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72 - 172화 - 아카데미(11)
172화 - 아카데미(11)
시우가 세계수 수액을 시원하게 들이켰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청량감이 짜릿했다.
소모됐던 내력이 쭉쭉 차올랐다. 내력을 회복한지 벌써 두 번째.
에반 녀석의 손끝이 바르르 떨렸다.
콰직.
푸른 냉기가 뿜어져 나오는 함정을 짓밟았다. 놈이 준비한 아티팩트는 모조리 고철로 변했다.
“더 없냐?”
“너 이 새끼···! 도대체 수액이 얼마나 많길래..?”
수액병을 빙글빙글 돌리며 놀렸다.
“부탁하면 한 모금 줄 수도 있는데. 어때?”
“이익..!”
주춤 물러나는 에반을 보다가 피식 웃었다.
넘쳐나는 내공을 주먹에 모았다.
순식간에 응집된 내공이 푸른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금강파산권(金强破山拳).
권강이 순식간에 커졌다. 주먹보다 몇 배는 커진 강기가 대포알처럼 쏘아졌다.
콰아앙!
녀석을 지켜 주던 암석 따위가 모조리 박살 났다.
“앱솔루트 쉴드!”
노란 배리어가 권강을 막아섰다. 놈이 양손을 앞으로 뻗었다. 이마에 핏줄이 돋아났다.
그것도 잠시.
쩌저적.
배리어에 거미줄처럼 금이 생겼다.
쩌엉!
결국 산산조각 났다. 권강을 둘러싼 항마력에 버티지 못했다.
심장을 꿰뚫린 녀석이 물로 변했다.
에반이 창고 구석에 다시 나타났다. 입가에 한줄기 피가 흘러내렸다.
“크허억..! 빌어먹을.. 개 같은 항마력 같으니···.”
피식 웃으면서 녀석의 마력을 계산했다. 벌써 절반 이상 소모됐다.
마력이 소모되길 기다린 것은 놈만이 아니었다.
‘이제 많아야 두 번? 얼마 안 남았네.’
에반 놈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유일한 입구를 등졌다. 압박하듯 천천히 걸어갔다.
이를 악문 녀석이 성녀를 쳐다봤다.
“이익..”
성녀는 헬레나 옆에서 얌전히 서 있었다.
애초에 원한도 없는 두 사람이 싸울 이유는 없었다.
“에반. 이제 그만하고 같이 사과해요. 정중히 사과하고 보상하면 용서받을 수 있을지도 몰라요.”
“미친! 나보고 사과 하라고?! 인간 따위한테?! 으아아악!”
발작하던 에반이 품에서 무언가 꺼내 들었다.
새빨간 나침반.
그것을 보고 발걸음을 멈췄다. 직감이 경고했다. 뒤통수가 저릿한 것이 느낌이 좋지 않았다.
팔이라도 잘라버릴까 하다가 그만뒀다. 이미 늦었다.
어느새 뻣뻣해진 근육을 풀었다. 과한 긴장은 대응속도를 늦출 뿐이었다.
헬레나와 시선을 교환했다. 그녀도 이상함을 감지했는지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에반이 실핏줄 터진 눈으로 노려보더니 소리쳤다.
“날 원망 마라 인간! 네놈이 자초한 거니까!”
녀석의 팔뚝에 힘줄이 돋았다.
콰직.
꽉 쥐어진 주먹에 나침반이 산산조각 났다.
“크윽!”
날카로운 가시가 손등을 뚫고 튀어나왔다. 마치 촉수처럼 팔을 타고 심장에 파고들었다.
가슴에 구멍 뚫린 에반이 피를 토했다.
쩌저적!
허공이 갈라지며 사람 형체가 튀어나왔다.
보라색 피부를 가진 남자가 허공을 걸어 내려왔다. 머리에 달린 짐승뿔이 인간이 아님을 보여줬다.
마족. 날카로운 두 개의 뿔에서 마기가 물씬 풍겼다.
남자가 고개를 좌우로 꺾으며 히죽 웃었다. 듣기 싫은 목소리가 지하창고를 진동시켰다.
-하아.. 이 상쾌한 공기. 짜릿하군.
느긋하게 양팔을 펼치던 마족이 멈칫했다. 히죽거리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하.. 건방진 엘프 놈이 감히 껍데기만 바쳐?
심장이 꿰뚫린 에반이 물로 변해 사라졌다. 몇 걸음 옆에서 다시 나타났다.
파리해진 안색으로 소리쳤다.
“쿨럭.. 계약대로 몸을 바쳤으니 저 인간놈을 죽여!”
성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마, 마족?! 에반!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예요!”
“리디아 걱정 마. 우린 안전할 거야.”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시우가 눈가를 좁히며 마족을 살폈다. 겉으로 보기에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없었다.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굳은 몸을 풀며 자세를 잡았다. 헬레나 앞을 막아섰다.
-허참.. 계약이라.. 그래. 몸을 바치면 놈을 죽여주기로 했었지.
제 턱을 쓰다듬던 마족이 모든 동작을 멈췄다.
히죽웃으며 말했다.
-그래 좋다. 엘프. 네놈이 원하는 대로 해주마.
마족이 자신의 심장을 찔렀다.
촤악!
펄떡거리는 심장을 뽑아내더니 거침없이 터뜨렸다.
피 대신 검은 안개가 터져 나왔다. 폭발하듯 사방으로 번졌다.
그그극.
안개에 닿은 지하 창고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에반이 기겁해서 소리쳤다.
“미친새끼..! 이게 무슨 짓이냐!”
심장을 잃고 허물어진 마족이 실실 웃으며 말했다.
-크하하하! 네놈이 원하는 걸 공짜로 줄 것 같으냐! 그냥 다 같이 죽자!
시우가 내공을 끌어올리고 감각을 곤두세웠다.
일렁거리는 지하창고에서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설마···. 공간 이동?’
예전 봉황에게 강제 전이 됐을 때도 이런 느낌이었다.
“아아악!”
뒤틀린 공간에 에반이 삼켜지고 성녀마저 빨려 들어갔다.
구구궁!
창고 바닥이 무언가에 짓눌린 듯 깨져나갔다. 마치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시우님 가까이 붙으세요!”
헬레나가 복잡한 수인을 맺더니 배리어를 생성했다. 두 명이 겨우 들어갈 만큼 좁은 배리어.
순식간에 차오른 안개가 배리어를 짓눌렀다.
빠뜨드득.
무언가 갈려 나가는 소리와 함께 헬레나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읏..”
항마력을 머금은 호신강기로 배리어를 감쌌다. 그녀의 안색이 나아진 만큼 내력이 급격하게 소모됐다.
세계수 수액을 마실 틈도 없었다.
콰지직!
내력이 줄어드는 속도를 계산했다. 곧장 판단이 섰다.
둘 다 버티는 건 무리였다. 그는 어디로 전송되든 살아남을 자신이 있었다.
남은 내공을 모조리 호신강기에 때려 박았다. 그것으로 헬레나를 감싸며 뒤틀린 공간으로 뛰어들었다.
“아, 안 돼..!”
경악한 헬레나가 손을 뻗는 것을 마지막으로 전송에 휩싸였다.
*
번쩍.
순식간에 주변 풍경이 바뀌었다. 반사적으로 주변을 살폈다.
일단 실내였다.
‘복도?’
천장까지 검은색 벽으로 막혔다. 창문하나 없었다. 어두침침한 복도가 쭈욱 이어져 있었다.
마족놈이 무슨 수작을 부린 건지 고민했다. 감각을 곤두세우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기감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장님이 된 것처럼 답답했다.
‘봉황한테 전송당했을 때도 이랬는데···. 그럼 여긴 심상 공간인가?’
주변은 고요했다. 눈에 보이는 위험은 없었다.
인벤토리에서 세계수 수액을 꺼내 들고 들이켰다.
“크으..”
시원한 청량감과 함께 텅 빈 단전이 가득 차올랐다.
‘헬레나는 괜찮으려나.’
비상용 통신기를 꺼냈다. GPS 신호는 잡히지 않았다. 역시 정상적인 공간은 아니었다.
통신 신호가 딱 한 칸 잡혀 있었다. 최상급 통신 아티팩트를 사놓은 보람이 있었다.
‘되려나?’
헬레나에게 연락해봤다.
-뚜르르.. 뚜르르.. 딸각.
“오? 헬레나?”
-시..우..님?! 몸은 괜찮으..세..요..?
“멀쩡해. 헬레나는 괜찮아?”
-저..도오.. 멀쩡.. 저는... 지하.. 창고..에.. 그대로...
늘어지는 목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통신칸을 보니 당장 끊어질 것처럼 깜박였다.
“헬레나. 말이 너무 느린데?”
-저느은.. 너무... 빨라아...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느려졌다. 잠시 고민하다 깨달았다. 서로 시간 흐름이 다른 것 같았다.
“일단 난 멀쩡하니까 걱정하지 마. 여긴 검은 벽으로 사방이 막혔어. 복도가 쭉 이어져 있는데. 혹시 알아?”
-미··궁····. 걱·····정·········마··········곧···············해················결.
뚝.
결국 통신이 끊겼다. 다시 연결해 봤지만 먹통이었다.
‘미궁, 걱정 마. 곧 해결?’
가장 큰 걱정을 덜었다. 헬레나는 이곳에 빨려들지 않은 것 같았다.
게다가 바깥에서 해결할 방법도 있어 보였다.
‘기다리기만 해도 되나?’
헬레나의 느려진 목소리로 보아 시간 흐름이 다른 것 같았다. 여기서 얼마나 버텨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얼핏 느끼기에 네다섯배 정도 말이 느렸다.
‘여기서 일주일이 바깥의 하루 정도 되려나?’
점점 느려진 말소리를 보아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잠시 고민하다가 생각을 접었다.
어차피 정보가 없으니 추측에 불과했다. 시간 흐름이 다른 게 아닐 수도 있었다.
인벤토리가 있으니 적어도 굶어 죽을 걱정은 없었다.
쭈욱 이어진 복도를 보다가 눈가를 좁혔다. 어두워서 끝이 보이질 않았다.
벽에 다가가 주먹으로 툭툭 두드렸다.
‘제법 단단한데···.’
부숴볼까 하다가 말았다. 주변에 간이 결계 아티팩트를 설치하고 가부좌를 틀었다.
이런 수상한 곳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건 결국 본인의 실력이었다.
세계수 수액을 거침없이 들이켰다.
다시 한번 초절정에 오를 시간이었다.
*
뿌드득. 뿌득.
시원한 뼈 소리와 함께 눈을 떴다.
“스으읍.. 후우..”
상쾌한 감각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바닥에서 튕기듯 일어났다.
온몸이 가벼웠다. 전신을 꽉꽉 조이던 구속복을 벗어던진 느낌.
황홀한 해방감을 즐기며 몸을 풀었다.
어두침침하던 복도가 밝아졌다. 초절정으로 오르며 시력 자체가 강해졌다.
‘에반 이 새끼.. 이제 만나면 뒤졌다.’
6성일 때도 일방적이었는데 이제 7성. 녀석과 만날 날이 기대됐다.
결계 아티팩트를 회수하다가 멈칫했다.
‘잠깐···. 그럼 여기 성녀도 있단 거잖아?’
같은 전송에 휘말렸으니 가능성이 상당히 높았다.
사실상 정상적인 방법으로 따먹는 게 불가능에 가까웠던 금발의 폭유 엘프.
터질 듯한 신성력 주머니가 떠올랐다.
이런 좋은 기회라니.
하늘. 아니, 전 약혼자 에반이 준 천금 같은 기회였다.
‘그 자식 앞에서 따먹어야겠다.’
상상만 해도 군침이 돌았다.
성녀를 어떻게 찾을지 고민하며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