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44 - 144화 - 무협지구(5)
144화 - 무협지구(5)
아직도 멍청히 서 있는 문지기의 뒤통수를 찰싹 때렸다.
“악!”
“가만히 뭐 하냐? 빨리 소리 안 질러?”
“뭐, 뭐라고..”
손바닥을 다시 들어 올렸더니 주춤거리던 놈이 입을 열었다.
“도, 도둑이야..!!”
“그래. 잘하네. 계속 그렇게 질러.”
“예! 도둑이야! 도둑이야!!”
문지기와 도둑. 서로가 본분을 다하는 아주 훌륭한 광경이었다.
길가에 걷던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췄다. 이쪽을 보며 웅성거렸다.
흡족했다. 이러면 따로 작업할 필요도 없었다. 내일. 아니, 오늘만 지나면 낙양에 소문이 진동할 것이다.
산책이라도 하듯 모용상단 안으로 당당히 걸었다.
채채채챙!
수십 명의 무사들이 검을 뽑으며 달려 나왔다.
“웬 놈이냐!”
“흠..”
문지기보단 대응이 나았다.
전체적인 무공 수준도 높았다. 하지만 그래 봤자였다. 상단이라 그런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실망인데···.’
애송이들 중 그나마 나은 녀석이 앞으로 튀어나와 소리쳤다.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도둑.”
“뭐, 뭐라고..?”
“도둑이라니까. 아니 잠깐. 이러면 강도인가?”
철가면에 감싸인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했다. 지금 하는 짓이 강도질인지 도둑질인지 헷갈렸다.
놈의 얼굴이 터질 듯 붉어졌다.
“이 건방진 놈이 감히! 이곳이 모용 세가의 상단임은 알고 이러는 것이냐!”
“어차피 내가 누군지도 모를 텐데 뭔 상관이냐.”
“뭐, 뭐라고..?”
녀석이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주먹까지 꽉 쥐었다.
하지만 쉽사리 덤벼들지 않았다. 놈의 눈동자가 박살 난 대문을 살피고 있었다.
“창고는 어디냐? 이왕이면 영약이 좋겠는데.”
“미친놈···! 모두 쳐라!”
그 말에 기다렸다는 듯 누군가 빠르게 달려들었다.
“죽어라!!”
용기가 과하게 넘치는 놈이었다. 아니면 공을 세울 욕심이 크던가.
하지만 실력은 받쳐주지 못했다.
찔러오는 검이 선명하게 보였다. 날카로운 검날 옆. 검 면이 마치 바다처럼 넓어 보였다.
툭.
그곳을 손가락으로 밀어내며 품안으로 파고들었다.
이어진 진각과 촌경. 원인치 펀치라 불리는 기술로 명치를 후려쳤다.
쩌엉!
“꾸웨에엑!”
무언가 터져나가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엎어졌다.
용기 있던 자가 묽은 침을 흘리며 꺽꺽댔다. 달려오던 무사들이 동시에 발걸음을 멈췄다.
“고, 고수···! 진을 펼쳐! 가서 장로님을 모셔와!”
땡땡땡땡!
시끄러운 종소리가 모용상단을 가득 채웠다.
***
낙양제일루.
평범한 사람이라면 꿈도 꿀수 없는 고급 기루.
곱게 차려입은 여인이 금을 탔다. 흥겨운 가락이 분위기를 흥겹게 달궜다.
가장 상석에 앉은 노인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턱에는 정성껏 가꾼 하얀 수염이 길게 자라 있었다.
그때. 아름다운 선율 사이로 불협화음이 끼어들었다.
-도둑이야!!
미간이 꿈틀한 노인이 작게 혀를 찼다.
“소란스럽군.”
“죄, 죄송합니다.”
“됐네. 자네가 죄송할 건 아니지.”
토실토실하게 뱃살이 오른 남자가 노인에게 굽실댔다.
“헤헤.. 감사합니다. 오늘은 심장로님이 좋아하시는 거로 신경 써서 준비했습니다. 여봐라!”
남자의 말에 누군가 벌벌 떨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고운 옷을 입었으나 아직 어린 계집아이였다.
그녀는 잘게 떨리는 손을 감추며 억지로 웃었다.
“대, 대인을 뵙습니다..!”
선풍도골 도사처럼 근엄하게 앉아 있던 노인이 한쪽 눈을 힐끔 떴다. 그러곤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후덕한 남자가 헤벌쭉 웃었다.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애야 이리 와서 술부터 따르거라.”
“아.. 예..!”
파르르 떨던 그녀가 주전자를 기울였다. 벌벌 떨리는 손탓에 술이 이리저리 튀었다.
후덕한 남자가 눈을 부라리며 호통쳤다.
“네 이년! 이분이 누구신줄 알고 그런 무례를..! 그 옷만해도 네년 몸을 팔아도 사지 못할 것이야!”
“히끅! 죄, 죄송합니다! 제, 제가 어떻게든···.”
“됐네. 옷이야 빨면 그만인 것을··· 그나저나 참 곱구나. 흐..”
-도둑이야!! 도둑이야!!
손을 뻗던 노인이 멈칫했다.
아까보단 작았지만 계속해서 울려대는 소리가 영 거슬렸다.
“도둑..?”
“하하. 어떤 얼간이들이 도둑한테 털렸나 봅니다. 신경 쓰지 마시지요. 뭐 하느냐 어서 다시 따르지 않고.”
진정한 소녀가 이번엔 술을 제대로 따랐다. 그것을 음미하던 노인이 말했다.
“···그나저나 이번 달 물건은 두 배로 늘려야겠네.”
후덕한 남자의 얼굴이 뻣뻣하게 굳었다. 물건은 돈 준다고 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예..? 이, 이렇게 갑자기..”
“곤란한가?”
“아, 아닙니다. 어떻게든 해 보겠습니다. 일단 술부터 받으시지요!”
“이보게 상단주.”
“예..!”
“성의를 보이는 거야 자네 자유네만··· 그래도 양은 못 줄여.”
“아하하.. 아닙니다. 일단 즐기시지요. 일 이야기야 나중에 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이번엔 정말이네. 본가에서 명이 내려왔어. 최대한 물량을 확보하라 하셨네.”
“그..”
노인의 진지한 표정을 보고 후덕한 남자가 침음을 흘렸다. 돈을 달란 건 아닌 것 같았다.
머리가 복잡해진 가운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똑똑.
“저어.. 상단주님.”
“무슨 일이냐.”
“그, 그게···.”
지금은 접대시간이었다. 노인의 미간이 좁혀지는 것을 보고 상단주라 불린 남자가 호통쳤다.
“어허..! 빨리 말 안 하고 뭐 하는 것이냐!”
들어온 무사가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조아렸다. 몇번이고 망설이다가 겨우 말했다.
“사, 상단에 도둑이 들었습니다. 지금 다 털리고 있습니다.”
“뭐라..?”
*
콰아앙!
무사옷을 입은 남자가 포탄처럼 허공을 날았다. 그와 부딪친 벽이 우르르 무너졌다.
돌무더기에서 기어 나온 남자가 바닥에 엎어져 피를 토했다.
“우웨엑.. 쿨럭..!”
시우가 박살 난 창고로 들어오며 휘파람을 불었다.
“오..”
당첨이었다.
영약으로 보이는 약초들이 가득했다. 무사 우두머리가 필사적으로 막았던 장소 다웠다.
‘대박인데?’
언젠가 먹었던 하수오나 산삼따위가 꽉 차 있었다. 이름 모를 식물들도 많았다.
“여, 여긴 안 돼.. 끄윽..!”
바닥에서 꺽꺽대는 무사의 턱을 후려쳐 기절시켰다.
주변을 훑었다.
시선이 없는 것을 확인한 다음 인벤토리에 영약을 쓸어 담았다.
잔뿌리가 가득한 노란 식물, 붉은 꽃송이 등등.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고 인벤토리에 모조리 넣었다.
흡족했다. 배부르게 먹은 것처럼 포만감이 들었다.
‘이 정도면 되려나···?’
조금 시시했다. 모용 세가라는 이름이 아까웠다. 내심 기대했던 강자와의 싸움은 없었다.
대충 마무리 할까 싶던 그때.
“응..?”
수상한 곳을 발견했다. 영약이 사라지고 드러난 구석. 유난히 먼지 없는 바닥이 보였다.
통! 통!
발로 두드려보니 역시나. 빈공간이 느껴졌다.
턱을 쓰다듬다가 발에 내공을 담았다.
콰앙!
박살 난 바닥 속에 계단이 나타났다. 지하로 뚫린 공간에서 탁한 공기가 확 일어났다.
아무래도 영약이 아니라 이곳 때문에 필사적으로 막았던 것 같았다.
‘오···! 가 볼까?’
호기심이 발걸음을 이끌었다.
5분가량 계단을 타고 내려갔더니 지하공간이 나타났다. 그리고 코를 찌르는 썩은 내가 맡아졌다.
‘뭐야 여긴.’
불쾌한 공간이었다. 바닥엔 피로 그려진 기이한 문양이 가득했다. 사방에 시체가 널려 있었다.
몇몇 시체는 심장부위에 방울 달린 막대기가 꽂힌 채 죽어 있었다.
마치 전신의 피가 모조리 빨린 듯 창백했다. 기괴한 시체였다.
‘혈마령···이라 했던가?’
사람을 죽여 영혼을 흡수하는 방울. 예전에 청봉산에서 본 기억이 났다.
잠시 고민하다가 방울을 인벤토리에 챙겼다. 나중에 제대로 관찰해볼 작정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시체가 한둘이 아니었다. 복장으로 보건대 무공을 모르는 양민이 대부분이었다.
‘이건 좀 심한데.’
이런 놈들인 줄 알았다면 맘 편하게 죽여 버렸을 텐데. 기절만 시켰던 것이 살짝 후회됐다.
그때.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렸다.
“이, 이보시오..! 거기 누구 없소?”
소리를 따라 걸었다. 곧 퀭한 눈매를 가진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쇠창살에 갇혀 있었는데 외팔이였다. 구멍이 숭숭 뚫린 옷 사이로 고문의 흔적이 보였다.
남자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위에서 소란피우던 자가 맞소..? 나 좀 도와줄 수 있겠나..? 이 은혜는 어떻게든 갚지.”
남자를 관찰했다. 십여개의 쇠침이 몸에 박혀 있고 쇠사슬로 꽁꽁 묶여 있었다.
“뭐 하다 여기 갇힌 거요? 혹시 죄인?”
“무슨..! 절대 아니오! 나는 무림맹원인데 여긴 조사하다가..! 아, 이럴 때가 아니지. 모용 놈들이 사람들을 죽이며 사술을 부리고 있소! 그들이 몰려오기 전에 어서 빨리 나가야 하오!”
거짓간파 결과 진실이었다.
그를 풀어 주는 게 모용 세가를 엿먹이는 결과가 될 것 같았다.
다가가서 쇠창살을 두드렸다. 단단한 것이 보통 철이 아니었다.
외팔이 남자가 이마에 침이 박힌 시체를 보며 말했다.
“열쇠는 그 시체 허리에 보면.. 헛!”
서걱.
검을 뽑아 휘둘렀다. 쇠창살을 모조리 썰어 버렸다. 눈을 부릅 뜨고 있는 무림맹원을 보다가 쇠침을 뽑아줬다.
“허! 대단한 고수셨군. 이 은혜는 어떻게든 갚겠소. 자네 이름이..?”
“됐으니까. 여기 일이나 무림맹에 잘 알리시오.”
“큭.. 정말 고맙소!”
도둑질하는 와중에 정체를 밝히긴 좀 그랬다. 모용 세가 엿먹이는 거로 충분했다.
여기서 훔친 것 중 내상약도 있었다. 적당한 것을 꺼내 남자에게 던졌다.
“무림맹원이라고? 무공 좀 익힌 것 같으니 이거 먹고 탈출은 알아서 하시오.”
“아..! 그러지!”
허겁지겁 내상약을 받아먹은 남자의 안색이 한결 밝아졌다. 내상약 효과가 제법이었다.
“흐으··· 이제 좀 살 것 같군. 정말 고맙소!”
운기가 끝나고 탁기를 내뱉는 그에게 말했다.
“그쪽 목숨은 알아서 챙기시오.”
“응?”
이제야 싸워볼 만한 상대가 왔다.
“드디어 왔네.”
하얀 수염을 가진 노인이 계단을 타고 내려왔다.
초절정. 권왕과 다르게 무공을 익힌 초절정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지하실 바깥에 수십 명의 기운이 느껴졌다. 이곳을 포위하는 중이었다.
노인이 살기 가득한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놈! 감히 그따위 실력으로 모용 세가를 건드려!”
얼마나 서둘러 왔는지 새하얀 수염과 머리카락이 산발이 되어 있었다.
노인의 허리엔 검이 없었다.
모용 세가의 주력은 권장법. 세가의 진짜 무공을 익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용철과 가까운 사이라는 것이기도 했다. 그는 지하실을 보며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여길 봤으니 살아나갈 생각은 말아라.”
살벌하게 노려보는 노인네의 면상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꼬장꼬장한 입매를 보니 더 그랬다.
노인공경. 선물을 주고 싶어졌다.
“늙은이. 빛나는 거 좋아해?”
양손에 음양의 기운을 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