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90 - 90화 - 무협지구
90화 - 무협지구
오랜만에 무협지구에 왔다.
옆에서 잠들어 있는 당화린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머리결과 따뜻한 체온이 기분 좋게 느껴졌다.
‘흠.. 그나저나.’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아..!’
청봉산에서 혈교로 추정되는 괴한들을 박살 냈던 것이 기억났다.
사람들을 죽이고 괴상한 방울로 영혼을 제물로 바치던 놈들.
무림맹을 이용해 놈들을 몰살 시켰던 기억이 났다.
‘덕분에 퀘스트도 거저먹었지.’
지금 시간은 해가 막 떠오르기 직전인 새벽.
“으응..”
차가운 새벽공기가 침대 속으로 들어왔다. 잠들어 있는 당화린이 추운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잠에서 깨지 않도록 이불을 잘 덮어 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 보유 카르마 1,715
‘애매하네.’
옛날같았으면 상당히 많은 카르마로 느껴졌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뭘 살까 고민했다.
지금 가장 사고 싶은 것은 상급 마력코어였다. 내공은 말 그대로 다다익선이니까.
‘팔천 카르마를 언제 모아.’
중급 마력코어를 8번 더 사야지 상급 마력코어가 된다. 남은 카르마가 턱없이 모자랐다.
“우웅..”
옆에서 자고 있는 당화린이 보였다. 기분 좋은 꿈을 꾸고 있는지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언젠가 그녀에게 주고자 했던 게 있었다. 그녀를 안을 때마다 찔렸던 장침 때문에 결심 했던 것.
[인벤토리(Lv.0) 부여권] : 1,000 카르마.
- 배낭 크기의 [인벤토리(Lv.0)]를 대상에게 부여한다.
잃어버리거나 빼앗길 수 있는 아공간 주머니를 선물하는 것보단 이게 안전해 보였다.
***
“선물?”
당화린이 호기심 어린 얼굴로 눈을 반짝였다.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맛있는 것을 기대하는 것 같았다.
“눈 감아봐.”
“흐응.. 먹여주려고? 좋아! 아~”
입안의 분홍빛 혓바닥을 보자마자 아랫도리에 힘이 들어갔다. 척추반사급 반응이었다.
‘흠흠..’
조금 진정한 다음 [인벤토리(Lv.0) 부여권]을 구매했다.
-대상에게 부여하시겠습니까?
그녀에게 빛이 스며들었다. 꽤 화려한 빛인데도 불구하고 눈치채지 못 했다. 그에게만 보이는 빛인 것 같았다.
“으응..? 이게..?”
그녀가 미간을 찡그리며 허공을 봤다.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이고 귀신이라도 보이는 것처럼 손을 휘젓고 있었다.
아무래도 눈앞에 무언가 떠오른 것 같았다.
“혹시 뭐가 보여?”
“무슨 글자가.. 아공간..? 이게 뭐야?”
인벤토리가 아닌 아공간. 아무래도 그녀의 언어에 맞춰져 번역된 것 같았다.
“내 선물. 일단 수락해. 직접 사용해 보는 게 이해하기 쉬울 거야.”
“우웅..”
그녀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큼 그를 믿는 것이다.
가슴이 뿌듯해졌다. 서로의 이득과 무관하게 믿고 의지하는 관계는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없는 충만함이 있었다.
“어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기대됐다. 당화린의 동그란 두 눈에 경악이 차오르고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사용법을 알게 됐는데 어쩌려나.’
한동안 눈을 깜박이던 그녀가 허리춤을 더듬었다.
당화린이 꺼내든 것은 아무런 장식 없는 평범한 비도였다. 그것이 손바닥에서 사라졌다 생겨나길 반복했다.
‘놀란 표정도 예쁘네.’
충격받았는지 작은 입이 점점 벌어지는 것이 귀여웠다. 손가락을 집어넣어 만지고 싶은 충동이 생길정도로.
“어때··· 좋..지?”
그녀의 초점이 이상했다. 뭔가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기분.
당화린의 기운이 들끓기 시작했다.
혹시 문제라도 생기나 싶어 유심히 관찰했는데 안 좋은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당화린의 운명이 비틀리고 있습니다.]
- 카르마 1,822획득
1,000 카르마를 사용했는데 오히려 더 많이 얻었다.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좋은 일이었다.
‘음··· 깨달음?’
현대에서 영상으로 몇 번 본 장면이 떠올랐다. 무아지경에서 깨어난 그들은 한차원 더 강해졌다.
‘인벤토리 하나 줬다고 깨달음···? 아니, 아공간 자체가 대단한 거긴 한데···’
당화린의 기운이 불꽃처럼 피어올랐다가 사그라드는 것이 반복됐다. 본능적으로 무언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기대감이 들었다. 그녀는 애인이자 스승이기도 했으니까. 그녀가 강해지면 그도 좋았다.
그런데 무언가 될 듯 말듯하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사그라들었다.
당화린의 내공이 부족했다.
‘아쉬운데.’
왠지 모르게 좋은 기회를 날려 먹는 것 같아 아까웠다. 고민하다가 유리병을 꺼내 들었다.
무협지구에서 먹으려고 남겨둔 공청석유.
‘에이 모르겠다. 어차피 쉽게 구한 건데.’
헬레나한테는 조금 미안 했다. 그 먹으라고 줬던 영약이니까. 하지만 아슬아슬한 장면을 보니 도저히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다람쥐가 조그마한 벽을 넘지못해 계속 넘어지는 것 같았다. 엉덩이를 조금만 밀어주면 될 것 같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화린이인데.’
그에게 무공의 기초를 알려 준 사람. 영약정도야 아깝지 않았다.
그녀에게 어떻게 먹일지 고민했다. 입으로 먹였다간 무아지경이 깨질게 분명했다.
‘키스? 당연히 안 되고..’
고민하다가 그의 입에 털어 넣었다.
불길처럼 일어나는 공청석유의 기운을 혼원기공으로 정제했다. 자연스럽게 단전으로 향하는 기운을 손바닥에 모았다.
당화린과 관계한 횟수만 수십 번. 두 손을 다 이용해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녀가 좋아하는 기운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날카롭고 빠르면서 조금은 흐릿한 기운.
당화린의 등에서 한 치가량 떨어진 곳에 손바닥을 멈췄다.
웅웅.
원거리로 전달하는 것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최대한 집중해서 그녀에게 기운을 전달했다.
[당화린이 가진 운명의 궤적이 변했습니다.]
- 카르마 2,702획득
사그라들던 불꽃이 다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
“아..”
당화린은 꿈에서 깨어난 기분이었다.
눈을 뜨고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시우.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어느새 너무나 소중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같이 지낸 기간이 오래된 것도 아닌데 어떻게 이렇게 좋아하게 됐는지는 그녀도 몰랐다.
그냥 그의 얼굴을 보기만 해도 좋았다.
“깼어? 축하해.”
“으응..?”
부끄러운 생각에 얼굴이 붉어졌던 당화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막 해가 떠오르는 아침이었는데 어느새 밤이었다.
분명 시우가 그녀에게 선물을 준다며 아공간을···.
‘아!’
그녀가 작게 손짓했다. 그 순간 저 멀리 있는 나무에 장침이 박혀 있었다.
보고 있던 시우가 놀랄 정도의 암기술. 전혀 느끼지 못했다. 나무에 장침이 박힌 것을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알아챘다.
빠르기는 전과 다름없었다. 중요한 것은 자연스러웠다. 아무런 의도도 느껴지지 않는 동작에서 암기가 날아들었다.
암기술에서 가장 중요한 자연체를 터득한 것이다.
절정의 벽이 눈앞에 있었다.
게다가 단전이 터질 것처럼 빵빵해진 내공. 누가 준 건지 모를리 없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렸다. 당화린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의 품에 안겨들었다.
***
한 달.
청봉밀사에서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가장 먼저 카르마를 사용했다. 당화린덕에 모인 오천이 넘는 카르마로 중급 마력코어를 5번 샀다.
이제 상급 마력코어까지 남은 것은 3번.
그의 예상대로라면 총 1만 카르마가 드는 상급 마력코어는 절정지경에도 통용되는 힘이다.
목표가 눈앞으로 훌쩍 다가온 기분이었다.
낮에는 수련하다가 밤이 되면 당화린과 모유선자. 아니 청월선자와 번갈아 가며 침대에서 뒹굴었다.
특히 절정할 때마다 모유를 뿜어대는 청월선자는 보기만 해도 자지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가 얼마나 강하던 자지를 찔러 주면 앙앙대는 암컷으로 변했으니까.
충실한 수련의 나날이 흐르자 점점 심심해졌다.
‘좋긴 한데···’
한 달이 흘렀는데도 카르마는 300 정도밖에 얻지 못했다.
반대로 말하면 단순히 놀고먹으며 섹스만 했는데 300 이나 얻은 거긴 하다. 그만큼 당화린에게 얻을 수 있는 카르마가 늘었다.
상급 마력코어까지 남은 카르마는 대략 3,000.
‘이 정도 속도면 대충 1년인데.’
당화린과 다르게 그는 깨달음이랄 것이 없었다. 단순한 수련으로 절정에 도달할 것 같지 않았다.
‘나한텐 안 맞아.’
애초에 그는 지금까지 실전으로 성장했다. 이런 정적인 수련이 어색했다. 검성이 괜히 급하게 마음먹지 말라고 한 게 아니다.
그가 빠르게 성장하려면 여러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고 카르마를 얻어야 한다. 아니면 어디서 죽도록 싸우던가.
문제는 당화린.
청월선자가 조언했다.
“어떤 기연인지 모르겠지만··· 천운이군요. 깨달음을 갈무리하면 젊은나이에 절정지경에 오르게 될지도 모르겠어요.”
“갈무리라면··· 얼마나 걸릴까요?”
“글쎄요. 짧으면 한 두 달.. 운이 없다면 몇십 년이 걸릴지도 모르죠. 그녀의 재능과 노력에 달린 것입니다. 깨달음이 잊혀지기 전에 폐관 수련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음..”
망설이는 당화린을 떠밀었다.
“폐관 수련해. 고수 말 들어서 나쁠 거 없잖아?”
“그렇지만..”
그녀가 배운 모든 암기술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점검해야 했다. 아니, 아예 무공을 다시 익히는 수준에 가까웠다.
옷에 숨겨진 암기를 꺼내서 던지는 것과 아공간을 이용해 암기를 던지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니까.
*
청월선자의 조언은 그에게도 이어졌다.
검성의 조언과 비슷했으나 하나가 추가됐다.
“무공을 처음부터 다시 익히는 것입니다. 그대는··· 솔직히 낭인들처럼 기초가 부실합니다.”
무협지구는 몇 년 동안 수련하는 것이 당연한 세상이었다. 무공을 처음부터 다시 익히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음···.’
정말 그럴 생각은 없었지만 처음 무공을 익혔던 때가 생각났다. 혼원기공 비급을 꺼내 들었다.
전전대 하오문주 목이도가 남겼던 책.
낡아 부스러질 것 같은 비급을 한 장씩 넘기고 있으려니 맨 처음 동굴에서 눈을 떴을 때가 생각났다.
‘글자에 환영결을 담아놨었지.’
전생체 문지홍과 그가 읽었을 때 보이는 글자가 달랐었다.
호기심에 다시 한번 마지막 장을 넘겼다.
——
연자여, 그대가 이 글자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은 혼원기공(混元氣功)이 적어도 8성에 달했다는 것이겠지.
광동의 고룡협(古龍峽)으로 향하라. 혼원기가 그대를 인도할 것이다.
——
“어..?”
글자가 또 달라져 있었다. 순간 환영인가 싶었지만 아니었다. 환영의 힘은 그에게 통하지 않는다.
‘묘하게 익숙한데···. 설마 잔류사념?’
200년의 시간이 흘렀는 데도 불구하고 남아 있는 사념이라니. 경이적인 무공이었다.
사용자의 수준에 따라 반응하는 책. 이 정도면 아티팩트라 부를 만 했다.
그렇다고 목이도가 마법을 익힌 것은 아니었다.
그저 하늘에 닿을 정도의 무공. 그 하나만으로 마법에 가까운 이적을 발휘한 것이었다.
이 비급은 인간의 순수한 의지로 만들어 낸 원시적인 아티팩트였다.
눈을 감고 있으니 손끝에 무언가 느껴졌다. 아주 미세한 내공이 책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대단하네.’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무공이 얼마나 뛰어나야 이런 재주를 부릴 수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엄청난 양반이었다.
괜히 당시 무림맹주 아내를 범하고도 무사히 도망갈 수 있었던 게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