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 속으로 들어간다-111화 (111/241)

Chapter 111 - 111화 - 아카데미(9)

111화 - 아카데미(9)

시우의 목덜미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뒤질 뻔했네.’

길가다 벼락 맞은 것처럼. 한순간에 재수 없이 죽을 뻔했다.

반사적으로 펼친 행운유수가 아니었다면 이미 죽었을 것이다.

문이 진동하면서 터져 나온 진홍빛 화염.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화끈거리는 손바닥을 식히듯 털어내고 앞을 경계했다.

거대한 문은 이미 열렸다. 아니 녹아내렸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었다.

문너머는 고요했다. 뜨거운 공기만이 잔잔하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마치 폭탄이 터진 이후처럼 조용한 열기만 가득했다.

그곳을 경계하다가 헬레나를 데리고 뒤로 물러났다.

“후우···”

전신 기혈이 화끈거렸다. 스쳐 지나간 것만으로 바위를 녹여 버리는 엄청난 고온을 흘려내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죽음이 목덜미를 핥고 지나간 느낌이었다.

다시 해 보라면 못할 것이다.

몸 안에 남아 있는 잔열을 손가락에 모아 튕겼다. 그것만으로 바닥이 녹아내리며 구멍이 뚫렸다.

‘···이게 탄지공인가?’

응축되어 터져 나가려는 불꽃을 버렸을 뿐인데 제법 위력적이었다. 나중에 차분히 연구해 보기로 했다.

“아···.”

헬레나가 입을 작게 벌리며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녀답지 않게 혼이 빠져나간 듯한 표정.

그녀의 볼을 살짝 쓰다듬는데도 움찔거릴 뿐이었다. 아직도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헬레나 괜찮아?”

“아.. 괜..찮아요..”

문 쪽을 경계하며 헬레나를 살폈다.

그녀의 눈동자에서 이전에 보이지 않던 감정이 일렁이고 있었다.

‘아깝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그녀에게서 느껴지던 벽이 엄청나게 약해졌다.

상황만 허락했다면 당장에라도 키스를 박아줬을 텐데.

억지로 마음을 가라앉히며 내공을 끌어올렸다.

“헬레나. 정신 차려.”

“아..”

멍한 표정이던 헬레나는 호흡 몇 번 만에 맑은 눈동자를 보였다.

그녀도 안쪽을 경계하면서 미간을 찡그렸다.

“방금 그 불꽃.. 본 기억이 있어요. 마치 불의 재앙···. 하지만 그건···.”

“미래 일이야?”

“네.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었던 재앙이에요. 그런데 조금 달라요. 방금 불꽃엔 아무런 의지도 없었어요.”

“의지..가 없긴 했지.”

엄청난 기운에도 불구하고 담겨 있는 의지란 아무것도 없었다. 말 그대로 자연현상 같았다.

단순한 에너지 덩어리.

그 강대한 화염에 의지가 담겼다면 행운유수고 뭐고 그냥 죽었을 것이다.

녹아버린 문은 어느새 식어 버렸다. 밀려났던 한기가 천장의 구멍을 통해 매섭게 들어오고 있었다.

마치 진군하는 군대같았다. 오히려 저쪽이 의지가 담겨 있었다. 마치 열기를 적대하는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하니 눈보라가 점점 심해졌던 것은 들고 있던 깃털 때문이 아닌가 의심됐다.

하지만 지금 와선 의미 없는 일.

스릉.

인벤토리에서 검까지 빼 들었다. 집중력을 끌어올리며 문 안쪽을 노려봤다.

균열이라면 보스 몬스터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움직이는 것은 없었다.

다섯평 정도 되는 조그마한 공간뿐이었다. 녹아내리고 식은 것이 반복된 듯 기이한 문양이 벽에 가득했다.

‘알?’

그곳에 존재하는 것이라곤 노란색과 붉은색이 뒤섞인 알이 전부였다.

방 안에 있던 열기가 모이더니 알 위에 환영이 맺히기 시작했다.

모여드는 기운에 따라 점점 더 선명해졌다. 화려한 깃털을 가진 새가 조용히 앉아 그들을 바라봤다.

공작새와 독수리가 합쳐진 듯한 외형이었다.

불타고 있는 것도 아닌데 깃털 하나하나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신비스러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어디선가 본 기억이 났다. 실제로 본 것은 아니고 아카데미 교재에서 봤던 모습이었다.

‘봉황..?’

사진으로 봤을 때는 어지간한 빌딩보다 컸었다. 그 봉황을 축소해 놓은 듯 빼닮은 외형이었다.

-드디어··· 왔구나.

깃털에서 들리던 것과 같은 목소리. 다른 점은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것이아니라 귀를 통해 들려오고 있었다.

목소리에 담긴 적의는 없었다. 오히려 미약한 호의와 반가움이 느껴졌다. 하지만 긴장을 풀 수는 없는 노릇.

‘사일(射日)까지 사용하면···. 모르겠군.’

애초에 전력을 다해서 이기지 못할 존재라면 이제 와서 도망가 봤자 늦었다. 최악의 순간이 오면 다른 세상에서 강해지고 돌아와야 했다.

휘이이잉!!

바깥에서 불어닥친 눈보라가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마치 저 새를 적대하듯.

자세히 살폈지만 환영에서 느껴지는 힘은 거의 없었다. 그래도 방심할 수는 없었다.

헬레나 앞을 가로막으며 긴장했다.

서울에서 이곳까지 강제로 공간 이동시킨 초월적인 존재. 아마도 이 새가 범인 같았다.

아직까진 호의적인 태도였다. 마력도 회복시킬겸 대화부터 하기로 했다.

“당신..이 우리를 이곳으로 부른겁니까?”

-그래. 마지막 발버둥이었지. 반만 성공했구나. 그대들을 해할 생각은 없으니 적의를 거두거라.

“···방금 전에 죽을 뻔했습니다만?”

긴장에도 무색하게 환영은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이곳에 가득하던 열기. 그것은 내게서 새어 나온 티끌이 쌓인 것. 나로서도 어쩔 수 없었느니라. 그리고 그대의 권능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없었을 일.

“권능..?”

-마력을 거부하는 그 기이한 힘 때문에 전이가 뒤틀렸다.

생각해 보니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깃털을 향해 항마력을 퍼부었던 기억이 있었다.

“그래서··· 우릴 부른 이유가 뭡니까?”

-부탁할 것이 있어 남은 힘을 끌어모아 불렀다. 애초에 저 아이만 부른 것이지만. 이제 보니 그대도 자격이 있구나···.

“자격..?”

봉황이 헬레나를 보더니 말했다.

-망각의 축복이 흐려져 있는 불쌍한 아이. 그 덕에 내겐 희망이 되었구나.

무슨 말인지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헬레나가 옆에서 입을 열었다.

“잠시만요! 설마 시우님. 아니, 이분도 그 망각의 축복이란 게 흐려져 있는 건가요?”

-글쎄.. 비슷하지만 다르군. 내게도 정확히 보이지 않는다.

무언가 고민하던 헬레나가 말을 이었다.

“···이제 보니 설산 자체가 당신을 봉인하기 위한 것 같은데요.”

혹시 세상에 해악을 끼치다가 봉인된 것이라면 위험한 존재였다.

-애초에 나는 그대, 인간들을 위해 스스로 봉인된 것···. 나로서는 힘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 했을 뿐이다.

깃털 하나로 전이를 일으키는 존재가 당했다니 믿기지 않았다.

“도대체 누가..?”

-그는 자신을 사도라고 부르더군.

“사도..?”

헬레나의 표정이 확 굳었다.

-이대로라면 내 의지는 사라지고 힘만 남을 것이다. 그건 재앙이 될 테지. 나를 돕는 것이 그대들 스스로를 돕는 것이다.

부탁이 뭔지 알아야 들어줄지 말지 고민이라도 해볼 것이다. 시우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 치고. 부탁이 뭡니까?”

-나의 아이를 키워다오.

“설마.. 그 알을 말하는 겁니까.”

-그래. 나의 아이이자 분신.

투두둑.

천장을 통해 눈보라가 들어오다가 막혔다. 마치 장막이라도 있는 것처럼 방 안으론 들어오지 못했다.

녹아내렸던 철문이 눈을 막듯 재생되고 있었다.

‘저게 봉인인가.’

봉인인 동시에 열기를 지키는 방패 같았다.

암석도 녹이던 잔열이 겨우 눈송이에 닿았다고 순식간에 식어 버렸다. 마치 눈에게 잡아먹히는 것 같았다.

-아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환영의 목소리에서 피로감이 확 늘었다. 처음에 비해 엄청나게 흐려져 있었다. 당장에라도 사라질 것처럼.

물어볼게 많이 남아 있었는데 이대로 사라져 버릴 기세였다.

온갖 질문들이 머릿속을 떠돌았다.

먼저 중요한 것부터 물었다.

“이곳에서 빠져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 곧 자연히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조금 안심됐다. 저 존재와 말하는 순간부터 거짓간파를 사용 중이다. 있어 보이는 존재지만 혹시 모른다.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환영은 당장에라도 사라질듯 깜박거렸다. 아마도 다음이 마지막 질문이 될 것이다.

질문을 고르다가 엄청나게 중요한 것이 떠올랐다.

봉황급 영물이면 인간으로 폴리모프도 가능할 것이다.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얘는 수컷입니까 암컷입니까?”

새의 환영에서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아니, 새주제에 표정이···’

봉황은 아예 질문을 무시하고 마지막 말을 남겼다.

-인간은 항상 보상을 바라지···. 이 아이를 키우는 것 자체가 보상이 될 것이다. 그래도 안 된다면 어쩔 수 없는 일. 그것이 운명일뿐···

환영은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와 동시에 알이 쩌적거리며 갈라지기 시작했다. 이제야 긴장이 조금 풀렸다.

왠지 뜨끔한 기분에 옆을 돌아봤다.

헬레나가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평소와는 조금 다른 미소.

“암컷..? 그건 왜 물어보신 거예요?”

입이 멋대로 내뱉은 말을 주워 담고 싶었다.

사실 봉황급 영물이면 인간화도 가능할 것 같았다. 가까스로 머리를 굴려 적당한 변명을 떠올렸다.

“···만약 키우려면 이름은 지어 줘야지. 그러려면 성별은 알아야 하지 않겠어?”

“흐음.. 그러네요.”

헬레나의 미소가 다시 돌아왔다. 변명이 먹힌건지 봐준 건지 모르겠다. 절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쩌적거리는 소리가 끝나며 알이 쪼개졌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