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93 - 93화 - 무협지구(4)
93화 - 무협지구(4)
당금 무림은 크게 둘로 나누어져 있다.
무림맹과 사도련.
변방 사막너머에 있는 마교를 제외하면 둘이서 무림을 양분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200년 전. 정사 대전이 일어난 혼란의 시기에는 두 세력 사이에 피가 마를 날이 없었다.
하지만 영원한 것은 없었다.
한쪽을 완전히 죽일 것처럼 싸워대던 그들도 시간이 흐르자 다툼이 잦아들었다.
평화와 부흥의 시대가 찾아왔다. 지금은 말 그대로 무림의 황금기였다.
하지만 달이 차면 기우는 법.
힘이란 그릇이 가득 쌓인 양 세력에 불안한 공기가 흘렀다.
무림맹이라는 거대집단의 머리라 불리는 군사 제갈혁.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무영신투의 비고라고?”
“예. 사도련이 움직이는 게 심상치 않습니다. 잘못하면 정사 대전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부채를 만지작거리던 제갈혁이 혀를 찼다.
그깟 도둑의 창고라고 말할 순 없었다. 무영신투는 말 그대로 천하제일 도둑.
무림의 거대 문파 중에 무영신투에게 털리지 않은 곳을 찾기가 더 힘들었다.
정사를 가리지 않고 이름 좀 있다고 하는 문파는 모조리 털렸다. 그 모든 문파의 무공이 모였다면 반드시 확인하고 회수해야 했다.
“짜증 나는군···.”
무영신투는 10년 전부터 활동이 뜸해지더니 요즘엔 완전히 멎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그의 비고가 드러났다.
달의 힘을 이용한 진법은 그의 독문절기. 진짜일 가능성이 컸다.
“진법가들의 말에 따르면 이틀 뒤에 진입할 수 있을 거랍니다.”
“이틀... 너무 짧군.”
***
오늘도 낙양루에서 질펀하게 술을 마시러 온 모용철이 소리쳤다.
“빌어먹을! 애화는 도대체 언제까지 쓰러져 있는 것이냐!”
“죄, 죄송합니다. 그, 금희라고 새로들어온 아이가 아주 예쁩니다.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쯧..! 데려와 보거라.”
“예! 금희야 이리 오너라!”
그녀의 가슴을 본 모용철이 헤벌쭉한 표정으로 웃었다.
“커험.. 고년 참 크구나. 마음에 들었다.”
쩝쩝거리며 입맛을 다신 그는 옆에서 몸을 떨며 서있는 지배인에게 소리쳤다.
“다음에도 애화가 안 오면 네놈 이빨을 모조리 가루로 만들어줄 것이다. 알겠느냐?”
“허업···! 예, 예! 최고의 의원을 데려다가 치료토록 하겠습니다!”
“쯧. 하여간 천한 것들은 때려야 말을 듣지.”
모욕적인 말에도 지배인의 얼굴은 비굴한 미소가 가득했다. 오히려 홍루에서 몰래 데려온 금희란 계집애를 마음에 들어 하니 다행이란 생각만 가득했다.
그는 자연재해같은 남자였다.
모용세가 같은 거대 가문에 반항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들의 뒤를 봐주던 문파는 도움 요청에도 응답이 없었다.
덕분에 그만 개고생 하는 중이었다.
“끄아아악!!!”
모용철이 금희의 어깨를 끌어당기며 기루에 들어가려던 그때. 거리에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무표정하게 서 있던 호위무사들의 위치가 자연스럽게 바뀌었다. 비명이 들려오는 쪽의 방비를 단단히했다.
지배인이 어색하게 웃으며 모용철에게 말했다.
“공자님. 위험할지도 모르니 안으로 피하시지요.”
“입 닥쳐! 누가 감히 나를 해한단 말이냐. 궁금하니 가봐야겠다.”
모용철은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비명이 들린 곳으로 향했다.
거리가 가득찰 정도로 사람많은 이곳에서 대낮에 살인이 벌어졌다.
막 사람을 죽인 털북숭이. 그가 시체에서 칼을 빼 들고 모용철을 경계했다.
“···부잣집 도련님으로 보이는데 괜한 일 신경 쓰지 말고 가시지요. 이놈은 도둑입니다.”
“시끄럽다. 감히 건방지게 내 앞에서 살인이라니. 죽여 버리겠다!”
모용철이 육중한 살덩이를 출렁이며 달려들었다.
권장법의 명가로 소문난 모용세가였지만 검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후덕한 몸을 출렁이며 검을 휘둘렀다. 육중한 체중탓에 넘어질 듯 위태위태했지만 그만큼 검격에 담긴 위력은 강렬했다.
값비싼 보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휭휭거리는 바람 소리가 이어졌다.
챙! 챙!
“으윽..!”
털북숭이는 차마 반격하지 못하고 방어만 했다.
눈이 있다면 주변에서 그를 노려보고 있는 호위무사가 보일 것이다.
모용철의 주력은 권장법. 칼질은 빈틈 투성이었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공격하긴 충분했다.
그를 상대하던 낭인은 점점 힘이 부쳤다.
“끄윽..!! 왜 나를 핍박하는 것입니까!”
“닥쳐라! 이 마두 녀석!”
챙!
“으윽..!”
일방적으로 공격받던 털북숭이의 눈빛에 점점 노기가 깃들었다.
그 순간 지켜만 보던 호위대주가 검을 휘둘렀다.
서걱.
“끄아아악!”
검이 닿지도 않았는데 팔이 어깨까지 잘려 나갔다.
털북숭이의 텅 빈 어깨에서 피가 분수처럼 쏟아졌다. 그런데도 모용철의 검은 멈추지 않았다.
“사, 살려..!!”
촤악!
“커억···! 시, 시바알..”
모용철에게 상체를 베인 털북숭이가 꺽꺽대기 시작했다. 갈비뼈가 드러날 정도의 치명상. 폐가 베였는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이미 제압된 상대에게 가한 살수에 좌중이 수근대기 시작했다.
“허어.. 모용세가도 갈 때까지 갔군···. 해도 해도 너무한 거 아닌가.”
“정파 놈들이 다 그렇지 뭘.. 헙!”
호위대주의 서늘한 눈빛에 그가 입을 다물었다.
모용철은 군중들의 적의섞인 눈빛을 개무시했다. 오히려 목청을 키우며 소리를 질러댔다.
“대 모용세가의 모용철! 내가 마두를 죽였다! 정의를 바로 세웠도다!! 크하하하하!”
정도가 너무 심했다. 참다못한 호위대주가 눈살을 찌푸렸다.
“공자님..!“
“왜 그딴 표정을 하는 것이냐. 대 모용세가의 행사를 누가 감히 뭐라 할 수 있겠느냐.”
호위대주는 뒷목이 뻐근했다. 가출했다가 돌아온 도련님. 철이 들기는커녕 안 그래도 더러운 성격이 더 나빠졌다.
심심하면 사람을 패더니 이제는 살인까지 거리낌 없이 했다.
정파인 그들은 적어도 체면은 차려야 한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죽여대면 뒷말이 나올게 뻔했다.
뒷수습할 생각에 머리가 얼얼해지는 기분이었다. 문제는 이런 놈을 가주께서 무한히 신임하기 시작한 것.
특히 이번 협객행은 무조건 그의 명에 따르라 했다.
“이런..”
모용철은 그런 호위대주의 걱정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눈을 빛내며 시체를 내려다봤다.
“호오.. 어디 보자.”
모용철이 시체에서 무언가 꺼내 들더니 하늘 높이 들어 올리며 사방에 자랑했다. 그것은 종이가 돌돌 말린 두루마리였다.
“허어!? 마두놈이 제법 쓸 만한 걸 가지고 있었군.”
길거리 한복판에서 두루마리를 망설임 없이 펼쳐들었다. 모용철의 커다란 목소리가 온 거리에 울려펴졌다.
“딱 봐도 장보도잖아! 어이 호위대주 여기로 간다!”
이와 비슷한 일이 광동성 곳곳에서 일어났다.
***
시우는 얼마 전 두루마리를 복사한 내용을 살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 보자마자 지도인 것은 알 수 있었다.
현대 지도와 다르게 해석하는 게 쉽지는 않았다. 그래서 전문가에게 맡겨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
‘어째 여기가 고룡협같은데···?’
문제는 그는 고룡협을 찾아왔는데 지도에서 가리키는 장소에 도착했다는 것.
산을 뛰어다니는 무림인들이 점점 많아졌다. 그중 주제도 모르고 시비 거는 놈을 두들겨 패줬다.
녀석은 주먹질 몇 번에 아는 것을 모조리 털어놨다.
“뭐..? 무영신투의 장보도?”
“예. 대협! 광동에 소문이 자자합니다!”
무릎을 꿇고 있던 놈이 어색하게 웃었다.
시우에게 두들겨 맞은 광대뼈가 아리는지 살살 쓰다듬고 있었다. 퉁퉁 부은 눈가에 푸른멍이 생겨나고 있었다.
산적같이 생긴놈이 그러고 있으니 잘 어울렸다.
“무림맹에서도 사람을 보냈다고 합니다!”
소문이 진동하고 있다. 고룡협에 무영신투의 비고가 발견됐다는 소문이었다.
무림 최고의 도둑이라는 무영신투가 한평생 훔친 물건이 가득 담긴 보물창고. 그곳의 위치가 담긴 장보도가 갑작스럽게 퍼지고 있었다.
“그런 귀한 물건이 사방에 뿌려진다고? 장난하냐?”
“아, 아닙니다! 정말입니다. 요즘 광동이 시끄러운 게 다 그것 때문입니다.”
어떤 놈들인지 모르겠지만 지도를 복사해서 뿌리고 있다.
문제는 상당히 신빙성 있다는 것. 인생역전을 바라는 삼류 낭인부터 몇몇 거대 세가에서도 움직이고 있다고 한다.
“꺼져라.”
“가, 감사합니다!”
녀석은 다리에 쥐가났는지 땅바닥을 나뒹굴며 황급히 도망갔다.
저런 낭인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저런 허접한 놈들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몇몇은 그도 만만히 볼 수 없는 강자들도 있었다.
‘염병.. 서둘러야겠네.’
무영신투의 비고인지 뭔지때문에 목이도가 남긴 안배를 얻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생겼다.
빼앗으면 빼앗았지 빼앗길 수는 없었다.
*
‘여긴가?’
고룡협은 거대한 협곡.
마치 거대한 뱀이 지나간 듯한 지형이었다. 일자로 길게 이어진 협곡에 거친 물살이 흐르고 있었다.
이곳에 도착하고 한동안 헤맸다. 쓸데없이 넓은 무림답게 협곡의 규모가 엄청났다.
무식하게 찾아선 한두 달로도 부족했다.
거칠게 쓸려 나가는 물살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혼원기가 인도 한다며?’
200년이나 지났는데 그의 안배가 멀쩡히 남아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이곳과 목이도의 비급이 있던 동굴은 전혀 다르니까.
그래도 그의 비급에 맺혀 있던 잔류사념이 대단하긴했다. 속는셈 치고 눈을 감았다.
“후우···”
마음을 가라앉히고 혼원기공을 운기했다.
역시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포기하려는 찰나에 어떤 기운이 느껴졌다.
‘···음?’
친숙했다. 희미하지만 분명했다. 여러 가지 가능성을 동시에 품은 기운.
자연지기와 유사하지만 혼원기가 분명했다.
그 기운이 바람결을 타고 날아오고 있었다.
눈을 감고 감각을 곤두세웠다. 미약하게 흩날려 오는 혼원기가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운기에 집중한 것은 처음이었다.
‘찾았다.’
바람이 불어오는 곳은 남쪽이었다. 물이 흘러내리는 방향과 동일했다.
몇몇 낭인들이 반대 방향으로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지도가 가리키는 곳도 그쪽이었다.
마음 같아선 둘 다 확인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부족했다. 우선시할 것을 선택해야 했다.
‘흠···.’
수상한 지도보단 혼원기가 더 믿음직스러웠다. 애초에 목이도가 남긴 안배가 원래 목적이었다.
남들과 반대로 혼원기를 따라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