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54 - 154화 - 무협지구(15)
154화 - 무협지구(15)
모용 세가의 태상장로 모용원.
그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모용 가주에게 향했다.
어느 날부터 모용 세가가 삐걱거렸다. 최선을 다해 막았지만 이미 늦었다. 손쓸 수 없을 만큼 완전히 망가진 뒤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모용휘가 가주에 올랐을 때부터 모든 게 시작됐다.
가주전에 들어온 그가 멈칫했다. 오늘따라 방이 유난히 어두웠다.
가주. 모용휘의 창백한 얼굴이 어두운 공간에서 홀로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귀신처럼 둥둥 떠 있던 하얀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맺혔다.
“어서 오십시오. 태상장로. 직접 보는 건 오랜만입니다.”
“···가주를 뵙습니다.”
모용원이 주변을 둘러봤다. 안 그래도 굳었던 얼굴이 더 뻣뻣해졌다.
사방에 기척이 가득했다.
태상장로인 그도 믿지 못하고 저렇게 호위를 배치하다니···.
‘흐.. 애초에 호위도 아니겠지.’
조만간 살수로 돌변할지도 모를 그들에게 시선을 뗐다. 가주에게 집중했다.
모용 세가의 심각한 상황과 반대로 가주의 얼굴은 밝았다. 빙그레 웃던 그가 자리를 권했다.
“우리 태상장로께서 화가 많이 난 듯합니다. 일단 앉으시지요.”
“후···.”
오기 전에 수없이 생각했지만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동안 차마 입에 담지 못했던 말을 내뱉었다.
“가주. 도대체 우리가 혈교랑 연관됐다는 소문이 무슨···. 하! 사실이었군요.”
아직도 미소 짓고 있는 가주를 보니 알 수 있었다. 오해 따위가 아니었다.
“하하.. 그동안 태상장로께 숨기느라 고생 좀 했습니다.”
눈을 질끈 감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대체 왜..?”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미천한 무재를 가졌던 가주가 어느 날 무공이 급진했을 때. 전대 가주의 아들들이 한 명씩 죽어 나갔을 때.
수상한 점은 많았다. 하지만 이미 늦어 버렸다.
태상장로가 가주를 노려봤다.
“이유가 뭡니까. 가문을 팔아먹고 힘을 얻으니 좋습디까?”
“하하.. 하하하!! 하하하하하!!!”
광기 어린 웃음소리에 듣는 순간 뒷덜미가 서늘했다. 어느새 가주의 경지는 그를 넘어서 있었다.
“좋냐고? 당연히 좋지. 흐..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미친놈처럼 광소를 퍼붓던 모용가주의 목소리가 확 낮아졌다. 차분한 분위기로 돌아와 차를 홀짝였다.
“장로. 반대로 묻지요. 세상천지에 힘보다 중요한 게 있기나 합니까?”
태상장로가 입을 다물었으나 가주의 말은 이어졌다.
“힘이 생기니 참 좋습니다. 어릴 때부터 저를 두들겨 패시던 장로님께 이렇게 차도 대접할 수 있게 되고···. 어서 한 모금 하시지요? 그게 더 편하실 텐데···.”
시선을 내리니 검붉은 차가 보였다. 독을 숨길 생각도 없는지 비릿한 냄새가 가득했다.
허탈함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클클.. 가주는 어릴 때부터 싸가지가 없었지. 그때 실수인척 죽여 버릴 것 그랬소. 그럼 이 지경까진 안 왔을 텐데.”
“거 안타깝구려.”
태상장로 모용원이 가주에게 주먹을 뻗었다. 기다렸다는 듯 사방에서 붉은 권강들이 쏟아졌다.
***
점창파.
소향이가 빨개진 얼굴로 시우에게 쏘아붙였다.
“···누구 마음대로 당신 여자라는 거예요!”
“왜? 하기 싫어?”
“뭐, 뭐라구요..?”
당황한 얼굴로 입만 뻐끔거리는 그녀를 은자현이 가로막았다.
“최소협. 장난도 정도껏 하십시오! 그게 무슨 헛소립니까! 싫은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열불내는 은자현과 다르게 소향이의 달싹이던 입술은 결국 닫혔다.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꼴을 보던 구릿빛 피부의 남자가 인상을 팍 찡그리며 말했다.
“하.. 지금 저보고 싸가지 없는 놈이라 하셨습니까?”
“귀는 멀쩡하네.”
그가 목소리를 내리깔며 말했다.
“점창파의 일대 제자 마일영. 그대에게 비무를 청한다.”
“오!”
“비무?!”
그 한 마디에 구경하던 제자들이 우르르 물러났다. 덕분에 커다란 원형 공터가 만들어졌다.
“자, 잠깐..! 마사형 잠시만요!”
앞을 막아선 곽해산이 다급히 말했다.
“최소협 참으십시오! 마사형은 쾌검의 달인입니다.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쾌검? 됐으니까 가서 의원이나 데려오시오.”
“으.. 조금만 버티십시오!”
말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곽해산이 어딘가로 달려갔다.
시우가 마일영이라고 소개한 남자를 살폈다.
전신에 울퉁불퉁한 근육이 가득했다. 야외에서 주로 수련했는지 피부가 까맿다.
경지는 절정이었다. 젊은 나이에 절정지경에 올랐으니 저렇게 자신만만한 게 이해는 갔다.
목검을 집어 든 그가 멋들어지게 허공에 휘두르며 턱을 치켜들었다.
“뭐.. 겁난다면 그만둬도 좋소.”
하얀 건치를 자랑하며 그의 여자들에게 씨익 웃는 것을 보니 한대 패주고 싶었다.
“하하.. 비무. 그거 좋지.”
허공에 손을 뻗고 흡자결을 사용했다. 훈련장 구석에 거치된 목검이 부르르 떨리더니 공중에 떠올랐다.
십여미터를 날아온 목검을 잡아채 놈에게 겨눴다.
“허, 허공섭물..?!”
놀란 누군가의 외침이 들렸으나 아니었다. 그냥 흡력을 발했을 뿐. 의지만으로 염력을 일으킨다는 허공섭물과는 달랐다.
하지만 겉보기엔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흠흠..’
눈동자를 굴려 그녀들을 살폈다. 눈을 반짝이며 좋아하는 당화린은 말할 것도 없었다.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힐끔거리는 소향이를 보니 흡족하기 그지없었다.
사람이 왜 관심종자가 되는지 이해가 갔다.
검을 까딱이며 마일영에게 말했다.
“시작할까?”
목검이 날아올 때부터 마일영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으음··· 그대의 사문은?”
색마 목이도나 무영신투나 당당히 말하기 곤란한 건 매한가지였다.
“그런 건 없다.”
“하..! 사문이 없다고? 설마 낭인출신이냐?”
“그런 셈이지.”
제대로 된 사문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놈의 긴장이 팍 풀렸다.
“쯧쯧.. 어처구니가 없군. 내 오늘 제대로 된 무공이 뭔지 알려주마.”
혀를 차던 놈이 검끝을 땅으로 향하더니 양손으로 붙잡았다. 그러곤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점창파의 마일영. 사용할 초식은 일수구곡이다.”
정파의 대련이란 원래 이런 것인가. 혹시나 해서 당화린을 살폈다.
“윽..”
그녀는 학을 뗀 얼굴로 고개를 좌우로 젓고 있었다. 마일영이란 놈이 이상한 거였다.
하지만 맞춰줬다. 재밌어 보였으니까.
대충 집어 든 목검을 까딱거리며 말했다.
“···최시우. 사문은 없고 사용할 초식은 턱 밑에 검 대기다.”
“턱 밑에 검..? 하하! 시건방진 낭인 놈이!”
목에 힘줄이 보일 정도로 이를 악문 녀석의 허벅지가 부풀었다.
반대로 상체는 근육이 조여지듯 움츠러들었다.
마치 활시위가 당겨진 것 같았다.
마일영이 진각을 밟았다. 무게 중심이 급격히 앞으로 쏠린 순간.
“하압..!”
내공을 머금은 목검이 벼락같이 쏘아졌다.
일수구곡(一輸九曲). 한 번의 휘두름으로 아홉 번 변화가 일어난다는 쾌검술.
쇄액!
곧게 뻗어오는 검 끝이 잘게 흔들렸다. 그가 어떻게 반응하냐에 따라 저 검의 경로가 변할게 분명했다.
명치와 단전 그리고 미간이 동시에 따끔거렸다.
단순히 아홉 번 변화가 아니라. 수십갈래로 뻗어 나갈 가능성이 담긴 쾌검이었다.
하지만 수십 개 나뭇가지를 가진 거목도 하나의 기둥에서 시작하는 법이다.
놈의 목검이 분열하기 직전. 그 찰나를 노려 찔렀다.
쩌엉!
검 끝이 맞닿았다.
마일영이 눈을 부릅떴다.
찌르기를 찌르기로 응수하다니. 행동을 완전히 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목검을 타고 들어온 경력에 팔이 저릿거렸다.
그것도 잠시. 검 끝을 비집고 들어온 목검이 손목을 후려쳤다.
“악!”
강렬한 통증에 검을 놓쳐 버렸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손목을 때린 목검이 흐릿해진다고 느낀 순간.
짜아악!
눈앞이 번쩍였다.
“어억..?”
얼굴을 부여잡으며 주춤거렸다. 난생처음 맞아본 뺨에서 뒤늦게 통증이 올라왔다.
광대뼈가 얼얼했다. 어처구니없게도 양쪽 뺨 모두 아릿했다.
제대로 반응도 못했는데 두 번이나 얻어맞은 것이다. 손목까지 치면 세 번이었다.
무어라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어느새 턱밑에 목검까지 드리워져 있었다.
시우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이것이 바로 쾌다.”
그 장면을 멍하니 보던 점창파 제자 한 명이 중얼거렸다.
“지, 진짜 턱 밑에 검..?”
“와!”
당화린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훈련장을 가득 채웠다.
짝짝짝짝!
미녀가 박수까지 치며 좋아하자 감탄의 눈으로 보던 점창파 제자들의 눈이 썩어들어갔다.
그들이 질투 섞인 눈으로 시우를 노려봤다.
소향이는 까치발을 들고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아까부터 자꾸만 자기 시야를 가리는 은자현을 피해서.
시우가 그녀들의 모습을 보고 절로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참았다.
고수의 맛은 달콤했다.
표정을 관리하며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패배를 인정하나?”
“윽..”
목이 콱 막힌 듯 아무 말도 못 하는 마일영을 보니 고소했다.
“안 해? 다시 해볼까?”
“그..”
양뺨이 퉁퉁 부어오른 놈의 목젖을 목검으로 콕콕 찔렀다. 한 번 더 덤벼들면 어디 한 군데 부러뜨릴 작정이었다.
“과연! 일영아 패배를 인정하는 것도 실력이다.”
목소리에 담긴 웅혼한 내공에 시선이 쏠렸다.
다가온 중년인을 본 마일영이 낭패한 얼굴로 고개를 조아렸다.
“자, 장로님을 뵙습니다.”
의원을 데리러 간 줄 알았던 곽해산이 장로를 불러왔다.
입가에 주름 한 자락 나 있는 중년 남자가 끄덕였다. 그가 시우에게 포권하며 말했다.
“과연 명불허전 은림이오. 은림에 신성이 떠올랐구려.”
최선을 다해 소향 사저의 시야를 가리던 은자현이 멈칫했다.
장로가 감탄하며 하는 말에 개미 기어가듯 중얼거렸다.
“시발.. 내가 은림 제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