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35 - 135화 - 현대(4)
135화 - 현대(4)
B급 헌터 한동호의 입이 쩍 벌어졌다.
사방이 너무나 고요했다. 소름 끼치던 끼리릭 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덜덜 떨리는 몸을 억지로 제어해 고개를 들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수백 마리의 갑각 달팽이들이 모조리 반토막 나 있었다.
뒤늦게 방금 전 장면을 떠올렸다. 남자의 검 끝에서 푸른색 마력이 퍼져나갔다.
마치 커다란 초승달 같았다. 그것이 지나간 자리에 살아 있는 달팽이는 단 한 마리도 없었다.
스르릉. 탁.
검이 검집에 회수되는 소리가 머리를 울렸다.
“아..”
최면에서 깨어난 듯 이제야 정신이 들었다. 턱을 타고 흐르는 침방울을 뒤늦게 닦았다.
“저, 저.. 고, 고맙..”
감사 인사를 올리려던 그를 누군가 밀쳤다. 방금까지 그들의 중심에 있던 힐러였다.
그녀가 남자의 팔을 껴안으며 소리쳤다.
“꺄악! 스승님! 구해주셔서 감사해요! 그런데 그거 어떻게 한 거예요? 검기! 검기맞죠? 저도 알려주세요!”
***
시우가 차를 홀짝이며 장예화를 감상했다.
다리를 꼬아 타이트한 정장 치마가 말려 올라갔다. 검은 스타킹의 밴드부분이 은근히 드러났다.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유혹하는 건지 평소 습관인지 구별가지 않았다.
SH스미스 사장인 그녀는 달아오른 얼굴로 티비를 보고 있었다.
“하아.. 정말 대단하시네요.”
뉴스에서 일 검에 수백 마리의 달팽이를 썰어 버리는 장면이 재생되고 있었다.
상기된 얼굴의 여자 앵커가 신성이 떠올랐다며 소리치고 있었다.
기자들에게 새삼 감탄이 튀어나왔다. 늪에 잠겨 있던 차에서 블랙박스라도 뒤진 것 같았다.
장예화가 붉은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
“오랜만이라고 타박도 못하겠어요. 그동안 수련만 하신 거예요?”
볼을 긁적였다. 섹스도 수련이니 쉬지 않고 단련했다고 해도 무방했다.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얼마 전에 B급이었던 것 같은데···. 지금 도대체 얼마나 강하신 거예요?”
“글쎄. 최소 A급은 될 텐데. 잘 모르겠네.”
거짓말은 아니었다. 현대에서 각성 능력을 갈고 닦은 이들이 어느 정도 수준일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게다가 무공이나 마법을 제대로 익히지 않은 현대 헌터들은 능력간 차이가 심했다.
달뜬 숨결을 내뱉은 장예화가 말했다.
“하아.. 이러다 정말 우리나라에서 가장 강한 헌터가 되겠어요.”
그녀의 눈동자에 탐욕이 보였다. 피식 웃었다. 가장 강한 사나이. 나쁘지 않은 울림이었다.
“SH스미스 모델은 아직도 유효한 거죠? 강해졌다고 다른 브랜드로 간다거나..?”
몸까지 섞은 사이인 장예화를 두고 그럴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관계를 더 돈독히 할 생각이었다.
“당연히 계속하지. 그것보다 우리 물건 좀 같이 팔자.”
장예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가 보기에 그는 재능 넘치는 각성자일 뿐. 생산자는 아니었다.
“물건이요? 그거 진짜였어요? 저 만나러 올 구실인 줄 알았는데.”
“어. 일단 이것 좀 봐봐.”
이연희가 만든 시제품을 건넸다. 친절하게 설명서까지 들어 있었다.
쉴드나 마탄을 보며 장예화의 미간이 좁혀졌다.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이쪽을 힐끔거리는 게 믿지 못 하는 것 같았다.
갑작스럽게 한차원 높은 기술이 튀어나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마지막으로 스캐너까지 본 장예화의 눈동자가 거칠게 떨렸다.
“마력탐지요? 그건.. 소형화 불가능한 거 아니었어요?”
현대에 있는 마력탐지기는 엄청나게 거대했다. 방 하나를 가득 채울 정도로 큰 것이 가장 최신기기였다.
하지만 샘플로 만든 스캐너는 팔찌 형태였다.
“우리 클랜 연금술사가 만든 거야. 어때?”
팔찌를 심각한 눈으로 노려보던 그녀가 설명서를 유심히 읽었다.
“마력을 집어넣으면··· 사방 1킬로 근방의 마력을 가진 존재가 머릿속으로 인식될 거다..? 하하.. 이제 보니 장난이셨나 보네요.”
“일단 써봐.”
작게 웃던 장예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꼴깍.
귀엽게 침을 삼킨 그녀가 팔찌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이, 이게..?”
흔들리는 눈동자로 팔찌를 보던 장예화가 입을 열었다.
“이 정도면··· 회사를 새로 차리는 게 낫겠네요.”
***
막 F급으로 각성한 헌터가 손에 들린 부적을 째려봤다. 한숨이 절로 튀어나왔다.
“에휴..”
“어! 그거 설마 아티팩트냐? 너 돈 많아?”
같이 온 파티원 중 한 명이 관심을 보였다.
“돈? 당연히 없지. 엄마가 나 걱정된다고 사 온 건데··· 하..! 사기 당하신 거 같다.”
“사기..? 어디 건데?”
“몰라. 구원 연금이던가.”
“진짜 듣보잡이네. 얼마 짜린데?”
“50만원.”
“으엑? 너무 싸잖아. 진짜 사기아니야?”
50만원. 딱 한 번 사용할 수 있는 소모품이라기엔 엄청나게 비쌌다. 하지만 마도 아티팩트 기준에서는 헐값이었다.
소모형이라도 아티팩트는 아티팩트.
가장 싸구려도 100만원부터 시작이었다.
이것도 정상가는 100만 원짜리였다. 그걸 출시 할인가라며 절반 값에 사 왔다던 엄마가 떠올랐다.
“에휴.. 엄마가 망할 놈들한테 속았나 봐. 이거 작동이나 하려나 모르겠네.”
“하긴. 50이면 너무 싸다. 환불은 된대?”
“오늘 균열 끝나고 가 보려고.”
주먹이 꽉 쥐어졌다. 보나 마나 어떤 쓰레기 같은 놈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엄마를 속인 것 같았다.
치솟는 분노를 겨우 참고 설명서를 읽었다.
“하하..”
읽어보니 더 어이가 없었다.
위급 시 자동발동에 D등급 몬스터의 일격까지 막아 낼 수 있음을 보장한다.
“쯧..”
딱 봐도 사기였다.
한숨을 푹 내쉬고 가슴주머니에 대충 집어넣었다.
*
어느새 포위당했다. 사방에서 살기를 흘리며 조여 오는 늑대들을 보니 머리가 새하얗게 변했다.
-으르릉..
파앗!
스프링처럼 달려든 늑대에게 총구를 돌렸다. 벌벌 떨리는 손으로 겨우 조준해 방아쇠를 당겼다.
틱.
“어..?”
무언가 걸렸는지 총이 나가지 않았다.
코앞까지 다가온 늑대가 커다란 입을 쩌억 벌렸다. 송곳처럼 날카로운 이빨을 보니 생각이 멈춰버렸다.
틱. 틱.
고장 난 로봇처럼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계속해서 방아쇠를 당겼지만 아무것도 나가지 않았다.
-크아아앙!
목을 향해 다가오는 송곳니를 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콱. 까득. 끄드득.
“어..?”
기다렸던 고통은 없었다.
제 몸에 생겨난 푸른 배리어. 그것이 늑대 이빨을 막아서고 있었다.
틱. 틱.
아직도 멍청히 방아쇠를 당기다가 뒤늦게 정신이 들었다.
허리춤에 차고 있던 단검으로 늑대의 목을 콱 찔렀다.
축 늘어진 늑대의 무게에 뒤늦게 헛숨을 토해냈다.
“사, 살았다···.”
뒤늦게 허겁지겁 달려온 파티원들이 소리쳤다.
“너, 너 그거 뭐야!?”
목숨 보험이나 다름없는 자동발동형 쉴드. 가장 싼 것도 몇 백만원 수준이었다. 초보 헌터인 그들에겐 너무나 비싼 물건이었다.
반사적으로 목에 걸려진 부적을 꺼내 들었다.
푸른빛이 웅웅대고 있었다.
“지, 진짜였네..?”
*
한 달이 지났다.
구원 연금. 시우가 클랜 이름을 붙여 만든 회사가 날로 번창하고 있었다.
가격에 비해 압도적인 성능. 초반에 의심쩍어 하던 헌터들의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회사 지분은 장예화와 6 : 4로 나눴다. 시우가 더 많은쪽이었다.
판매와 마케팅. 그리고 제품의 실질적인 생산 등을 모두 장예화가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몫이 더 많았다.
시우가 한 달 순수익 중 그의 몫으로 배당될 금액을 계산했다.
‘300억..?’
이것도 초창기에 판매가 부진했던 탓이었다. 매출은 끊임없이 늘어나는 중이었다.
“마력스캐너는 예상했는데 쉴드 부적이 생각보다 잘 팔리네요. 성능도 우월한데 가격을 좀 올려도 되지 않을까요. 고급화로 가는 거죠.”
약간 아쉬워하는 장예화에게 고개를 저었다.
“됐어. 최대한 많이 파는 게 더 나아.”
판매와 동시에 조금씩 카르마가 쌓이고 있었다. 최대한 많이 파는 게 더 이득이었다.
***
카페.
이연희가 절로 찡그려지려는 얼굴을 억지로 폈다.
어렸을 때 친했던 친구가 꼭 만나달라고 간청했다. 그래서 바쁜 와중에 시간을 쪼갰다.
“이연희씨. 이런 식으로 만나 뵙게 되어 정말 죄송합니다.”
그런데 친구는 대화가 시작되자마자 떠나버렸다. 처음 보는 남자만 남았다.
“하지만 연락이 전혀 안 되시더군요. 혹시 구원클랜에서 혹사라도 당하고 계신 건 아닌지 걱정되는 바람에···”
“정말 무례하시네요.”
그녀의 불쾌감을 알았는지 남자가 항복하듯 손바닥을 내보였다.
“하하.. 아니라면 다행입니다. 요즘 엄청난 성과를 내고 계시는데··· 정말 대단하시더군요. 특히 이번에 개발하신 그 쉴드 부적이···”
“하아.. 죄송한데. 저 바빠요. 이만 가 봐도 될까요?”
“···그럼 본론 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저 강진 그룹에서 나왔습니다.”
남자가 고개를 치켜들며 씨익 웃었다. 강진 그룹. 대기업이었다. 예전의 그녀였다면 화들짝 놀랐을 터였다.
하지만.
“그래서요?”
“네..?”
그녀의 차가운 말투에 남자가 당황했다. 기대했던 반응이 아니었다.
“저 강진그룹에서 나왔다니까요?”
혹시나 잘못 들었을까 다시 말했지만 의미 없었다. 이연희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자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10배! 저희 강진 화학으로 오시죠. 지금 받는 연봉에 10배로 쳐드리겠습니다.”
그녀는 어이가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그 표정을 오해한 남자가 거만하게 말했다.
“계약 때문이라면 걱정할 것 없습니다. 저희가 다 알아서-”
“됐어요.”
“네..?”
이연희는 매달 구원 연금에서 발생한 순이익의 1%를 인센티브로 받는다. 그돈만 해도 저들이 말하는 연봉보다 훨씬 많다.
하지만 그뿐만 아니었다. 애초에 받은 은혜가 너무 많아서 떠날 생각 자체가 없었다.
시간 낭비였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됐으니까. 앞으로 연락하지 마세요.”
“자, 잠시만요! 조건을 더 드리겠습니다. 어어..? 이연희씨!”
무시하고 떠나는데 남자가 서둘러 달려와 말했다.
“이런.. 제가 조사한 것보다 조건이 좋으신가 봅니다. 다음에 더 좋은 조건으로 찾아뵐테니 그쪽 클랜엔 비밀로 부탁드립니다. 보험은 많을수록 좋지 않겠습니까?”
남자가 씨익 웃는 것을 보던 이연희가 말없이 카페를 나갔다.
***
시우가 갑자기 찾아온 이연희의 아랫배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스카웃 제의?”
“아으읏.. 네에..!”
그녀의 상의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말랑하고 부드러운 살결이 느껴졌다.
“건방지게. 우리 연희를 데려가려고 했다고?”
“우리 연희..? 헤윽♥ 마자여..! 건방.. 흐잇..!”
이연희의 성감대인 날개뼈를 꾹꾹 누르면서 혀를 찼다. 회사가 빠르게 성장하니 똥파리가 달라붙었다.
순식간에 흐물흐물해진 그녀에게 물었다.
“어디 회사라고?”
“하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