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20 - 120화 - 아카데미(18)
120화 - 아카데미(18)
디아나가 차가운 물로 세수하며 화끈거리는 얼굴을 식혔다.
거울을 보니 붉어진 얼굴의 자신이 보였다.
남편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딸과 동갑인 남자에게 안겨 앙앙댔다. 미약 때문이라지만 용납하기 힘든 기억이었다.
사실 정말로 미약 때문만이라면 변명거리가 있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미약 때문인지 아닌지 불분명했다. 그저 달콤하고 끈적거리는 쾌락에 휩쓸려 교성을 흘려댔다.
“하아..”
얼굴을 들 수 없을 만큼 민망하고 부끄러운 일이었다.
입술을 깨물었다. 고기 막대기에 찔려 바보처럼 헤실거리던 기억이 자꾸만 떠올랐다.
특히 남편과의 경험에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강렬한 절정은 도저히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으음..”
아랫배 안에 있는 소중한 것이 두들겨질 때마다 뇌가 녹아버리는 듯한 쾌감이 느껴졌었다.
말 그대로 눈앞이 새하얘지는 기분. 그녀는 성교란 것이 그렇게 기분 좋은 것인지 처음 알았다.
차가운 물로 씻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읏..”
생각만으로 허벅지 사이에서 무언가 흘러내렸다. 남편과의 다정한 행위와는 전혀 다른 원초적인 쾌락···.
짝!
‘미, 미쳤어..!’
저도 모르게 드는 못된 생각에 화들짝 놀랐다. 제 뺨을 후려치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저 사고였을 뿐이다.
“하아.. 그래. 사고였어.”
*
쾅쾅쾅!
평소 로튼과 친하던 상인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라피스 공방 문을 거칠게 두드리며 소리쳤다.
“디아나! 로튼씨를 신고했다는 게 정말이야?! 도대체 무슨 일인데!”
“로튼씨가 뭘 잘못했다고!”
“남편도 잡아먹더니 그 친구까지! 어휴.. 예쁜 년들은 얼굴값을 한다니까.”
디아나는 귓가에 들려오는 소리에 손끝이 바들바들 떨렸다. 속에서부터 차오르는 분노 때문이었다.
제대로 된 사정도 모르면서 그녀를 욕하고 있었다.
그들은 누가 피해자고 가해자인지는 관심 없었다. 그저 이익을 보장해주던 우두머리가 잡혀간 것이 중요했다.
“디아나! 말 좀 해 봐!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다행인지 불행인지 어제의 일이 퍼지진 않았다.
상인들은 그저 로튼이 잡혀갔다는 소식만으로 저렇게 발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냥 잡혀간 것도 아니고 온갖 흉악범들이 모여 있는 광산에 들어갔다는 소문이 돌았다.
한 번 들어가면 평생 나올 수 없는 곳. 죽을 때까지 마정석만 캐야하는 극악한 감옥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저들의 행동은 비정상적이었다. 디아나는 분노를 넘어 허탈할 지경이었다.
‘최악이야···.’
연금거리 전체가 한통속이었다.
카르텔에 끼지 못한 자들에게 온갖 수작을 부린다는 소문은 사실이었다. 연금 재료 수급을 방해하는 건 당연했고 암암리에 헛소문도 퍼뜨렸다.
-저 가게는 쓰레기 재료만 써. 그래서 저렇게 싼 거야. 저 가격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거든. 저런 건 언제 고장날지 몰라.
다행인지 불행인지 디아나는 그 정도로 견제받진 않았다.
“로튼씨만 아니었으면 넌 이미 망했어! 은혜도 모르고 감히 신고를 해! 도대체 로튼씨가 뭘 어쨌길래! 그거나 말해 봐!”
디아나는 짜증과 피로감을 담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자신을 덮치려 한 놈에게 은혜라니. 가슴이 콱 막힌 듯 답답해졌다.
“그냥 떠날까···.”
남편의 꿈이었던 연금거리의 실상이 이랬다니. 약간 슬퍼지는 기분이었다.
“비켜 주십시오. 공무 집행 중입니다.”
누군가 상인들을 밀치며 다가왔다. 라피스 공방 앞에 모여 있던 상인들이 밀려났다.
“어어..? 뭐, 뭐야!”
“디아나씨? 저는 행정관입니다. 잠시 나와주시겠습니까?”
확연히 어두워진 얼굴의 디아나가 나왔다. 행정관이 그녀를 힐끗 보더니 서류를 펄럭이며 목을 가다듬었다.
“흠흠..! 먼저 로튼이란 자가 저지른 범죄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현재까지 밝혀진 것은 총 13종으로 불법 담합, 폭행, 사기, 살인교사, ······, 납치. 그리고 디아나씨의 남편인 프랭크씨의 독살미수까지···”
행정관이 왜 굳이 직접 찾아왔을까. 의아함도 잠깐이었다. 멍한 눈으로 그의 말을 듣던 디아나가 끼어들었다.
“뭐, 뭐라구요? 독살미수..?”
“예. 디아나님. 송구스럽습니다만··· 남편분께서 쓰러지신 이유가 로튼 때문이었습니다. 이미 증거까지 확보했습니다.”
“아아..”
정신이 아찔해졌다. 남편이 쓰러진 이유가 그 자식 때문이라니. 그런 줄도 모르고 가끔 도와줄 땐 고마운 마음마저 들었다.
끼어들기 위해 기회를 엿보던 상인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로튼의 범죄 이력이 상상 이상이었다.
서로를 보며 눈치를 살폈다. 그들 중 태반이 잡혀들어갈 것 같았다. 어쩌면 전쟁터로 끌려갈지도 몰랐다.
“그리고 회수된 로튼 재산의 인수자가 북부대공녀 헬레나십니다. 그분께서 임명한 관리자가 바로 디아나씨입니다만···.”
그 말에 지금까지 디아나를 욕하던 상인들의 얼굴이 헬쑥해졌다. 아마도 행정관은 이 말을 하기 위해 직접 찾아온 것 같았다.
거리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방금까지 욕하던 디아나라니. 하늘이 노래지는 기분이었다.
그나마 눈치 빠른 상인들이 앞다퉈 달려들었다.
“디, 디아나! 정말 다행이야. 그 몹쓸 놈이 도대체 얼마나 괴롭혔는지.. 내가 다 미안하더라구.”
“마, 맞아..! 매일 어디 가는지 감시하라 시키고 말이야. 정말 미안해!”
허탈한 얼굴로 허공을 보던 디아나가 미간을 찡그렸다.
“뭐라구요..? 감시?”
“어어.. 모, 몰랐어..? 그, 그게.. 그놈이 시켜서 어쩔 수 없었어..! 나만 한 거 아니야!”
그들을 보던 행정관이 말을 이었다.
“디아나씨께서 원하신다면 언제든지 북부방벽으로 오라는 말을 전달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고민 좀 해볼게요.”
사실 이런 곳에 더 이상 있고 싶진 않았다. 남편의 꿈이었던 연금거리는 생각보다 끔찍했다.
***
시우가 바닥에 그려진 기하학적인 문양의 마법진을 보며 디아나를 떠올렸다.
‘음.. 다음에 볼일 있을 때 찾아가면 되겠지.’
아무리 미약에 취했다지만 유부녀가 외간 남자에게 안겨 앙앙댔다. 진정할 시간도 줄 겸 다음에 찾아가기로 했다.
방바닥에서 푸른색 빛을 내는 마법진을 보다가 내공을 불어넣었다.
번쩍.
‘오..’
주변 풍경이 한순간에 바뀌었다. 절로 만족스러운 미소가 흘러나왔다. 어느새 기숙사 방으로 텔레포트 된 것이다.
‘엄청 편하네.’
신비스러운 문양이 새겨진 도장을 만지작거렸다.
디아나가 완성한 아티팩트였다. 정식 이름은 휴대용 공간 전이 환경 구축 장치.
하지만 그냥 워프 도장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시험 삼아 아멜리아의 방과 그의 기숙사 방에 마법진을 찍어서 사용해 봤는데 잘 작동했다.
이 워프 도장의 기능은 단순했지만 강력했다.
먼저 도장찍듯 손쉽게 텔레포트 마법진을 설치할 수 있었다. 물론 설치하는 것이 공짜는 아니다. 공간의 힘이 서린 재료가 소모됐다.
‘푸딩의 깃털이면 되니까···.’
이미 설치된 마법진끼리 이동하는 건 깃털이 소모 되지 않는다. 마력만 있으면 된다.
정리하면 새로운 워프 장소를 추가하는 것은 푸딩의 깃털이 소모되고, 이미 지정된 장소를 이동하는 건 마력만 있으면 된다.
남아 있는 푸딩의 깃털을 꺼냈다.
‘하나, 둘··· 다섯장 남았네.’
물론 다른 공간소재도 이용할 수 있다. 하지만 그때마다 도장에 추가작업을 해야 한다고 들었다.
그래서 그냥 푸딩의 깃털만 사용하기로 했다. 어차피 깃털은 계속 나오니까.
푸딩은 푹신한 방석을 집안 곳곳에 놔뒀더니 더 이상 깃털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둥지를 만들려고 했던 것 같았다.
‘청봉현이랑··· 목이도가 남긴 쪽방에 하나씩 설치하면 남은 깃털은 세 장인가.’
목표로 했던 텔레포트 마법진을 얻었다.
*
시우가 거실로 나오니 방울 소리가 들렸다.
딸랑.
푸딩과 아멜리아가 바닥에서 뒹굴거리고 있었다. 그녀가 작은 방울이 연결된 막대기를 흔들면 그 뒤를 푸딩이 졸졸 따라다녔다.
“웅?!”
기척을 내자 그녀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곧바로 뛰듯이 다가와 안겨들었다.
아멜리아가 체온을 즐기듯 말랑말랑한 볼살을 비비적거렸다. 기분 좋은 듯 헤실거리며 그를 올려다봤다.
“후웅..! 시우 왔어?”
“응. 아멜리아 뭐 하고 있었어?”
“헤헤. 푸딩이랑 놀아주고 있었어!”
푸딩은 방석을 향해 힘없이 걸어가더니 털썩 쓰러졌다.
-삐이잇..
마치 아멜리아와 놀아주다 지친 것 같았다. 방석에 쓰러지듯 누운 녀석이 작게 삑삑거렸다.
“하하. 그래? 잘했네.”
“응!”
아멜리아의 기운을 살폈다. 그녀의 성장이 가팔랐다. 4성 초반에서 벌써 5성 직전까지 성장했다.
혼원기와 푸딩의 시너지 덕분이었다.
‘생각보다 더 뛰어나.’
그의 혼원기도 한층 정순해졌다. 앞으로 관계하는 여자들의 성장이 빨라질 것은 당연했다.
게다가 정순해진 혼원기를 받아먹은 푸딩은 더 정순한 혼원기를 내뿜었다. 말 그대로 서로의 성장을 끌어내는 중이었다.
‘기특하네.’
푸딩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살살 쓰다듬어줬다.
기분 좋은 듯 손가락에 부리를 비벼대던 녀석의 머리가 점점 느려졌다.
졸린 듯 꾸벅거리던 푸딩이 방석 속으로 파고들었다. 어느새 잠든 것이다.
*
시우가 훈련장에서 눈을 감고 가부좌를 틀었다.
행운유수.
설산에서 목숨이 위험했던 순간에 느꼈던 감각이 아직도 아른거렸다.
그대로 사라질 줄 알았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더 선명해졌다. 호흡에 집중하면서 기억을 더듬었다.
잘하면 한 단계 더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