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08 - 108화 - 아카데미(6)
108화 - 아카데미(6)
휘이이잉!
주변을 둘러봐도 세차게 불어오는 눈보라만 보일 뿐이었다.
‘뭐야 여긴.’
희미하게 보이는 산봉우리가 설산이란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몰아치는 눈보라를 보다가 헬레나의 어깨를 톡톡 쳤다.
“헬레나! 정신 좀 차려 봐.”
“으으··· 핫?!”
빠르게 일어난 헬레나가 주변을 경계했다. 털이 바짝 솟은 고양이 같았다.
“아.. 시우님..?”
반사적으로 마력을 모으던 그녀의 경계심이 급속도로 줄어들었다. 시우를 보더니 귀여운 강아지로 되돌아왔다.
“여기는.. 어디죠?”
“글쎄. 나도 정신 차리니까 여기더라.”
“으음.. 분명히 그 깃털에서 빛이 번쩍였죠.”
당시의 기억을 떠올렸다. 화조의 깃털에 무언가 흡수되더니 엄청난 존재감이 느껴졌다.
‘솔직히 말도 안 되는 수준이었어.’
손하나 까닥하기 힘들 정도. 기억을 떠올리는 것에 불과한데 지금도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청월선자. 검성 등 많은 강자를 만났지만 어제처럼 압도적인 무언가는 없었다.
“혹시, 이런 상황에 대해 알고 있는 거 있어?”
헬레나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니요. 저도 처음 겪는 일이에요. 그 깃털에서 느껴지던 존재감···. 마치 재앙급 몬스터라도 나타난 것 같았어요.”
“재앙급?”
이 세계에서 북한이 망해 버린 이유가 바로 재앙급 몬스터 때문이었다. 그 정도 수준이라니.
어쩐지 한걸음 움직이는 게 더럽게 힘들었었다. 헬레나가 고민하더니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강제로 전송당한 것 같은데 말도 안 되네요.”
“공간 이동? 여기는 수신기고 뭐고 없는데?”
“그러니까 더 말도 안 되는 거죠. 날씨가 변할 정도로 먼 곳.. 같은데 아무런 시설도 없으니까요.”
“음..”
눈을 감고 주변을 느끼려 했지만 잘 안 됐다. 이곳은 이상하게 기감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게다가 마력도 거의 없어.’
대기 중 마력 농도가 엄청나게 낮았다. 한번 소모한 마력을 보충하기 쉽지 않을 것 같았다.
헬레나가 차고 있던 귀걸이를 만지작거리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제 호위는 여기 없는 것 같아요. 위치 추적이 안 돼요.”
“우리만 전송 된 건가?”
“글쎄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네요. 가문에 통신도 안 되네요···.”
몇몇 마도구가 먹통이었다. 특히 통신에 관련된 마도구들.
-아아..! 들리세요?
-어. 들려.
-이건 되네요.
그들 사이의 통신은 됐다. 마치 균열 속에 들어온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맨눈으로 주변을 훑었다. 눈보라가 점점 더 심해지는 느낌이었다.
휘이이잉!
처음 눈 떴을 때만 해도 나름 잔잔했다. 함박눈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그것은 칼바람으로 변해가는 중이었다.
바로 옆에 있는 사람도 잘 안 보일 지경이었다.
“시우님! 멀리 가지 마세요!”
“어! 헬레나 너도 조심해!”
헬레나와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며 근방을 훑었다.
그리고 발견한 두 가지.
먼저 하나는 마이클이었다. 경매장에서 화조 깃털을 입찰했던 남자.
‘아니, 이제 화조 깃털인지도 모르겠네.’
마이클은 오만상을 찡그리며 눈 속에 파묻혀 있었다. 팔뚝에 돋아 있는 닭살을 보니 더럽게 추워 보였다.
헬레나와 함께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놈이 원흉은 아니겠지?”
“글쎄요. 이자의 아비는 저도 아는 상인이에요. 이런 일을 벌일만한 사람은 아니에요. 애초에 능력도 없을 테구요.”
“일어나면 물어보자. 그리고··· 이건 어쩌지?”
사실 진정한 원인은 이것으로 추정됐다.
거친 눈보라에도 불구하고 타오르고 있는 손바닥만한 깃털. 이곳에서 발견한 두 번째 존재였다.
새하얀 세상에서 유일하게 붉은색을 띠고 있었다.
혹시 몰라서 만지진 않고 그저 가만히 관찰했다. 아까 전에 느껴지던 그 초월적인 존재감은 사라지고 없었다.
“헬레나 손 좀 줄래?”
“네, 네..?!”
“이것 좀 살펴보게. 혹시 또 전송될지도 모르니까.”
“아.. 그, 그러네요. 헤어지면 곤란하니까···.”
날씨탓에 얼음장처럼 차가워진 그녀의 손바닥을 꽉 쥐었다.
그리고 반대쪽 손에 혼원기와 항마력을 둘렀다.
바닥에 놓인 깃털을 자세히 살폈다. 불타고 있는데도 열기가 약했다. 은은한 온기만 느껴질 뿐이었다.
긴장한 채 손을 댔으나 전송되진 않았다.
- ···오라.
먼 곳에서 메아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희미한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
항마력을 조금씩 줄이자 들려오는 소리가 점점 선명해졌다. 새벽녘에 들려오는 새소리 같았다.
-이리로 오라···. 이리로 오라···.
깃털은 그 말만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었다. 마치 고장 난 라디오처럼.
*
눈보라가 점점 심해졌다.
마력으로 냉기를 차단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특히 이곳은 마력 회복 속도가 엄청나게 느렸다.
휘이이잉!
거친 바람 소리 때문에 말소리도 잘 들리지 않았다. 바로 옆에 있는데도 고함치듯 말해야 했다.
“시우님! 잠시만요!”
헬레나는 제손에 채워진 팔찌를 만지작거리더니 인상을 썼다.
“···안 돼요!”
“응?! 뭐가!”
“아공간이 안 돼요!”
그녀는 미간을 좁힌 채 팔찌를 툭툭 치고 있었다. 그녀가 가진 아공간 아티팩트였다.
‘안 된다고..?’
반사적으로 인벤토리에서 에너지바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이건 멀쩡하네.’
인벤토리만 멀쩡해도 굶어 죽을 걱정은 없다.
“하아..”
헬레나는 추운지 손바닥에 입김을 불고 있었다.
그녀의 복장은 청바지와 흰 반팔. 보는 그가 더 추워지는 기분이었다.
사방에서 몰아치는 눈보라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복장. 애초에 여름용 옷이니까 어쩔 수 없었다.
“하으..”
추운지 몸을 부르르 떠는 헬레나가 보였다. 곧바로 롱패딩을 하나 꺼내 주려다 멈칫했다.
‘잠깐···.’
성인 남녀가 추운곳에 조난당했을 때 할 일이 떠올랐다.
휘이이잉!
“으으.. 점점 더 추워지네요···!”
“흠흠! 그러게..!”
헬레나를 보며 표정 관리를 했다. 그렇다. 남녀가 추운곳에 있으면 할 일은 하나뿐이다.
‘체온관리!’
그녀의 입이 작게 벌어지고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귀에 내공을 두르며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헬레나가 기어들어가듯 작게 속삭였다.
“너, 너무 추워서.. 어, 어쩔 수 없네요.”
*
*
*
헬레나가 어느새 땅굴 하나를 완성했다.
‘망할. 손재주도 좋지···.’
1미터가량 눈 속에 파고들어온 것만으로 훈훈한 공기가 맴돌았다. 벽에다 무슨 짓을 한 건지 꽤나 튼튼해 보였다.
이 정도라면 체온을 유지하는 것이 가능했다.
헬레나가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이 만든 땅굴을 둘러봤다.
“흐흥..”
똑바로 설수는 없지만 앉아 있기는 딱 좋은 높이. 네 다섯 명이 누워서 쉴 수 있는 넓이의 쉘터가 완성됐다.
“시우님. 조금만 쉬다가 주변을 둘러봐요.”
“에휴.. 그래.”
헬레나가 조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어디 불편하세요? 더 넓게 만들까요?”
“아냐 충분해. 이 정도면 너무··· 넓어.”
그렇다. 너무 넓어서 문제였다.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마이클은 바닥에 던져뒀다.
‘각성자니 죽지는 않겠지.’
시우는 월광초를 먹고 음양지체 가호를 얻었다. 덕분에 냉기저항이 있어서 딱히 춥지는 않았다.
“마, 맞아요. 너무 넓죠. 이, 이런 곳에서는 체온이 가장 중요하거든요···.”
“응?”
“그, 그러니까 우리 조, 조금만 가까이 앉아요.”
그런 기특한 소리를 헬레나가 하다니. 당연히 환영이었다. 옆구리가 닿을 만큼 바짝 붙었다.
“이렇게?”
“이, 이건 너무 가까워요!”
헬레나가 은근슬쩍 밀어내는 바람에 10cm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아니, 이게 무슨 체온유지야.’
체온이 낭비되는 너무나 괘씸한 거리였다. 감질났다. 당장에라도 껴안고 싶었다.
“으으.. 추, 추워···”
바닥에 널브러진 누군가가 중얼거리는 말이 들렸지만 그도 헬레나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서로의 눈치를 보며 미묘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을 뿐.
***
시간이 흐르면서 기온은 점점 더 낮아졌다.
자신의 팔뚝을 쓰다듬고 있는 헬레나를 보니 조금 미안해졌다.
시우는 마지막 시도를 해 보고 안 되면 그냥 패딩하나 꺼내주기로 마음먹었다.
“헬레나 이거 받아.”
“네..?”
훌렁.
입고 있던 재킷 하나를 벗어줬다.
“어어..?”
“나는 추위를 별로 안 타. 괜찮아.”
거짓말은 아니었다. 이 얼음장 같은 추위도 그저 시원한 공기로 느껴질 뿐이었으니까.
혼원기와 음양지체의 시너지는 대단했다.
“아, 안 돼요! 마력으로 버티다간 얼마 못 갈 거예요.”
“괜찮다니까.”
“핫..?!”
거부하는 헬레나에게 억지로 재킷을 덮어줬다. 그녀가 만약 이것까지 버틴다면 어쩔 수 없었다. 포기하고 패딩을 꺼낼 수밖에.
5분이 더 흘렀다.
추위때문인지 부끄러움 때문인지 헬레나의 뺨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안 추우세요..?”
“으음··· 괜찮아.”
개미기어가듯 그녀에게 접근해서 5cm까지 좁히는 데 성공했다.
더 이상 밀어내진 않았지만 가까이 갈수록 그녀의 움찔거림이 커졌다.
영 감질나는 거리를 유지하니 조금 답답했다. 모른 척하고 확 달라붙을까 고민하던 그때.
눈이 번쩍 뜨이는 말이 들렸다.
“어, 어쩔 수 없네요. 이, 이리 오세요. 제가 안아드릴 테니까.”
그녀의 말과 함께 등에 포근한 무언가가 닿았다. 말랑하고 황홀한 감촉이 이어졌다.
“도, 돌아보진 마세요···. 따뜻하신가요..?”
“어... 너무 따뜻해.”
개수작이 드디어 성공했다. 너무나 바람직한 체온교환이 이루어졌다. 억만금을 줘도 바꾸지 않을 천상의 감촉.
등에서부터 퍼져가는 부드러운 온기가 너무나 좋았다.
‘크으..’
어쩌다 이곳에 전송된 건지 모르겠지만 나쁜 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헬레나와 전송된 것은 행운이었다.
등에 감각을 집중시켜 뭉클한 그것을 음미하던 그때.
“아..”
헬레나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쉬움이 가득 담겨 있는 숨소리와 함께 그녀의 살결이 멀어졌다.
“끄응···.”
대충 던져놨던 마이클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뭐, 뭐야..! 여긴 어디야!! 헉?! 헤, 헬레나 공녀님!?”
마이클은 한참 동안 호들갑을 떨어댔다. 그러던 녀석이 몸을 덜덜 떨더니 이쪽을 봤다.
시우와 헬레나는 딱 붙어 있진 않았지만 나름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으으.. 너, 너무 추운데.. 조, 조금만 도와주시면···.”
“뭐..?”
시우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헬레나의 차가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하아.. 바닥에 있는 그 깃털이나 쓰시면 되잖아요.”
“아..? 가, 감사합니다!”
마이클이 허겁지겁 불타고 있는 깃털을 집어 들었다.
“그래. 딱 봐도 따뜻해 보이.. 응?”
순간 뭔가 이상했다.
헬레나를 살펴보니 뚱한 표정으로 마이클을 노려보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화나보였다.
방금 전까지 그를 껴안고 있던 그녀가 저 깃털에 대해 알고 있었는지 격렬하게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