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52 - 152화 - 무협지구(13)
152화 - 무협지구(13)
시우가 마차 밖으로 나왔다.
아직도 절정에 취해 비틀거리는 화린이를 부축했다. 그녀를 째려보는 소향이가 느껴졌지만 모른 척했다.
평평한 바위에 화린이를 앉혀주자 그녀가 속삭이듯 말했다.
“고마워.”
“아냐.”
그 광경을 멍하니 보던 은자현이 말했다.
“왜, 왜 이리 늦게 나오신 겁니까?”
“별거 아냐.”
시우가 친절하게 대답해줬으나 그는 인상을 쓰며 쏘아 댔다.
“당신한테 물은 게 아니라 사저한테 물은 겁니다. 사저?”
“···아무것도 아니야.”
“거 봐. 별거 아니라니까. 밥이나 먹자.”
주먹을 쥐며 부들거리던 은자현이 억지로 표정을 관리했다.
“으.. 해 저물기 전에 식사부터 하죠. 사냥을 좀 해 올까요?”
“됐어. 나한테 식량 많아.”
“보존 식량은 질렸습니다. 제가 금방 다녀오죠.”
숲으로 달려가는 그를 말리지 않았다.
‘사서 고생하겠다는데 뭐.’
나뭇가지라도 주울 것처럼 주변을 둘러보는 소향이를 말렸다.
“소향아 너도 그냥 앉아 있어. 이거면 돼.”
후두둑.
허공에서 검은 숯이 한가득 쏟아졌다. 인벤토리에서 튀어나온 숯들이었다.
그것을 집중해서 보던 소향이 물었다.
“···그건 도대체 어떻게 하신 거죠?”
“내가 덕구인 증거 중 하나지.”
“···.”
의심으로 똘똘 뭉친 그녀에게 웃으며 말했다.
“게다가 그 검···. 애초에 내 거잖아?”
“으엣..?”
화들짝 놀란 소향이가 검을 바짝 끌어안았다.
달라고 했다간 울기라도 할 태세였다.
‘왠지 울면 귀여울 것 같은데···.’
미움 받기 싫으니 관뒀다. 소중한 것을 지키듯 검을 껴안은 그녀에게 말했다.
“됐어. 너 가져.”
“으..”
“뭐야. 고맙다고 인사 정돈 해줄 수 있는 거 아냐?”
“고, 고맙습니.. 으응..?”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녀가 인상을 팍 찡그렸다.
“핫! 이건 덕구가 남긴 검인데. 왜 그 쪽한테 고마워해야 되는데요!”
“그게 나라니까.”
“우으..!”
볼을 부풀린 그녀를 보며 웃다가 숯에 불을 피웠다.
작은 모닥불을 만들었다.
나른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당화린이 말했다.
“시우가 주는 음식도 오랜만이네. 한동안 벽곡단만 먹느라 힘들었는데.”
“특별히 먹고 싶은 거라도 있어?”
“···달달한 거?”
“밥은 안 먹고?”
“응. 입맛이 없네.”
고개를 끄덕이고 소향이를 살폈다. 그녀는 어떤 음식을 좋아할지 궁금했다.
“소향이 너는?”
“됐어요.”
“단 거 괜찮아?”
“···네.”
그녀도 딱히 배고파 보이진 않았다. 인벤토리에서 뭘 꺼낼지 고민하다가 생크림 롤 케이크를 꺼냈다.
“자.”
부드럽고 폭신한 빵 사이에 생크림이 듬뿍 들어갔다. 당화린의 눈빛이 반짝였다.
“와 이거 저번에 먹었던···. 그 케이크맞지? 이거 맛있던데!”
포크도 꺼내서 나눠줬다.
제 손에 들린 포크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는 소향이를 뒤로하고 화린이에게 콕 하나 찍어서 먹여줬다.
“으음..! 부드러워!”
열심히 우물거리던 화린이가 행복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아.. 이 하얀 게 뭐라 그랬지?“
“생크림. 어때 괜찮아?”
“응. 엄청 맛있어.”
한입에 먹기 좋게 썰린 생크림 롤 케이크.
머뭇거리며 한 입도 먹지 않는 소향이에게 말했다.
“왜 그래? 너도 먹여줄까?”
“···됐어요. 저는 사제를 기다렸다 같이 먹을게요. 그리고 반말하지 말라니까요.”
“걔는 내가 따로 챙겨줄 테니까. 어서 먹어.”
“으.. 반말..”
그새를 못 참은 화린이가 롤 케이크를 직접 찍어먹었다.
한입 가득 넣고 행복한 듯 우물거리는 화린이의 입가에 하얀 생크림이 묻어 있었다.
“칠칠맞지 못하긴.”
“헤..”
절정 고수가 돼서 크림이나 묻히다니.
부드러운 손수건을 꺼냈다. 톡톡 두드리듯 크림을 닦아주니 기분 좋은 듯 흥흥거렸다.
붉은 입술을 내민 그녀를 닦아주던 그때.
툭.
소향이가 포크를 떨어뜨렸다. 케이크 조각을 찍어 막 입에 넣으려던 찰나였다.
그녀의 시선이 당화린의 입가에 집중되어 있었다.
“아..”
고수답게 떨어지던 포크는 중간에 잡아챘지만. 생크림 일부가 그녀의 손등에 튀었다.
무슨 생각인지 소향이의 동작이 멈췄다. 눈동자만 또르륵 움직여 이쪽을 힐끔댔다.
이건 지금 고양이가 다가온 것일까.
다가온 고양이에게 밥을 줄까 말까 고민하던 순간.
당화린이 손수건을 꺼내더니 소향이의 손등을 닦아 버렸다.
“여기 생크림 묻었네. 내가 닦아줄게!”
“아..?”
단 한 번의 손짓으로 깔끔하게 크림을 제거한 당화린이 소향이를 보며 웃었다.
‘귀엽기는.’
그런 그녀들을 보다가 케이크 하나를 찍었다. 그리고 소향이의 입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맛있을 테니까 먹어봐.”
“으..”
힐끗힐끗 당화린의 눈치를 보던 소향이가 입을 벌렸다.
천천히 벌어진 작은 입속에 케이크를 쏙 집어넣었다.
그녀의 말캉한 혓바닥에 새하얀 생크림이 닿았다.
“읏..?”
흠칫한 소향이가 입을 닫았다. 맛을 보듯 천천히 혀를 굴린 그녀의 눈이 점점 커졌다.
믿기 힘든듯 눈동자가 떨렸다. 자꾸만 두 눈을 깜박이며 입안에 들어온 그것을 꿀꺽 삼켰다.
“아..”
침을 꼴깍이며 아무 말도 못 하는 그녀가 귀여웠다. 난생처음 도토리를 먹은 다람쥐 같았다.
“맛있어?”
“네..! 아..니요?”
뒤늦게 부끄러움이 올라왔는지 소향이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황급히 무표정으로 돌아왔지만 그녀의 시선이 연신 케이크를 향했다.
“더 먹어. 많으니까.”
“아..”
케이크가 든 접시를 스윽 밀었다. 몇 번이나 멈칫거리던 포크가 케이크를 콕 찍었다.
그리고 하압.
한 입, 두 입, 세 입.
포크 속도가 조금씩 빨라졌다.
우물우물.
소향이가 눈을 감더니 몸을 부르르 떨었다. 현대 식도락의 정수. 폭력적인 단맛에 취해 버린 모습이었다.
지금 만큼은 당화린도 작게 웃음 지었다. 열심히 케이크를 먹는 소향이는 보기만 해도 뿌듯했다.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제어하며 소향이를 구경하는데 근처 수풀이 떨렸다.
푸스슥.
이제서야 사냥이 끝났는지 은자현이 나타났다. 한 손에는 토끼가 들려 있었다.
“어..?”
막 도착한 그가 멈칫했다. 그의 시선이 열심히 무언가를 우물거리는 소향이를 향했다.
소향이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흠흠..”
또륵.
돌아간 눈동자와 다르게 오물거리는 입은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
***
식사를 마친 시우가 주변을 둘러봤다.
마차를 잠깐 세우고 밥 먹을 정도는 되지만 잠자긴 부족한 공터였다.
마부석에 오르며 말했다.
“해지기 전에 잘 곳 좀 찾자. 이번엔 내가 몰게.”
“그럼 나도 여기!”
당화린이 옆자리를 차지했다. 참고로 마부석에는 세 명까지 앉을 수 있다.
은자현이 마차에 오르며 말했다.
“사저 들어가서 쉬시죠.”
“어, 응..”
못내 망설이던 소향이 객실에 올랐다.
짜악거리는 채찍 소리와 함께 마차가 출발했다.
은자현이 널찍한 의자에 감탄하며 앉았다.
“응..? 여기 웬 물기가.. 그나저나 사저. 사일검수에 대한 정보가 너무 없습니다. 점창파 사람이긴 할까요?”
“···글쎄. 그래도 정보는 찾을 수 있겠지.”
“이번 임무는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살무공을 익혀 오라니···. 이건 그냥 사저를 견제하는 것 같은데요. 대충하고 돌아가죠?”
“..그건 안 돼.”
그녀는 대답하면서도 불안해보였다. 손가락을 쉴 새 없이 꼬물거리며 심각한 눈으로 무언가 고민했다.
소향이의 귓가에 희미한 말소리가 들렸다.
- 하읏..! 그만해.. 여긴 밖인데!
- 괜찮아.
아까부터 내공을 한껏 집중했기에 들을 수 있었다. 안색을 굳힌 그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사저?”
“느낌이 이상해. 바깥 좀 둘러볼게. 넌 나오지 마.”
“네? 갑자기요?”
대답도 없이. 달리는 마차에서 문을 연 소향이 휘리릭하고 천장 위로 올라섰다.
매의 눈으로 주변을 살피던 그녀가 힐끔 시선을 돌렸다.
이쪽을 보던 시우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피식 웃었다.
“뭐하러 나온 거야?”
“저, 정찰하려고요.”
저도 모르게 움찔한 그녀가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천장에서 내려올 생각은 없었다. 한동안 주위를 살피던 소향이 눈가를 좁혔다.
먹이를 노리는 고양이처럼 자세를 낮췄다. 고개만 빼꼼 내밀어 마부석에 앉은 남녀를 훔쳐봤다.
딱 달라붙은 모습에 기분이 확 나빠졌다.
‘너무 가깝잖아..!’
***
해지기 직전에 널찍한 공터에 도착했다.
“워워..”
마차가 멈추고.
소향이 옅은 한숨을 내쉬며 천장에서 내려왔다. 아까부터 집중했더니 피곤이 급격히 몰려왔다.
‘으..’
그 원흉을 째려보는데 시우가 허공에 무언가 던졌다.
머리통만한 천 뭉치였는데 공중에서 부풀더니 천막 비슷한 것으로 변했다.
“여기서 자고 아침 일찍 출발하자.”
소향이 눈가를 좁혔다. 또 정체 모를 물건이 튀어나왔다.
던지면 천막으로 변하는 물건이라니. 덕구라고 주장하는 저 남자에게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같이 있으면서 수상한 점을 밝히려 했는데. 오히려 의문만 쌓여 갔다.
“어이 은자현? 네가 저기 들어가 자.”
“엇..”
곧 허공에서 시우 몫의 천막 하나가 더 튀어나왔다.
여자들은 마차에서 함께 자기로 하고 시간이 흘렀다.
어느새 어둑해진 한밤중.
푹신한 마차 의자에 누워 잠을 청하던 소향이 몸을 뒤척였다. 피곤한데도 잠이 오질 않았다.
‘응..?’
당화린이라는 여인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을 감고 있었으나 그녀의 시선이 느껴졌다.
긴장감을 끌어올렸다. 저 마음에 안 드는 여자가 무슨 짓을 할지 몰랐으니까.
아주 잠시.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보던 당화린이 마차 밖으로 나갔다.
‘뭐야..’
긴장이 무색하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여자의 직감 때문일까. 본능적으로 기척을 죽이고 뒤쫓았다.
‘저게..!’
당화린이라는 못된 여자가 덕구의 천막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남자와 함부로 가까이 있지 말라고 배운 그녀로선 상상도 못 할 행동. 한밤중에 남녀가 좁은 공간에 함께 있다니.
시간이 조금 흘렀다. 천막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바람 한 점 없는 날씨인데도 그랬다.
최대한 기척을 죽이고 살금살금 걸었다. 조심스레 다가가 귀를 기울였다.
- 아앙..
- 찔꺼억···.
촉촉하고 끈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게 무슨 소리지..?’
처음 들어 보는 생소한 소리에 집중했다.
- 찰팍.. 쯔걱, 찔꺼억..
물기어린 무언가가 서로 부딪치는 것 같았다. 도대체 뭘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꼴깍.
호기심과 의문도 잠시. 점점 더워졌다. 왠지 모르게 공기가 뜨거워진 기분이었다.
“하아..”
저도 모르게 열기맺힌 숨결을 내뱉으며 허벅지를 비비적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