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42 - 142화 - 무협지구(3)
142화 - 무협지구(3)
월영신법(月影身法).
언제 인지도 모를 까마득한 과거. 한 도둑이 밤하늘에 떠오른 달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
그가 바로 초대 무영신투.
너무나 빨라 그림자도 따라잡을 수 없다는 전설의 주인공이었다.
그 깨달음이 담긴 무공이 월영신법.
월영신법은 세 가지 초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풍신결(風身結), 월영신(月影神), 월광형(月光炯).
각각 경신법, 은신법, 단거리 보법에 관한 초식이었다.
*
서지유가 눈을 감고 가느다란 숨결을 내뱉었다.
“후우..”
얕고 길게 이어지는 기묘한 숨소리가 이어졌다. 그녀의 존재감이 점점 흐릿해졌다.
눈앞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인식하기 힘들었다. 마치 길가에 놓인 돌멩이처럼 자연물로 느껴졌다.
그녀가 눈을 반개하며 속삭였다.
“잘 봐. 이게 월광형(月光形)이야.”
팟.
서지유의 존재감이 흐릿해진 순간. 신형이 연기처럼 흩어지고 한 걸음 옆에서 다시 나타났다.
“오..?”
“하아..”
약간 피로한듯 한숨을 내쉬는 그녀를 보며 감탄했다.
단 한 걸음이지만 눈으로 쫓기도 힘들었다. 경지 차이가 나는데도 이리 빠르다니. 무영신투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았다.
월광형은 이형환위였다. 다른 말로 하면···.
‘이 정도면 거의 점멸인데?’
왠지 뿌듯한 미소를 짓고 있는 서지유에게 박수를 쳤다.
“우리 스승님 멋진데?”
“흐흥.. 그, 그래..? 핫..! 지, 집중해! 지금부터 구결 알려줄 테니까!”
*
시우가 그림자 아래서 눈을 감았다.
처음엔 달리는 방법에 은신술이 왜 필요한가 싶었다.
하지만 애초에 도둑질에 필요한 세 가지를 극한으로 연구한 게 월영신법이었다.
월영신법의 두 번째 초식인 월영신(月影神).
세상에서 가장 어두운 곳. 달빛도 닿지 않는 곳의 귀신이 되는 방법이었다.
은신술인 월영신을 대성하려면 세 가지를 죽여야 했다.
-숨을 죽이면 보이지 않고. 기를 죽이면 느낄 수 없다. 마지막으로 하늘을 죽이면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지리라.
초대 무영신투가 남긴 월영신의 구결이었다.
가장 먼저 식살(息殺).
숨을 죽인다는 것은 육체를 완전히 통제하는 것이다. 이건 쉬웠다. 이미 심장마저 컨트롤 할 수 있는 절정 고수였으니까.
다음 단계는 기를 죽이는 것.
각성자는 통제하지 못한 마력을 조금씩 흘린다. 그것을 완전히 통제하여 기운을 감추는 것이 바로 기살(氣殺)의 경지였다.
마지막 천살(天殺)의 경지는 지금으로선 이해할 수 없었다.
구결을 곱씹다가 월영신을 운용했다.
물에 잠긴 것처럼 먹먹해졌다.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 침잠하는 기분.
그를 유심히 보던 서지유가 끄덕였다.
“음··· 그 정도면 됐어.”
고개를 주억이던 그녀가 중얼거렸다
“절정 고수라 그런가..? 되게 빨리 배우는 구나···.”
“그래?”
서지유가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무튼 이제 기본은 뗐네. 이제 내가 도와줄 건 없겠다.”
왠지 말하는 투가 떠날 사람 같았다.
“설마 떠나려고?”
“응. 스승님이 남기신 창고 좀 둘러보려고. 또 너 같은 놈한테 털릴 순 없으니까.”
“···돌려줄까?”
“됐어. 잘 보관해놔. 필요하면 내가 다시 털어갈 거니까.”
서지유가 짐짓 밝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얼굴 한구석에 묘한 그늘이 보였다.
인벤토리에서 아티팩트를 꺼냈다.
“갈 거면 이거 가져가.”
그녀의 손목에 팔찌를 채워줬다. 서지유의 직업을 생각해서 빛이 비치지 않는 묵색으로 골랐다.
제 손목에 채워진 팔찌를 경계의 눈으로 보던 그녀가 말했다.
“···이건 또 뭔데?”
“위치 추적기라 해야 되나.”
“위치.. 추적기?”
사용법을 알려 줬다. 내공을 집어넣으면 서로의 위치를 알 수 있는 아티팩트.
“와..”
아까부터 어둡던 서지유의 표정이 밝아졌다. 작은 미소를 띄우며 팔찌를 쓰다듬고 있었다.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나 보고 싶으면 호남 청봉현으로 와. 아마 거기 있을 테니까. 없으면 팔찌 써서 찾아오고.”
“읏..! 뭐, 뭐래. 누가 보고 싶데.”
소리를 빽 내지른 서지유가 뒤돌았다.
당장이라도 떠날 것 같던 그녀가 발걸음을 멈췄다.
“맞다! 진짜 중요한 걸 안 알려줄 뻔했네.”
“응?”
“엄청 중요한 거야. 네가 아무리 대단한 곳을 털었어도 소문이 안 나면 의미가 없잖아?”
“그건 그렇지.”
체면에 목숨 거는 무림인들은 도둑맞은 걸 숨길 수도 있었다.
“그럴 때. 이 기술이 필요할 거야.”
“뭔데?”
서지유가 엄청난 비밀이라도 되는 것처럼 목소리를 낮췄다.
“소문내는 법.”
“응?”
잠시 말을 고르던 그녀가 입을 뗐다.
“먼저 마을에서 세네 번째로 큰 객잔으로 가.”
겨우 소문 내는 법이 중요하다니. 일단 들어나 보기로 했다.
“맛집으로 소문나서 사람 많으면 딱 좋아. 아, 그리고 너무 고급스러워도 안 돼. 알겠어?”
“···대충은.”
“좋아. 그리고 객잔을 쭈욱 훑어봐. 입 가벼워 보이는 사람이 한 명쯤 있을 거야. 걔한테 다가가서 한마디 건네는 거야.”
서지유가 연극이라도 하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흠흠. ‘이보게. 그거 아나?’ 라고 하면서 자연스럽게 옆자리에 앉아. 그리고 적당히 정보를 푸는 거지. 이 근방에 무영신투가 다녀갔다던데···. 이런 식으로.”
“그다음엔?”
“이게 진짜 비법이야. 그때 입을 딱 다물어야 돼.”
“···왜?”
그녀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말없이 이쪽을 빤히 보길래 가슴을 콕 찔렀다.
“히약..! 으.. 참을성 없긴! 이래야 그쪽에서 적극적으로 된단 말이야. 방금 너처럼!”
“음..”
“아무튼..! 이렇게 가만히 쳐다봐. 그럼 눈치있는 놈이면 알아서 술이랑 안주는 사줄 거야. 그거 한두점 먹고 말해야 돼. 그래야 소문이 더 잘나.”
대단한 비밀이라도 되는 양 뻐기는 게 조금 귀여웠다.
“설마 다음도 있어?”
서지유가 갑자기 고개를 치켜들고 눈을 내리깔았다. 사람을 묘하게 무시하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이 표정이랑 자세 기억해. 이대로 말해야 효과가 제일 좋아. ‘이거 진짜 비밀인데 자네만 알고 있게.’ 라고 하면서······.”
***
이곳은 광동.
시우가 청봉밀사 쪽으로 방향을 잡고 몸을 풀었다. 제대로 달려볼 작정이었다.
땅을 박차고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후우웅.
귓가에 스치는 바람 소리가 상쾌했다.
고도가 높아지니 끝없이 펼쳐진 수해(樹海)가 보였다. 나무로 이루어진 녹색 바다가 시야를 가득 채웠다.
쏘아진 화살처럼 날다가 점점 떨어졌다. 날개 없는 이의 숙명이었다.
타앗.
얇은 나뭇가지를 박차며 다시 뛰었다. 손가락보다 얇은 가지를 밟았으나 부러지지 않았다.
마치 스프링이라도 밟은 듯 하늘로 떠올랐다.
월영신법의 풍신결을 운용한 결과였다.
몸이 깃털처럼 가벼웠다. 혼원기로 몸을 가볍게 하는 것과는 달랐다.
풍신결은 장거리 달리기에 특화된 경신법이었다.
신법없이 달릴 때와 비교해서 배는 빨랐다.
그만큼 내공소모가 늘어나야 정상일 텐데. 오히려 반대였다. 줄어들었다.
앞을 가로막는 공기의 벽이 갈라지며 길이 생기는 기분.
바람과 하나 되어 달리는 법. 그게 바로 무영신투가 남긴 풍신결이었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보니 가슴속까지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후우웅.
얼굴을 스치는 바람을 즐기다 뒤를 돌아봤다.
방금 전에 밟았던 나뭇가지가 저 멀리 있었다. 하늘을 나는 새도 이렇게 빠르진 못할 것이다.
끝없는 자유가 온몸에 넘실거렸다.
“후우···”
얼마나 뛰었을까. 높이 솟아오른 나무 위에 멈춰 섰다.
눈앞에 거대한 호수가 나타났다. 바다로 착각할 만큼 넓었다.
노을빛으로 물든 호수를 보다가 그쪽으로 향했다.
동정호였다.
*
달리는 것에 집중하다 보니 방향이 조금 어긋났다.
청봉현이 아닌 다른 도시에 도착했다.
‘여기가 낙양인가.’
거대한 호수인 동정호 옆에 자리 잡은 도시 낙양.
첫인상은 상업도시같은 느낌이었다. 해가 떨어지기 직전인데도 바삐 일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이리저리 짐을 옮기는 짐꾼들과 호객하는 상인들이 넘쳐났다.
“음···”
잠시 고민하다가 근처 객잔을 하나 골랐다. 바쁠 것도 없으니 좀 쉬다 갈 생각이었다.
들어가자마자 점소이가 허리 숙여 인사했다.
“어서 옵셔!”
객잔은 왁자지껄한 분위기였다.
적당히 음식 냄새 좋은 곳을 찾아왔다. 그런데 우연히도 서지유가 말했던 객잔과 조건이 맞았다.
“나 참..”
그녀를 생각하니 괜스레 웃음이 났다. 어떤 요리를 먹을까 고민하던 그때.
더벅머리 남자가 씨익 웃으며 옆자리에 앉았다.
“이보게 소협. 그거 아나?”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로 웃는 그를 보다가 말했다.
“당연히 알지.”
“뭐, 뭣..?”
당황하는 남자를 보다가 피식 웃었다.
“농담일세. 뭔데?”
***
어느 깊은 산속 냇가.
한 여인이 바위에 앉아 시냇물을 내려다봤다.
졸졸 흐르는 맑은 물에 저물어가는 하늘이 비쳤다.
그녀가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흑발을 쓸어내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또···.”
신경 쓰지 못한 사이에 음기가 차올랐다. 머리카락 끝자락이 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습관처럼 허리춤에 매인 검을 쓰다듬었다.
기이하게도 그 검에는 SH스미스라는 글자가 각인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