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69 - 169화 - 아카데미(8)
169화 - 아카데미(8)
코피를 질질 흘리던 강수호가 주춤했다. 황급히 화장실 문을 닫으며 소리쳤다.
“뭐, 뭡니까!”
“앗..! 죄, 죄송해요.”
바지를 추스른 뒤 인상을 찡그리며 화장실에서 나왔다.
얼굴이 살짝 붉어진 성녀가 시선을 피했다.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
“남의 방에 함부로 들어오다니···. 이게 무슨 짓입니까.”
“정말 죄송해요. 감이 안 좋아서 어쩔 수 없었어요.”
“감..?”
그녀가 자세를 바로 했다. 급하게 뛰어온듯 흐트러진 드레스 자락을 정리했다.
“후우··· 네. 감이요. 저는 어릴 때부터 감이 좋았거든요.”
입을 다물었다. 어이가 없었다. 겨우 감 좀 나쁘다는 이유로 다짜고짜 방문을 부수다니.
게다가 오늘 처음 본 사이다.
순간 짜증이 치밀었다. 버럭 소리를 지르려다 성녀와 눈이 마주쳤다.
반짝이는 커다란 눈망울이 보였다. 헤벌쭉 펴지려는 입매를 겨우 붙들었다. 도저히 화낼 수 없었다.
“···무슨 일인데요. 자세히 좀 말해 봐요. 하나도 모르겠으니까.”
성녀가 입술을 오물거리며 무언가 고민했다.
“으음.. 일단 사과부터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무례하게 방에 들어와서 정말 죄송합니다.”
그녀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거대한 무언가가 출렁거렸다. 얼마 남지도 않은 화가 단번에 사라졌다.
“흠흠.. 왜 그랬는데요.”
“네. 처음부터 설명드리겠습니다. 저는 프레이야 여신님의 종입니다. 남들에겐 성녀라 불리지요.”
고개를 끄덕이다 무언가 떠올랐다.
“아!”
이걸 이제야 깨닫다니 어이가 없었다. 어릴 때 어머니와 다녔던 신전이 프레이야 여신교였다.
여신님이라고만 부르다 보니 잠시 까먹었다.
앤에게서 구해 준 것으로 추정되는 여신. 그녀가 바로 프레이야 여신이었다.
“일단 앉아서 이야기하죠. 마실 것 좀 가져올게요.”
“어머.. 감사합니다. 강수호님.”
냉장고를 뒤졌으나 적당한 차가 없었다.
컵에 맹물을 따르며 복잡해진 머리를 식혔다.
‘프레이야 여신님의 성녀라고..’
사실 배신감이 컸다.
며칠 전. 호텔 방에서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낼 때 도와주지 않았으니까.
‘후..’
곧 탁자를 사이에 두고 성녀와 마주 앉았다.
“여기 물이요. 딱히 차같은 게 없네요.”
“저는 이거로 충분합니다. 그나저나 강수호님. 말씀 편하게 해주시겠어요?”
한결같은 미소가 살짝 부담스러웠다. 성녀라는 존재가 너무 공손했다.
“···왜요?”
“그대는 여신께서 선택한 용사시니까요.”
“용사라면..?”
“어지러운 세상을 구원해 줄 유일한 존재입니다.”
순간 머릿속이 정지됐다. 자신이 세상의 주인공이라 생각했는데 진짜였다니.
“···내가 진짜 용사라고?”
화사하게 웃은 성녀가 말했다.
“네. 지금까지 큰 어려움 없이 잘 자라시지 않았습니까? 느끼셨는지 모르겠지만 그게 바로 여신님의 가호였습니다.”
“가호라···.”
쉽사리 동의할 수 없었다. 며칠 전에 겪은 지옥 같은 일이 떠올랐다.
얼굴이 절로 굳었다. 고개를 갸웃거린 성녀가 말했다.
“최근에 직접 기적을 겪으셨지 않습니까? 용사님을 위해 여신께서 힘을 발휘하셨을 텐데···.”
앤의 얼굴을 벽돌로 찍었을 때가 떠올랐다.
“그..랬긴 했지.”
성녀가 두 손을 가슴께에 모으며 웃었다. 뭉클거리는 살덩이에 절로 시선이 쏠렸다.
“아..! 은혜를 느끼셨다니 정말 다행이네요. 정확히 어떤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마 시련이 찾아왔을 겁니다. 고통받는 수호님을 보다 못한 여신께서 직접 나섰으니까요. 물론··· 대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요.”
“대가..?”
“네. 신께서 현상계에 직접 개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신님은 그때 이후로 잠드셨습니다. 당분간 수호님을 지켜 줄 수 없게 된 거죠.”
“아..?”
입이 쩍 벌어졌다. 앤을 물리쳐준 덕분에 한동안 지켜 주지 못했다고..?
“그분께서 잠들기 전. 저에게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곧 수호님이 이곳에 찾아올 터이니 자신이 깨어나기 전까지 지켜달라고.”
“세, 세상에..”
뒤통수가 뻐끈했다. 여신만 믿고 그 수상한 방에 들어갔었는데. 그때는 잠든 상태였다고..?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흔들었다. 그것도 모르는 성녀가 말을 이었다.
“특히 수호님의 씨앗은 정말 귀중한 것이니 소중히 지키라 하셨습니다. 어..? 표정이 왜 그리 굳으셨나요. 설마.. 며칠 사이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 아니지요?”
파르르 떨리는 입꼬리를 억지로 올렸다.
“그으..럴 리가. 아무 문제없어.”
“참으로 다행입니다. 그럼 씨앗. 그러니까 특성은 각성하지 않으셨겠네요? 수호 님은 아직 준비되지 않았으니······.”
그녀의 말이 이어졌지만 들리지 않았다. 이명 소리와 함께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수호님. 어디 편찮으신가요? 축복이라도 해드릴까요?”
“아하하.. 아냐! 그런데 말이야··· 그 특성이란 거. 한 번 각성하면 도로 무를순 없나?”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물었으나 절망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평범한 방법으론 거의 불가능합니다. 큰 희생을 치러야할 텐데.. 설마..?”
“아, 아냐. 전혀 문제없어. 그냥 혹시나 해서.”
의심하듯 눈가를 좁힌 성녀에게 다급히 말했다.
“그, 그런데! 내, 내가 용사면..”
“네. 말씀하시지요.”
“그러니까··· 그게..”
머뭇거리던 성녀가 물었다.
“설마.. 특성에 무슨 문제라도..?”
“아, 아냐! 용사면 어, 엄청 중요한 사람인 거지?”
“···그럼요.”
성녀의 미간이 점점 좁아졌다.
어서 화제를 돌려야 했다. 입이 바싹바싹 말랐다. 변태같이 엳듣기 가호 따위를 얻었다고 말할 순 없었다.
결국. 아무 말이나 되는대로 지껄였다. 아까부터 신경 쓰이던 것이 튀어나왔다.
“리디아. 가, 가슴 만져도 돼?”
말하다 보니 순간 천재인가 싶었다. 용사라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
‘성녀 가슴 정도는 만져도 되지 않을까?’
출렁이는 그것을 보며 침을 삼켰다. 기대감을 담고 시선을 올렸다.
성녀와 눈을 마주친 순간 찔끔했다. 싸늘한 눈매엔 경멸만이 가득했다.
“수호님.. 장난이 너무 심하시네요.”
여전히 웃고 있었으나 차가웠다. 목소리에서 느껴지던 온기가 모조리 사라졌다.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미, 미안..”
냉기 어린 목소리에 그곳이 쪼그라드는 기분이었다.
***
교류회 2일차 오전 9시.
엘븐하임 아카데미 입구에 생도들이 모였다.
오늘 일과는 두 가지였다.
견학과 친선대련.
오전엔 생도들끼리 엘프 아카데미를 견학하기로 예정돼 있었다.
시우가 안내역으로 온다는 에반을 기다리며 혀를 찼다. 이 녀석은 첫날과 마찬가지로 오늘도 늦었다.
‘어?’
우연히 강수호를 봤는데 얼굴색이 어제와 달랐다.
다 죽어 가던 녀석이 회복됐다. 축 늘어졌던 어깨가 당당히 펴졌다. 거뭇하던 다크서클도 거의 사라졌다.
‘짜식. 맷집이 제법인데? 더 괴롭혀도 되겠다.’
처남에게 어떤 선물을 줄지 고민하고 있을 때.
뒤늦게 에반이 나타났다.
20분이나 늦은 주제에 느긋하게 걸어왔다. 어이가 없었다.
“음.. 모두 오셨군요. 그럼 따라오시죠.”
한 생도가 인상쓰며 말했다.
“잠시만요. 늦었으면 사과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에반이 시계를 힐끗 보더니 혀를 찼다.
“겨우 20분 가지고···. 아..! 단명족인 인간에게 20분은 제법 길겠군요. 제가 실수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허..”
피식 웃은 그가 망토를 펄럭이며 아카데미로 들어섰다.
싸가지없는 행동을 보니 입맛이 돌았다.
어떻게 하면 일주일 안에 저놈 앞에서 성녀를 따먹을 수 있을지 고민했다.
‘약혼자가 나한테 앙앙거리면 어떻게 반응하려나.’
머리를 굴리며 아카데미에 들어갔다.
건물이 거의 없었다.
빽빽하게 가득 찬 푸른 나무가 보였다. 잘 관리된 수목원에 들어온 것 같았다.
“여긴 정령과 계약하지 못한 아이들이 주로 다니는 곳입니다.”
“아이들이요?”
“20살도 안 된 어린 엘프들이죠.”
얼마 걷지 않아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엘프들이 보였다. 물장구 치며 놀던 그들이 고개를 들었다.
“어..? 저기 좀 봐! 인간이야! 귀가 엄청 짧아!”
“으에.. 저러면 들리긴 하는 거야?”
“그러게. 지금 우리 말도 안 들릴 거 같은데? 이봐 인간 이거 들려?”
이쪽을 기웃거리는 엘프들에게 에반이 소리쳤다.
“모두 인간에게 신경 쓰지 말고 각자 자리로 돌아가십시오. 교류회에 방해됩니다.”
“우웅.. 네에!”
아이들이 쪼르르 사방으로 흩어졌다.
한 엘프는 나무에 기대 눈을 감았다. 어떤 엘프는 물가에서 발을 흔들며 물장구쳤다.
그들을 보던 에반이 말했다.
“저건 정령 친화력을 쌓기 위한 수련입니다. 자연과 교감하는 게 가장 중요하죠.”
정령사로 보이는 한 생도가 질문했다.
“저런 방식으로 수련하면 하급 정령과 계약하는데 얼마나 걸립니까?”
“재능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5년 정도 걸립니다.”
“너무 느리지 않습니까? 정령석은 이용하지 않는 겁니까?”
인간의 주된 수련방법은 정령석을 손에 쥐고 명상하는 것. 그에 비하면 엘프의 방식은 너무 느렸다.
에반이 피식 웃었다.
“정령석으로 빠르게 강해져 봐야 의미 없습니다. 한계가 금방 찾아오죠. 최상급 정령과 계약한 인간이 단 한 명도 없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건..”
“이 방법이 정도입니다. 게다가 5년.. 단명족인 인간과 다르게 엘프에겐 그리 긴 시간도 아닙니다.”
에반의 얼굴에 비웃음이 가득했다.
*
숲을 지나 널찍한 공터에 도착했다. 사각형 대리석 바닥이 보였다.
대련장이었다.
아카데미를 지나며 한 번도 길을 틀지 않았다. 애초에 이곳으로 곧장 온 것 같았다.
대련하던 엘프들이 에반을 발견하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반님? 왜 여길 벌써···. 친선대련은 오후 아니었습니까?”
“하아.. 오랜만에 인간들과 있었더니 피곤하군요. 친선대련부터 끝내고 남은 곳은 알아서 관람시킬 생각입니다.”
“어.. 교관님들도 아직 안 오셨는데요?”
“됐습니다. 제가 책임지죠. 그나저나 제 상대는 누굽니까.”
드디어 기대했던 대련시간이다. 시우가 앞으로 나섰다.
“호오.. 6성? 인간치곤 제법이군요.”
에반이 지팡이를 짚은 채 고개를 치켜들었다. 포스터에서 봤던 그 자세였다.
비릿하게 올라간 입꼬리를 보며 고민했다. 때려주고 싶은 곳이 너무 많았다.
‘어디에 피를 낼까···.’
에반이 제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었다. 양팔을 쫙 펼치며 말했다.
“뭐.. 결과는 뻔하지만.. 시작하지요. 세 수를 양보하겠습니다. 그동안 방어만 하지요. 자 들어오십시오.”
녀석의 오뚝 솟은 콧대가 탐스러웠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코피가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