탕 한끝에 이곳에 올 수 있었다.
반쯤 가출하듯 집을 나왔지만 상관없었다. 그녀에겐 제대로 된 검술을 배우는 것이 더 중요했다.
약간 도도하고 차가워 보이는 여자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회복하고 버프. 더블능력자 맞으시죠? D등급 이시구요?”
“네에!”
최대한 발랄하게 대답했다. 이러면 태백검문 사람들은 모두 좋아했으니까. 그런데 부클랜장이라는 한소영의 눈썹이 살짝 찡그려졌다.
‘내, 내가 뭘 잘못했나..?’
아주 살짝 한숨을 내쉰 한소영이 조금 고민했다. 그러더니 옆에 있던 시우에게 속삭였다.
“확인은 해 봐야겠는데.. 진짜 할 거야?”
고개를 끄덕인 시우가 팔뚝을 걷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주윽 그었다. 그것만으로 피부가 갈라지고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능력 시연 부탁드립니다.”
“아, 네 네!”
우웅.
원거리에서 날아든 그녀의 마력이 상처를 치유했다. 흉터 하나 없이 멀쩡한 피부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어진 버프.
시우와 그녀의 등급차이가 심한데도 불구하고 신체 강화가 제대로 들어왔다. 일정량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비율로 강화하는 것.
‘생각보다 더 뛰어난데.’
원거리 힐에 고정치가 아닌 비율강화. 최상급 자질을 가진 버퍼이자 힐러였다.
이 정도라면 거대길드에서 탐낼 만한 후위가 맞았다. 중소 클랜에 들어오려 하는 게 이해가 안 갈 정도의 능력자였다.
그래서 직접 물어봤다.
“좋네요. 그런데 거대길드에서 오라는 곳도 많을 텐데 저희 클랜에 들어오려는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하다못해 그녀의 집안인 태백검문만 해도 반쯤 클랜이다. 같은 무술을 익히는 사람들이 모인 곳.
“그게..”
서가윤은 지금껏 보인 당찬 모습과 다르게 약간 부끄러워했다. 땅바닥과 시우의 얼굴을 번갈아 보던 그녀가 벌떡 일어났다.
“제, 제자로 받아주세요!”
그러더니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이마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절했다.
어제 작은 돌멩이가 툭 떨어진 것과는 다른 의미로 면접장이 조용해졌다.
“검술보고 반했습니다. 부탁드립니다!”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시우와 한소영이 저도 모르게 서로를 쳐다 봤다. 어제 아무 생각 없이 내뱉었던 말이 진짜였다.
“잠깐만요.”
“네, 네?
엉거주춤 고개를 든 서가윤이 두 손을 꼬옥 모으고 그를 올려다봤다.
“지금 제 검술을 배우고 싶다. 이겁니까?”
그의 검술이라 해봤자 별거 없었다. 몬스터와 한평생 싸우다 죽은 헌터의 경험을 기반삼아 실전으로 다듬은 전투 기술일 뿐이었다.
딱히 체계적인 검술이 아니었다.
“괜찮아요! 그게 제가 배우고 싶은 검이에요! 실전만을 위한 살검! 냉혹무정한 살수의 검!”
머리가 약간 아팠다. 현대에 사승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무림과는 조금 달랐다.
계약 관계에 가까웠는데 그녀가 절까지 하는 것을 보니 신박한 또라이를 보는 느낌이었다.
탁자를 톡톡 치며 고민하는데 서가윤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그런데 안 물으세요?”
“뭘요?”
“아, 스승님. 말씀 편하게 하세요.”
“···그건 스승되면 편하게 할게요.”
힐끔힐끔 눈치를 살피던 그녀가 말을 이었다.
“아, 아버지한테 허락 맡고 온 거냐고···.”
“서가윤씨는 성인 아닙니까? 그런 걸 제가 왜 물어요?”
“아..!”
별것도 아닌 대답에 그녀는 감동받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무릎을 꿇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올려다봤다.
“스승으로 모시게 해주세요!”
제자가 되게 해 달라고 간청하는 서가윤을 살폈다.
윤기 나는 검은 머릿결을 질끈 묶어 뒤로 넘겼다. 전체적으로 군살 하나 없이 날씬한 체형이었지만 가슴과 둔부는 풍만했다.
전투에 방해되지 않게 꽉 조여져 있었지만 저런 여자들을 많이 보다 보니 감이 왔다.
‘최소 H컵..!’
사이즈를 보자 모든 고민이 사라졌다. 예쁜 아가씨가 저처럼 구는데 허락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무엇을 얼마나 가르칠지는 그녀가 하는 것을 보고 결정하기로 했다.
***
오늘은 클랜에 들어오기 전에 숙소를 배정받고 클랜하우스에 대해 소개받는 날이었다.
이연희는 함께 입사한 동기들을 살폈다.
총 6명.
힐러라고 들었는데 허리에 검을 차고 있는 여자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온몸에 명품이 아닌 것이 없었다.
그녀는 한손을 검 손잡이 위에 올리고 눈을 감고 서 있었다.
뭔가 기죽는 기분이었다. 그녀와 달리 부잣집에서 태어난 아가씨.
‘으아.. 저건 균열소재로 만들어진 거 같은데···?’
일상복을 균열소재로 만든 것으로 입고 다니다니.
그녀뿐만 아니라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대단해 보였다.
이연희는 옆에서 말을 거는 동기 때문에 입안의 침이 바싹 마르는 기분이었다.
“하아.. 저는 신체에서밖에 발열이 안 돼요. 어쩔 수 없이 몬스터랑 붙어서 싸워야 한다니까요.”
“그, 그러시구나..”
“이연희씨는 어떤 능력이에요?”
영원히 피하고 싶던 순간이 찾아왔다. 눈을 질끈 감았다. 같이 균열에 다닐 동료에게 능력을 숨길 순 없었다.
“아, 암석소환이요.”
“어머! 원거리세요? 부럽다. 정말..! 우리 친하게 지내요.”
손바닥 정도 거리에서 주먹만한 돌멩이를 소환하는 능력이라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워, 원거리긴 한데.. 거리가 좀 짧아요. 그리고 위력도..”
“에이 원거리인 게 중요하죠. 어차피 등급 올라가면 거리랑 위력은 늘어날 텐데.”
“그, 그건 그렇지만.”
이연희는 하늘이 노래지는 기분이었다. 지금이라도 빨리 오해를 바로잡아야 했다.
‘아.. 집에 가고 싶다.’
어머니가 아프기 전 대학에 다니던 시절이 그리웠다. 풍족하진 않았지만 공부만 하면 되는 즐겁고 편한 시절이었다.
언제 돌멩이에 대해 털어놓을지 기회를 엿보던 그녀의 귀가 쫑긋했다. 그녀가 가장 관심 있는 주제였다.
“제가 전에 있던 클랜은 숙소가 정말···. 솔직히 답도 없었어요.”
“네? 숙소가 어땠는데요?”
“닭장같은 곳이었어요. 6인 1실이니 말 다 했죠?”
당황스러웠다. 채용 공고에 올라와 있는 사진은 멀끔한 오피스텔이었는데?
“저, 정말요? 하지만 사진엔···”
“어머. 언니 그걸 믿어요? 아, 언니맞죠? 전 21살인데.”
“아, 네. 전 23살이에요.”
동기는 천성적으로 활발하고 말 많은 여자였다. 정신이 없을 정도로.
“언니 말 편하게 하세요. 그런 사진은 다 개뻥이에요. 솔직히 모든 클랜원에게 그 정도 숙소를 제공하는 게 말이 돼요?”
“그, 그런가..?”
“꼬우면 자기 돈 내고 집 구해라 이거죠. 어머 오셨다.”
로비에서 기다리다 보니 클랜장님의 비서가 찾아왔다. 오늘 클랜하우스를 소개해 줄 사람.
그런데 복장부터 이상했다.
“여, 여고생..?”
교복이 유니폼은 아닐 것이다. 아니 유니폼이면 더 문제였다.
그것을 보니 동기의 말에 신빙성이 생겼다. 숙소를 살피기 두려워질 지경이었다.
그녀의 월급이 500이라는 것도 모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