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23 - 123화 - 아카데미(21)
123화 - 아카데미(21)
노인이 손끝을 벌벌 떨면서 중얼거렸다.
“아.. 안 돼..! 이, 이럴게 아니라. 빨리 나가야..!”
“조금 진정하시고. 저기요?”
“어, 어서 나가야 돼.. 아니.. 이게 꾸, 꿈은 아니겠지? 흐으.. 그냥 죽는 게..”
최대한 달래봤지만 다시 정신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창백해진 얼굴로 온몸을 덜덜 떨어댔다.
치이익..!
“크윽..!”
노인의 주름진 어깨에 정체불명의 액체가 한 방울 떨어졌다.
묶여 있는 것도 아닌데 의자에서 일어나질 않았다. 액체가 닿을 때마다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그랬다.
그저 불안한 얼굴로 횡설수설할 뿐이었다.
“이, 이러다 괴, 괴물년이..! 차, 차라리 죽여 줘.. 으으!”
몇 명의 사람들을 더 풀어줬지만 하나같이 똑같았다. 죽여달라고 소리치거나 미친 것처럼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일단 사람들을 억지로 의자에서 끄집어내 바닥에 앉혀놨다.
“으으..”
“안 돼애···”
하나같이 제정신이 아니니 질문에 대답도 제대로 못했다.
‘답답하네.’
그들이 품을 뒤져 봤다. 노인의 품 안에서 지갑이 튀어나왔다. 신분증을 살펴보고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스물두 살이라고..?’
아까 최초로 치료해줬던 노인의 신분증이었다. 앳된 청년의 사진이 붙어 있었는데 노인의 얼굴과 얼핏 닮은 느낌이 났다.
동일 인물인 것이다.
‘음..’
20대 청년이 노인이 되려면 도대체 무슨 짓을 당해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끼익..
문이 열리고 여성 특유의 고음이 들렸다.
“마음에 들어? 그게 네 미래인데.”
지옥 같은 장소에 어울리지 않게 맑고 고운 목소리였다. 그녀는 깃털을 들고 사라졌던 메이드였다.
그녀가 박수를 짝짝 치며 말했다.
“모두 벌 받기 싫으면 당장 자리로 돌아가. 안 그러면 또 혼난다?”
“히, 히이익!!”
의자에서 억지로 끄집어냈던 사람들이 화들짝 놀랐다. 말이 끝나자마자 멀쩡하지도 않은 몸으로 기어가듯 제자리로 돌아갔다.
*
먹이들의 잘 교육된 모습에 흡족한 미소를 짓던 메이드가 눈가를 좁혔다.
아마도 마법진에 홀려 이곳에 들어왔을 남자가 아직도 가만히 서 있었다.
“이번 가축은 조금 이상하네..? 왜 가만히 있을까? 저기 빈자리 있잖아?”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까부터 매료의 힘을 뿌려대고 있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심장이라도 꺼내 바칠 정도로 그녀의 말에 복종할 텐데.
몸 안에 담아 뒀던 피를 소모해서 매료의 힘을 더욱 끌어올렸다.
“흐응.. 오빠··· 피곤하지 않아? 여기서 조금 쉬다 갈래..?”
그녀는 가슴팍을 가린 옷을 살짝 들춰냈다. 우윳빛 피부가 은근하게 드러났다. 이 육체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이 바로 새하얀 피부였다.
방긋방긋 웃으며 은근히 속살을 드러내던 그녀가 눈살을 찌푸렸다.
남자는 그저 가만히 그녀를 보고 있었다.
“응? 뭐 하는 거야? 착하지..?”
가장 윗단추를 풀어 예쁜 윗가슴을 드러낸 그 순간.
“절벽이잖아···.”
무언가 실망한 듯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너무나 어이없는 소리에 표정 관리에 실패했다.
“뭐..?”
뻣뻣하게 굳은 입매를 억지로 올리려던 그 순간. 남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건 됐고. 너 사도 개새끼 해 봐.”
앞뒤 맥락도 없는 소리에 메이드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저도 모르게 머릿속으로 한 남자가 떠올랐다. 무심한 눈길로 그녀를 볼 때마다 소름이 돋는 존재.
그 모습을 연상하는 것만으로 손끝이 살짝 떨렸다.
그것을 물끄러미 보던 남자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알고 있네? 사도.”
*
시우가 새하얀 얼굴의 메이드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사도라는 단어가 나온 순간부터 이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동공이 커지고 손끝이 잘게 떨렸다.
모른다면 나올 수 없는 반응이었다.
“알고 있네? 사도.”
인형처럼 어색하게 웃고 있던 메이드의 미소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얼음장처럼 차갑게 변하며 목소리도 낮아졌다.
“하아.. 무슨 소린지.. 그게 누군데?”
애초에 이 메이드는 표정도 어딘가 어색했다. 어설프게 인간의 행동을 흉내 내는 것 같아 묘하게 불쾌했다.
“누구? 혹시 사도가 사람이야?”
메이드는 말없이 이쪽을 노려봤다. 그것이 곧 대답이나 다름없었다.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려대는 사람들을 보다가 말했다.
“도대체 이런 짓은 왜 하는 거야?”
피를 뽑는다. 그건 대충 예상이 갔다. 인간의 피란 여기저기 쓸데가 많으니까. 뱀파이어 같은 종족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일부러 고통까지 주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고문이란 상당히 피곤한 행동이었다. 저렇게 자동화 장치까지 이용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어지간히 원한 있지 않은 이상 할 수 없는 행위. 하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야 당연히 아버지를 위해서지.”
“아버지?”
메이드의 눈동자가 점점 빨간색으로 변했다. 한동안 그를 보던 메이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대체 어떻게 멀쩡한 거지..?”
메이드가 붉은 눈동자를 옆으로 돌렸다. 바들바들떨면서 고문의자에 앉아 있던 남자에게 향했다.
“흐헤? 흐헤헤!!”
시선을 받은 남자가 괴상하게 웃으며 제 허벅지 살을 손톱으로 후벼 팠다.
“잘되는데..?”
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광경이었다. 이제는 저 여자가 메이드 형태를 한 인외의 존재로 보였다.
생판 남이라지만 인간이 장난감 취급받는 걸 보는 게 썩 유쾌하진 않았다.
작게 혀를 차며 물었다.
“아버지가 누군데? 걔가 사도야?”
불쾌한 말을 들었다는 듯 메이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처음으로 보는 진심이 담긴 표정이었다.
“인간 따위가 건방지게···.”
메이드가 뚜벅뚜벅 걸어왔다. 겉으로 보기엔 내공 한 줌 없는 일반인으로 보였으나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몸의 긴장을 풀고 이완시켰다. 과한 긴장은 대응속도를 느리게할 뿐이니까.
세발자국. 그의 경지라면 눈 한번 깜박할 사이에 상대의 목을 취할 수 있는 거리였다.
“그냥 죽어.”
메이드의 입이 열린 그 순간.
뒤통수가 저릿한 느낌에 곧바로 머리를 옆으로 틀었다.
촤악!
말 그대로 찰나만에 그녀의 손이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어느새 그녀의 다리는 통나무처럼 부풀어 있었다.
얇은 다리가 굵어진 만큼 피부가 멀쩡할 순 없었다. 찢어진 피부 사이로 새빨간 힘줄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두꺼워진 다리는 인간이 아니라 오우거 다리처럼 보였다. 상체와 하체가 서로 다른 생명체인 것처럼 어울리지 않았다.
“이걸 피해?”
약간 감탄한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느끼지 못할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특히 마력이 느껴지지 않아서 더 피하기 어려웠다.
볼에서 주르륵 흘러내리는 핏방울이 느껴졌다.
“하하.”
그런데도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직감에 따라 이곳에 온 순간부터 이상하게 홀가분함을 느끼고 있었다.
항상 뒤를 걱정하느라 스스로 채워놨던 족쇄가 풀리는 기분.
아무런 이유도 없는데 직감을 믿었던 이유를 깨달았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 이제서야 진정한 절정지경에 오른 기분이었다.
온몸이 가벼워졌다.
대꾸 없이 곧바로 주먹을 뻗었다. 이 여자는 처음 본 순간부터 그냥 이상하게 마음에 안 들었다.
인간의 천적이라도 되는 것처럼 보기만 해도 불쾌했다.
‘경(輕), 파(破).’
놀란 표정으로 물러나는 그녀에게 따라붙었다. 얼굴에 잽을 치듯 툭 쳤다.
콰지직.
살짝 닿은 것에 불과한데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스며든 혼원기로 인해 메이드의 코뼈가 작살났다.
‘중(重).’
고통 때문인지 얼굴이 일그러지고 있는 메이드의 발목을 걷어찼다.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는 그녀의 목을 손날로 후려쳐 쓰러뜨렸다.
콰앙!
나무로 된 바닥이 박살 나며 건물 전체가 거세게 흔들렸다.
“크하!! 먹이따위가 감히!”
뻐억.
무방비하게 일어나려는 메이드의 얼굴을 다시 한번 발로 찼다.
처음 빠른 속도에 긴장한 것이 무색하게 너무나 어설펐다. 막 마력을 각성한 각성자들이 강해진 육체를 제어하지 못하는 것과 비슷했다.
“크르륵..”
예쁘장하던 메이드가 한순간에 거지꼴로 변했다. 뭉개진 코에서 피가 흐르고 희번뜩하게 뜨여진 눈은 시뻘갰다.
으르렁거리는 입 사이로 날카로운 송곳니가 보였다. 생김새가 점점 변했다. 이제는 인간이 아니라 짐승으로 보였다.
“이 버러지 같은 놈이..!”
목소리마저 굵어졌다. 여성이라기보다는 남성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하하. 천박하게 굴던 것보다 그게 더 잘 어울리는데?”
도발하듯 손을 까닥였다.
콰앙!
메이드의 눈에 살기가 어리고 밟고 있던 땅이 터져 나갔다.
다시 한번 중간과정이 삭제된 듯 날카로운 손톱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하지만 이미 육체는 반응하고 있었다.
무릎을 살짝 굽히고 쓰러지듯 몸을 뒤로 기울였다. 메이드의 손이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
그대로 메이드의 손목을 붙잡아 당겼다.
“흡..!?”
어설프게 균형을 유지하려는 그녀의 발등을 밟았다. 넘어지지 않으려 뒤로 힘주는 그녀를 손바닥으로 밀어 쳤다.
콰당탕!
호쾌한 소리와 함께 메이드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손바닥이 닿는 순간 침투경을 담았다. 스며든 혼원기가 상대의 내장을 조각냈다.
“캬하아악!”
이제는 성별도 알 수 없는 짐승이 괴로운 듯 괴성을 토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