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73 - 173화 - 아카데미(12)
173화 - 아카데미(12)
시우가 머리를 굴렸다.
엘븐하임에 있을 수 있는 시간은 일주일. 그마저도 이미 이틀이 지났다.
사실상 이번이 성녀를 꼬셔볼 마지막 기회였다.
길게 이어진 복도를 무작정 걸었다.
곧 갈림길이 나왔다.
왼쪽과 오른쪽. 양쪽을 번갈아 보며 눈가를 좁혔다. 기감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7성급이 됐는데도 마찬가지였다.
1미터 정도가 한계였다. 차라리 눈으로 보는 게 나았다.
‘흠···.’
어찌할까 하다가 그냥 찍었다. 오른쪽.
지도 제작용 아티팩트를 뿌려두고 갈림길을 떠났다.
내키는 대로 걸었다. 신통이 담겼다는 상단전이 제대로 일하길 바라면서.
얼마나 걸었을까.
-끼잉..
강아지 한 마리가 나타났다. 복슬복슬한 황토색 털을 가진 작은 짐승.
“하..! 어이가 없네.”
시골 똥강아지처럼 생긴 게 낑낑거리며 꼬리를 말았다. 순진한 눈망울을 끔벅이며 천천히 걸어왔다.
녀석이 코앞까지 다가온 순간.
퍼어억!
축구공차듯 갈겨 버렸다.
-깨애앵···!
벽에 부딪쳐 축 늘어진 강아지가 애처로운 눈빛을 보냈다.
“놀고 있네. 그냥 그대로 죽어라.”
미간에 지풍까지 쐈다. 바닥에 누워 있던 강아지가 쏜살같이 몸을 튕겼다.
-크르르..!
입이 쩌억 벌어졌다. 수십 개의 날카로운 송곳니가 번뜩였다. 시체 썩는 냄새가 확 풍겼다.
순식간에 2미터가 넘게 커졌다. 찢어진 가죽 사이로 새빨간 근육이 꿈틀거렸다.
그것을 보고 피식 웃었다. 살기와 마기를 풀풀 풍겨 대는 주제에 강아지 행세라니.
오른손을 허리춤에 매고 자세를 잡았다.
우웅!
몸도 풀겸 기운을 응집했다.
-크아아앙!
놈에게 주먹을 흩뿌렸다. 강렬한 광채가 뻗어나갔다.
콰아앙!
마치 공성추에 맞은 것처럼 벽에 처박혔다. 피떡이 된 마물을 보다가 벽을 살폈다.
벽에는 작은 흠집도 없었다.
‘생각보다 단단한데.’
인상을 굳히다가 시선을 내렸다.
시큼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시체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피가 부글부글 끓었다.
‘산성..?’
이런 마물이라면 적어도 그냥 먹을 순 없다. 관자놀이를 툭툭 치다가 팔찌를 쓰다듬었다.
보여주기식으로 가지고 다니던 아공간 아티팩트.
‘안 되네.’
인벤토리와 달리 작동하지 않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꽤 곤란한 상황이었다.
마력을 다루는 초인이면 일주일 정도 굶는다고 큰일 나진 않는다.
허나 그 기간이 한 달 단위로 넘어가면 이야기가 달랐다.
‘큰일이군.’
성녀가 굶으면 곤란했다. 풍요로운 신성력 주머니가 줄었다간 인류의 손실이었다.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또다시 갈림길. 이번엔 세갈래였다.
‘성녀.. 성녀..’
양쪽 관자놀이를 짚으며 집중했다. 직감을 바라고 갈림길을 노려봤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상단전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감이 오질 않았다.
이번에도 그냥 찍었다.
‘으음··· 이번엔 왼쪽.’
대여섯 번의 갈림길을 지났다. 복도를 얼마나 걸었을까.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들렸다.
‘어?’
어두운 복도 저편에서 누군가 걸어왔다. 은은한 빛을 내뿜는 성녀.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리디아가 나타났다.
‘아니 벌써?’
운이 좋았다. 내키는 대로 걸었을 뿐이다. 하루도 안 돼서 만날 줄은 몰랐다.
“아! 그대는..”
피곤해 보이던 성녀의 얼굴에 반가움이 깃들었다.
뛰듯이 다가오던 그녀가 멈춰 섰다. 황금빛 기운이 피어오르더니 이마에 보석 문양이 생겨났다.
미간을 움찔한 성녀가 한 걸음 물러났다.
“벽이.. 당신이었군요.”
“그게 무슨 소립니까. 벽이라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말과는 다르게 태도가 돌변했다. 흐릿하게 생겨나던 미소도 사라졌다. 마치 적이라도 대하는 것처럼 자세까지 낮췄다.
명백히 이쪽을 경계하는 모습이었다.
‘벽은 또 뭔 소리야.’
그녀의 거대한 흉부에 시선이 쏠리려는 걸 억지로 제어했다.
강제로 범하는 건 최후의 선택지였다. 스스로 다리를 벌린 성녀를 보고 싶었다.
양손을 펼쳐 보이며 말했다.
“성녀님. 진정하시죠. 이런 수상한 곳에서 우리끼리 싸울 필요 없지 않습니까.”
“그건..”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던 리디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죄송해요. 그래요. 서로 협력하죠.”
“좋습니다. 먼저 여기가 어딘지 아십니까. 에반놈. 아 실례. 아무튼 그 자식이 마족을 소환하더니 이리 됐지 않습니까.”
“저도 자세한 건 몰라요. 이곳은 마족이 구현한 미궁이란 것밖에..”
“에반이랑 같이 오셨는데 아는 게 없다고요? 놈은 아예 저를 묻어버릴 기세던데.”
“저는.. 그냥 말리러 따라온 거예요.”
고개를 끄덕였다. 에반이 덤벼들 때 성녀는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
“음.. 그럼 여기서 나가는 방법도 모르겠네요?”
“나가는 방법은 명확해요.”
“명확하다고요?”
찌푸려지는 표정을 억지로 폈다. 성녀를 따먹지도 못했는데 벌써 나가면 곤란했다.
한숨을 푹 내쉰 그녀가 말을 이었다.
“에반을 찾아서.. 어떻게든 설득해야지요.”
맥이 탁 풀렸다.
“겨우 설득이요? 설마 여기서 내보내달라고 사정이라도 할 셈입니까? 그놈이 그걸 들어 주겠어요?”
“에반은···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신성력으로 정화하면 원래대로 돌아올지도 몰라요.”
“애초에 그놈도 마족한테 당한 것 같던데. 여기서 내보내는 게 가능한 겁니까?”
“마족 낙인을 지우면 계약이 끊길 거예요. 그럼 이 미궁도 힘을 잃겠죠.”
그녀의 말에 고민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일단 설득해 보고 안 되면 제압 하자는 겁니까?”
“···그래요.”
“제압이라··· 그거 괜찮은 방법이네요.”
놈을 꽁꽁 묶어놓고 그 앞에서···. 상상만 해도 즐거웠다.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제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시도해 보고 안 되면 그때 가서 생각해 보죠.”
앞서 걷는 성녀에게 가호를 발동했다.
‘관찰.’
- 대상의 메인 기질은 ‘피학성애 : 복종’입니다.
“음..?”
새하얀 드레스 자락이 흔들리며 성녀가 돌아봤다.
“···왜 그러시죠?”
무표정한 눈매가 언뜻 차가워 보였다.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가시죠.”
눈썹을 찡그린 성녀가 고개를 획 돌렸다.
또각또각. 복도를 밟는 구두 소리가 일정하게 울려 퍼졌다.
허리를 꼿꼿이 펴고 걷는 뒤태를 감상했다.
종아리까지 내려온 치마 아래. 하얀색 스타킹으로 감싸인 발목과 하이힐이 보였다.
말 그대로 순백의 성녀님이다.
단정한 옷차림 속에 감춰진 본성을 떠올렸다.
‘마조 성녀님이라.. 마음에 드네.’
*
복도는 끝없이 이어졌다.
시우가 앞장선 성녀를 따라갔다. 나란히 걷기 위해 속도를 높였는데 그녀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허..’
계속해서 일정 거리를 유지하는 리디아를 보다가 눈가를 좁혔다. 경계심이 너무 과했다.
곧 마물이 나타났다. 이번엔 귀엽게 생긴 고양이였다.
설마 겉모습에 속을까 싶었는데 다행히 아니었다.
“이 미궁은.. 정말 악질이네요. 이곳 주인인 마족의 성격이 보여요.”
성녀가 인상을 찡그리며 손을 뻗었다.
차앙!
허공에 황금빛 망치가 생겨났다. 키보다 커다란 망치를 나무막대기처럼 가볍게 휘둘렀다.
후웅- 콰앙!
단숨에 내리꽂혔다. 마물의 머리를 뭉개버렸다.
부룩..
시체가 된 마물이 부풀었다. 원상태로 돌아오는지 1미터가 넘는 괴물형태로 변했다. 머리를 잃어서인지 움직이진 않았다.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망설이던 성녀가 두 손을 모았다.
우웅!
황금빛이 뿜어졌다. 연기를 뿜어내던 시체에 스며들었다. 부글거리던 피가 멈췄다.
시체가 정화됐다.
머뭇거리다 시체에 걸어가는 성녀에게 말했다.
“설마.. 그거 먹으려고요?”
“네. 어쩔 수 없잖아요? 아공간도 작동하지 않는데. 벌써 하루 종일 굶었어요. 더 굶었다간 마력이 줄어들기 시작할 거예요.”
‘하루?’
성녀는 이곳에 온 지 벌써 하루가 지난 것인가.
순간 먹을 거로 어떻게 해볼까 하다가 말았다. 경계심을 보아하니 통할 것 같지도 않았다.
인벤토리에서 햄버거를 하나 꺼내 건넸다.
“그냥 이거나 드시죠.”
“이건..?”
그녀가 눈가를 찌푸리며 말했다.
“어째서 당신 아공간은 멀쩡한 거죠?”
“제 건 특수 제작된 거라 어디서든 잘 작동합니다. 안 먹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성녀가 이쪽을 힐끔거렸다. 눈치 보던 그녀가 양손으로 햄버거를 감쌌다. 황금빛 기운이 햄버거에 스며들었다.
“허.. 지금 햄버거를 정화한 겁니까? 독이라도 탔을까 봐?”
“···.”
시선을 피한 성녀를 보다가 그냥 툭 터놓고 물었다.
“좀 심하지 않나? 이렇게까지 절 경계하는 이유가 뭡니까. 애초에 전 에반한테 당한 피해자일 뿐인데.”
“그건···.”
한동안 손가락을 꼬물거리던 그녀가 결국 입을 열었다.
“하아···! 당신이 수호님을 가로막는 벽이니까요.”
“수호? 설마 강수호?”
성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뜬금없는 인물이 튀어나왔다. 이해가 안 갔다.
“지금까진 경황이 없어서 몰랐지만···. 여기서 보니 알겠더군요. 당신이 바로 수호님의 벽이에요.”
‘내가 강수호의 벽이라고?’
설마 호텔 방에서 처남에게 준 선물이 걸린 것인가.
‘어떻게?’
“그게 무슨 소립니까? 이해가 안 되는데.”
성녀가 커다란 눈동자로 직시했다. 허리에 손을 올리고 단호하게 말했다.
“시치미 떼지 말아요. 당신은 분명 수호님에게 해로운 존재예요. 뭘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그만해요. 그분에게 떨어지세요.”
마치 직접 보기라도 한 것처럼 확신에 차 있었다.
“···둘이 아는 사이에요? 수호한테 왜 님이라고 부르는 겁니까?”
“그건 말할 수 없어요.”
“허참.”
“그분은 정말 중요한 분이에요. 부탁해요. 수호님에게 문제가 생기는 건 그대에게도 좋지 않아요.”
성녀가 두 손을 가슴께에 모으며 고개까지 숙였다.
“아니.. 그 녀석이 중요하면 뭐 얼마나 중요하다고···.”
“정말 중요해요. 당신들.. 수십억 인간 중에 가장.”
멈칫했다. 별생각 없이 써본 거짓간파 결과가 진실이었다.
‘이게 진짜라고?’
적어도 성녀는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이다. 혹시나 하고 물어봤다.
“허! 엘븐하임에 있는 엘프들보다 중요합니까?”
“···네.”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이용해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맨입으로?”
“네..?”
“수호 괴롭히지 말아 달라면서요. 부탁 들어줄 테니까. 내 부탁도 들어줘요.”
“···좋아요. 무슨 부탁인데요.”
주인을 따라 출렁이는 신성력 주머니를 보다가 말했다.
“보지 대줘.”
“뭐..라구요?”
입이 쩍 벌어진 마조년에게 말했다.
“아, 보지 대달라고.”