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60 - 160화 - 무협지구(21)
160화 - 무협지구(21)
흙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던 오장로가 눈을 떴다.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 드디어 나왔군. 치료는 어떻게 됐나?”
“이제 괜찮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입니까?”
“내 사제. 그러니까 명장로가 깨달음을 얻은 듯하네. 혹시나 누가 방해하지 못하도록 호법을 서는 중이지.”
명장로를 자세히 관찰했다. 초점이 흐릿했다. 마치 먼 곳을 보는 것 같았다.
그의 입이 구결이라도 외우듯 미세하게 달싹이고 있었다.
어느 순간 주변의 기가 들끓기 시작했다.
우우웅..!
반경 십여미터에 있는 기운이 회오리치더니 명장로에게 흡수되기 시작했다.
신기한 광경에 감각을 곤두세웠다.
끝도 없이 빨려 들어가던 기운이 몸을 가득 채웠다.
뿌득. 뿌드득.
뼈 소리와 함께 구부정했던 허리가 조금씩 펴졌다. 피부가 갈라지며 새살이 돋아났다. 자글자글하던 주름도 일부 사라졌다.
환골탈태. 지켜보던 제자가 감탄을 흘렸다.
“오오..”
마음고생탓인지 60살 나이에도 불구하고 다 늙은 노인처럼 보이던 명장로. 그가 이제야 제 나이로 되돌아왔다.
오히려 젊어졌다 할 수 있었다.
감겨 있던 눈이 떠지며 형형한 눈빛이 뿜어졌다.
노인이 한순간에 중년인으로 변했다. 초절정 고수가 겪는다는 제대로 된 환골탈태였다.
‘과연···’
그 과정을 머릿속에 새겨넣었다. 절정 지경에서 초절정 고수로 발돋움하는 장면이었다.
젊음을 되찾는다는 반로환동까진 아니어도 충분히 신비스러운 광경이었다.
경지를 갈무리하듯 심호흡하던 명장로가 주변을 둘러봤다.
호법을 서던 점창파 제자들이 한 목소리로 외쳤다.
“명장로님! 성취를 감축드립니다!”
초절정 고수. 드디어 장로직에 어울리는 무공을 가지게 된 것이다.
만감이 서린 얼굴로 주변을 보던 명장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자들에게 일일이 포권했다.
“다들 정말 고맙네. 으음..?”
사방에 인사하던 그가 시우를 발견하고 눈이 커졌다.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
“장로님..?”
자연스레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시우 바로 앞에 도착한 명장로가 구십 도로 허리를 숙이며 포권했다.
“사일검수를 뵙습니다!”
경악의 눈동자가 쏟아졌다. 수십 명의 건장한 남정네들의 시선이 몰렸다. 아주 살짝. 아니,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사, 사일검수..?”
갑자기 조폭 두목이라도 된 느낌이었다.
***
산속 공터.
십여평 넓이의 평평한 흙바닥. 명장로가 평소 수련 하던 장소였다.
시우가 명장로를 살폈다.
20년은 젊어진 그를 보고 있으니 신기했다.
‘깨달음 하나 얻었다고 젊어지다니.’
뿐만 아니라 강해졌다. 40년 동안 궁리하고 고민했던 게 폭발하듯 넘친 것이겠지만 신기한 건 매한가지였다.
‘저 정도면 초절정 끝자락인가?’
스릉.
명상하듯 집중하던 명장로가 검을 뽑아 들었다.
“시작하겠습니다.”
우웅!
검에서 찬란한 광채가 피어올랐다. 눈부셨다. 해가 쨍쨍한 정오인데도 그랬다. 직시하기 힘들 정도로 밝았다.
명장로가 검강을 휘감은 검을 허공에 내질렀다.
강렬한 광채가 직선으로 뻗어졌다. 마치 광선같았다. 태양처럼 눈부신 그것이 십여미터 밖에 있던 바위에 닿았다.
즈즈즛.
바위에 조그마한 구멍이 뚫렸다.
처음엔 동전만 하던 구멍이 순식간에 커지기 시작했다.
스으으..
바위가 증발했다. 재가 되어 바람에 흩날렸다. 감탄이 절로 나왔다.
“과연..”
다른 사람이 쓰는 사일을 보니 색다른 기분이었다.
사일검법을 펼친 명장로가 피로해진 얼굴로 말했다.
“후.. 이거 쉽지 않군요. 그런데 정말로 저에게 사일검법에 대해 묻겠다는 것입니까? 사일검수인 그대께서?”
“···말씀부터 편하게 하시지요.”
잠시 망설이던 명장로가 끄덕였다.
“으음.. 그대가 불편하다면야. 알겠네. 그나저나 정말로 내게 배우고 싶다는 건가?”
“예. 저는 구결을 통해 익힌 게 아니라 모르는 게 많습니다.”
“허.. 사일을 스스로 깨달았다는 건가. 말도 안 되는 재능이군···. 그대의 재능에 찬탄을 보내네.”
사실 스킬로 사용하는 것이기에 조금 민망했다.
“흠흠. 아무튼 사일검법이란 게 대체 뭡니까?”
“점창파의 사일검법과 그대가 스스로 익혀낸 사일이 같은 것이란 보장은 없지만 참고하라고 말해주겠네.”
고민에 잠겼던 명장로가 입을 뗐다.
“사일검법. 내 생각에는 닿을 수 없는 것에 닿고자 발버둥친 인간의 집념이 담긴 검법이 아닌가 싶네.”
“집념? 조금만 더 자세히 설명해주십시오.”
“무언가를 베려거든 그 대상을 보아야 하지. 태양을 찌르려면 적어도 태양을 봐야 할 것 아닌가? 그 단순한 이치를 나는 너무나 늦게 깨달았네.”
“태양을 본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말 그대로네. 나는 자네의 검에서 분명 태양을 보았네. 덕분에 깨달을 수 있었지.”
하늘을 봤다. 강렬한 존재감을 내뿜는 태양이 보였다. 전혀 이해가 안 갔다.
“태양은 상징적인 것이네. 결국 대상을 명확히 보고 검 끝에 모든 것을 담아 쏘는 것. 그게 바로 사일검법이라네.”
모든 것이라니. 너무 추상적인 말이었다.
“···검에 내공이라도 담아 찌르는 것입니까?”
“으음.. 내공을 담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것만으론 모자라. 말 그대로 발악하듯 가진 모든 것을 검 끝에 내걸어야 하네.”
잠시 골똘히 생각하던 명장로가 고개를 들었다.
“그래. 영혼까지.”
“영혼..?”
“내공 한 줌 없는 노인의 검. 이제야 이해가 가네. 영혼까지 화살로 제련해 태양마저 꿰뚫는 것. 그게 바로 사일검법의 요체일세.”
“음···.”
조금 단순하게 생각해봤다. 먼저 영혼에 힘이 있다고 가정했다.
‘영혼을 제련한다라.’
운동이 떠올랐다.
무거운 것을 들면 근육이 찢어지고, 회복 되면서 더 강건한 근육을 가지게 된다.
영혼에 수준이 있다면 마찬가지일 것 같았다.
‘영혼의 격.’
분명 각성권을 사용했을 때. 영혼의 격이 부족하다는 말을 들었었다.
스킬을 통해 강제로 사일을 사용하면서 영혼의 성장통을 느끼는 거라고 보면 될 것 같았다.
‘내 영혼의 격이 올랐나?’
영혼이 성장한 효과 중 하나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빠른 성장.
요즘 성장이 빠르다 싶었는데 사일덕을 본 것 같았다.
하지만 약도 과하면 독이 되는 법이다.
‘적당히 써야겠네.’
***
점창파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오장로와 만났다. 사로잡은 습격자들을 고문한 결과가 궁금했다.
“놈들은 어디서 온 자들이랍니까?”
“충성심이 대단한 건지 한 명도 입을 열지 않네. 하지만 혈마령을 꺼내 든 놈들이 뻔하지 않은가. 혈교 아니면 모용 세가겠지. 고문을 통해 놈들의 본거지가 어딘지 캐내는 중이네.”
“그렇군요.”
오장로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그나저나 정말 떠날 셈인가?”
“예.”
“정말 아쉽구만···. 장문께서 폐관이 끝나면 그대를 보고 싶어 할 거 같은데. 점창파에서 일이년 정도 함께 수련하며 지내는 건 어떤가?”
끔찍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
그는 모유선자가 기다리는 청봉현으로 돌아갈 것이다.
“갈 곳이 있어서요.”
오장로가 아쉬운 얼굴로 나무 상자를 내밀었다. 고풍스러운 금테두리로 감싸인 것이 제법 귀해 보였다.
느껴지는 기운으로 보아 영약같았다.
상자를 여니 뜨거운 공기가 확 풍겼다. 진홍색 뿌리가 한가득 들어 있었다.
“명장로를 지켜줘서 정말 고맙네. 대가라고 하긴 뭐 하지만 우리의 성의네.”
“이건..?”
“천 년 묵은 태양옥지 뿌리네. 오늘 아침 운 좋게 구했지."
옆에서 놀란 표정의 당화린을 보니 귀한 영초인 것 같았다. 그녀가 작게 속삭였다.
“화산에서 열기를 먹고 자라는 영초야. 천 년이면 절정 고수한테도 효과가 있을 거야.”
“오..?”
조금 더 자세히 살폈다. 진홍색 뿌리가 마치 용암을 보는 듯했다. 만져 보니 뜨끈한 열감이 느껴졌다.
양기영약.
아무래도 쓰러졌던 소향이를 위해 급하게 구한 영초인 것 같았다.
“양기에 치중된 영약이긴 해도 조금씩 복용하면 괜찮을 것이네. 내공증진 효과가 뛰어나니 그대들이 알아서 나누어 먹게.”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
은자현은 점창파를 떠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신살무공을 익혀 오란 임무는 실패였지만 이 정도면 충분했다. 사등분으로 나눈 태양옥지 뿌리가 든든했다.
앞서 걷는 소향 사저를 몰래 살폈다. 점창파에서 한 번 쓰러진 뒤로 이상하게 더 아름다워진 것 같았다.
‘저 무복은··· 처음 보는 건데?’
그녀가 입던 것과 비슷했지만 분명히 달랐다. 묘하게 이질적인 그 복장도 잠시.
봉긋한 엉덩이에 시선이 쏠렸다. 오늘따라 도드라져 보였다.
뭔가 야한느낌이 폴폴 풍겼다.
‘···조금 커진 것 같은데?’
걸을 때마다 살랑이는 둔부를 보니 애가 탔다.
‘이제 은림만 돌아가면 저게 내···. 응?’
갈림길. 자연스럽게 최시우를 따라가는 소향 사저를 보고 기겁했다.
“사, 사저 잠시만요!”
그녀를 데리고 거리를 벌렸다. 도둑놈에게서 최대한 멀어진 다음 속삭였다.
“어디 가시는 겁니까! 이제 은림으로 돌아가는 거 아니었어요?”
“···무슨 소리야. 사일검법은 익히고 돌아가야지.”
머리가 띵해졌다.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그녀가 보였다. 뒤통수를 망치로 후려맞은 것 같았다.
“사일검법은 익힐만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재수 없으면 40년이 걸릴지도 모르는데 그걸 익히겠다구요?!”
사십 년. 터무니없이 긴 세월이다.
그런데.
무슨 생각인지 소향 사저의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40년..? 좋아..”
“조, 좋다구요?”
“아, 아냐! 아무튼 나는 오라.. 아니, 최소협 따라가서 사일검법을 익힐테니까 그런 줄 알아.”
말도 안 되는 소리. 며칠간 어떤 마음으로 참아왔는데. 이렇게 되선 안 됐다.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그냥 은림에 돌아가서 잘 설명하고 다른 임무로 대체하죠! 이건 시간 낭비입니다!”
그녀가 고개를 홱 돌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싫어. 너 혼자 가.”
“네, 네?”
“나는 사일검법..이 궁금해. 더 알아볼래.”
“무슨! 저희 어머니께 뭐라고 말한단 말입니까! 앞으로 몇 년! 아니, 몇십 년이 걸릴지 모르는데요!”
“···너가 잘 말씀드려. 너무 오래 걸리면 가끔 돌아갈 수도 있잖아?”
은자현이 뻐근해진 뒷목을 주물렀다.
“이, 이런..”
막무가내였다. 소향 사저의 눈빛이 이상했다.
마치··· 사랑에 미쳐 버린 철없는 계집애 같았다. 그토록 바라던 눈빛이 다른 남자를 향하고 있었다.
‘도대체 언제?’
눈 뜨고 코 베인 기분이었다.
설마 했던 끔찍한 악몽이 현실로 변했다.
“앗..!?”
그녀의 미간이 확 좁혀졌다. 시선을 따라가니 도둑놈과 팔짱 낀 당화린이 보였다.
억장이 무너졌다. 저런 미녀가 있음에도 사저를 빼앗다니.
소향 사저가 다급히 말하며 달려갔다.
“스승님께는 내가 따로 전서구 보낼게!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드려. 그럼 잘 가!”
“어어..”
이번 임무만 끝나면···. 이라는 생각으로 버텼던 그에게 보답은 없었다.
도둑놈과 함께 떠나는 그녀를 우두커니 서서 지켜봤다.
하늘이 어둑해질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