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29 - 129화 - 아카데미(27)
129화 - 아카데미(27)
벽돌.
눈을 부릅떴다. 시야가 좁아졌다. 흙먼지가 묻어 있는 붉은 벽돌이 마치 신의 계시처럼 느껴졌다.
저도 모르게 다가가 그것을 집어 들었다.
“흐흐..”
아직도 약 기운이 끝나지 않은 건지.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전과 다르게 너무나 상쾌했다.
가슴속에 빛나는 무언가가 차올랐다. 밝고 따스한 기운. 어릴 때 자주 느꼈던 엄마품이 떠오를 정도로 포근했다.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모든 것이 하찮게 느껴졌다.
그 후, 스며든 기운이 시키는 대로 따랐다.
정신을 차렸을 땐 복면을 쓰고 앤의 집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드문드문 이어지는 기억을 되돌려 봤다. 여기까지 아무에게도 안 들키고 온 것 같았다.
말 그대로 기적이었다.
‘진짜 기적인가..?’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누군가 자신을 내려다보며 지켜 주는 기분이었다.
갑자기 용기가 솟아올랐다. 망설임 없이 초인종을 눌렀다.
띵동.
뒤늦게 CCTV 같은 것들이 떠올랐지만 왠지 모르게 괜찮을 것 같았다.
-괜찮단다.
환청처럼 들려오는 따스한 목소리에 대답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신비로운 기운이 머리를 토닥였다. 두려움이나 걱정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이 씻은 듯 사라졌다.
“누구..?”
문이 살짝 열렸다. 안전고리가 걸린 문틈 사이로 앤의 심술맞은 얼굴이 보였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쾅!
마력을 다루는 초인에게 안전고리가 무슨 상관인가. 그대로 박살 내며 단숨에 열어젖혔다.
놀란 눈으로 한걸음 물러나는 앤이 느릿하게 재생됐다.
곧바로 들고 왔던 벽돌에 마력을 담았다.
“죽어!”
손에 들린 벽돌이 앤의 안면과 정확히 맞닿은 그 순간.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을 살짝 빼 버렸다.
콰직!
“악-“
하지만 벽돌은 벽돌. 사방에 돌가루가 튀면서 앤이 철퍼덕 쓰러졌다. 뭉개진 코뼈 사이로 코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뒤늦게 정신이 조금 들었다.
“미, 미친..! 내, 내가 지금 뭔 짓을..?”
귀신에 홀린 것 같았다. 반사적으로 한걸음 물러났다가 정신 차렸다. 이렇게 도망가는 것은 최악의 행동이었다.
얼마 남지 않은 가슴속 신성한 기운이 마치 고개를 끄덕이는 것 같았다.
그대로 집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주, 죽은 건 아니겠지..?”
떨리는 손으로 앤의 코 아래 손가락을 댔다.
“흐아..”
느껴지는 공기의 흐름에 안도의 숨이 새어 나왔다. 심장이 철렁 하는 기분이었다.
‘이제 어쩌지..?’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일단 앤의 방으로 들어갔다.
컴퓨터 화면을 보니 무언가 전송 되고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클라우드에 영상을 저장하는 중이었다.
이미 저장됐다는 앤의 말은 거짓이었다.
‘개 같은..!’
곧바로 전송을 취소했다. 그가 야동보다 들킨 영상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믿은 내가 병신이지..”
뒤통수가 얼얼했다. 믿지도 않았는데 배신감이 치밀었다. 아까 전 벽돌을 내리칠 때 힘을 뺀 것이 아쉬워질 정도였다.
‘됐다!’
유명 클라우드에 들어가 영상을 모조리 확인했다. 자동로그인이 되어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인터넷에 저장된 모든 영상을 지운 뒤 손에 마력을 모았다.
‘아니지.’
컴퓨터를 그대로 박살 내버리려다가 멈칫했다.
아공간 아티팩트에 컴퓨터를 집어넣었다.
이 원본 영상은 그가 무고하다는 증거였다.
가슴 속 기운 덕분인지 평소같지 않았다. 머리가 쌩쌩 돌아갔다.
빠르게 방을 둘러보며 눈에 보이는 전자기기를 모조리 챙겼다.
‘이 정도면 됐다.’
그대로 나가려다 망할 곰 인형들이 보였다.
가서 흔들어 보니 역시나 머리에 딱딱한 무언가가 들어 있었다. 이것도 챙겼다.
“후우.. 클린! 클린! 클린!”
최대한 흔적을 지웠다. 모든 일 처리가 끝나고 현관으로 향했다. 아직도 바닥에 쓰러져 있는 앤이 보였다.
코뼈가 박살 나 피를 질질 흘리고 있었다. 그녀의 폰에 영상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 중얼거렸다.
“···꼴 좋네.”
마지막에 망설인 바람에 크게 다친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날 것 같았다.
갑자기 전신에 힘이 쭉 빠졌다.
얼마 남지 않은 가슴속 기운이 앤의 머릿속으로 스며들었다.
신성한 기운이 사라지자 다시 두려움이 치밀었다. 아까와 달리 차마 죽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앤을 보며 이를 악물다가 도망치듯 나와 버렸다.
*
집에 가면서 손발이 덜덜 떨렸다.
‘이제 어쩌지.’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답이 안 보였다. 이런 일을 누구에게 상담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야동보는 장면이 찍힌 영상에 협박받을 때가 그리워질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하아.. 진짜 좆 됐다.”
아까 전 용기를 불어 넣어 주던 신성한 기운이 그리웠다.
‘그건 뭐였을까···.’
어렸을 때 엄마와 다녔던 신전에서 느꼈던 기운이 떠올랐으나 정확하진 않았다.
“하아..”
한숨이 멈추질 않았다. 깨어난 앤이 어떻게 나올지 두려웠다.
“큭큭.. 돌겠네..”
어이가 없어서 피식피식 웃음이 나올 지경.
지이잉.
떨리는 손으로 폰을 들어 올렸다. 누나 강현아에게서 온 문자가 보였다.
-수호야. 언제 와? 미안한데 아직 밖이면 밴드 좀 사다줄래? 찾아봤는데 떨어졌더라구.
“아..!”
그의 눈동자에 초점이 잡혔다. 누나한테 상담하면 방법이 생길지도 몰랐다. 누나는 똑똑하니까.
-알았어. 지금 사갈게.
발걸음에 조금 힘이 났다. 겨우 앤따위에게 당해서 강수호 인생이 무너질 순 없었다.
곧바로 근처 약국에 들어갔다.
“어.. 어서 오세요!”
귀찮은 듯 대충 인사하던 투가 확 달라졌다. 카운터에 있던 여성이 이쪽을 보며 침을 꼴깍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을 본 여자의 전형적인 반응이었다.
“어, 어떤 약 찾으세요?”
그녀의 태도를 보니 자신감이 차올랐다.
그렇다. 겨우 앤에게 당해 쓰러질 순 없었다. 중요한 것은 포기하지 않는 마음이었다.
“밴드하나 사러 왔는데요.”
“거, 거기 왼쪽 선반 세 번째 칸 보시면 있어요!”
“아, 네.”
살펴보니 선반 한층이 전부다 밴드였다.
‘이건.. 힐링 포션 함유량이 5%···?’
화상특화 밴드도 있고 다양했다. 선택지가 너무 많아서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등 뒤에서 약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떻게든 말 걸어 보려는 여자들의 태도는 익숙했다.
“혹시 추천해드려도 될까요?”
“아.. 예.”
기다렸다는 듯 그녀가 가까이 다가왔다.
“어떤 상처에 붙이실 건가요? 요즘은 제품들이 다양해서요.”
“그건 모르겠는데요.”
“직접쓰실 거 아닌가요? 호, 혹시.. 여자 친구 심부름..?”
“아니요. 누나가··· 아! 20대 초반 여자들이 많이 쓰는 밴드가 뭐예요?”
“어머! 누나 심부름 하는 중이시구나! 자상하시네요. 그럼 이건 어떠세요?”
그녀가 가리킨 것은 장미꽃이 그려진 밴드였다.
약사의 설명이 이어졌다.
“어지간한 상처는 흉터 하나 없이 싹 지워지는 밴드예요. 젊은 여성분들에게 인기 많아요!”
“···그래요? 피부에 부작용은 없고요?”
“부작용 없는 거로 유명한데 당연하죠! 피부가 예민하신 분들도 잘 쓰세요. 평범한 상처는 한 시간도 안 돼서 깨끗하게 사라질 거예요. 그럼 뽀얀 피부만 남는 거죠.”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딱 이거다 싶었다. 누나는 피부관리에 진심이니까.
흉터를 흔적도 없이 싹 사라지게 하는 밴드라면 당연히 좋아할 것이다.
“좋네요. 이거로 주세요.”
*
앤에 대해 어떻게 말할지 고민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순식간에 집에 도착했다.
“누나! 나 왔어!”
“수호 왔어? 오늘은 좀 늦었네?”
웬일로 누나가 현관문까지 마중 나왔다.
그의 손을 기웃거리는 것을 보고 장미꽃이 그려진 밴드를 건네줬다.
“자, 여기.”
“고마워!”
상당히 오래 기다렸는지 누나는 밴드를 받자마자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곤 화장대 앞에 앉더니 상의를 살짝 내렸다. 새하얀 목덜미가 드러나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얼핏 보이는 그녀는 신중한 얼굴로 장미꽃이 그려진 밴드를 붙이고 있었다.
“흐응.. 됐다!”
밴드 붙이는 게 뭐 대단한 일이라도 되는 듯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작게 콧소리를 내며 방에서 나온 누나가 빙긋 웃더니 말했다.
“수호야 밥은 먹었어?”
“아니..”
“지금이 몇 신데 아직도 안 먹었어? 차려줄까?”
지금은 밥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심호흡을 한 다음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후우..! 밥은 됐고. 누나..!”
“응?”
“아, 그게···.”
짧은시간에 몇 번이나 입을 달싹였다. 도저히 뭐라고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잠시 이쪽을 보던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제서야 이상함을 눈치챈 것이다.
“수호야. 얼굴이 왜 그래?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
“아, 아니야!”
결국 입을 다물었다. 차마 강제로 당했다느니 영상을 찍혔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어떻게든 잘 풀리지 않을까 하는 안일한 마음이 차올랐다. 지금까지 항상 그랬으니까.
“지, 진짜 별거 아냐. 바, 밥 좀 차려줄래? 갑자기 배고프네.”
누나의 눈초리에서 의심이 거둬지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한걸음 물러났다.
“흐음..?”
미간을 찡그리며 고민하던 그녀가 말했다.
“혹시 또 시우랑 싸운 거야?”
“어..? 갑자기 걔가 왜 나와.”
“아, 아니면 말고..! 안 싸웠다니 다행이네. 앞으로도 친하게 지내. 알았지?”
잠시 얼굴을 붉히던 누나가 입술을 달싹였다.
“···족이 될지도 모르니까···.”
목소리가 개미기어가듯 작아서 일부 밖에 듣지 못했다.
“누나 뭐라고?”
“아, 아니야! 아무튼 시우랑 친하게 지내!”
“···싫어. 난 걔 맘에 안 들어.”
“응?! 왜, 왜..?! “
누나의 반응이 조금 격했다. 영 이상했지만 한숨을 내쉬었다. 앤 때문에 정신적으로 너무 피로했다.
그리서 조금 생각 없이 말을 내뱉었다.
“하아.. 그놈이 자꾸 아멜리아한테 찝쩍거린단 말이야. 열 받게.”
“뭐어!?”
순간 아차 했다. 누나는 아멜리아 이야기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예전부터 그랬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누나의 눈에서 이글거리는 무언가가 보였다.
“시우가··· 찝쩍..?”
입술을 달싹이며 무언가 말하려던 누나가 입을 꾹 다물었다.
스마트폰을 집어 들더니 엄지손톱 끝을 잘근잘근 씹었다.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며 무언가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때.
지이잉.
타이밍 좋게도 메시지가 왔다.
그걸 본 누나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갑작스럽게 피어난 미소가 가슴속에 박혀 드는 것 같았다.
솔직히 가족만 아니었으면 이 순간 반했을 것 같았다.
먼 미래에 누나와 만날사람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질투가 났다.
꿀꺽.
심장 속에서 꿈틀거리는 특성도 느끼지 못하고 멍하니 누나를 쳐다봤다.
보조개가 파일 정도로 배시시 웃던 누나가 갑자기 흠칫했다. 그러더니 억지로 입꼬리를 내리려는 듯 입술을 우물거렸다.
하지만 자꾸만 맺히는 미소를 도저히 막지 못했다.
“후.. 만나자니. 어쩔 수 없네.”
메시지라도 보내는 것 같던 누나가 이쪽을 보며 말했다.
“수호야 미안한데. 저녁은 혼자 먹어야겠다. 누나 친구 좀 만나고 올게.”
“어.. 친구..?”
잡을 새도 없이 화장대 앞에 앉은 누나가 빠르게 화장을 시작했다.
도톰한 입술에 붉은색 립스틱이 칠해지는 것이 보였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화장을 마치니 한결 더 아름다워졌다. 넓은 침대가 꽉 차도록 드레스를 늘어놓았다.
“흐응.. 뭘 입을까..”
모두 화려하고 예쁜 옷이었다. 몇몇 옷은 등허리가 깊게 파여 야릇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걸 멍하니 보고 있는데 귓가에 누나의 혼잣말이 들렸다. 엄청나게 작았는데 귀에 선명하게 꽂혀들었다.
“하아.. 오늘은 혼 좀 내줘야겠어.”
갑자기 귀가 이상하게 좋아진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