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34 - 134화 - 현대(3)
134화 - 현대(3)
한소영이 말했다.
“장예화씨가 오늘 저녁에 보자는데? 무슨 재벌이 이렇게 쉬워?”
재벌겸 여자 친구라서 그렇다. 사실 너무 오랜만에 만난 느낌도 있었다.
“어디서 보재?”
모니터를 보던 한소영이 눈가를 좁혔다.
“강남 호텔..에 있는 식당에서 보자네..?”
“알았어.”
어딘지 느낌이 왔다. 장예화와 처음 몸을 섞었던 그 호텔이었다.
“에휴..”
한소영이 무언가 눈치챘는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쪽을 살짝 째려보다가 티비를 켰다.
익숙한 얼굴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었다.
[···저는 강진 길드 마스터 강지혁입니다.]
찰칵찰칵.
기자들의 플래시 세례에 눈가를 찡그리던 그가 말을 이었다.
[저희 강진 길드에서 관리하는 가평군 일대 균열 브레이크 사태에 대하여 사실 여부를 떠나······]
왠지 재수 없는 얼굴에 누군지 떠올랐다.
‘스피드맨 고용했던 그놈이네.’
강지혁은 시우가 공개대련에서 검을 조각낸 뒤. 브랜드 이미지에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던 무기회사 사장이었다.
강진 철강은 거의 망하기 직전이라 들었다. 그런데 어느새 강진 길드를 운영하고 있었다.
녀석이 헛기침 하며 국어책 읽는 어투로 말했다.
[···의도는 아니었지만 일이 이렇게 된 점.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찰칵찰칵.
그러던 놈이 카메라를 쳐다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결과가 나쁘지 않습니다. 아시다시피 광산이 발견됐습니다. 저희 길드원들의 조사 결과! 해당 광산에 미량이지만 진은이 발견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진은!
기자들이 눈을 크게 떴다. 진은이라면 금속 중 손에 꼽을 정도로 귀한 마력 금속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미스릴.
[대박입니다 여러분! 없어서 못 파는 진은이라니. 이제 저희 대한민국은 산유국이나 다름없습니다!]
놈이 목에 핏대가 설 정도로 목청을 높였다.
[그런데! 여기서 끝내서야 되겠습니까? 지금 당장! 한시가 더 흐르기 전에 균열을 터뜨려야합니다. 거기서 광산 하나만 더 나와도 얼맙니까!?]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대는 놈을 보다가 인상을 찡그렸다.
“미친놈···”
욕심에 정신이 나간 것 같았다. 그런데 분위기가 저쪽 손을 들어 주고 있었다.
미스릴 광산을 차지한 강진그룹의 주가는 폭등하는 중이었다.
산유국이라는 단어가 사람들의 이성을 흐리게 만들었다.
[더 늦기 전에 당장 균열을 터뜨려야 합니다! 그래야 같은 환경이 차원침식 될 확률이 높으니까!]
이쪽 지구라고 차원침식의 위험성을 모르는 게 아니다. 오히려 더 경계하고 최선을 다해 막아왔다.
하지만 다들 진은에 눈이 멀었다.
미스릴이라면 수십, 수백 배 많은 차원침식이 일어난 아카데미 지구에서도 흔치 않은 광물이었다.
“우리 클랜원들 저기 근처에 가지 말라 그래.”
“응. 안전 거리 유지하라고 아침에 공지해놨어.”
장예화 만날 준비를 하려다 발걸음을 멈췄다.
“안전 거리가 몇 킬로였지?”
“5킬로.”
균열이 터지면 차원침식이 일어난다. 그 영향을 받지 않는 범위 밖을 안전 거리라고 불렀다.
아카데미 지구에선 안전 거리를 최소 15km로 잡는다. 그것도 어쩔 수 없이 타협한 게 그 정도였다.
“가평에서 가장 가까운 애가 누구야?”
“응..? 잠깐만.”
모니터를 보던 한소영이 눈가를 좁혔다.
“가윤이? 얘는 또 혼자 균열갔네. 도대체 하루에 몇 번을 가는 거야···. 가평에서 10km 정도 떨어졌는데. 이 정도면 괜찮지 않아?”
평소라면 당연히 안전 거리였다. 이쪽 지구에서 차원침식은 보통 3~4km반경까지 일어난다.
하지만 영 찝찝했다.
“그냥 빨리 돌아오라그래.”
“으음.. 알았어.”
한참 스마트폰을 두드리던 그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직 균열에서 안 나왔나 본데? 연락이 안 돼.”
“후우··· 그래?”
***
B급 베테랑 헌터 한동호.
그는 균열에서 몬스터를 사냥하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대박이다!”
옆에 있던 파티원들의 표정도 똑같았다. 오늘따라 마정석 수입이 유난히 많았다.
“이 정도면 두 배는 될 것 같은데?”
“그니까!”
오늘따라 재수가 좋았다. 몬스터를 잡는 족족 마정석이 튀어나왔다.
‘이제 얼마 안 남았다.’
그의 목적은 단 하나였다. 앞으로 1년만 더 일하고 은퇴 하는 것.
B급 헌터로 10년 넘게 균열에 다니면서 재산을 제법 모았지만 아직 모자랐다.
“어?”
오늘 수입을 계산하던 그가 멈칫했다. 뒷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심상치 않은 공기가 흘렀다. 균열이 무너질 것처럼 하늘이 깨져나갔다.
“어어.. 서, 설마..?”
구궁!
그가 있던 균열은 숲지형이었다. 그런데 눈 깜짝할 사이에 주변 풍경이 변했다.
늪지대. 헌터들에게 최악이라 평가받는 지형이었다.
현대와 늪지대가 뒤섞였다. 기울어진 건물이나 차 따위가 땅속에 반쯤 파묻혀 있었다.
게다가 파티 원들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시발.. 차원침식?”
심지어 연쇄 균열 브레이크였다. 그가 있던 균열까지 터져 버렸다.
어떤 멍청한 놈들이 차원침식이 일어날 때까지 균열을 방치한 것이다.
최대한 빨리 이곳에서 나가야 했다.
곧장 주변을 둘러보는데 옆에 있던 바위가 꿈틀거렸다.
쉬익!
“아악!”
바위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촉수에 배가 꿰뚫렸다.
본능적으로 피하지 않았다면 척추가 박살 났을지도 몰랐다. 옆구리에 뚫린 호두만한 구멍에 격통이 치밀었다.
“끄으윽..!”
단검을 뽑아 들고 촉수를 내리쳤다. 미끄덩거리며 잘리지 않았다. 더럽게 질겼다.
촉수가 반항하듯 꿈틀거렸다. 강렬한 고통에 눈앞이 새하얘졌다. 검기까지 사용하고서야 겨우 잘라낼 수 있었다.
“허억.. 허억..”
촉수를 쏘아낸 바위를 노려봤다. 잘려 나간 촉수가 몇 초 만에 재생됐다.
끼리릭..
바위가 기괴한 소리를 내며 꿈틀거렸다. 바위인 줄 알았던 그것은 갑각이었다.
갑각 사이에 꾸물거리는 무언가가 보였다.
B급 몬스터 중에 고약하기로 소문난 갑각 달팽이였다.
검기에도 잘리지 않는 껍질을 가진 몬스터. A급으로 상향해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좆 됐네.’
오늘 재수가 좋다 했더니 아니었다. 까딱 잘못했다간 죽을지도 몰랐다.
끼리릭. 끼리릭.
갑각끼리 부딪치며 기괴한 소리가 울렸다. 구멍 난 옆구리에서 무언가 흘러나와 집중하기 힘들었다.
억지로 눈을 부릅떴다.
촤아악!
갑각 사이에서 촉수가 쏘아졌다.
어느새 무릎까지 차오른 질척한 늪을 뒹굴어 겨우 피했다.
땅을 박차고 일어났다. 등에 차고 있던 거대 망치를 뽑아 들었다.
촉수를 쏘아낸 갑각 달팽이를 향해 달려들었다.
“끄아아아!!”
격통에 흐릿해져가는 정신을 억지로 그러모아 망치를 내리쳤다.
전력을 다 했다. 능력까지 발동했다.
‘무게증폭!’
콰직!
급격히 늘어난 무게에 늪 아래 있던 아스팔트가 박살 났다.
전투망치가 순식간에 톤단위를 돌파했다. 갑각 달팽이 머리를 향해 내리쳤다.
쩌엉!
“아아악!!”
격통. 반발력에 팔뼈가 조각났다. 갑각을 깨부수는데 실패한 대가가 고스란히 돌아왔다.
첨벙.
망치가 탁한 늪 속으로 빠져들었다. 뼈가 박살 나서 도저히 들고 있을 수가 없었다.
“염병..”
머리를 살짝 흔들던 달팽이가 이쪽을 노려봤다.
몬스터 특유의 적의. 물컹거리는 촉수가 꿈틀거렸다.
반쯤 포기한 채로 멍하니 서 있는데 무언가 몸에 스며들었다.
“정신 차려요!”
따뜻한 기운이었다. 오랜 헌터 생활 중에 몇 번이나 느껴본 기운.
‘힐러?’
웅.
이미 감각도 없던 복부의 살이 차오르고 전신에 힘이 솟아올랐다.
‘버프까지! 사, 살았다!’
희망이 생겼다.
땅바닥을 나뒹굴어 촉수를 피했다. 바닥의 망치를 집어 들었다.
휭휭휭!
몸에 힘이 끓어 넘쳤다. 나무막대기를 다루듯 망치를 빙빙 돌리다가 하늘로 뛰어올랐다.
무식한 공격이지만 힐러를 믿고 몸을 내던졌다.
날아온 촉수에 또다시 꿰뚫린 복부를 무시하고 이를 악물었다.
우웅!
망치에 있는 대로 마력을 박아 넣었다. 전력을 다한 망치가 달팽이 머리와 만났다.
콰아앙!
검붉은 눈이 망치에 짓이겨졌다.
“흐아아.. 하하..”
탈력감과 만족감이 동시에 느껴졌다.
피떡이 된 채 뭉개진 달팽이 머리를 보니 희열이 느껴졌다.
“크..”
그것도 잠시.
끼리릭 끼리릭 끼리릭 끼리릭.
“아..?”
사방에 불쾌한 소리가 가득 찼다.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순간 망치를 떨어뜨릴 뻔했다. 도망갈 곳이 없었다. 어딜 봐도 달팽이가 가득했다.
힘겹게 처치한 달팽이. 수십, 수백마리가 끼리릭거리며 기어 오고 있었다.
허탈한 심정으로 멍하니 서 있는데 청량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쪽으로 모이세요! 최대한 버텨요!”
“뭐..?”
아까 그에게 힐과 버프를 줬던 여성. 대여섯 명가량의 헌터들이 그녀를 중심으로 모여 버티고 있었다.
얼굴에 묻은 진흙에도 불구하고 미모가 가려지지 않았다.
멍하니 보다가 정신을 바짝 차렸다.
“빨리 도망가자! 여기 있다간 다 죽어!”
“안 돼요! 돌파하다간 대부분 죽을 거예요!”
그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쩌란 말인가.
여기서 버텨도 마찬가지였다. 얼마 안 가서 확실하게 모두 죽을 것이다.
“어쩔 수 없잖아! 누가 살지는 운에 맡기고 튀자!”
여자가 고개를 거세게 저었다.
“안 돼요! 여기서 버텨요! 곧 지원군 오니까!”
“멍청한..!”
혼자라도 도망갈까 사방을 훑어봤지만 도저히 탈출구가 보이지 않았다.
“시발..”
끼리릭 끼리릭.
사방에서 천천히 조여 오는 죽음을 보다가 침을 꿀꺽 삼켰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전투 망치를 꽉 쥐었다. 이를 악물던 그때.
하늘에서 누군가 툭 떨어져 내렸다.
“아..! 스승님!”
여자가 말하던 지원군이 저 남자인가. 하지만 혼자서 뭘 어쩌겠다는 건지 순간 허탈감이 밀려왔다.
힐러를 보며 웃던 남자가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잡기 전까지.
스르릉.
남자가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청명한 쇳소리가 귓가에 또렷이 들렸다.
‘아..’
입을 벌렸으나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평범해 보이던 남자가 너무나 커 보였다.
그가 검을 허공에 휘둘렀다.
평범한 가로베기.
단순한 동작에서 도저히 눈을 뗄 수 없었다.
“아..”
제 입에서 튀어나온 목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이게 들려···?’
문득 깨달았다. 시끄럽던 늪지대가 어느새 고요하게 변해 있었다.
빌어먹을 끼리릭 소리가 단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