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28 - 128화 - 아카데미(26)
128화 - 아카데미(26)
헬레나의 파르르 떨리는 입가를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가끔은 모른 척해야 하는 것도 있는 법이었다.
그러다 강수호 놈과 눈이 마주쳤다.
‘음..?’
턱에 힘줄이 보일 정도로 이를 악물면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직도 혼이 덜났네.’
놈의 눈동자 속에 가득 차 있는 것은 질투였다. 아직도 아멜리아를 마음에 담아 두고 있는 것이었다.
‘현아 좀 혼내야겠다.’
동생 교육을 잘못한 책임은 누나가 져야했다.
*
강수호가 주먹을 꽉 쥐었다.
저 멀리서 아멜리아가 해맑게 웃고 있는 것이 보였다.
심장이 뛰었다. 요즘 따라 아멜리아가 더욱 아름다워진 것 같았다. 길에서 조는 일이 사라지면서 안색도 좋아졌다.
원래도 아름답던 그녀에게 건강미까지 더해지자 보기만 해도 목이 타는 기분이었다.
자신 뿐만 아니라 몇몇 생도들도 그녀를 보며 침을 삼켜대고 있었다.
어째서 남자들이 여자에 목숨 거는지 지금 이순간 깨달았다.
‘망할!’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파트너인 최시우 놈에게만 향하고 있었다.
착한 아멜리아 답게 수업에 너무나 성실했다.
‘어떻게 하지···.”
마음이 조급해졌다.
아멜리아와 친해지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요즘 따라 그녀는 수업이 끝나면 곧장 기숙사로 달려갔다. 말붙일 틈도 없었다.
‘도대체 집에 뭐가 있길래.. 요즘 안 졸더니 잠이라도 자나..?’
아멜리아를 보다가 눈을 부릅떴다. 파트너인 최시우 놈이 손바닥을 마주대는 것을 넘어 손깍지까지 끼고 있었다.
‘뭐, 뭐 하는 거야!’
최시우 녀석이 수업이라는 핑계로 아멜리아를 희롱하고 있었다.
‘미, 미친..!’
순진하고 착한 아멜리아는 화도 못 냈다. 얼굴을 살짝 붉히며 어쩔 수 없이 받아주고 있었다.
“이이..!!”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당장에라도 달려들어 소리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후우..’
지금 한두 번 방해해봤자 그때 뿐이다. 최시우 놈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어떻게든 아멜리아에게 찝쩍대기 위해 작정한 눈빛이었다.
더 늦기 전에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했다.
‘그렇지!’
근본적인 해결책. 그건 자신이 먼저 아멜리아와 사귀는 것이었다.
‘···고, 고백할까..?’
사실 자신의 얼굴이라면 누구에게 고백하든 결과는 당연했다. 머릿속에 장미빛 미래가 재생됐다.
강의실 복도에 쭈욱 깔린 촛불. 그 길을 따라 아멜리아가 걸어오고···.
하트모양 촛불 가운데서 무릎을 꿇고 꽃다발을 건네는 것이다.
공개 고백.
“크으..! 이거지!”
저도 모르게 나온 감탄사가 강의실에 울려 퍼졌다. 갑자기 시선이 확 쏠렸다.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서둘러 앉으며 고개를 팍 숙였다.
그 꼴을 보던 누군가가 미간을 좁혔다.
“수호야 뭐 하는 거야? 집중해야지.”
“헛..?”
파트너 앤이었다. 그녀가 손을 꽉 쥐었다.
“윽..! 미, 미안..”
휴강 기간 동안 앤이 집요하게 연락했다.
한 번만 만나자는 그녀의 협박어린 부탁을 무시하고 피했다. 하지만 결국 수업 시간에 이렇게 마주앉게 됐다.
‘빌어먹을···’
수련성지 숲에서 그녀에게 큰소리 치는 바람에 눈도 마주치기 힘들었다.
이쪽을 빤히 보고 있는 앤이 솔직히 조금 무서웠다.
“아, 알았어.. 집중할게.”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녀의 손바닥에 마력을 흘려 넣었다.
심호흡하며 평정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수업 시간이 더럽게도 길었다.
그런 그를 무표정하게 바라보던 앤이 갑자기 입꼬리를 올렸다.
“수호야. 그동안 내가 너무 심했지?”
“어..?”
앤이 다가오더니 귓가에 속삭였다.
“생각해 보니까. 그런 영상으로 협박하는 건 좀 아닌 거 같아서. 솔직히 말하면 그냥 놀림 좀 받고 끝날 내용이잖아?”
“그, 그렇지..?”
웬 행운인가 싶었다. 영상을 우려 먹으며 귀찮게 굴던 앤이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런데··· 내 부탁 하나만 들어 주면 그 영상은 치워줄게.”
“지, 진짜..?”
솔깃했다. 앤에게 큰소리 쳤지만 진짜로 영상이 퍼지길 바란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야동보다 걸린 영상이 공개됐다간 창피해서 아카데미도 못 다닐 것이다.
그건 멋지고 쿨한 강수호 이미지에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꿀꺽.
왠지 모를 기대감에 입안이 바싹 마르는 기분이었다.
심술맞던 앤의 인상이 오늘따라 착해 보였다. 그녀가 입을 달싹였다.
“별거아냐. 수업 끝나고 같이 차나 마시자.”
“차..?”
무슨 속셈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를 관찰했으나 후덕한 살덩이 때문에 표정을 읽기 어려웠다.
“···좋아.”
*
강수호가 방을 둘러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꼭 이런 데서 마셔야겠어?”
솔직히 부담스러웠다. 카페도 아니고 앤의 방이라니.
가족이 아닌 여자의 방은 처음이었다. 그런데 첫 경험 상대가 앤이라니···.
왠지 뭔가 허탈했다.
그의 마음도 모르는지 앤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나는 내가 직접 탄 차 아니면 안 마셔.”
강수호는 속으로 혀를 찼다. 아무거나 잘 먹게 생긴 주제에 입맛이 까다로웠다. 하지만 지금 그는 압도적인 을.
살아오면서 갈고닦은 멋진 표정을 유지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앤의 취향따위가 아니었다.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 아까 말했던 거 있잖아···.”
“뭐? 영상?”
“어, 어..! 지, 지워주는 거 맞지···?”
“어머! 당연하지. 난 약속은 지켜. 그 영상은 지워줄게.”
절로 안도의 한숨이 튀어나왔다. 그동안 망할 영상 때문에 앤에게 휘둘린 것을 떠올리면 열불이 났지만 억지로 웃었다.
그것도 오늘로 끝이니까.
“고마워.”
앤이 히죽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뭘 그런 거 가지고. 나는 차 좀 타올게.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응.”
주변을 둘러봤으나 왠 커다란 곰돌이 인형 보였다. 검은색 눈알이 묘하게 반짝이는 기분이었다.
대여섯 개의 곰돌이 인형이 방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앤은 인형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나 참.. 앤도 여자라는 건가.’
미세하게 열린 방문 틈으로 차를 타는 앤의 뒷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가로와 세로가 구별가지 않았다.
성격은 둘째치더라도 저 후덕한 몸매는 도저히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기다렸지?”
“아. 괜찮아.”
드디어 차가 나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차는 아니었다. 얼음이 동동 띄워져 있는 아이스티.
좋은 일이었다. 차가운 것이라면 빠르게 마시고 자리를 끝낼 수 있었다.
이것을 마시면서 비위만 맞춰주면 앤의 마수에서 해방이었다. 홀가분한 마음마저 들었다.
그런데 앤의 미소를 보고 있으니 왠지 모르게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다.
‘설마··· 뭐 탄건 아니겠지..?’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망설임을 알아차렸는지 앤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왜 그래? 안 마실 거면 그냥 없던 일로 할까?”
“아, 아니야.. 마, 마실게.”
무표정하던 앤이 갑자기 빙그레 웃었다.
“내가 뭐라도 탔을까 봐? 바꿔서 마실까?”
솔직히 고개라도 끄덕이고 싶었으나 심기를 거스를순 없었다. 작게 헛기침하며 시선을 돌렸다.
“음.. 이러면 안심이 돼?”
아무렇지도 않게 찻잔을 바꾸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아무래도 앤을 너무 못되게 생각한 것 같았다.
“흠흠..! 앤 네 거가 더 맛있어 보이더라구.”
어설픈 변명에 앤이 피식 웃었다. 그녀가 차를 음미하듯 느긋하게 마시는 것을 보며 따라 마셨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식감의 아이스티였다. 제법이었다. 생각보다 맛있었다.
한 모금, 두 모금···
‘어..?’
목구멍 속에서 무언가 활활 타오르는 것 같았다. 갑자기 전신에 열이 올랐다.
뭔가 눈치채기도 전에 갑자기 앤이 푸웃! 하고 입에 머금고 있던 차를 뱉어냈다.
손끝이 발발 떨렸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퉤..! 흐.. 이거 엄청 독하네.. 물을 더 탈걸 그랬어.”
“애, 앤.. 이 이게에..”
너무나 더워서 입고 있는 옷을 찢어 버리고 싶었다.
갑자기 타는 듯한 갈증이 느껴졌다. 속에 있던 뜨거운 것이 숨이 되어 토해졌다.
“허으..”
“흐응.. 역시 효과 좋잖아!“
눈을 부릅뜨고 정신을 차리려 노력했지만 소용없었다.
신체 한부위에 피가 쏠려 뻣뻣하게 세워졌다.
“크으.. 아, 안 돼..!”
도저히 앤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앤이 후덕한 살집을 덮고 있는 상의를 살짝 들춰낸 그 순간.
툭. 이성이 끊겼다.
귓가에 연기투의 어색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 안 돼애 수호야..! 뭐 하는 거야! 이러지 마!”
하지만 그의 몸은 이미 통제를 잃었다.
*
*
*
“하..”
강수호는 벌려진 입에서 침이 뚝뚝 흘러내리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세상이 미웠다.
아멜리아에게 주기 위해 아껴놨던 동정이 이렇게 사라지다니.
하지만 지옥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앤이 방에 가득하던 곰 인형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머리 뒤를 찢더니 무언가 꺼내 들었다.
카메라였다.
“뭐..?”
벌어진 입이 다물어 지지가 않았다. 눈을 부릅뜨고 손을 뻗으려는데 그녀의 목소리가 막아섰다.
“어딜! 이미 클라우드에 저장 돼 있으니까. 뺏을 생각하지 마.”
귓가에 앤의 살집가득한 목소리가 환영처럼 이어졌다.
“이전 영상은 지워줄게. 이제 필요 없으니까. 수호야? 안 들려?”
“어어..”
다리에 힘이 풀렸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후우.. 안 들리나 보네. 그래도 잘 들어. 앞으로 말만 잘 들으면 오늘 영상이 퍼질 일은 없을 거야. 나는 분명히 하지 말랬는데. 억지로 했었지?”
“아···?”
“그거 다 찍혔어. 후후후..! 드디어 수호가 내 손에 들어오다니···! 너무 좋잖아! 진작 이럴걸. 괜히 꼬셔보려고 헛고생했네.”
***
얼굴이 창백해진 강수호가 힘없이 집으로 향했다.
앤이 무어라 더 말했던 것 같은데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냥 지금 당장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었다.
“하.. 인생..”
문득 고개를 들었더니 노을 진 하늘이 보였다.
오늘따라 빌어먹게도 아름다웠다. 그것을 보고 있으니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발작처럼 소리쳤다.
“아아아아악!! 악악!! 악!!”
한참을 발광하듯 소리를 질렀지만 소용없었다. 가슴이 콱 막힌 듯 답답했다.
누가 고구마도 아닌 감자를 강제로 퍼먹인 기분.
길 가던 사람들이 힐끔대는 게 느껴졌지만 지금은 그딴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하아..”
복장 터진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뼈 속 깊이 체감됐다.
바닥에 보이는 그림자가 비틀거렸다. 마치 술 취한 것처럼.
흔들리는 그림자를 보다가 발걸음을 멈췄다.
‘시발. 이건 아니지!’
핏발 선 눈으로 땅바닥을 노려보는데 유난히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벽돌.
눈을 부릅떴다. 시야가 좁아졌다. 흙먼지가 묻어 있는 붉은 벽돌이 마치 신의 계시처럼 느껴졌다.
저도 모르게 다가가 그것을 집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